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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94화 (94/131)

〈 94화 〉 모방범(2)

* * *

칠판에서 본인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 나는 곧바로 가설을 몇 가지 세워봤다.

첫 번째, 놈이 내 정체를 알고있다.

하지만 그 가설은 곧바로 무산됐다.

'내가 최근 그린 더스트로서의 신분을 이리저리 많이 까발리긴 했지만... 이런 새내기들까지 그걸 알고있을 확률은 거의 없어.'

애초에 내 정체를 알고있다면 나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그냥 정보를 공개하면 된다.

그럼 나를 훨씬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두 번째, 내가 아니라 예리엘의 사생팬이다.

물론 두 번째도 확률이 그리 높아보이진 않았다.

'여기 있는 사진들... 재판에 들어가면 징역 20년 정도는 거뜬히 나올만한 중범죄자들이야.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놈 같진 않은데?'

그렇다면 세 번째다.

이 녀석은 그린 더스트로서의 내 정체를 모른다.

헌터 연쇄 살인귀 그린 더스트가 아니라, 협회 특별 수사관 이제현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있는 케이스.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확률이 높다.

"내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산 적이 있었다니..."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감이 안 잡히지?"

"웃기셔."

나는 앨리스에게 주먹을 흔들면서도 자료를 정리해봤다.

이게 1,2개월에 걸쳐서 수집된 자료가 아닌 듯,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세한 신상명세와 현재 소재지까지 파악되어 있었다.

우선은 이놈들부터 붙잡기로 했다.

"지금 잡을 수 있는 놈들은 모두 잡는다. 신분증 같은 건... 남아있을 리가 없나. 최소 년 단위로 계획한 것 같은데. 이 폐공장의 소유주는?"

[현재 소유주는 따로 없습니다. 무단 점거였군요.]

"무단 점거라니... 이 흉악한 새끼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해. 가만히 놔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팀원들은 농담 반 진담 반의 호들갑에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작업을 속행했다.

현장을 살펴볼수록, 나는 점점 더 걱정이 됐다.

현장을 보니까 범행에 앞서 보통 공을 들인 것이 아닌데...

아지트가 드러났다고 해서 곧장 그만둘 것 같진 않다.

"어차피 중요한 물건은 이미 다 챙겨서 나간 것 같네."

"그대로 잠적할 가능성은 없을까?"

"아니. 오히려 더 빨리 움직이겠지. 어쩌면 폭주할지도 몰라."

지금쯤 다른 수배범과 범죄자들도 모방범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테니...

전과는 행동패턴이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내가 놈이라면 타겟들이 완전히 잠적하기 전에 해치우려고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한창 증거물과 단서를 수집하고 있자 블랑쉬가 놈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용의자를 발견했습니다. 아지트에서 10km 떨어진 장소에서 차량에 탑승!]

"10km라고? 빨리도 갔다! 이 정도면 최소 A랭크 수준인데... 예상 목적지는?"

[아직 추론이 불가능합니다.]

"알겠어. 할당량 마음껏 써도 되니까, 확인되는대로 알려줘! 티아, 따라서 나와!"

"네!"

나는 티아를 용의 형태로 변신시켜서 곧바로 올라탔다.

전용기가 될 수 있는 헌터펫이라고 생각하니까 확실히 편하다.

게다가 보기보다 훨씬 고성능이라서, 수직 이착륙 기능까지 달려있다.

다만 안장 같은 것이 없는 것은 확실히 흠이다.

요동치는 등에 올라타봤자 금방 굴러떨어질 것이 뻔하므로, 나는 녀석과 내 몸을 단단히 묶었다.

"날아!"

"다른 대원들은 안 데려가도 되나요?"

"시간 없어. 어차피 현장 인력은 충분해. 어디로 갈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

아니나 다를까.

티아가 밤하늘로 치솟자마자 블랑쉬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예상 경로 파악 완료. 용의자는 블랙마켓으로 이동 중.]

"그럴 줄 알았어. 새내기라 그런지 너무 대담한데?"

헌터들의 블랙마켓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암시장이나 범죄 알선 뿐만이 아니다.

놈들은 신변보호나 망명 서비스 등도 어설프게나마 제공한다.

나는 즉시 현장의 서번트에게 통신을 걸었다.

"거기서 다들 뭐하고 있어?"

[예, 지금 모방범에게 현상금을 걸고있습니다. 호위를 요청하는 수배범들도 적지 않고...]

"그럼 그렇지. 얼른 거기서 빠져나와. 휘말린다."

[옛...]

살짝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지시에 따르는 서번트.

나는 통신을 종료하곤 블랙마켓 근처의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착륙이 좀 걱정되긴 했는데...

티아는 의외로 인간형으로 변신해서 나와 함께 천천히 활공하는, 우아한 방식의 착지를 보여줬다.

"주인님, 저 잘했죠?"

"목소리 낮추고 고개 숙여. 곧 온다."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는 블랙마켓은 바깥까지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티아는 아무리 그래도 용의자가 저기에 쳐들어갈까 싶었으나...

나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몸을 빼고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라이트도 켜지 않고 달리던 차가 멀찍이서 멈춰섰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든 용의자는 장비를 챙겨서 어디론가 향했다.

'블랙마켓의 구조를 대충이나마 알고있군.'

놈이 침투한지 얼마나 됐을까.

돌연, 블랙마켓은 물론이고 근처의 건물들까지 죄다 정전이 되어버렸다.

한 블록의 전기가 통째로 나가버린 것이다.

위험한 장사를 하고 있는만큼, 블랙마켓은 비상용 발전기를 구비해두고 있었으나 그것도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뭐야 이거?"

"누가 불 좀 켜봐!"

"끄아악!"

블랙마켓 내부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웅성거리던 가운데, 날카로운 비명이 밤공기를 찣었다.

총성과 폭발음이 희미하게나마 새어나오자 티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최악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닫곤 작게 혀를 찼다.

오늘따라 내 예상이 백발백중이긴 하지만, 이런 것까지 맞아떨어질 필요는 없었다.

"S급이군."

"엑... 그, 그럼 어떻게 해요?"

"괜찮아. 능력은 이미 대충 파악했어. 여기서 못 잡으면 앞으로는 더 힘들어."

블랑쉬가 블랙마켓의 CCTV를 보여준 덕분에, 비상용 발전기가 파괴되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능력의 특성도 파악했다.

나는 티아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넣곤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블랙마켓이, 지금은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짙은 그림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발치가 기분나쁘게 찰박거렸다.

망해버린 상점가의 중앙에 도착한 나는 낮게 변조된 기계음을 들을 수 있었다.

"특별 수사관... 아직은 네 차례가 아니야."

"뭐야, 내가 마지막 차례였어? 아니면 아직 조사가 덜 된 건가?"

"!"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듯, 암흑 속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전방의 놈이 그대로 돌진하려던 찰나.

내 등 뒤에서부터황금색의 광채가 퍼져나왔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티아가 본인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화아앗!

광량이 상당한 덕분에 순식간에 물러나는 어둠.

나는 녀석이 모처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작게 투덜거렸다.

"장하다 매력 담당. 자체 발광이라니, 아주 놀라운 능력이야."

"윽!"

그러나 효과는 충분했다.

방독면을 착용한 가짜 그린 더스트는 이쪽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티아마트의 검은색 머리와 마찬가지로, 놈의 능력은 그림자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습격에 앞서 발전기부터 타격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무적이나 다름없지만 빛 속에서는 극심하게 약화된다.

"가짜 그린 더스트. 너를 살인 과 사칭, 무단 점거 혐의로 긴급 체포..."

"웃기지마!"

놈은 예상보다 거칠게 반응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도망쳐봤자 총 맞는다는 것을 알고있는 모양이다.

나는 주저없이 사격을 가했지만, 그림자가 방패처럼 일어나서 방어.

S급답게 약화돼도 권총탄 정도는 충분히 막는 것 같다.

'방독면 쓰고 잘도 뛰네!'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단검을 빼들고 근접전에 돌입.

놈은 칼로 나를 찌르려는 체 하다가 앞차기를 날렸다.

페인트가 섞인 탓에 자세가 그리 깔끔하지도 않았는데 상당한 위력이었다.

게다가 저쪽 체격이 나보다 조금 더 크다.

퍼억!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다.

내 몸은 놈의 앞차기에 맞고도 멀쩡히 버텨있었다.

"오, 힘조절 해준 거야?"

"크윽!"

팟!

칼날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당황하며 거리를 벌리는 놈.

나는 다시 권총 사격으로 상대를 견제했다.

저쪽에서 무척 억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별 수사관이란 놈이 헌터라고? 역시 너도 놈들과 똑같았구나!"

"뭐 이 정도 가지고 이런 쓰레기들이랑 같은 취급을..."

파밧!

아까보다 한층 맹렬해진 공격이 날아들었다.

놈은 단검을 몇 번 휘두르다가 칼을 버리곤 주먹으로 몸통을 가격하려 했다.

S급 헌터의 주먹이라면 칼보다 특별히 못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놈은 오히려 주먹질이 더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곤 그린 더스트 단검으로 반격했다.

짧고 간결하게 베고 찌르는 움직임에 놈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린 더스트제 단검은 평범한 무기와는 압박감이 완전히 다르다.

"윽! 그,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내 물건이 아니면 누구 건데 씹새야."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된 나는 놈을 힘껏 걷어찬 다음 그린 더스트를 흩뿌렸다.

녹색 불씨가 휘몰아치며 황금빛의 광채를 반사하자 힘겹게 몸을 가누던 상대의 동작이 완전히 멈췄다.

직후, 놈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가이거 계수기가 특유의 불쾌한 소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지직...

'저거 모형이 아니었던 건가? 하긴. 가이거 계수기는 쉽게 구매할 수 있으니까 모형을 만드는 게 더 번거로웠겠지.'

내가 추격을 준비하던 찰나.

놈의 방독면 뒤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특별 수사관이... 그린 더스트라고?"

"후배님. 고수랑 싸울 때는 몸을 막 집어넣으면 안 돼. 그러다 혼나."

이쪽에서 신나게 촐싹거리거나 말거나.

놈은 아주 천천히 방독면을 벗었다.

방독면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대뜸 벗어던지는 꼴이라니.

내가 그걸 보고 또 한 소리를 하려던 찰나. 비로소 놈의 얼굴이 공개 됐다.

"... 어?"

저쪽이 나를 알아봤듯. 이쪽도 저쪽을 알아봤다.

자주 대면한 사이는 아니지만 분명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

잊고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 네가 왜 여기있어?"

"..."

"야,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주, 주인님? 왜 그러셔요?"

티아가 뒤에서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북두칠성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군요."

"..."

6여년 전, 북두칠성 사건 당시, 증인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가족.

억울하게 사망한 증인의 아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한참동안 아무말도 못하고묵묵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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