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이, 이게 머선129...(1)
* * *
지금의 용사는 여신이 생각 했던 것보다 강하지만, 그래도 바이올렌스를 상대로는 역부족이다.
바이올렌스가 혼돈의 파편으로 얻은 힘은 지배.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파훼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혼돈의 파편의 힘을 사용하고 있거나 빛의 여신인 루미너스의 가호를 받고 있다면 그 지배 능력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용사 일행 중에서 루미너스 여신의 가호를 받은 사람은 오로지 용사 루크 한 명뿐.
혼돈의 파편을 동료에게 주면 지배 능력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그대로 파편의 힘에 먹혀 적이 되어버린다.
본래는 용사가 세 차례의 전투로 세 개의 깨달음을 모두 얻은 상태로 세 명의 동료들에게 각각 하나씩 파편을 줘서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지만, 깨달음을 한 개 밖에 얻지 못 한 지금 상황에서 무지성으로 쳐들어 갈 경우 동료 한 명만 남기고 전부 바이올렌스에게 지배당해서 적대시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용사가 불멸의 용을 상대 하기도 전에 악역 보스한테 처맞아 뒤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지금 급하게 저택을 떠나온 상태다.
호위병 열 명과 레이, 사하와 함께 말이다.
미아는 내가 없는 동안 내 대리인으로서 저택을 책임지고 맡아줘야 하고, 마르스는 다시 전선에 나선 데다가 그녀의 능력은 이런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조정이 좀 필요한 상태고.
그래도 레이를 동행한 덕에, 엘헤임 왕국으로 향하는 길은 꽤 편했다. 내 마차를 끄는 건 말이 아니라 무시무시하고 튼튼한 마수들이었으니까.
마수란 본디 사람의 손길을 잘 따르지 않는 짐승. 허나 나에게 있어서는 그냥 지나가다 필요하면 부려 먹을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지금 행복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그녀, 마수 조련사 레이 덕분에 말이다.
레이에겐 [동물의 친구]라는 스킬이 있다. 이 스킬의 효과는 아주 간단하다. 제아무리 사납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마수라고 할지라도, 레이에 한해서 최소한 100 중에 15 정도의 호감도를 가진다.
이 호감도는 마수 조련사들이 가진 테이밍 스킬의 성공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인데, 대다수의 마수들이 인간에 대한 호감도가 0 이하 이기에 길들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레이는 이 스킬, 동물들이 그녀에게 최소한의 호감도를 가지게 해 주는 [동물의 친구]라는 스킬 덕분에 제아무리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마수라도 길들일 수 있다.
이 마수라는 것도 종류가 아주 많다. 이런 마차를 끄는데 적합한 소나 말의 형태부터, 주변에 접근하는 것을 사전에 확인하기 위한 새나 박쥐의 모습까지, 그 수와 종류가 아주 천차만별이다.
"주인님. 용사 일행을 발견했습니다."
레이는 이렇게 자신이 길들인 비행형 마수를 통해, 용사 일행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게 보고할 수 있는 것이다.
용사 루크. 나를 죽이고 성장해야만 하는, 루미너스 여신이 만든 이 연극의 주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뒤쪽입니다. 뒤쪽에 있는 마차를 타고 있어요. 하지만 속도 는 굉장히 느려서, 이대로만 그냥 달리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겠네요."
"그래? 그럼 만일 우리가 여기서 마차를 멈추면, 대략 어느 정도 후에 녀석들과 마주하게 되지?"
내 물음에 레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 했다.
"아마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녀석들이랑 만나봤자 좋을 일은 없을 텐데..."
"아니, 괜찮다. 어차피 만나봤자, 녀석들은 나에게 덤비지 않을 테니."
이건 자만심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용사 루크는 내가 대부분의 병력을 물러나게 하고 약점을 드러내도, 혹시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신중을 가했던 녀석이다.
그런데 내가 고작 열 명의 병사와 부하 두 명을 데리고 눈 앞에 나타났다고 해서, 그걸 기회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에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닐까 경계할 테지.
...뭐, 솔직히 녀석들이 덤벼도 상관없다. 용사 일행의 실력은 이미 저번에 충분히 확인했다. 내가 질 가능성은 거의 없고, 설령 진다고 해도 용사가 깨닫지 못 한 깨달음을 알려 주며 패배할 수 있다.
단순히 나를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게 해서 최종 흑막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내 목적이니까.
물론 그 겁쟁이 용사는 절대로 나한테 덤비지는 않을 테지만.
"레이, 일단 마차를 멈추어라. 그리고 적당한 마수 몇 마리를 이쪽으로 데려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레이는 그렇게 답하고선 대담하게 트인 옷 사이 거대한 흉부에 손을 넣었다. 내 다섯 여자들 중에서 마르스 다음으로 큰 물건의 소유자인 그녀가 거대한 가슴 사이에서 꺼낸 물건은 비취로 만든 오카리나였다.
가슴이 큰 여자는 저게 진짜로 되는 구나...? 저것 참, 하반신에 자극이 오는 장면이네.
레이는 그 오카리나를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은 후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남은 구멍들을 통해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깊이가 느껴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이 바람을 타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해 흘러 가며 그 소리는 더더욱더 증폭된다.
그것은 악기 하나의 음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카리나와 숲이라는 거대한 악기가 만나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중주.
귀가 존재한다면, 이 몽환적인 음색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르르르르..."
"크륵, 크르르..."
얼마 안 가 그녀의 음색에 이끌려, 근처에 있던 마수들이마차로 모여 들었다. 레이의 직업과 능력을 알고 있는 내 호위병들은 마수들의 등장에 놀라며 소란을 피운다거나 하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내 저택에서 지내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다보니, 이젠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기는 모양이다. 나야 뭐, 귀찮은 설명을 덧붙힐 필요가 없어서 좋고.
마차를 멈췄으니, 용사 일행과 만나기까지 얼마 안 걸리겠지. 물론 그들이 내게 덤빌 가능성은 거의 없고, 덤빈다고 해도 내가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숲에 사는 마수를 죄다 자신의 수족으로 거느릴 수 있는 마수 조련사 레이와, 대상이 스스로 죽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 사하가 같이 있는 상황에서, 그 용사 일행이 내게 덤빌 리가 없지만, 혹시라도 덤볐다가 진짜로 전멸해서 죽어버리면 굉장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용사 일행이 날 발견해도 다짜고짜 덤비지는 않도록, 그들의 정신을 쪽 빼놓을 미친 짓 하나 벌여야겠다.
*
".....아, 이런 제기랄."
"호크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용캐 평온한 자세로 기도 하는 엘리아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비올라는 일행 중 유일하게 마차 안이 아닌 마차 지붕에 앉아 있던 호크나가 갑자기 험악한 말을 짧게 내뱉자 무슨 일이냐며 되물었다.
"빌어먹을, 마수들이야. 길목을 막고 있어. 한 두 놈이 아니네. 게다가 하나 같이 위험해 보이는 놈들이야."
엘프에 레인저라 일행 중 가장 눈이 밝은 호크나는 누구보다 먼저 저멀리서 보이는 한 무리의 마수를 발견하고선 혀를 차며 마차 안의 일행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혹시 마수 말고 다른 것도 있어?"
"그러고 보니 마수의 뒤쪽에 마차가 하나 있는 데, 그 마차에 새겨진 문양이 잘 보니 그 귀족 놈의 저택에 있던 거랑 똑같네.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그 여자야. 저번에 저택에서 마주쳤던 그 빌어먹을 년."
호크나는 그렇게 말 하며 등에 매고 있던 활을 꺼내 거기에 화살을 매겼다. 엘리아는 기도를 멈추고 그녀의 화살에 빛의 축복을 내렸으며, 비올라도 스태프를 들고서 마법 폭격을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루크.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우리는 뭘 하면 되지?"
"우린 할 게 없어, 고든.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포션이나 챙겨두자고."
팝콘 대신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언제든 쓸 수 있게 준비할 뿐이었다.
이윽고 용사 일행이 탄 마차와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마수들 사이의 거리가 화살이 닿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호크나가 한계까지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흡!"
"받아라! 이 비올라님 특제 폭격 마법, 플레어 버스트 mk2를!!"
피슝, 투화아아아악!
여신관이 빛의 축복을 담은 화살이 먼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고, 그 뒤를 비올라가 마력의 3할을 소모하며 쏟아낸 화염의 파도가 뒤따랐다. 그리고 어지간한 마수도 견디기 힘든 그 무지막지한 공격들은...
까앙! 푸화아아악!
"...뭣?"
"어?!"
허공에 나타난 투명한 장막에 막히는가 싶더니, 방향을 바꾸어 날아온 궤도 그대로 다시 돌아 갔다.
"젠장, 돌아온다! 얼른 막아!"
"마의 힘, 지금 방패가 되어, 우리를 보호하라!"
"빛이여, 저희를 지켜주소서!"
캉, 카가가강!
그들에게 되돌아온 공격은 다행히 비올라와 엘리아가 동시에 전개한 두 장의 방어막에 막혀 흩어졌다. 엘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 시켰고, 비올라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휴, 위험했네. 하마터면 저세상 직행할 뻔... 그보다 방금 그거 공격 반사 마법이야! 그리고 화살은 그렇다 쳐도, 이 몸의 특제 마법까지 전부 반사할 정도의 고등 마법이라고!"
"...저기에, 그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루크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성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수들과 그 마수 조련사 여자.
그 둘 뿐이라면, 그 규격 외의 전력인 네 머리의 마수를 동행하고 있지만 않다면, 그녀와의 전투는 할 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록 그 마수 조련사 여자와 한 번 부딪히고 힘이 좀 빠진 상태로 싸웠다고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그들을 참패시킨 그 남자가 있다면 정면에서 맞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호크나, 지금 상황은..."
"...뭐야, 저거?"
과연 싸워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그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걸리는 것을 감수하고 길을 돌아서 갈 것인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루크는 조금 더 신중을 가하기 위해 호크나에게 상세한 상황을 물었다.
그러나 호크나로부터 돌아온 것은 항상 냉철하고 침착했던 그녀 답지 않은 얼빠진 대답이었다.
"잠깐만, 저거... 좀 이상한 데?"
"이싱하다고?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아니 그게... 이상해. 뭐야, 저거? 저건 그냥, 진짜 이상하다고밖에 말 못 하겠는데...? 아니, 그게, 진짜 저게 뭔..."
호크나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일행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이상하길래, 산전수전 다 겪은 엘프인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결국 길을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얼마 안 가 호크나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의 눈에도 아마게돈 남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 한 검은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호크나가 이상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하지 않은 그 광경도.
그리고 그건...
"응?"
"어...?"
"아니, 저게 뭔..."
"그, 확실히 그 말대로네. 저건 좀, 음.... 이상하네."
다른 일행의 눈에도, 확실하게 이상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마수란 마력이 담긴 짐승으로, 일반 짐승보다 길들이는 과정과 난이도가 몇 배는 높은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그리고 그런 마수를 수족처럼 다루는 마수 조련사는 굉장히 희귀하며 위험한 존재이고.
하지만 아무리 마수 조련사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마수라는 것이 그 본성이 워낙 흉포하다 보니 그 점을 이용해 인간을 공격하게 만들 거나 마수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은 제법 어렵지 않지만 되려 보통의 짐승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렵다.
말이나 소처럼 마차를 끌게 한다던가, 애완동물머냥 재롱을 떨게 하는 것 같은 일반 짐승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마수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3일 동안 굶주린 사자 우리에 떨어진 아이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빠져나오길 바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인간과 마수의 교미를 시도한 미친 수간충 마수 조련사가 한 명 있었다. 물론 그 끝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마수랑 교미를 한다는 말과 자살이라는 단어가 같은 말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찢어진 하반신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마수 조련사들이 마수를 길들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인간 또는 다른 마수와 싸움을 붙이는 정도가 고작이라고 할 수 있다.
♬~~~
길 한복판에 멈춘 마차와 거기에 앉아 있는 어둡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퇴폐미가 넘치는 연상의 여인.
그녀가 연주하는 녹색 빛의 악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높은 음색이 숲의 나무 사이를 통해 몽환적인 멜로디가 되어 울려 퍼진다.
그리고 사람 한 두 명 정도는 몸풀기로 가볍게 찢어 죽일 법한, 어둠에 물든 거대하고 흉악한 마수들이 마차에 앉은 여인을 중심으로 춤추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 모습은.
이 세계의 보편적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그 광경은, 용사 일행의 멘탈을 저 너머 안드로메다까지 날려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기괴함이 담겨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