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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5화 (5/229)

〈 5화 〉 아니 진짜 어케 이겼누;;(4)

* * *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일명 라돈 남작.

쇠퇴를 거듭해 결국 몰락하고만 가문의 유일한 적자이자 젊은 가주인 그는 성품은 좋지만 점차 망해가는 가문을 되살릴 능력은 없는 사내였다.

그러나 5년 전을 시작으로,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명확한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아마게돈 가문의 선조가 비상시를 대비하여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것이라 추정되는 값비싼 재화를 팔아 치워 자금을 충당하고.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황폐해져 가던 영지를 다시 과거의 영광이 빛나던 그 시절로 다시 되살려냈으며.

추종자 뿐만 아니라 재화로 용병들마저 고용하여 병력을 모아 적극적으로 주변 영지에 영지전을 걸기 시작했다.

완전히 달라진 행적.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헤르몬 왕국에서 영지끼리의 분쟁을 통해 일어나는 영지전은 자체적인 판단에 맡기고 있다. 그리고 영지전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에게서무엇을 가져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는 귀족들이 지나치게 재물을 축적해 그 권력으로 왕가를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들끼리 서로 싸움을 붙임으로써 그 힘을 소모시키기 위한 법이었다.

그리고 라돈 남작은 귀족에게 지나치게 힘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이 법을 역이용하여 점차 힘을 쌓기 시작했다.

아마게돈 영지와 맞닿은 작은 영지들부터 시작하여, 라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피해로 영지전을 완승함으로써 단지 재산을 뜯어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 영지 자체를 집어삼켜 자신의 영지에 편입시켰다.

상대 영지에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선 영지전을 벌여야 하는 명분이 필요했는데, 라돈 남작에게는 이미 그것이 있었다. 아마게돈 영지와 맞닿은 영지 대부분은, 본래 아마게돈 영지에 속해 있던 곳이었으니까.

한 때 아마게돈 가문이 남작가가 아니라 공작가이며 개국공신이었던 영광스러운 시대가 있었다.

아마게돈.

페리오드.

그라카스.

이 세 가문은 개국공신이자 헤르몬 왕국의 유일한 공작가로서 왕가를 섬기는 가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가문과 아마게돈 가문이 어떠한 이유로 대립하는 사소한 일이 있었는데, 왕가에서 아마게돈 공작가의 눈치를 보며 그 쪽의 편을 들어준 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페리오드 공작가와 그라카스 공작가는 세 공작가 중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강했던 아마게돈 공작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아마게돈 공작가에 온갖 트집을 잡으며 지속적으로 영지전을 벌여 땅을 빼앗고, 그것을 자신들을 따르는 하위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계속된 영지전의 영향으로 영지가 황폐화되고, 힘을 잃은 아마게돈 공작가는 두 공작가가 뒤집어 씌운 누명을 벗지 못한 채, 믿었던 왕가마저 더 이상 힘이 없는 공작가를 내쳤다. 왕가에서 두 공작가가 씌운 누명을 핑계로 힘을 잃은 아마게돈 공작의 직위를 강등시킨 것이다.

공작에서 후작으로, 후작에서 백작으로.

백작에서 자작으로, 자작에서 남작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가문은, 점차 쇠퇴하며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이러한 과거를 가지고 있던 아마게돈 가문이 페리오드 공작가와 그라카스 공작가의 추종자들이 영주로 있던 근처 영지에 영지전을 거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빼앗긴 영지를 되찾기 위한 영지전이었으니까.

아마게돈 가문을 몰락시킨 두 공작가도 갑작스러운 라돈 남작의 변화를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이미 잃을 대로 다 잃었던 영지가 겨우 되살아난 상태에서 영지전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젊은 가주가 해봤자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라돈 남작에게 기이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기존의 전쟁의 상식을 가볍게 뒤엎는, 상상을 초월하는 불길한 힘이.

본래 한 번 영지전이 시작되면, 최소 이틀에서 길면 이주일까지 지속되었고, 영지전이 길어질 수록 양쪽 영지에서는 엄청난 자원을 소모했다.

그러나 라돈 남작은 무려 다섯 번의 영지전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완승했으며, 두 공작가에 그 사실이 전해지기도 전에 그 공작가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영지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두 공작가는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자신들을 따르는 귀족의 3할을 영지전으로 잃었고,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두 공작가를 따르던 귀족들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빌미로 영지전을 선포당하였고, 제 아무리 열심히 수비를 굳힌다 한들 가주인 라돈 남작이 나선 영지는 하루아침에 무력하게 점령당했다.

분노한 그라카스 공작은 직접 본 때를 보여줄 셈으로 아마게돈 남작가에 영지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라카스 공작가를 돕기 위해 뒤늦게 영지전을 준비하던 페리오드 공작가는, 자신이 병력을 보내기도 전에 그라카스 공작의 사망과 영지전의 패배라는 소식이 자신의 귀에 들어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헤르몬 왕국의 두 날개 중 하나인 그라카스 공작가마저 그대로 날름 집어삼킨 아마게돈 남작가는 이미 '남작'이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는 어마어마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페리오드 공작가의 두 배에 가까운 병력에 가주가 가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힘.

이미 아마게돈 영지는 헤르몬 왕국 내의 또 하나의 작은 왕국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곳의 왕은 당연히, 단 1년 만에 밑바닥 몰락 귀족에서 왕가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권력을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은,라그나 아마게돈이었다.

아마게돈 가문을 억압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고 여긴 헤르몬 왕가는 다가오는 왕의 탄생일 축하 파티에 아마게돈 남작을 초대했다. 그가 순식간에 엄청난 힘을 손에 넣어 왕가를 흔들리게 만드는 존재지만, 아직 왕가에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있는지는 알 수 없기에 그것을 확인하고자 한 일이었다.

헤르몬 왕국의 왕자는 파티에 참석한 아마게돈 남작에게 넌저시 그 의도를 떠보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소란스러웠던 파티장은 무거운 침묵만이 내리앉았다.

"나는 왕가를 끌어내릴 생각 따윈 조금도 없소. 허나 왕가에게 충성을 맹세할 생각도 없지. 기르던 사냥개의 이빨이 날카롭다고 꺼려하다, 그 이빨이 빠지자마자 쓸모가 없다며 버리는 사냥꾼을, 그 어떤 사냥개가 주인으로 따르겠소?"

아마게돈 가문은 왕가가 자신을 버린 일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마음 깊숙이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빨을 되찾은 사냥개가 자신을 버렸던 주인의 목을 물어 뜯지 않는 것은, 한 때 자신을 돌봐주었던 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오. 그러니 제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던져준다 한들, 이미 떠난 짐승을 다시 붙잡을 순 없소.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목을 비틀어 죽이려고 한다면."

와그작. 아마게돈 남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과자를 하나 집어, 씹으며 말을 이었다.

"사냥개는, 한 때 주인이었던 그것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마게돈 가문은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그리고 왕가에 적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개국공신을 쳐내었으나 그래도 귀족의 직위를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

설령 왕가라 할지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치겠다.

이미 왕가로서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가주의 경고에, 귀족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게돈 남작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영지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과 달리, 본인이 직접 나서는 대신 자신의 대리인에게 영지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왕가에서 그를 회유하기 위해 다시 공작 직위를 내려도, 라돈 남작은 그것을 거부했다.

마치 왕가가 자신의 가문을버린 것을 잊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또한 암살 시도 같은 웃기지도 않은 짓을 벌였던 귀족들은 모든 혈육의 씨가 마르는 끔찍한 짓을 당했다.

그것이 반복되어, 결국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공포의 재앙이 탄생했다.

지금은 그 누구도 그의 행동에 아무런 제약을 걸 수 없었다. 그가 거의 취미 생활 하듯 다른 귀족의 영지를 침공하여 재물을 빼앗아도, 수많은 여자들을 침실로 들이며 방탕한 생활을 즐겨도, 심지어는 면전에서 왕가를 모욕해도.

*

"...그렇게 된 거지."

"...세상에 맙소사."

"...음."

"허..."

"..미친."

아마게돈 가문과의 영지전에서 패배해 모든 것을 잃고 도망쳐 집없는 주정뱅이가 된, 한 때는 백작이었던 남자의 이야기에 용사 루크와 그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한 번 맞섰을 때부터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만, 설마 이런 엄청난 일들을 벌였던 사람이었다니.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덤볐다가 살아 돌아온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 것인지, 그들은 다시금 깨달았다.

동시에 적에 대한 생각도 고칠 수 밖에 없었다.

주정뱅이가 언급한 '마치 다른 사람 같아졌다'는 시기는 아마 그가 혼돈의 파편을 손에 넣었을 때일 것이다.

몰락한 귀족인 그가 어떤 경로로 그것을 손에 넣었는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그 힘을 손에 넣고 벌인 일은 파편을 가진 다섯 존재 중에서 가장 역대급이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까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

하지만 그가 아무리 전에는 선한 사람이었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사정으로 금지된 힘에 손을 댈 수 밖에 없었다고 해도, 지금의 그는 명백한 악인이다.

도저히 변명할 방법이 없는 악인. 더 웃긴 점은, 그 자신도 그것을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크는 아마게돈 남작에게 도전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의 심복 중 하나가 풀어둔 수많은 마수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상태였던 그들은 간신히 아마게돈 남작의 앞에 도달했고, 파편과 공명하여 뿜어내는 그의 어마어마한 악한 기운에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위축되었다.

[...그렇군. 네가 바로 최근에 이야기가 나돌던, 빛의 여신이 선택한 용사인가.]

루크는 아마게돈 남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마게돈 남작은 이미 루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나를 악인이라 매도하는 건가? 상관 없다. 사실이니까. 그래, 나는 악하다. 구제할 길 없는 악인이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용사에겐 용사의, 악인에겐 악인의 길이 있다.]

[올곧은 빛의 용사여. 모두가 너처럼 바른 길만을 걸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마라. 너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마라.]

[나는 너의 정의에 반대되는 악당으로써, 그리고 세상을 위협하는 악으로써,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을 뿐.]

[그것을 막고 싶다면, 힘으로 막아보아라.]

그리고 루크는 그에게 당했다. 손가락 하나 도달하지 못한 채, 처참하게 참패하고 달아났다.

"...."

루크는 두려웠다. 여신의 인도를 받아 그가 행하는 기이한 힘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단을 얻었지만, 과연 그를 상대하는 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지금의 루크에게 라그나 아마게돈은 처음으로 마주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것은 그의 힘에 맞설 능력을 얻은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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