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자들이 딸감을 자처한다-44화 (44/74)

〈 44화 〉 여황제를 벗겨라 (1)

* * *

여황제를 벗겨라 (1)

[10층 클리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히든 보상이 부여됩니다!]

[도시의 주인을 제거하는 것에 관여했다.]

[스탯 포인트 +5]

[코인 +5]

[플레이어를 결집시키는 데에 관여했다.]

[스탯 포인트 +5]

[코인 +5]

[플레이어를 가장 많이 구해냈다.]

[스탯 포인트 +10]

[코인 +10]

[가장 많은 플레이어에게 칭송받았다.]

[스탯 포인트 +10]

[코인 +10]

[‘좆 잡고 전장을 지휘한’ 칭호를 얻었습니다!]

[히든 보상으로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

.

.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보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스탯 포인트가 이렇게나 남아 돌게 되다니.

당분간 딸딸이 못 치겠네…….

성벽 아래에서는 여전히 플레이어들이 나를 칭송함과 동시에 비난하고 있었다.

[귀축 용사가 플레이어들의 함성에 감동합니다.]

[딸딸이를 친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칭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단한 일이긴 하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무지개 변태가 되었으니까.

이 소문이 제발 여기서 멈췄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내 작은 소망은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짓밟혔다.

[10층을 클리어하신 모든 플레이어에게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제부터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탑을 공략하고 있는 전세계의 많은 플레이어들과 지금 당장 소통해보세요!]

“…….”

아. 시스템 개새끼.

이걸 못 참고 고로시를 때려?

*

히든 보상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연이, 유리, 교수님, 심지어 성훈이까지도 일반 플레이어들보다 월등히 많은 보상을 받았다.

그 덕에 공략은 순탄해졌다.

내 이미지가 개박살이 났다는 것만 빼면.

­무지개변태 어디 있음?

­왜 찾음?

­한번 보고 싶어서 ㅋㅋㅋ 딸치는 거 존나 웃길 것 같음

­칭호가 ‘좆 잡고 전장을 지휘한’이라던데 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 ㅈㄴ골때림

­무지개 변태님 욕하지 마라 내 목숨 살려주신 분이다 ㅡㅡ

­오. 딸감 ㅎㅇ

­무지개 변태님은 10층에서 일만 명의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100연 딸딸이를 치셨고, 칼 대신 좆으로 전장을 지휘하셨다. 쓰러질 때까지 딸딸이를 멈추지 않으시어,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딸감으로 삼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셨…….

나는 커뮤니티의 밈이 되어 버렸다.

“오빠 또 커뮤니티 봐요? 그만 보라니까요.”

유리가 커뮤니티 창을 휘휘 저었다.

“진짜 쪽팔려 죽겠네…….”

“그래도 대놓고 놀리는 사람은 없잖아요?”

유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10층 클리어 후, 11~13층 대기실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을 만났지만,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커뮤는 한 줌이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하는 걸까?

그때, 이제 막 대기실로 들어온 플레이어가 소리쳤다.

“우와! 무지개 변태다!!”

“…….”

“커뮤에서 봤어요! 무지개 변태 화이팅! 팬이에요! 응원합니다!”

사내는 키득거리며 사라졌다.

염병…….

유리가 내 등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모두가 오빠를 놀림거리로 삼아도, 저는 절대 오빠를 놀리지 않을 테니까요.”

“고맙다…….”

“사실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오빠를 놀렸으면 좋겠어요. 오빠가 아예 외톨이가 되어 버리도록.”

“?”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 그래서 저의 고백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고, 제 관심을 사기 위해 집착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저 때문에 오빠는 하루하루 피폐해지는 거죠. 전 그런 오빠에게 가끔씩 여지를 주고, 오빠는 저 때문에 반쯤 미쳐 버리고…….”

“…….”

유리가 4드론 소설을 쓰는 사이, 상점에 갔던 세연이와 성훈이가 돌아왔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응?”

“교수님이 가족이랑 만났어.”

“아…… 잘됐다.”

박설화 교수님은 우리와 11~14층 공략을 함께했다.

우리의 합은 매우 좋았다.

탱커 강성훈, 전사 김세연, 궁수 강유리, 마법사 교수님, 딸잡이 이진현.

밸런스가 아주 좋은 파티였다.

플러스 알파로, 교수님은 엄청나게 꼴리기도 했고…….

교수님이 뒤늦게 우리에게 달려왔다.

밝은 표정의 그녀가 내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진현 학생!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저는 이쯤 해서 빠져야 할 것 같네요! 언니를 만났거든요!”

“축하드려요!”

교수님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한 기색으로 답했다.

“여러분들도 가족이 걱정되시겠죠. 곧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가족이라…….

물론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칭호를 살폈다.

[★☆야한 낙서로 동료를 발기시킨 김세연☆★]

[★☆좆 잡고 전장을 지휘한 이진현☆★]

[서큐버스에게 외면받은 강성훈]

[아군을 열 번이나 쏜 배신자 강유리]

나와 세연이는 야한 칭호를,

성훈이와 유리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달고 있었다.

유리는 장난을 친답시고 촉이 뭉뚝한 화살을 성훈이에게 날려대다가 그만 디버프 칭호를 얻고 만 것이다.

“가족들은 좀 나중에 만나는 게 좋겠지?”

“응. 무조건.”

이대로 가족을 만날 순 없다.

그건 형벌이라고.

“어쨌든 모두들 정말 고마웠고, 또 즐거웠어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니, 꼭 만날 거예요! 여러분은 강하니까요!”

교수님은 밝은 에너지를 전도하시고는 사라지셨다.

마지막에 야한 눈으로 내 고추를 훑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잠시 후 탑 15층으로 이동합니다.]

[15층을 함께 공략할 플레이어와 손을 잡아주세요.]

메시지가 뜨자 우린 손을 잡았다.

이번 공략 인원은 딱 4명.

[5초 후 탑 15층으로 이동합니다.]

어떤 시련이 찾아올지는 몰랐다.

하지만 딱히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내기할 거죠?”

“당연하지.”

“진 사람이 다음 대기실에서 저녁 쏘기.”

“탱커인 내가 불리하잖아!”

“그래서 하는 건데?”

“쓰레기들!!”

히든 보상을 받은 우리는 너무 강해졌다.

전투가 우스워질 정도로.

[플레이어 여러분들의 행운을 빕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이번 공략이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팟­!

세상이 점멸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

“세연. 괜찮아?”

“으응?”

“어딘가 멍하길래.”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세연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세연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다. 네가 아프면 일손이 모자랄 거야. 오늘은 엄청 바쁜 날이잖아.”

“일손……?”

세연이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주방이었다.

양철로 된 조리도구, 앤틱한 디자인의 조리대, 커다란 아궁이.

중세의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지만, 주방임은 확실했다.

주변에서는 조리복을 입은 남자들과 하녀복을 입은 여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남들보다 깔끔한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세연에게 윽박질렀다.

“지금 잡담 떨 시간이 있냐?! 공주님이 며칠째 음식을 거부하고 계시단 말이다!”

“!”

그의 말에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운동부 출신인 세연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이곳을 책임지는 조리장이라는 것을.

“만들어 바쳐야 할 요리가 수십 가지야! 오늘 내로 음식을 드시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잘릴 판이라고!! 어디서 돈 많은 남자라도 만난 거냐? 아니면 날 실직자로 만들 셈인 거냐?! 어서 움직여!!”

“넵!”

세연이 후다닥 손을 놀렸다.

그녀의 앞에는 버섯이 한가득이었는데, 그것을 손질하는 게 세연의 몫인 것 같았다.

“쯧쯧. 어떻게 저런 머저리를 보낸 거야. 황실 주방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면…….”

조리장은 혀끝을 차며 세연을 지나쳤다.

‘황실……?’

세연은 열심히 버섯의 머리를 따며 주변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진현과 동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빙의라도 된 건가?’

주변인들은 세연을 원래 아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연은 이 모든 것이 너무 낯설 뿐이었다.

그때, 조리장이 세연의 귀에 대고 꽥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아! 버섯을 이 따위로 손질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게 하나에 얼마짜린 줄 알아? 누가 이렇게 가르쳤어? 엄마한테서 배웠냐? 그럴 리는 없겠지! 애미가 있었다면 이 따위로 멍청하게 자라진 않았을 테니까!!”

‘이 십새끼가…….’

세연이 상대를 스캔했다.

우락부락한 체형에 콧수염 남자.

그러나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외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황실 주방에서 일하게 된다고 했을 때는 좋았겠지! 말단으로 들어와 천부적인 요리 재능을 발휘하여 승승장구하다가 왕자랑 결혼하게 되는 염병할 로맨스 소설 따위를 읽었을 테니까! 꿈 깨라 이 멍청아! 너 같은 건 평생 하인으로 살다가 죽는다!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상대보다도 중요한 건 상황 파악이었다.

남자는 이곳이 황실의 주방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하녀 신분인 자신이 조리장을 때려눕힌다?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대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냐? 얼굴 좀 반반하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여기에 너 같은 쓰레기가 할 일은 없다! 길거리에서 몸이나 팔아보든지! 걸레처럼 몸을 굴리는 데에는 재능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세연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누구보고 걸레레 이 고든 램지 같은 새끼가!”

세연이 주먹을 휘둘러 옆구리를 타격했다.

“커헉……!”

간장 치기에 당한 조리장의 눈알이 뒤집혔다.

흰자위가 사라진 그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거대한 체구가 무색한 순간이었다.

털썩.

“어머!”

“조, 조리장님?”

“저 거구를 한 방에…….”

“세연!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조리장님을 쓰러뜨리다니!!”

세연은 빙의와 동시에 주방을 평정했다.

요리 실력이 아닌 주먹으로.

“어어, 어떡하지?”

“어서 하녀장님께 보고드려!”

“세연아! 대체 어쩌려고 이런 짓을……!”

그때, 출입구 쪽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뒤를 돌아본 주방 인원들은 눈이 반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황실 서열 3위, 첫째 공주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 공주님께서 이런 누추하신 곳에는 어쩐 일로……!”

주방장들과 하인들은 냉큼 머리를 숙였다.

분위기에 휩쓸린 세연도 눈을 깔았다.

‘아씨. 왜 공주까지 얽히고 난리야. 뭐라고 하면 공주도 때려눕혀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세연이었다.

“저녁 메뉴가 궁금해서 들렀는데, 이런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조리장은 무슨 일인지 당장 보고하세요.”

“조리장이 뻗어 버려서…….”

“그럼 부조리장이 있을 거 아녜요?”

“그, 그게…… 하녀가 조리장을 때려눕혔습니다.”

“때려눕혔다? 저 가녀린 체구의 소녀가 덩치 큰 조리장은 한 방에 보냈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잔뜩 긴장한 세연은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그 탓에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한 것이다.

“대단한 주먹이로군요. 하녀로 썩기에는 아쉬운 재능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

“무식한 주먹을 가진 당신. 고개를 들어보세요.”

“…….”

세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유리가 서 있었다.

유리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얼굴도 무식하게 생겼군요. 풉…….”

“…….”

세연의 이마의 핏발이 섰다.

유리가 공주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왜 자신은 하녀인 건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하녀는 제가 데려가겠어요. 예전부터 힘이 센 몸종을 갖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공주님. 세연은 조리장님을 폭행했습니다. 황실의 법에 따라 처벌을…….”

“하인이 말대꾸?”

“죄, 죄송합니다!”

“거기 무식하게 생긴 하녀. 따라오세요.”

“…….”

유리는 세연을 데리고 주방을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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