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화 〉 ...어케 이겼누;;
* * *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일명 라돈 남작.
세계를 위협하는 '혼돈의 파편'을 가진 다섯 명 중 하나이며, 암흑의 힘을 다루는 악역.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혼돈의 파편'을 얻게 됨으로써 야망을 드러내며 죄 없는 마을과 도시를 침략하는 탐욕스러운 악당.
다섯 명의 보스들 중에서 가장 비열하고 사악하며, 어떠한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의 길을 걷는 일명 '간지나는 악역'들과는 달리 정말 순수할 정도로 악한 악역.
'혼돈의 파편'을 통해 얻은 암흑의 힘을 이용하여 주인공을 한계에까지 몰아붙히고, 주인공이 새로운 힘을 각성하는 계기를 주며 그대로 주인공의 손에 처참히 참교육당하는, 이 이야기의 중간 보스.
"큿, 라돈 남작...!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어..."
...였어야 하는 데 왠지는 몰라도 라돈 남작은 패배하기로 되어있는 대본과 달리 주인공을 이겨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 라돈 남작이다.
...어케 이겼누?
*
아아아아아아아악! 세상에 맙소사!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아, 아니 그게... 솔직히 나도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 다고요."
내 귓가에 들려오는 이 날카로운 비명의 주인은 이 무대를 준비한 극단주이자 이 세계에서 신으로 숭배 받는 존재, 바로 조금 전에 나한테 쓰러진 남자. 용사 루크를 인도하는 빛의 여신 루미너스 님이시다.
...그 루미너스 님이 왜 나한테 뭔 짓을 저질렀냐고 따지고 있으며, 나는 왜 적이나 다름 없을 존재에게 쩔쩔 매고 있냐고? 그야 아주 간단하다.
이 세상은 그녀가 고위 신의 유희를 위해 만든 거대한 무대이며, 나는 그녀에게 고용된 배우였으니까.
애초에 어째서 이렇게 된 건가요?! 루크와 당신이 가진 능력의 상성상,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시키는 대로 한 죄 밖에 없다고요..."
어설픈 연극으로는 관객들은 만족시킬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던 게 본인이 저런 말을 하니 나로선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솔직히 용사라는 놈이 중간 보스인 나 따위에게 이렇게 처발리는 게 말이 되냐고. 장본인인 나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단 말이다.
여신 루미너스의 가호를 받은 용사 루크의 힘인 빛, 그리고 악역인 나의 힘은 어둠. 우리의 힘은 서로에게 역상성이기에, 내가 그에게 치명적인 만큼 그도 나에게 치명적이다. 그래서 이론상 내가 이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그 확률은 무척이나 낮다.
"근데 솔직히 이번 일은 제 잘못이 아니지 않나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면... 루크가 정화 스킬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지 못 했다는 쪽이 맞겠지.
"그도 그럴게, 루크 녀석이 정화 스킬도 없이 저한테 덤볐잖아요. 루미너스 님의 계시라던가, 동료가 전해준 정보를 통해 이번 전투에서 '정화' 스킬이 필수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빛의 용사 루크, 그는 나를 쓰러트리기 위한 필수 스킬인 '정화'를 습득하지 않은 상태로 내게 도전했다.
나의 주특기는 암흑의 힘을 이용하여 적을 현혹시키는 것. 루크는 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내게 도달하기 전에 머무르는 마을에서 특정 퀘스트를 완료하고 그 보상으로 자신에게 해로운 효과를 모두 제거하는 '정화' 스킬을 휙득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루크는 '정화' 스킬 습득 없이 내게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도주했다. 본래라면 가볍게 이겼어야 할 적에게 대차게 패배한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제 잘못이라고 하기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당신의 잘못이 없지는 않아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악역을 연기하라는 말해서 시키는 대로 한 게 진짜 잘못이라고?
루크와의 전투를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은 좋지만, 당신은 정도가 지나쳤어요! 이미 밸런스 파괴 수준이라고요! 그 탓에 루크가 예정보다 훨씬 강해진 당신을 퇴치하는 것을 서두르느라...
내가 연기하고 있는 라돈 남작은 암흑의 힘을 다루는 악역으로, 조각의 힘을 이용해 멀쩡한 생명체를 타락시켜서 수하로 쓰는 보스다. 그래서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 수록 부하의 수가 늘어나고 그 수준이 높아지기에 빠르게 쓰러트리지 않으면 상대하기 성가셔지는 적이다...라는 설정이 있다.
그러니까 루미너스 여신의 말은, 내가 예상보다 더 빨리 강한 부하들을 많은 만든 바람에 루크는 나를 빨리 막아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꼈고 그 탓에 정화 스킬을 습득하는 퀘스트를 깨기도 전에 내게 도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에게 대차게 패배함으로써 대본도 어그러졌고.
....뭐야, 씨발. 이러면 진짜 내 잘못이 맞잖아? 난 최선을 다한 죄 밖에 없는데, 그게 진짜 죄가 될 줄은 몰랐지.
"아니, 저라고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랬겠습니까? 고의는 아니었다고요. 아시잖습니까?"
하아, 이걸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루미너스 여신 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뭐지? 나 진짜 좇된 건가? 혹시 관객들 중에서 내가 참교육 당하기를 바랬던 한 명이 루크가 나한테 패배하는 거 보고 빡쳐서 따지고 있는 건가?
이대로 가다간 소원이고 뭐고 제대로 뿔난 관객들에게 갈가리 찢길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무래도 나 진짜로 좇된 모양인데...?
하아... 일단, 제가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까 앞으로 활동을 자제하세요. 주변 침략과 병력 증강을 멈추고, 그대로 대기하고 계세요. 알겠죠?
"관객들이 뭐라고 하면 어쩌시게요? 주인공한테 이긴 악역이 그대로 주인공이 돌아와서 자신을 쓰러트려주기를 기다린다니, 그건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어거지 전개 아닙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루크와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어서 그 상처를 회복하느라...
"...아니, 그치만 그건 무리잖아요. 루크 녀석의 공격을 한 번도 안 맞았는데 치명상은 무슨 치명상입니까?"
루크는 내 현혹 스킬에 제대로 당해 나에세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못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결국 도주했다. 그런데 내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관객들이 개연성은 어디다가 갖다 버렸나고 욕하며 따지고 남을 것이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선하지만 약한 주인공이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점차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지, 여신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은 치터가 이 세계에서 깽판치는 허접한 작품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니까.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우선은 루크의 멘탈을 수습하는 게 먼저에요. 이대로 루크가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니까. 라돈 남작이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나중에 어떻게든 구실을 지어내면그만이니, 일단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대기하세요. 그리고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단속 잘 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선 제작 후 설정이라는 건가. 루미너스 여신은 다시 한 번 내게 자제하라고 당부한 후에 루크를 수습하러 떠났다.
젠장.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루크와 싸워 패배하는 것으로 내 역할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틀어지는 바람에 수습해야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아이고, 머리야.
"일단... 마르스부터 해결해야겠네."
나는 수정구를 작동시켜 마르스를 호출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대체 무슨 이유를 대야 이 타락한 전쟁광의 침략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