〈 17화 〉 어디, 나 없이 잘 사나 보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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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나 없이 잘 사나 보자 (3)
박건우가 우리 파티를 탈퇴한 지 일주일째.
떠나간 박건우를 생각하며 후회하고,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집착하고, 그의 빈자리 때문에 하루하루 우리의 정신이 피폐해지는…….
그런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너 없이 잘 사나 보자고?
너무 잘 산다! 와!
퍼걱!
철퇴로 고블린의 대가리를 부쉈다.
우린 막 전투를 끝마친 참이었다.
가장 먼저 상자를 연 세연이 말했다.
“또 있다. 코인.”
“오. 얼마나?”
“하나 둘 셋…… 여덟 개.”
“딱 두 개씩 가지면 되겠네. 뭐야. 빵도 있잖아?”
“빵은 내 거야.”
“왜 네 거야?”
“내가 제일 잘 싸우니까. 불만 있어?”
앙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딱딱한 빵을 무는 세연이.
양 볼 가득 빵으로 채운 그녀가 우물우물거리며 ‘불만 있으면 말하든가.’라고 중얼거렸다.
사실 대기실에서 식량을 넉넉히 챙겨온 터라, 크게 탐이 나지는 않았다.
보물상자 속에 며칠씩이나 보관되어 있었을지 모르는 딱딱하고 맛없는 빵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세연이는 빵에 집착했다.
진짜 엄청나게 먹어대는데, 저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
다 가슴으로 가나?
“뭘 쳐다봐.”
“그냥. 신기해서.”
“뭐가?”
“사람인 척하는 코끼리도 아닐 텐데, 진짜 존나게 많이 처먹는구나 싶…… 컥!”
세연이의 손날이 내 목젖을 가격했다.
“적당히 깝치세요.”
“넵…….”
그녀에게 변태 키스를 한 후, 관계가 또 틀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뒤로 고추를 깐 적이 없어서 그런지, 우리는 그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다희가 내 팔뚝을 터치하며 말했다.
“진현 오빠는 섹스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싸움도 잘하네요?”
“어어? 어…… 고맙다.”
다희는 그날 이후로 은근히 나를 만져댔다.
섹스에 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했고.
우리가 섹스한 사이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원래 인싸들은 다 이런 거야? 응??
“10분도 못 버티는 허접 자지한테 너무 과분한 칭찬 아니야?”
굳이 이걸 또 반박하는 세연이.
빵이나 처먹지 왜 치사하게 팩트로 후리고 난리야.
“언니가 몰라서 그래요. 진현 오빠 섹스 스킬 장난 아니거든요……. 후훗.”
“그러니까…… 삽입 버프의 효과가 개쩐다는 거지?”
“당연하죠. 좀 이상하게 들렸어요?”
“어. 많이.”
[귀축 용사가 어깨가 수직으로 상승합니다.]
세연이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우릴 떠나갔다.
뒤늦게 상자 앞에 도착한 성훈이가 말했다.
“다희야. 대체 얼마나 좋았길래 그러는 거야?”
“막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와. 진짜 이건 말로 설명 못 해.”
“그래? 나랑 하면 더 좋을 텐데. 하하하!”
“?”
실실 웃음을 흘리던 다희가 정색했다.
표정을 구긴 그녀가 ‘짜증나’라고 궁시렁거리며 세연에게로 향했다.
“이진현. 나 방금 실수한 거냐?”
“어. 사회였으면 전자발찌 찼을지도.”
“너랑 섹스하는 얘기는 마음껏 하면서, 나는 가정한 것뿐인데도?”
“정신 차려라 성훈아. 다희는 너 싫어해.”
“씨발……. 대체 다희는 너 같은 변태를 왜 좋아하는 거야.”
“세상에 남자가 너랑 나 둘뿐인데 널 좋아할 순 없잖아.”
“왜 없어?”
“거울이 없어서 깜빡했나 보구나. 성훈아. 너 존나 못 생겼어.”
“푸하하하! 웃기시네. 내가 너보단 낫지.”
“하하하하하! 방금 그거 올해의 농담이었다.”
우릴 바라보던 세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더니.”
“…….”
“…….”
아무래도 팩폭 금지 룰 같은 걸 만들어야겠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다희는 굳이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둥, 꾸준히 신호를 보내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적으로 섹스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개방적인 다희라고 해도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명분 없이 섹스하기는 좀 그렇겠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랑 섹스할 마음은 없고, 그냥 놀리는 걸 수도 있고.
“여기서 잠깐 쉬자.”
세연이의 말에 따라, 우리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녀는 파티의 리더가 되어 우리를 이끌고 있다.
우리들 중 상황 판단이 제일 빠르고, 제일 잘 싸우기도 했으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이끌어주니 좋았지.
“강성훈. 지도는 잘 만들고 있지?”
“깜짝 놀라지나 마. 짜잔! 엄청나지?”
“……어. 잘했네.”
성훈이는 지도 싸개가 되었다.
똑똑한 세연이는 대기실에서 공책과 연필을 구매했고, 우리 중 그나마 방향 감각이 있는 성훈이에게 지도 제작 임무를 맡긴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주 앉은 다희와 눈이 마주쳤다.
메롱.
나를 놀리는 그녀.
세연과 성훈의 눈치를 보더니, 혓바닥으로 볼 안쪽을 밀어서 마치 좆을 물고 있는 듯한 얼굴을 만들었다.
뭐지?
지금 하자는 건가?
일주일 동안 못 해서 그런지 자지에 바로 느낌이 왔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로 파티와 떨어지려는데, 세연이가 선수를 쳤다.
“어디 가?”
“어? 화장실 가려고.”
“그래? 내가 망봐 줄게.”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봐주겠다니까?”
화장실은 2인 1조로 가는 게 우리가 정한 룰이었다.
보통은 성훈이 놈이랑 가는데, 왜 지금 세연이가 나서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언니. 힘들 텐데 쉬고 있어요. 제가 같이 다녀올게요.”
“나도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래. 그냥 있어.”
“아…….”
어쩐지 날이 선 말투에 다희는 곧바로 제압당했다.
운동부 출신이라 그런가.
세연이에겐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잘 통하는 카리스마가.
결국 나는 세연이와 함께 볼일을 보러 향했다.
화장실로 사용하기로 한 빈방 앞에서, 세연은 나를 불러세웠다.
“이진현. 지금 급해?”
“아니. 먼저 할래?”
“그게 아니고. 손 좀 줘봐.”
세연이가 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가져온 수통으로 내 손을 깨끗이 닦였다.
“뭐해?”
“가만있어 봐.”
꾸욱꾸욱.
손에 힘을 줘가며 내 손가락을 깨끗이 닦아주는 그녀.
그렇게나 무거운 검을 휘두르면서도, 세연이의 손바닥은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웠다.
“일주일 전에 기억나지?”
“박건우 튄 거?”
“아니. 나한테 변태 같은 키스한 거.”
“윽…….”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다희를 살리려면 흥분해야 했는데, 그냥 키스로는 부족할 것 같”
“너 키스해본 적 없지?”
“?”
훅 들어온 펀치.
그래 씨발. 나 모쏠 아다다.
“말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네. 진짜 존나게 못하더라. 무슨 진공청소기랑 키스하는 줄.”
“아니 그거 일부러 그런 거라니까.”
“웃기시네.”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 상태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
손등 위로 뜨거운 콧김이 느껴졌다.
“알려줄 테니까 잘 봐.”
“뭐, 뭐라고?”
“알려준다고. 키스하는 법.”
쪽.
살짝 고개를 꺾은 세연이가 내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두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살짝 물던 그녀는, 이제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았다.
츄릅…♡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혓바닥이 손가락 사이를 탐했다.
검지에서 중지로, 중지에서 약지로.
그녀의 따뜻하고도 유연한 혀놀림은 내 손가락을 성감대로 만들고 있었다.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열심히 내 손에 키스하는 세연이.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내 손가락을 입에 넣어 굴렸다.
나는 손가락에 약간 힘을 주어 그녀의 혓바닥에 보답했다.
그러자 조금 놀랐는지 움찔했다.
살짝 뜬 눈으로 나를 살피는 그녀.
내가 손가락을 움직인 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이 조금은 민망한 건지, 시선이 흔드리고 있었다.
볼이 발그레해서 그 모습이 더욱 귀엽고 야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뗐다.
“하아……. 이제 알겠지……?”
“…….”
“네가 한 건 구강으로 나를 두들겨 팬 거고, 이게 키스야. 알겠어?”
“어. 알겠어.”
“네가 혹시 딴 여자한테도 그럴까 봐, 여자들이 불쌍해서 내가 알려준 거야. 알겠냐? 알겠냐고?”
“어. 알겠다니까.”
정말로 그런 거라고?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혹시 세연이가 나를 좋아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얘가 나를 좋아할 이유 따위는 없는데.
근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굳이 키스를 알려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것도 이렇게 꼴리는 방법으로.
“세연아.”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인상이 찌푸려진 그녀가 답했다.
“하……. 분위기 잡지 마. 이런 분위기 난 지긋지긋하단 말야. 키스 좀 알려줬다고 고백하려고? 미안한데 난 너 안 좋아해. 진심으로 네가 불쌍해서 알려준 거라고. 객관적으로 나 같은 여자가 널 좋아할 이유가 있냐? 응?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날 보면서 딸딸이나 치고, 내 얼굴에 정액이나 싸지르고, 변태 같은 키스나 해대는 놈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게 아니고.”
왜 또 혼자 급발진이냐.
공주병 말기다운 생각이었다.
“키스 되게 잘하네?”
“당연하지. 스물넷이나 먹었는데 키스 정도는”
“너 역시 처녀 아니지?”
“……뭐?”
순간 굳어지는 세연이의 얼굴.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에 금이 갔다.
“네가 그러니까 모쏠 아다 새끼지!!!”
세연이의 비처녀 펀치가 날아들었다.
*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희와 진현 사이에 오가는 신호를 발견한 순간, 샘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진짜로 사귀고 있는 건가?’
세연은 충동적으로 진현의 화장실 전우조를 자처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어떻게 하면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먼저 사귀면 되잖아. 근데 그럼 이진현이 내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가 되는 건데……?’
세연은 오직 한 명의 남자만을 사귀고 평생 사랑할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친구를 고르는 건 신랑감을 고르는 것 이상의 의미.
그렇기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누르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너무 충동적으로 정하는 거 아닌가?’
일생일대의 선택을 쉽게 정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게다가 아직은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이진현.
진심으로 그에게 끌리는 게 맞을까?
어쩌면 사랑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던 것이 일종의 자기암시가 되어 버린지도 몰랐다.
혹은 아직도 메소드 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상식적으로, 자신에게 변태적인 짓만 일삼은 남자가 좋아질 리 없었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키스 강습이었다.
키스를 가르쳐준다는 걸 핑계로, 그를 살짝 꼬셔서 송다희와 이어질 수 없도록 하는 작전.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있었다.
‘나 키스 안 해봤잖아?’
세연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
결국 세연은 드라마와 영화를 떠올리며 키스를 시작했다.
‘일단 고개를 꺾고…… 혀를 넣어야겠지…….’
최대한 능숙해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조금 과하게 한 것도 있었다.
굳이 손가락을 입 안에 다 넣을 필요는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진현의 손가락은 이미 입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들켰나……?’
키스를 마친 세연은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사실 키스 경험이 없다는 것을 들킬까 봐서.
그러나 돌아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너 역시 처녀 아니지?”
“……뭐?”
대체 이 새끼는 왜 자신을 걸레로 생각하는 걸까?
평생 순결을 지켜온 세연에게 그보다 모욕적인 말은 없었다.
그런 주제에 키스는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은 꿋꿋이 외면하는 그녀였다.
“네가 그러니까 모쏠 아다 새끼지!!!”
라고 모쏠 아다가 소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