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36화 (36/131)

〈 36화 〉 영속교(6)

* * *

세뇌된 신도들은 교주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뒤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본인들의 손으로 신을 죽인 그들은 저마다 교주의 조각을 하나씩 움켜쥔 채 망연자실한 얼굴이 됐다.

"이, 이상하다. 부활... 부활 하셔야 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저놈들이다. 저놈들이 교주님을 죽였다!"

자기들끼리 충분히 죽여댄 놈들은 이제 나와 앨리스에게 살의를 드러냈다.

잠복중이던 팀원들도 지금쯤 소란을 들었겠지만,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다.

앨리스는 맨손으로 나를 때리며 능력을 풀라고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린 더스트를 재차 흩뿌렸다.

지금 당장 저놈들이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된다.

"야, 이제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저쪽의 A랭크는 대부분 멀쩡해. 이대로 교전하는 게 훨씬 나아."

"이제현!"

"죽어! 죽여서 천국에 계신 교주님의 시종으로 만들어주마!"

'아하, 사후세계 쪽은 이슬람에서 베꼈니?'

내가 애써 가볍게 생각하고 있자 신도들 중 일부가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나는 맨손으로 놈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알몸이라서 사타구니 쪽이 엄청나게 거슬리긴 하지만, 내 손에 닿을 때마다 다 큰 성인들의 몸이 퍽퍽 날아간다.

"저놈도 헌터다!"

"그린 더스트가 교주님을 죽였어! 복수해야 해!"

"교단의 적과 싸워서 발할라로 가자!"

일부러 대충대충 싸우던 나는 참다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적당히 좀 베껴! 너희는 사후세계가 몇개냐?"

어쩌면 여러개 중에 한 곳으로 골라서 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다시 자세를 갖추자 앞서 나가떨어졌던 놈들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개중에는 한쪽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깡총깡총 뛰어오는 놈까지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어지간해선 못 막겠군.'

게다가 헌터들 같은 경우에는 헌터 장비까지 챙겨왔다.

그린 더스트 때문에 특수 능력까진 사용할 수 없겠지만, 헌터 장비의 단단함과 날카로움은 그대로다.

나는 앨리스와 예비 신도들의 앞에 버텨서 권각을 날렸다.

파바밧!

내 체내에서 합성된 그린 더스트가 폭발적인 활력을 선사했다.

예전에 납치당했을 때도 써먹었던 변칙적인 운용법.

그린 더스트를 소비해서 체내의 마력을 증폭시켰다.

이번에 맞고 나가떨어진 헌터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점점 더 매서워지는 공세에 하는 수 없이 급소를 노리기 시작했다.

퍼억! 콰득...

"꺄, 꺄아아악!"

헌터들의 핏물을 뒤집어쓴 예비 신도들이 그제야 자리를 이탈했다.

심지어 겁도 없이 앨리스와 내게 덤벼드는 놈도 있었다.

세뇌 능력을 쓸 필요도 없을만큼 영속교에 심취한 인원이다.

앨리스는 상대를 힘겹게 제압하곤 내게 외쳤다.

"이제현!"

아쉽게도 나는 지금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신도들 중에는 헌터들이 많아서, 제법 괜찮은 합격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쪽은 마력을 못 쓴다지만 제대로 된 장비를 들고 죽자사자 덤비니까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나는 알몸으로 그것을 받아넘기고 반격하며 열심히 도망쳤다.

이젠 위치를 지킬 수가 없다.

사람의 갈비뼈를 뭉개고 두개골을 함몰시키는 끔찍한 감각.

떨쳐내려고 팔을 휘두르면 오히려 더욱 강해진다.

그런데, 내 속도를 어렵사리 따라잡던 앨리스가 그만 놈들 중 한 명에게 따라잡히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린 더스트를 제어했다.

파스슷!

녹색의 불씨처럼 휘날리던 그린 더스트가 앨리스에게서 물러나자, 녀석은 비로소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커다란 식칼을 소환해서 상대의 팔을 쳐낸 앨리스가 아주 격하게 항의했다.

"이, 이거 치울 수 있는 거였어?"

"시끄러워!"

온몸을 날려서 앨리스를 쫓던 헌터를 해치우자 다른 놈들이 우르르 달라붙었다.

앨리스는 다시 능력을 사용하려 했으나, 그린 더스트가 그것을 방해했다.

이미 글러버린 상대들이라지만 그녀가 놈들을 죽이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끔찍한 경험을 하는 것은 한 명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윽!"

조금 무리를 해버린 탓에 옆구리에서 핏물이 왈칵 솟았다.

헌터들의 무기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행히 상처는 얕았다.

나는 곧바로 놈의 다리뼈를 부숴서 복수한 다음 정권으로 마무리했다.

콰드득!

힘이 과하게 들어간 탓에 내 주먹이 놈의 가슴팍을 뚫고 나왔으나, 회수할 시간이 없다.

나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서 다른 헌터들을 쳐냈다.

어두운 실내는 이미 피바다가 되어있었다.

'진짜 싫다.'

결국 참다못해 그린 더스트를 폭주시키려던 찰나.

등 뒤에서 녹색의 섬광이 신도들의 몸에 꽂혔다.

밖에서 대기중이던 김정태와 팀원들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었다.

탕, 타앙! 두두두...

전투복 차림의 대원들은 내가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사격을 가했다.

원래 에스콰이어와 서번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오라클과 마스터들을 수호하는 것이다.

"세, 세상에 이게 무슨..."

이서우가 실내의 참상에 홀로 망연자실해있는 사이, 나는 몸부림치는 앨리스를 데리고 입구로 나갔다.

서지유는 회장의 안쪽을 슬쩍 들여다본 것만으로 다리의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못 본 체 하며 앨리스에게 옷을 건넸다.

"입어."

짜악!

앨리스는 내가 손을 놓자마자 내 뺨을 때렸다.

피차 수치심 따윈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다.

"무슨 짓이야! 나는 저놈들이랑 못 싸울 줄 알아?"

"너까지 싸울 필요가 없었잖아."

"필요가 없었긴 개뿔! 피를 그렇게 흘리면서 잘도 지껄이네."

"야, 현역 헌터가 다른 헌터들을 죽였다고 하면 뉴스에 어떻게 뜨겠냐?"

나는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황급히 지혈했다.

그린 더스트를 살짝 폭주시켜서 온도를 높인 다음 그것으로 베인 상처를 지졌다.

응급처치는 했으니, 나중에 한예진에게 제대로 치료받으면 되겠지.

나와 앨리스가 겨우 옷을 걸치자 이서우가 황급히 돌아와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교주의 세뇌 능력이 풀려서 신도들이 폭주했어. 교주는 산 채로 조각조각 분해당했고."

"세,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이 핏자국은 다 뭐구요?"

"이미 지혈했어."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우울한 기분으로 교단을 나섰다.

최악의 결과다.

내가 너무 안이하게 판단해서 교주는 물론이고 신도들까지 대부분 죽어버렸다.

'옷 벗으라고 했을 때 그냥 도망쳤어야 했는데...'

안전하게 증거를 수집하지 못하게 됐을 때 미련없이 후퇴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교주에게 호출당하기 전에 몰래 자리를 빠져나가서 팀원들을 불러야 했다.

이서우의 말대로 무작정 압수수색을 했어도 이것보단 괜찮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하다못해 김우민이 죽으면 좀 진정될 줄 알았어.'

나는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지만, 도대체 어떻게 귀환했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없었다.

뒷정리야 김정태가 알아서 잘 했겠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좀 식자 폭주하던 신도들을 처리한 것은 정당방위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후회가 남았다.

'김우민을 법정에 세웠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그린 더스트로 활동했을 때보다도 훨씬 못하다.

김우민을 신도들의 앞에서 죽이지 않았다면 놈들의 폭주도 훨씬 덜했을테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그대로 방 안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원망하던 중. 앨리스가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일어나. 오늘이 며칠째인 줄 알아? 이틀 뒤면 언니가 돌아온다고."

"..."

나는 앨리스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장장 사흘 정도 누워있었단 말인가?

입술을 열어서 무어라 하려고 했으나, 목이 말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만약 헌터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자."

애초에 물컵을 들고 들어왔던 앨리스가 그것을 내게 건넸다.

나는 부끄럼도 없이 그것을 벌컥벌컥 마시곤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피난했던 예비 신도들은 대부분 살았어. 그린 더스트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가긴 했는데, 다들 헛소리인 줄 알더라고. 회장에서 마약이 엄청나게 나왔거든."

아... 그러고 보니 신도들이 대놓고 대마초를 피워댔던가?

우리가 실제로 그린 더스트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외부인들은 신도들이 착각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앨리스는 계속해서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다른 지역에 있었던 신도들도 거의 다 체포돼서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어. 다 끝났으니까 걱정할 필요없어."

"..."

"그리고, 지난번에 때린 거 미안해.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는 건 아니야."

"괜찮아. 어차피 생각이 중요한 건 아니지. 이번 작전도 의도는 좋았던 것처럼..."

내가 우울하게 대꾸하자 앨리스가 살짝 역정을 내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사람의 온기가 이토록 기분 좋은 치유력을 지니고 있었나싶었다.

"아, 진짜..."

"무, 뭐해?"

"언니가 자기 대신 좀 안아주래. 지금 당장 꼭 필요할거라면서..."

예리엘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앨리스를 밀어내긴 커녕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싶다.

나는 앨리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작은 몸에 끝도 없이 파고들었다.

평소였다면 진작 기겁했을 녀석이 그저 얌전하게 안아준다.

'도대체 예리엘에게 무슨 짓을 당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앨리스에게 정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앨리스는 그 뒤로도 나를 보살폈다.

지난 사건을 아직 떨쳐내지 못한 나는 애써 지나간 일처럼 이야기해봤다.

"좀 늦었지만... 너도 정말 수고했어. 연기 정말 잘 하던데?"

"그야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 뭐라고?"

내쪽을 보지도 않고 대꾸하던 앨리스가 로봇 청소기를 돌려놓곤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은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번에 연기했던 설정은 내 실제 경력과 한없이 닮았어. 처음에는 네가 일부러 그렇게 한 줄 알았다니까?"

"그, 그게 무슨... 그럼 가정폭력을 당한 게 진짜였다고?"

"으응, 그건 말고. 왕따는 정답이야. 친구도 아예 없었고."

"그건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퍽!

앨리스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에 맞아버린 나는 그녀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대등한 입장의 사람과 어울린다는 게 이렇게나 즐거운 것이었다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비로소 떠올렸다.

양쪽 모두에게 좀 미안한 말이지만, 앨리스는 예리엘보다 훨씬 약해서 부담감이 크게 덜했다.

그녀 덕분에 기분을 많이 회복한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하여 미뤄둔 업무를 처리했다.

예리엘이 출장 중에도 팀원들을 지도해줘서 업무는 대부분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팀원들은 내 살이 좀 빠진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아줬다.

이제 내일 저녁이면 예리엘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며 퇴근하자, 앨리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핀잔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도움과 평온함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슬슬 잠자리에 들어갈 즈음.

거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돌연 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삐빅... 철컥!

"으음?"

혹시 예리엘이 조금 일찍 출장에서 돌아왔나 싶어서 벌떡 일어나자 보기 드문 잠옷 차림의 앨리스가 아주 태연히 걸어들어왔다.

아니. 사실 보기 드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본 적이 없다.

베이비 돌 같은 느낌의 잠옷을 걸친 그녀는 완전히 굳어버린 나를 지나쳐서 멋대로 침실까지 들어갔다.

"애, 앨리스? 뭐해?"

"..."

묘하게 몽롱한 눈동자의 그녀를 보고있자니 자연히 영속교의 신도들이 떠올랐다.

설마 영속교 교주가 사용했던 능력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일까?

나는 살짝 기겁하며 그린 더스트를 만들어냈다.

분명 뒷처리는 어제 제대로 끝냈을텐데?

애초에 앨리스는 수준급의 헌터라서 쉽게 세뇌 따윌 당하지도 않는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그린 더스트를 사용하자 초록색 광채가 앨리스의 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내가 일단 그녀를 데리고 나가려던 찰나.

스르륵, 하고 잠옷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지난번처럼 알몸을 고스란히 내보이게 된 앨리스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세뇌 상태 같지만, 사실은 말짱한 기색.

걱정이 되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던 나는 그녀가 제정신이란 것을 깨닫곤 얼이 빠졌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니까? 너 내가 미치는 꼴 보고싶어?"

"..."

"아니 무슨..."

야밤에 남자의 침실에 찾아와서 이런 짓을 하다니.

단순한 장난 치곤 너무 과하다.

나는 기가 차면서도 남심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에는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던, 희고 깨끗한 나체가 내 앞에 보란듯이 버텨서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야, 남자 앞에서 이렇게 있다간 나쁜 짓 당한다?"

"..."

내 기분 탓일까?

순간, 앨리스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여지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나는 정말 미칠 지경이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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