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아니 진짜 어케 이겼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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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를 기다리며, 나는 벽에 달린 전신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언제봐도 익숙하지 않은 외모의 사내가 거울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 불길하다 여겨지는 검은 눈과 머리카락, 날카로운 인상을 심어주는 뱀 같은 눈. 하지만 그 모든 외형의 단점을 전부 덮어주는, 온몸에서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 거울 속의 남자가 바로 나다.
그리고 이 연극의 최흉 최악의 악역이자, 본래라면 주인공의 손에 참교육 당해 관객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해줬을 라돈 남작이기도 하고.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혼돈의 파편을 얻고 야망을 드러내며 침략 전쟁을 시작한 악당. 그게 바로 나에 대한 설정이다.
혼돈의 파편을 통해 내가 얻은 능력은 '암흑'.
타인을 현혹하고 지배하는 능력. 직접적인 전투 능력 자체는 그리 좋지 않지만, 강한 부하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아주 위험한 능력이다.
타락의 속삭임. 내가 가진 이 스킬은 대상을 타락시켜, 나의 부하로 만드는 스킬이다. 하지만 대상의 정신력이 굳건할 수록 잘 먹히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강자의 대다수가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도 강한 편이기에, 사실상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나 통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시전자보다 정신이 강한 사람이라도 정신력이 너덜너덜한 상태라면 타락의 속삭임이 통한다. 즉,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도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아 붙히면 결국 타락시켜 부하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라돈 남작은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하지 않고 자신보다 확실히 약한 녀석들만 부하로 만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 악역을 연기하라고 들었기에 내 나름 최선을 보여주고자 제법 강한 녀석들을 타락시켜 부하로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나중에 용사 루크의 동료가 될 가능성이 있던 영웅들도 몇명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타락시킨 영웅은 다섯. 그 중 첫 번째인 타락한 영웅의 이름은 마르스. 현재 나의 부대를 이끌고 침략 전쟁을 주도하는 공격 대장.
마르스는 처음부터 굉장히 강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을 이용해 마르스를 손쉽게 타락시켰고. 지금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부하 중 하나다. 만일 그녀가 침략을 하는 것이 아닌 내 옆에 있었다면, 루크는 그냥 패배하고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똑똑똑.
"아마게돈 님. 마르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며, 마르스가 들어왔다. 갈색으로 태운 피부,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장신에 군더더기 살 하나 없는 다부진 근육, 그리고 언제 봐도 거대한 존재감을 느끼는 놀라운 흉부.
자신의 키와 맞먹는 두껍고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걸친 여자. 여전사 마르스. 그녀는 그야말로 '강한 여자'의 표본이었다.
"마르스, 내가 무슨 일로 너를 불렀는지 알고 있나?"
내 나름 위압감을 표현하고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묻자, 마르스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최근 주변 영지 침략이 더뎌지고 있습니다. 소위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영지들이 단합한 결과... 하지만, 제게 충분한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고. 그래서 내가 일주일 전에 너에게 영지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뭐, 사실은 내가 죽은 후에 용사 루크가 타락한 그녀를 갱생시켜 일행에 넣어주기를 바랬기에 내가 루크와 싸울 때에 맞춰서 불러들인 것이지만, 루크가 패배해서 도망쳤으니 다른 식으로 써먹을 수 밖에 없지.
"인간이란 본래 서로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 물어 뜯고 싸우지만, 거대한 적 앞에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단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이 이상의 침략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난 무리하게 더 많은 땅을 얻는 것보다, 현재 손에 넣은 땅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 말씀은?"
"곧 영웅들이 빼앗긴 영지를 되찾기 위해 이 영지를 공격할 준비를 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대비하여 영지 내의 기강을 다지고 침략을 대비하도록. 알겠나?"
"네, 아마게돈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음?"
그냥 물러갈 줄 알았는데, 마르스는 고개를 반즈음 든 채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다 결심한 듯,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오늘 밤은 제가 아마게돈 님의 시중을 드는 것을 허가해주시겠습니까?"
"..."
아...
....하긴, 그동안은 영지를 침략하느라 바빴지. 그녀가 열심히 침략으로 영토를 넓히는 동안, 나는 다양한 녀석들을 타락시켜 부하로 만드느라 바빴고. 그래서 관계를 가질 시간이 제법 부족했지.
마침 루미너스 여신에게 그 이상 전력을 늘리는 행동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할 일이 없어졌고, 오늘은 나도 그녀를 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별히 허락하마."
"...!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마르스는 다시 한 번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섰다. 그녀가 떠난 후, 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휴, 방금 막 지어낸 변명인데 잘 납득해 줬네."
만일 납득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근심을 덜었다. 마르스 녀석은 순수 전투 능력만으로는 나보다 강하니까. 비록 타락시켜서 내 부하가 되었기에 나에게 적대적일 일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나보다 강한 부하를 다루는 데에는 조심할 수 밖에 없다. 혹시라도 타락 상태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나저나 부하의 앞에서 주군의 위엄을 유지하는 건 아직도 어려운 일이네. 으음, 어쩌지. 바이올렌스 녀석의 행동을 참고라도 해야 하나? 아니, 그 녀석은 위엄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막나가는 대로 행동해서 밑에 있는 놈들이 무서워서 알아서 기는 건가? 젠장, 어렵네. 어려워."
일단은 무서운 주인을 연기하고 있지만, 5년이나 연기를 했음에도 원래 소시민이었던 내게 위엄을 보인다던가 라는 일은 아직도 고난이었다.
용사 루크, 제발 빨리 강해져라. 내가 일부러 너에게 질 필요가 없어지도록.
...그러고 보니 루크의 파티 멤버 중에 그 힐러 제법 내 취향이던데. 용사 파티만 아니었으면 타락시켜서 곁에 뒀을 텐데, 아쉽다.
*
'...아마게돈 님,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셨군. 역시 그 용사라는 놈을 놓쳤기 때문인가.'
라그나 아마게돈의 방을 나온 마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영지 침략으로 인해 보지 못 했던 주인이지만, 그 새 그녀의 주인은 더더욱 강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 앞에서, 마르스는 말을 더듬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오늘 그녀의 주인은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그녀는 그것이 용사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루크. 빛의 여신 루미너스의 계시를 받은 용사.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아마게돈 영지를 찾아온 그들은 그녀의 주인과 전투를 벌였고, 참패하여 목숨만 부지한 채 간신히 달아났다. 그러나 용사를 자칭하는 존재가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과 그런 암살자를 놓쳤다는 점 때문에 아마게돈 남작은 눈에 띄게 저기압이었다.
하지만 마르스는 자신의 힘으로 용사를 찾아내 죽인다던가 하는 일을 벌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분이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용사를 찾아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곧 쳐들어올 영웅들을 대비해 영지의 수비를 강화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주인, 아마게돈 영주는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이 충성심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니 어설프게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행위는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인의 좋지 않은 기분을 풀어줄 방법은 그것 뿐이 아니었으니까.
오늘 밤이다.
무려 한 달만에 갖는 밤 시간.
그 생각에 마르스는 벌써 몸이 흥분감으로 달아올랐다. 한쪽 팔이 잘려나가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무기를 휘두르는 그녀가, 유일하게 누군가의 밑에 깔려서 비명을 내지르는 시간.
그녀는 지나치게 뛰어난 전투력 탓에 항상 최전방의 전투에 투입되었고, 그래서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주인의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그랬던 만큼, 마르스는 오늘 밤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주인 님이, 그다지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몸을 탐하며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밤을 새려나? 너무 기분 좋아서 도중에 정신을 잃을 지도 몰라. 너무 오랜만이라, 몸이 기분 좋은 것을 견디지 못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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