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6화 (6/229)

〈 6화 〉 아니 진짜 어케 이겼누;;(5)

* * *

혼돈의 파편.

그것은 루미너스 여신이 준비한 이 이야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사정이 좀 긴 데 대충 요약하자면, 다섯 개의 혼돈의 파편은 원래 하나의 보옥이었다. 그게 어떤 사정이 있어서 박살 났고, 용사의 사명은 그것을 전부 모아 원래 있던 곳에 다시 되돌려 놓는 것.

문제는 가장 큰 파편을 가진 불멸의 용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다른 네 개의 파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파괴자 세르베르크

떠도는 광인 실립

검은 군대의 라그나 아마게돈

폭군 바이올렌스

이렇게 넷이, 용사 루크가 불멸의 용과 싸우기 전에 맞서야 할 시련이다.

내가 이 연극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5년 전. '진짜 라그나 아마게돈'의 영혼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소실됨으로써, 내가 급히 그 빈자리를 메꾸었다. 그리고 내가 대타로 투입된 것은 라그나가 혼돈의 파편을 얻기 바로 직전의 순간.

혼돈의 파편을 얻은 자는 그 물건이 주는 힘의 영향으로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달라진다고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진짜로 사람이 바뀐 경우인 셈이다.

어쨌든 나는 본격적으로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여신이 준 대본을 통해 내가 할 역할의 준비를 철저히 끝마쳤다.

이 '대본'이라는 건 내가 보는 것의 정보가 절로 떠오르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에서 단골이나 다름없는 능력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거기서 나온 것들과 조금의 차이가 있다.

이 '대본'은 급히 이 무대에 투입된 배우인 내가 어색한 티를 내지 않고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도구로, 나에게 낯선 이 세상을 내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주로 남자들)은 이 힘을 일종의 게임 시스템, 스테이터스라던가 하는 식으로 인식한다.... 여신 피셜이니까 진짜겠지, 뭐.

근데 나는 좀 다르다. 레벨이니 스킬이니 하는 것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간단화 된 것보다는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느낌? 사람이나 물건을 보면, 현재 상태와 여태까지의 기록 등의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스테이터스 같은 방식보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늦은 셈이만, 더 세부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대의 현재 감정 상태나 호감도라던가, 신체적인 약점이나 극복하지 못한 끔찍한 정신적 트라우마라던가, 호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나 행동까지. 진짜 별에 별 게 다 있다.

핵심 키워드를 검색하는 형식의 공략법이랄까.

어쨌든 간에 지금 나의 이 위치는 이 '대본'의 영향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적군이 두려워할지, 어디를 공격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적이 무너질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상대를 온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처음엔 이 정도로 철저히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것은 연극. 최선을 다 하라고 했지만, 다시 살아날 예정도 없는 악역 보스니 '원래' 라그나 아마게돈이 했을 정도까지만 하고 적당히 퇴장할 생각이었...다만 상황이 변했다.

용사 루크가 여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원래 루크는 첫 상대인 파괴자 세르베르크를 상대로 굉장히 고전한다.... 파괴자라는 이명 그대로 눈앞의 모든 것을 분쇄하는 그 녀석은 솔직히 나라도 상대하기 꺼려지는 무지막지한 괴물이다.

원래의 시나리오대로라면 루크는 세르베르크와 첫 격돌에서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느끼고, 자신과 뜻을 함께할 동료를 구한 후 수일에 걸쳐 세르베르크를 서서히 몰아 넣다 보름이 될 즈음에 간신히 첫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함께 걷는 것.

그것이 용사가 첫 보스인 파괴자를 상대로 얻었어야 할 깨달음.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용사는 예상보다 강했다. 동료를 구하고 파괴자를 쓰러트린 것이 아닌, 파괴자를 쓰러트리고 동료를 구했다.

주인공의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리고 루미너스 여신이 다시 재조정을 하기도 전에, 두 번째 보스인 떠도는 광인 실립이 그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원래 실립 녀석은 파편이 주는 힘 하나만 믿고 까부는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다만, 문제인 그 힘이 제법 까다로웠고 거기에 한 곳에 머무르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성격이 더해져 공략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비겁한 실립은 그 특유의 힘으로 성가신 용사보다는 그 동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그 과정에서 용사는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잣대는 것의 위험을 깨닫는다.

근데 용사는 녀석을 손쉽게 해치웠고, 그렇게 내 차례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본래 예정이었던 두 차례의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네 개의 파편을 모으는 과정에서 네 개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불멸의 용에게 다다르면 그대로 배드 엔드가 되기 때문이다.

기껏 준비한 연극이 주연의 급발진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제대로 못 보여준 걸로도 모자라 배드 엔딩으로 끝난다니. 만일 그런 걸 보여줬다간, 빡친 관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래서 루미너스 여신은 다급히 밸런스 패치를 진행했다.

나에게 앞으로 용사의 예정 및 내 주변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내게 알려주었다. 용사에게 첫 난관이 되며, 앞서 두 전투에서 얻지 못한 두 개의 깨달음도 함께 주기 위해.

다만 내가 너무 오버한 바람에... 용사가 힘들게 이겼어야 할 전투가 용사의 참패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용사가 세르베르크를 상대할 때 얻었어야 할 깨달음이라도 뒤늦게 얻었다는 점이죠. 그것조차 못 얻었다면, 정말 대참사라고요.

"어쨌든 앞으로 3주 동안은 전 무방비 상태입니다. 루크 일행을 지치게 했던 마수 조련사는 북쪽으로 보냈고, 전쟁광은 다시 최전선으로, 암살자는 정보 탐색을 보냈으며 메이드는 제가 죽는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테고, 나머지 한 명은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죠. 그러니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괜찮을 겁니다. 이 정도면 손에 칼을 쥐어주고 '자, 여기봐. 여기가 심장이야. 여길 찌르면 죽어.'라고 알려주는 꼴인데, 설마 이걸 실패하겠습니까?"

­.....하긴, 그렇겠죠? 제가 걱정이 지나친 것이겠죠?

그리고 3주 후.

나는 침대에 엎어진 사하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후려치며 외쳤다.

"이 망할 용사 놈은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찰싹! 찰싹!

"헤으으으응♡"

*

용사 루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전투에서 입은 부상도 모두 나았고, 새로운 동료도 구했으며, 장비도 모두 새로 맞추었다. 전방에서 공격을 막아줄 든든한 전사를 구한 덕에 파티의 전투력 자체는 이전보다 훨씬 증가했다.

거기다가 아마게돈 남작의 부하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여기던 여전사 마르스와 암살자 사하, 그리고 마수 조련사 레이가 저택을 비운 지금, 그에게 다시 도전할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었다.

허나, 루크는 고민했다.

이대로 다시 가도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라그나 아마레돈. 루크가 앞서 상대했던 파편을 가진 그 두 명과 달리, 이번 적은 노리는 적이 많은 귀족이다 보니 자신을 지킬 방도를 충분히 마련한 상대였다.

저택 내의 수많은 위험천만 함정들과 흉포한 마수, 완벽하게 무장된 데다가 군기가 바짝 들어간 병사들, 그리고 사람의 정신을 현혹하는 무시무시한 능력.

처음으로 그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시켜 주었던 그 사내를, 고작 이 정도로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 상대를 확실하게 처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줄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을 곁에서 떠나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이건 함정인가?"

아직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용사를 유인하기 위한 덫.

일부러 약점을 노출시킴으로써, 어디에 숨어 있는 지 알 수 없는 자신들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게 만들기 위한 함정.

용사 루크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루크는 자신의 일행을 설득했다. 그리고 더 강해지기 위해, 수련을 쌓기 위해 그들은 라그나 아마게돈 영지의 북쪽으로 향했다. 최근 그 근방에 대량의 마수가 출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니, 그것들을 상대하며 좀 더 힘을 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지 북쪽에 도착한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착하지, 착해."

"그르르르르르..."

거대한 마수의 목에 목줄을 채우고 그 큼지막한 목덜미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고 있는 한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을 호위하는 서른 명의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병사의 갑옷에 새겨진 흑사와 백사가 교차하고 있는 저 문양은 아마게돈 남작가의 문장. 즉, 저 병사들은 모두 아마게돈 가문의 병사.

네 머리의 괴물이 용사 일행의 등장에 경계하며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돌린 여인은 그들을 발견하고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당신들은..."

용사 루크 일행은 이미 저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마침 잘됐네요. 길들인지 얼마 안 된 이 아이의 힘을 이제 막 시험해 볼 생각이었거든요."

그것도, 라그나 아마게돈의 저택에서.

그녀, 마수 조련사 레이는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띄우며, 마치 산책이라고 나가겠다는 듯한 나긋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크릉아, 없애버려."

그 말을 신호로, 악명 높은 북쪽의 마수가 네 개의 머리로 한 번에 괴성을 내지르며 용사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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