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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25화 (25/229)

〈 25화 〉 미..미...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지!(7)

* * *

아마게돈 남작이 무언가를 한다는 소식에 용사와 동료들은 원형 경기장에 관객으로서 참여했다. 그 이벤트라는 것이 지난 번에 붙잡았다던 수인 중 하나와 맞대결을 펼치는 것이라는 점은 몰랐지만.

처음에 여성 로얄 나이트가 규칙을 설명할 때, 루크는 과연 이걸 계속 지켜보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막아야 할지, 아니면 이 자리를 떠나야 할 지 동료들과 상의했다.

그 결과, 아마게돈 남작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도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캐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결국엔 대결을 지켜보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으음, 저건 좀..."

"너, 너무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공정하고 대등한 '결투' 따위가 아니라, 한 쪽의 일방적인 '구타'였다.

"아싸, 역시 아마게돈 남작이 이겼다!"

"역겨운 역배충 놈들 다 뒤졌죠? 크크크큭!"

"이 씨뻘 이거 주작 아니야?!"

"응, 아니야~!"

라그나 아마게돈의 힘과 기술은 크게 대단하지 않았다. 무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초짜의 손놀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질 불명의 검은 금속 막대로 여자 수인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교묘한 마술이었지만, 그것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신체 능력이 꽤나 뛰어난 여자 수인이, 고작 그 마법 하나 때문에 지금 저렇게 바닥에 비참하게 널부러져 있으니까.

"으, 으으..."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리는 수인 여성의 모습은 차마 두 눈으로 지켜보기에 안쓰러웠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 루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은 것은, 이미 저항할 힘 하나 없는 약자를 향해 아마게돈 남작이 다시 막대를 휘둘렀을 때였다.

그것은 루크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분명 결투라고 했다. 결투라 함은, 한 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싸울 수 없을 때까지 서로의 무용을 겨루는 것. 이미 승패가 갈린 시점에서 다시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이미 결투라고 부를 수 없다.

루크는 용사였다. 아무리 라그나 아마게돈이 두렵고, 그에게서 도망치다시피 그의 영지를 떠났다 하더라도, 그는 용사다.

그리고 용사란...

"그만 둬!"

불의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 인생 참 피곤하게 사는 참견쟁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

챙! 얇고 긴 검은 막대와 날카로운 장검이 부딪히며 주황색 불꽃이 튀었다. 나는 난입자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용사 루크? 어찌하여 너는 이 신성한 결투 재판을 방해하려 드는 거지?"

"신성하기는 무슨, 이미 승부는 났잖아! 그 이상은 그저 분풀이일 뿐이야! 무기를 내려 놔, 아마게돈 남작!"

"...안제."

"...!"

챙강! 측면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기습에, 루크는 재빨리 검을 되돌린 후 칼날을 눕혀 공격을 막아냈다. 안제의 위협적인 찌르기를 용캐 막아낸 루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큿, 어째서...?"

"보기보다 실력은 있으시군요. 이름이...루크, 라고 하셨나요?지금 당장 자리로 돌아가시죠. 지금 당신의 행동은 여왕 폐하께서 정하신 법인 신성한 결투 재판을 방해하는 행위. 당장 돌아가지 않는다면, 공무 집행 방해로 당신 또한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났잖아?"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쐐애애애액! 안제의 세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수차례 휘둘러졌고, 그 예리한 참격을 모두 받아내며 루크는 점차 뒤로 물러났다.

"결투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조건, 당사자인 두 사람은 그것을 항복 선언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녀가 자기 입으로 항복 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결투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저 사람은 항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그건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항복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이 이상 무력 행사를 하기 전에 자리로 돌아가시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까아앙! 루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안제의 날카로운 일격이 그의 검면에 작렬했다. 그 충격으로 뒤로 밀려난 루크는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여기사의 시선에 몸이 굳었다.

"이것은 당신이 외지인이라 이 나라의 규칙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드리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 이상 지시에 응하지 않는다면, 당신 또한 범법자로 규정하고 구속 절차를 실시하겠습니다."

루크를 막아선 것은 결투의 심판을 맡은 여기사 뿐만이 아니었다.

"맞아! 당장 꺼져!"

"신성한 결투 재판을 모욕하지 마라!"

"나!락!나!락!나!락!"

결투를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그에게 나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홀로 고립된 감각에, 루크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이 이상 억지를 부려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자신의 여정은 이런 것에서 이런 식으로 끝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아..으..."

빠악! 퍽! 퍼억! 빡! 퍽퍼억!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사람을, 정녕 용사라 칭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상대가 항복을 하지 않았기에 결투가 끝나지 않았다, 이런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 결투의 공정한 심판으로서 지금 그녀에게 항복할 의사가 있는 지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항복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지금 확인할 테니, 당신은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렇다. 이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그녀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이렇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걸로 그녀는 더 이상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통받지 않...

"...확인 결과, 그녀에게 결투를 속행할 의사가 있음을 확인. 결투를 재개합니다."

...뭐?

*

수인 여자의 어리석음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저 겁쟁이 용사 님이 기껏 용기를 내서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줬건만, 그녀는 기어코 그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그것이 어떻게든 나를 이기고 자유가 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인지, 아니면 나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유효타를 먹이고 싶다는 오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존나 쳐맞은 탓에 머리가 이상해져서 헛소리를 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분명 제 입으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합법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었고, 이번엔 용사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즉, 나는 그녀에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그녀 자신의 힘에 대한 무력감을 제대로 심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내가 즐겨쓰는 방법은 아니다만, 이것 밖에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주먹과 발길질을 써서라도 상하 관계를 제대로 각인시켜 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빠악! 퍼억! 빡!

나는 다시 막대를 휘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때리다가 되려 지쳐서 나가 떨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직 쌩쌩했다. 내가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온갖 아티팩트들의 영향이다.

물리 공격의 속도와 위력을 약화시키는 '왜곡' 마법부터, 일정 거리 밖에서 시행한 원거리 공격을 빗나가게 만드는 '흐릿함', 거기에 격렬한 장기전에 특화된 마르스의 온갖 특성들도 빌려왔지.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마법 아이템 및 마법 이외의 수단만으로도 충분히 이 정도까지는 싸울 수 있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지. 나는 싸움 실력도, 마법도 그리 특출난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라 가능한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긁어 모아야 했으니까.

"어이, 정신 차려."

퍼억. 널부러진 수인녀의 복부를 걷어차 깨운다. 고통 때문에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 결국 우웩거리며 바닥에 대고 구역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방에서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들려왔다.

"이런, 신성한 싸움의 무대를 지저분한 토사물로 더럽히다니. 예의라는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군."

저항도 제대로 못하는 상대를 수 시간동안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만, 내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으니 상관 없었다.

"오버하지 마. 죽지는 않도록 일부로 봐주면서 때리고 있으니까."

그녀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용캐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내가 폭력을 이용한 조교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해본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다. 처음엔 굉장히 어설펐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하는 지 몸에 뱄다. 그래, 예를 들면...

부웅!

"어이쿠."

그 상황에 용캐 몸을 일으켜 손톱을 휘둘러 오다니, 오기 하나는 진짜 감탄할 정도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가볍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공격을 피한 후,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덤벼드는 그녀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냈다.

퍼억!

"크, 으읏...!"

내 발에 힘없이 밀려 뒤로 나가떨어진 그녀를, 이번엔 손에 든 막대로 패지 않고 발로 밟았다. 여길 밟으면 뼈가 비틀리는 아픔을 느끼지. 그리고 여기는 느껴지는 아픔에 비해 나중에 상처가 별로 남지 않고, 여긴 특히 아픔이 크게 느껴지기에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적합하지.

남이 보면 무지성으로 짓밟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 다 계산하며 때리고 있는 중이다. 죽이지는 않으며, 고통은 최대란 느끼도록 말이지. 그러자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면 공격을 멈춘다. 스스로 일어나 내게 덤벼오기 전까지만.

"..."

그러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다. 다소 불규칙적이지만 호흡은 분명히 하고 있다. 수인의 뛰어난 신체 능력상 벌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회복했을 테고.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못 했다.

아니,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나 봤자, 또 다시 무자비한 폭력이 날아올 뿐이니까.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만 두들겨 팬 후에,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어나 봤자 다시 이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 자신이 무릎 꿇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러니까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몸으로 체감했디.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에 대한 공포가 심어졌고, 결국 그 앞에 무릎 꿇었다.

무식하기에 용감했던 그녀는, 바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폭력 앞에 결국 마음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흠.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둘까."

폭력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만, 간만에 휘두른 무기와 발길질로 스트레스가 좀 풀렸다. 오늘은 특별히 여기서 봐 주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이 이상 계속한다면...

"...."

저기서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고 있는 용사가 결국 자제력을 잃고 내게 덤벼들 지도 모르니까.

나는 처참하게 널부러진 수인녀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고개를 들게 만든 후 물었다.

"어이, 수인녀. 항복할 생각은 들었나?"

"....잘못, 했어요..."

그리고 수인녀는 입에서 나온 것은 항복으로 받아들기에 충분하며 또한 나를 만족시키는 말이었다. 궁지에 물린 사람이 용서를 비는 것은 대다수가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며, 이는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는 항복 선언과 같이 때문에.

"그래, 항복한다고. 알았다. 결투 재판은 결투가 끝난 시점에서 판결이 결정되지. 안제, 벌은 내가 정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것이 결투 재판에서 승리한 자의 권리이니."

"좋아. 그럼 이 녀석이랑 나머지 녀석들, 전부 지금 당장 노예 각인을 박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두 사람의 결투 재판을 폐멍하겠습니다."

이 수인녀도 참 멍청하다.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발악? 어리석긴.

바이올렌스, 그 욕심 많은 계집이 자기 것을 순순히 내놓을 리 없다. 자기가 원하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일단 자기 것인 이상 결코 타인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 탐욕스러운 성격이니까.

그런 그녀가 도망친 수인들에게 시민 자격을 줬다는 것은, 살아있는 수인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일 내가 이 수인녀들을 노예로 데려가려 한다면, 제법 귀찮게 들러붙을 것이다. 아마 꽤나 고생하겠지.

원래는 그걸 빌미로 바이올렌스와 시비가 붙어, 그녀가 먼저 조약을 어기게 함으로서 바로 전면전을 들어갈 생각이었다만, 결투 재판 때문에 이야기가 바뀌었다. 그 년이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약속의 소중함은 아는 년이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새겨줬으니까.

결투 재판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이상, 수인녀들은 빼도박도 못하게 내 소유가 되었다. 그것이 결투 재판의 룰. 죄인에게 주는 마지막 면죄부? 웃기는 소리.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광대를 이용해 시민들의 폭력성과 오락성을 충족시키며 모두에게 마치 기회가 있다는 듯한 착각을 심어주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정치일 뿐.

만일 그냥 평범하게 재판을 했다면, 확률은 제법 낮지만 그래도 내 노예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멍청한 년은 이길 가능성이 0.0001%도 존재하지 않는 필패의 도박수를 자기 손으로 던짐으로서 동료들과 제 운명을 내다버린 셈이고.

나는 용사에게 보란 듯이, 수인녀의 발목을 잡고 짐덩이 끌고 가듯 바닥에 질질 끌며 데려갔다. 투지가 한층 커졌다. 그러나 그 속은 텅 비었다. 용사 녀석은 당장이라도 내게 덤벼들고 싶은 얼굴이지만, 그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겁쟁이 용사 루크, 너는 아직 내게 덤빌 때가 아니야. 네가 나와 싸울 때는, 네가 충분한 힘과 용기를 얻은 후여야만 해. 그래야만 또 다시 내가 너를 이기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악역 보스니까.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온갖 악행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결국 정의의 용사님의 손에 쓰러짐으로서 이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게 정의 구현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야 할 악역이니까.

그러니까 얼른 강해져라.

나의 악행을 막기 위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쓰러트리고 관객들에게 극강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위해서.

내가 나의 역할을 제대로 끝마칠 수 있도록.

*

"한 가지 물어볼게."

"네, 무엇이든."

'그'는 수인 여성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루미너스 여신에게 물었다.

"분명 그는 원래 악행과는 아주 거리가 먼, 오히려 극히 선한 인간이라고 했지?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는 인간이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바뀔 수는 없어. 그렇다면 너와 저 인간 사이에 또 다른 무언가가 오고 갔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

루미너스 여신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원래 저 세계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눈치가 엄청 빠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그것만으로 이 정도까지 눈치챌 수 있을 줄이야.

이래선 더 이상 숨겨도 의미가 없다. 말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 안가 스스로 알아낼 것이 분명하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자기 입으로 말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루미너스 여신은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실은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배우가 사라진 것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할 영혼을 구할 때, 힘을 조금 사용해서 '제가 원하는 최선의 결과'를 줄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을 불렀습니다."

"흐음. '네가 원하는 최선의 결과'를 줄 수 있는 인간의 영혼을 불렀다라. 과연, 그렇구나. 그는 전생에는 선량한 사람이었을지언정, 착하고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야. 그저 그런 환경에 있었고, 그 환경을 바꿀 힘이 없었기에 그 안에 자신을 욱여넣었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자신을 욱여넣는 대신, 자신에 맞게 주변의 환경을 바꿀 힘을 얻었으니까."

피해자가 무조건 선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피해자는 그저 가해자가 되지 못한 가해자일뿐.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저 녀석은 특별해. 아무리 너와 연결이 되어있다고는 한들 보통은 저런 상황이 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눈이 멀텐데, 저 녀석은 달라. 철저히 악행을 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배역에 맞는 역할일 뿐."

관객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상쾌하게 웃었다.

"물론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자신의 욕구도 풀고 있긴 하지만, 그는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며 필요 이상으로 심취하지 않았어. 악역을 연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그런 악역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상황인데,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이 그와 저의 약속이니까요."

"...약속?"

루미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할에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에게 여러 방면으로 지원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 지원이라는 게 혹시..."

"네, 감정의 조작입니다."

고작 한 편의 연극을 하겠다고 세상 하나를 창조하는 여신에게, 인간 한 명의 머릿속을 바꾸는 일 따위 그리 어려울 리 없다. 특히 인간성을 완전히 바꾸는 것도 아닌, 감정의 일부만을 통제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지성체를 죽이는 것에 대한 망설임, 자신이 벌인 행위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악역으로서 완벽히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을 없애달라고, 그가 먼저 요구해 왔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고요."

"그리고 그 감정들의 빈 자리를 다른 감정이 채우게 되고, 전생에선 기회가 없어서 쭉 억눌려 있던 성욕이 미친듯이 활개치게 된 거로군.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만약 성욕까지 제거한다면 일이 더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그'에게 있어서 더 재미가 있었기에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좋아. 너희'들'이 준비한 연극, 많이 엉성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재밌어. 너희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을 지 궁금해졌어."

"..."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줘. 나는 말이야, 다른 무엇보다 '재미'를 우선시하니까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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