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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7화 (7/229)

〈 7화 〉 강해져서 돌아와라(1)

* * *

"크오오오오오!!!"

흐읍... 하아아압!"

서걱!

생사를 넘나드는 찰나의 순간,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딛는 순간 목숨을 잃는 그 극한의 전투 속에서 용사가 휘두른 검이 기어코 마수의 마리를 베어냈다.

머리 한 개를 잃은 마수는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었다. 이윽고 나머지 세 머리가 자신의 목을 베어낸 용사에게로 집중되었다.

"위험해!"

성인 남성 한 명은 가볍게 눌러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앞발이 용사를 향해 날아 들었다. 마수의 주의를 끌며 마수의 공격을 받아내 거나 흘리던 전사는 갑자기 마수의 목표가 자신에게서 용사로 바뀐 것에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몸을 날려 그 공격을 대신 받아냈다.

뿌드득, 뿌득...!

"큿...!"

어지간한 공격은 가볍게 튕겨내는 육중한 타워 실드라도, 몸집이 성채만한 마수의 공격은 버거웠다. 삐걱거리는 불길한 소리는 전투가 지속될 수록 점차 심해졌고, 전사는 자신의 방패가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전사 외에 다른 사람들도 상태는 별로 좋지 못 했다.

엘프 레인저 호크나의 화살은 마수의 이상하리만큼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하고 결국 동 나버렸고, 여신관 엘리아는 쉴 새 없이 전사에게 축복과 회복을 걸어주느라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이 불안정했고, 여마술사 비올라는 무리하게 마력을 쥐어 짜내다 결국 코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파티의 구심점인 용사 루크도, 마수의 네 개의 목 중 하나를 베어내기 위해 이미 많은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쿠오오오오오!"

푸화아아악! 다시 한번 마수의 쩍 벌어진 세 주둥아리에서 가센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밝은 청록빛 브레스 공격에, 용사 일행이 애써 잡아 놓은 포지션이 다시금 힘없이 무너졌다.

엘리아가 공격이 닿기 직전에 간신히 펼친 보호의 축복과 비올라가 입에서 각혈을 하며 마나를 쥐어 짜내어 걸어둔 마나 쉴드.

두 개의 기술이 합쳐져, 용사 일행은 사각지대 없이 사방으로 뿜어지는 마수의 브레스를 간신히 견딜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마수가 저 공격을 할 때마다 엘리아와 비올라, 두 사람이 급속도로 지쳐갔지만.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얼굴로 비틀거리는 에일라와 지팡이마저 놓치고 바닥에 쓰러진 채 사경을 헤매는 비올라의 모습을 보며,용사는 다음 브레스가 날아올 때 파티가 전멸하리라 확신했다.

"...젠장."

마수가 가진 힘은 지나칠 정도로 강력했고, 가장 큰 문제인 마수를 제외하더라도 아마게돈 저택에서 그들을 고전케했던 마수 조련사와 수 차례의 영지전 경험으로 단련된 병사들도 서른 명이나 남아 있다.

어찌어찌 간신히 마수를 쓰러트려도, 남은 적들까지 상대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이 마수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조차도 벅차지만 말이다.

염소, 독수리, 사자, 그리고 뱀. 마수의 네 머리 중, 이제 겨우 뱀의 머리를 베어냈다. 아직 독수리와 사자, 염소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 하나가 없어진 것만으로, 그렇지 않아도 위협적이었던 마수의 공격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흠? 흐음. 흐으으으음..."

그때, 마수의 목이 하나 날아갈 때 잠시 눈가가 움찔한 것을 제외하고선 표정 변화 없이 전투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마수 조련사가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내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크릉아, 돌아와."

"뭐...?"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당장이라도 용사를 감싼 전사를 앞발로 짓눌러 죽일 기세였던 마수가 돌연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마수 조련사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용사 일행은 의아함을 품었다. 대체 뭐지?

"용사와 그 동료들이었나요? 오늘은 운이 아주 좋으시네요."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조금 전에 라그나 님께서 이 귀여운 아이를 가능하면 멀쩡한 상태로 데려오라고 제게 명령하셨답니다. 이 이상 전투를 계속하면 크릉이도 위험해질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 이해하셨나요?"

마치 한참은 봐주고 있다는 듯한 어투...

아니, 실제로 봐주고 있는 것이리라.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놓아준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아마게돈 남작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럼, 용사와 그 동료분들, 오늘은 이만 작별이에요. 나중에, 라그나 님의 저택에서 다시 뵙죠. 그때는..."

씨익.

레이는 용사 일행을 가엽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했다.

"부디 지금 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오시길."

*

레이와 마수, 그리고 서른 명의 병사들이 떠난 후 용사 루크와 그 일행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받았다는 굴욕, 거대한 적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자신들을 얕봐도 너무도 얕보는 적을 향한 분노.

그러한 감정들이 질척하게 뒤섞여,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되어 그들을 흔들었다.

"...역시, 이대로는 부족해."

마수 조련사는 마수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즉, 다음에 라그나 아마게돈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번에 쓰러트리지 못한 그 무시무시한 마수와 그런 괴물을 손쉽게 길들인 마수 조련사를 거쳐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적은 강해도 너무 강하다. 물론 그 거대한 마수를 안전하게 이송하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지금이라도 서두르면 그 마수가 아마게돈 남작의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아마게돈 남작과 정면승부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사는 그럴 수 없었다. 아마게돈 남작이 자신의 주 전역을 밖으로 보낸 것이 함정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 마수 조련사는 아마게돈 남작의 부하.

그의 부하인 그녀 한 명을 상대로도 이리도 애를 먹는데, 과연 그런 괴물 같은 자들을 거느리는 그 남자를 정말로 자신의 힘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까?

루크는 이미 아마게돈 남작과 맞설 의지와 용기를 잃었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연이어 겪은 압도적 전력 차 앞에 서서히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더, 더 강해져야만 해. 이대로는 사명을 완수할 수 없어."

지금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자신은 라그나 아마게돈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린 루크는 무너질 것만 같은 각오를 다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들, 내 말 들어줘."

평소의 모습과 달리 체면 차리는 것조차 잊은 채 바닥에 엎어진 여마술사, 양손을 맞잡은 채 금방이라도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얼굴로 기도하고 있던 여신관,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나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악물고 있던 엘프 레인저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타워 쉴드가 반 고물이 되어버린 것에 참담함을 느끼던 전사.

그들은 용사의 말에 고개를 들거나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전투로 너희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만, 라그나 아마게돈을 지금 우리의 힘으로 쓰러트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용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행이 그 말에 욱하며 나서지 않은 것은, 그들의 동료인 루크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어. 그러니 지금의 우리로선 도저히 이길 수 없어. '지금의 우리'로서는 말이야."

루크는 바닥에 반 즈음 꽂혀있던 자신의 검을 뽑았다.

"우리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어. 아마게돈 남작을 상대하는 것은 더 강해진 이후야. 지금 우리들은 그보다, 다른 적을 먼저 상대하는 거야."

그동안 루크는 아마게돈 남작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라는 적을, 단지 폭군 바이올렌스를 상대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 정도로만 보고 있었다. 허나, 실상은 반대였다.

바이올렌스를 쓰러트리기 위해 아마게돈 남작을 쓰러트릴 것이 아니라, 아마게돈 남작을 상대하기 위해 바이올렌스를 쓰러트려야 한다..

상대를 지배하는 힘? 일개 개인이 가진 힘치고는 강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아마게돈 남작에게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이올렌스가 그저 무력으로 찍어 눌러 복종시킨다면, 라그나 아마게돈은 대상을 그의 것으로, 스스로 복종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 위험성을 따지고 보면, 바이올렌스보다는 아마게돈 쪽이 몇 배는 더 위험하다. 루크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아마게돈 남작을 상대하는 것은 나중으로. 우선은 바이올렌스를 꺾는 것을 목표로 바꾸자."

다음 날, 용사 일행은 폭군 바이올렌스가 지배하는 도미나 왕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적이 제발 자기를 죽여 달라며 강한 여간부를 전부 내 보내고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이 씨발 놈들이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내가, 어! 온갖 핑계를 대며 가장 쎈 부하들을 기껏 떨어트려 놨는데, 응? 그 기회를 잡지는 못할 지언정, 뜬금없이 내 부하가 있는 곳에 가서 거의 전멸을 당할 뻔 해?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애초에 레이가 길들인 그 마수, 그거 나보다 쎈 놈이거든? 사실상 최종 보스인 불멸의 용을 상대하기 직전에나 잡을 법한, 고 레벨의 짱짱 쎈 필드 보스라고!

마수 조련사인 레이가 가진 개사기 스킬 덕에 간신히 길들였을 뿐이야! 지금 저택에서 나보다 이 마수가 더 강하다고! 레이가 없었다면, 내 저택은 이미 이 마수로 인해 폭삭 내리앉았을 거라고!

강함의 수치를 게임의 레벨로 따지면 이 마수는 레벨 90 정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원래 라그나 아마게돈을 상대할 즈음에 용사의 레벨은 60대 정도여야 정상이고.

그런데 이 마수의 머리를 하나 날릴 정도라면, 못해도 이미 용사의 레벨은 80 정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내 레벨은 70도 안 될 테고. 이게 뭔 소리냐고?

용사 놈은 날 죽일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나한테서 튀어? 이렇게 '나 죽여주쇼'하고 있는데도? 칼 한 번 휘두르면 목이 뎅겅 하고 날아가서 끝날 일인데, 그걸 안 하고 도망을 쳐?

용사는 지금 나를 상대하기 위한 필수 스킬인 '정화'도 습득한 상황. 곧바로 여기 쳐들어와서 나랑 일 대 일로 맞다이 뜨면 내가 뒤진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부하들이 있다면 해볼 만 하겠지만, 부하 없이 상대하면 내가 무조건 진다.

...근데 이 개쫄보 용사는 막판 보스 전에나 겨우 상대할 수 있는 마수한테 치명상까지 입혀 놓고서 나한테 쫄아서 다음 보스로 튀었어!

3번째 보스 스킵하고 4번째 보스 먼저 상대하러 갔다고!!

­ 이제 이거 어떻게 할 거에요?! 용사의 여정이 완전히 망했잖아요!!

"이게 어떻게 제 탓입니까! 제가 기껏 죽이기 쉽게 밥상 다 차려 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에 넣어 주려고도 해도, 이 망할 놈의용사가 밥을 먹여 주려고 해도 지멋대로 밥상 엎은 거 잖아요! 이 이상으로 했다간 관객들도 티가 난다고 생각할 거란 말입니다!"

즉, 이건 지나치게 신중한 데다가 직접 보지도 않은 내 실력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내뺀 겁쟁이 용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절대 내 탓이 아니다.

아무튼 내 탓 아님!!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시나리오를 수정할 수밖에 없어요. 바이올렌스와 당신의 순번을 바꾸고, 그래서 꼬이는 문제점을 수정하고... 끄으응.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데, 왜 자꾸 문제가 터지는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야!

루미너스 여신은 순탄하지 않은 계획과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늘어나는 수많은 계산 범위 외의 오차에 머리를 쥐어 싸매며 비명을 질렀다. 어우, 귀 아파라.

...그러고 보니 애초에 왜곡의 시작은 용사가 초반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강했던 것이었지.

즉,이 모든 문제는 처음부터 용사의 전력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는 루미너스 여신의 잘못...

샤아아아아아!

­혹시 지금 굉장히 신성모독적인 생각 하지 않으셨나요?

뭔가 눈앞에 굉장히 불길한 빛이 번뜩이며 차가운 여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웃어 넘겼다

"하하, 설마요.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쳇, 하여간에... 이래서 눈치 빠른 여신은 싫다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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