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벚꽃이네? 벚꽃이여?(1)
* * *
'여신님? 루미너스 여신님? ....허당신 루미너스?'
평소라면 버럭 화를 냈을 불경한 생각까지 했음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내게 다급히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연결이 끊긴 후, 아직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위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마차를 타고 수도까지 가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다는 레이의 의견도 있었고, 이대로 무작정 수도로 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인원을 분배했다.
니 중에서 가장 빠른 사하에게 먼저 수도에 도착해서 바이올렌스가 벌이는 일이 대한 상세한 정보를 모을 곳을 지시하고 레이에겐 마차와 병사들과 함께 용사 일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그들이 수도로 오는 속도가 늦어지도록 마수들을 가끔 보내서 적당히 발목을 잡아두라 명령을 내렸다.
지금 용사 일행에게 부족한 건, 역시 경험이다. 용사는 어째서인지 여신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싸운 경험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은 탓에 그 힘을 아직 능숙히 다루지를 못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레이에게 마수를 보내 용사 일행의 움직임을 방해하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부족한 경험을 채워주기 위함이다. 용사를 쓸 곳이 있으니 죽이지 말고 적당한 녀석으로 시간만 끌라고 명령했으니, 레이는 용사가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마수만 보낼 것이다.
약한 마수라도, 전투가 계속되면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적은 어느 부분을 노리는 것이 효율적인지부터, 어떤 적의 무슨 공격을 어떤 방법으로 막아내는 것이 확실한지.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함으로서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사하에게 정보 수집을 부탁한 것은 바이올렌스의 목적은 안제에게 들어 알았어도,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하는 지 까지는 그녀도 몰랐기에, 그 계획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각각 한 가지씩 임무를 맡긴 후, 레이가 기른 마수들 중에서 가장 순하고 빠른 비행형 마수 하나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일일히 마을과 도시마다 검문을 거치며 통과할 여유는 없었고, 대놓고 머리 위로 날아다니면 귀찮은 로얄 나이트들이 바로 따라붙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목적지까지 직선으로 향하기 보다는, 조금 휘어지는 곡선 코스로 날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변이 일어났다.
"....어?"
갑자기 어디선가 몰려드는 먹구름.
쿠르릉...!
그것도 보통 먹구름이 아니다. 품은 번개를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검고 거대한 뇌운. 그 구름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도 잔뜩 화가 난 사나운 짐승 같은 느낌을.
"...어, 어어? 아니, 씨발. 저거 뭐야? 왜 이쪽으로 오는데?"
나는 그 구름이 어딘가 불길하게 느껴져 일부러 경로를 조금 틀었으나, 먹구름은 내 움직임을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정도로 노골적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저 먹구름이 평범한 구름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노리고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우르릉, 쿠르르릉....!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천둥 소리를 터트리며 먹구름이 뒷편에서 사나운 기세로 따라 붙었다. 세상에, 내가 구름 따위에 겁을 먹는다고?
먹구름의 접근 속도는 내가 탄 비행형 마수보다 조금 빠른 정도였다. 그 탓에 나와 먹구름 사이의 거리는 접차 좁혀져 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따라잡힐 것 같았기에, 나는 뭔가 수단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양손으로 잡고 있던 마수와 연결된 고삐를 왼손으로만 잡은 채, 혼돈의 파편으로 만든 목걸이를 오른팔에 휘감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매섭게 쫓아오는 먹구름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파편을 단순히 몸에 지니고 마법을 쓰는 것과 직접 손에 쥐고 쓰는 것의 위력의 차이가 제법 크게 나는 편이다.
파편을 쥔 손으로 마법을 발사하면 가장 위력이 강하지만 나에게도 반동이 오기에,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왼손으로 파편을 잡아 마력을 끌어내고 오른손으로 발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손에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나는 급한대로 팔에 목걸이를 휘감은 채 마법을 준비했다. 이 방법이라면 파편을 쥔 채로 그 손으로 쏘는 것보단 반동이 덜 할체니까.
"꿰뚫어라." [피어스]
파직, 파지직! 우우우웅.... 지이이이이잉!
파편으로부터 끌어낸 마력이 검지 끝에 집중되어, 하나의 덩어리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한 줄기의 눈부신 광선이 되어 발사된다.
단순히 마력을 한 점에 집중해서 방출할 뿐인, 복잡한 술식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단순한 마법. 일반적인 마법사에게 이 술식으로 적을 무찌르라고 명령하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멱살을 잡힐 정도로, 단순하면서 그 효율은 처참하기 그지 없는 마법.
하지만 내게는 이걸로 충분하다. 단순하기에 사용하기 빠르고 쉬우며, 처참한 위력은 단순히 방대한 마력을 추가로 주입하여 메꿀 수 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기껏해야 나무에 손가락만한 구멍을 파낼 정도의 마법이지만, 마력의 제한이 없는 내가 사용하면 그냥 레일건이디.
그러나 먹구름은 내가 발사한 광선에 그대로 구멍이 나기는 커녕,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세가 더 흉흉해졌다. 그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이런 빌어먹을. 설마 그쪽 부류인가."
꼭 하나 씩은 있다. 위협적인 모습으로 상대가 공격하기를 유도하고 그것을 반사하거나 오히려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듣기만 해도 굉장히 골치 아픈 타입. 아무래도 나를 쫓는 이 먹구름도 그쪽 계통인 듯 싶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분명 저것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을 테지만, 그것을 역이용하여 쓰러트리기에는 불안 요소가 너무 많다. 굳이 내가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반드시 쓰러트릴 필요는 없다. 저쪽에게 내 힘이 통하지 않으면, 이쪽에 쓰면 되니까.
"옳지, 옳지. 아픈 거 아니야. 그렇지, 착한 아이구나."
나는 오른팔에 감은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파편의 마력을 뽑아, 고삐를 쥔 왼손을 통해 내가 탄 비행형 마수에게 그 마력을 흘려보냈다.
형태는, 고속 비행 특화형. 공격 능력은 필요 없고, 오로지 스피드에 올인이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로 하며, 탑승자를 확실하게 고정시켜 줄 형태.
머릿속으로 필요한 마수의 형태를 전부 그린 후, 불어넣은 마력을 통해 마수의 몸을 변화시켰다. 어둠에 잠식된 마수의 몸이 비행중에 조금씩 뒤틀리고, 성장하고, 퇴화하기를 반복하며, 끝내 변화가 완료되었다.
세 개 씩이나 되었던 꼬리는 불필요한 두 개를 없앰으로서 무게를 줄이며 꼬리의 끝의 형태를 갈라지게 변화하여 비행중 방향 전환을 쉽게 만든다.
악어처럼 길고 뭉특한 주둥아리는 날카롭게 깎은 연필처럼 다듬어져 바람을 더 잘 가르고 나아갈 수 있게 하고, 날개는 고속 비행을 위한 속날개와 내구성이 약한 속날개를 보호해줄 튼튼한 겉날개로 분리.
낙타의 혹처럼 등을 사람이 타기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며 그 외에 필요 없는 자잘한 부분을 전부 제거했다. 변이가 끝나자마자 비행 속도는 한층 빨라졌고, 이대로면 저 정체 모를 먹구름도 가볍게 따돌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귀를 찢었을 때, 나는 이미 온몸이 불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타고 있돈 마수와 함께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마수를 공격한다고 해도, 나는 [암흑화]를 상시발동 중이라 빛 속성이 아닌 공격은 내게 피해를 줄 수 없을 텐데...!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고...!
"이런... 씨발... 개같은..."
젠장... 점점 의식이...
*
신은 세상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신탁이라던가 대행자인 천사를 보낸다던가 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하에 허용되나, 신 본인이 그 세상에 직접 현현하여 임외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신의 힘은 지나치게 강하기에, 그리고 세상이한 것이 신이 한 번 개입한 것만으로도 부숴져 내릴 정도로 연약하기에, 그것은 신들끼리 창조물들을 위해 정한 일종의 배려였다.
그리고 이를 어긴 신에게는 일종의 패널티가 주어진다.
그럼 신이 규칙을 어겼는지, 어기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파악하느냐? 아주 간단하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합리적인가는 따져보면 된다.
신의 권능은 강하기에, 작고 연약한 세상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의 개입은 창조물들에게 그저 재앙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 과정과 결과, 원인이 일치하지 않는 일.
한 마디로 말해서... '불합리한 일'.
"....씨이이바아아알....."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앞이 흐릿하고 머릿속이 지잉지잉 울려서 속이 울렁거린다. 호흡이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숨이 턱턱 막히고, 피부는 공기가 닿은 것만으로도 살갗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아마 원래 있던 세상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졌겠지. 물론 그 세상에선 이런 말같지도 않은 일을 당할 리도 없을 테지만.
"후우, 후우...."
나는 지금 '라그나 아마게돈'이었던 덕에 살아 남았다. 완벽한 악역을 연기하기 위해 불필요한 감정을 모두 없앴다. 죄책감과 후회는 물론,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아프지만, 두려움은 없다. 몸뚱아리는 뜨거우나, 머릿속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이곳에 있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벌벌 떠는 한심한 잉여가 아니다. 약속한 대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침착하게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악역이다.
"하아, 하아, 하아..."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몸이 움직이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이대로는 죽기 일보 직전인 이 몸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마력을 모을 수 없다. 하다 못해 파편이 손에 있았다면 빠르게 마력을 뽑을 수 있을 테지만, 숨만 쉬는 것이 고작인 상황에서 목에 건 파편의 힘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는...
"...저기."
누군가 있다.
누군가가 지금 내 근처에 있다.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 나이는 아마 스물 남짓?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다. 그 안에 나를 향한 적의는 없는 듯하다.
마침내, 드디어 살 방법이 보였다. 그것이 면식이 없는 여인의 손에 달려 있긴 하지만.
"...목...걸이..."
"...네?"
"목걸...이를... 내... 손에..."
제기랄, 숨이 차서 더 이상은 말을 하기 힘들다. 하지만 다행히도 누군지 모를 여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금새 이해해주었다. 목 근처에서 조금 당겨지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힘없이 펼쳐진 오른쪽 손바닥에 익숙한 감각에 느껴졌다.
혼돈의 파편. 내가 가진 힘의 근원이자 내가 휘두르는 무기들의 바탕. 그래, 이것만 있다면 문제 없어.
여인은 내 손 위에 파편을 올려준 후, 부드러운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감싸 파편을 쥘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죽기 직전에 추억이 담긴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기를 원하는 줄 알고 그랬을 테지만, 그 행동이 결국 나를 살린 셈이다.
나는 파편을 쥔 손바닥의 모든 면으로 마력을 뽑아내어, 파편을 쥔 손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내 몸을 고쳐 나갔다. 1분 남짓한 시간이 흐르자, 간신히 시야의 반쪽이 돌아왔다. 이제 호흡도 문제 없다.
"...후우. 이제야 살겠군."
"꺄아아아악?!"
그리고 나를 도왔던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알만 하다. 내 손에 목걸이를 쥐어준 후, 내가 죽은 줄 알고 눈을 감고 추기도문 같은 것을 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내가 갑자기 눈을 뜨며 말을 하니 놀란 것이고.
몸의 상처를 전부 회복한 후에 몸을 일으킨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 생각보다 젊네? 목소리가 어른스럽고 성숙해서 20대 중후반은 되는 줄 알았다만, 의외로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소녀틱한 풋풋함이 가득한 미인이 내 앞에 있었다.
"도와줘서 고맙다. 네 도움이 없으면 진짜로 큰일날 뻔 했어."
"저, 저는 특별히 한 게 없는 데요...?"
"아니. 네가 이 목걸이를 내 손에 쥐어 주었기에 내가 다친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를 도운 은인이여, 혹시 너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비라. 저는 비라라고 해요."
비라인가. 꽤나 미인이네. 싱그럽고 풍성한 금발, 주근깨 하마 없는 하얗고 고운 피부, 그리고 딱 내 취향에 맞는 적당히 크게 부푼 가슴까지. 처음 본 여자지만, 나를 도왔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꽤나 호감이 가는 미인이다.
"그런데 혹시 당신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나? 나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공격 받고 죽을 뻔 한 그냥 흑마법사다."
나에 대한 온갖 오해와 소문은 엘헤임 왕국이 헤르몬 왕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기에 굳이 내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 이름을 밝혔다가 저 호의가 가득한 부드러운 눈이 적대심을 품으면 조금 슬플 것 같기도 하고.
"흑마법사요? 세상에, 그건 예전에 맥이 끊기지 않았나요?"
"뭐, 다들 그렇다더군. 나야 딱히 스승을 두지 않고 오래된 규서로 독학했지만."
"흐음... 흑마법사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아니, 오히려... 아니에요."
역시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은 어디에서든 바닥이다. 그래도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라고 밝히는 것보단 낫지만.
"어쨌든 고맙군, 비라. 이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다만,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없나?"
"...음. 보답말인가요?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그러니 나로선 꼭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네요. 그럼...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엘헤임 왕국의 수도로 가야 하는 데, 아무래도 여자 혼자서는 조금 힘든 점이 있어서요.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저와 동행해주실 수 있나요? ...혹시,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아니, 마침 나도 수도로 향하던 길이었다. 너와 동행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에헤헤..."
웃는 것조차도 호감형이다. 그니저나, 내가 타고 있던 마수는 어디로 갔지? 고개를 돌려보니, 내가 누워 있던 곳 근처에 검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아니, 자세히보니 내가 탔던 마수의 시체다.
어둠에 잠식된 상태에서 타죽은 탓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조금 색이 어두운 바위처럼 보인다. 뭐, 굳이 지금 치울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나는 비라의 부탁을 수락했다. 마침 나랑 목적지가 같은 데 굳이 따로 갈 이유는 없도, 함께 행동하는 쪽이 더 안전할테니까.
물론 그녀만 아니라 나도.
나를 쫓던 먹구름, 마지막에 들린 굉음, 온몸이 불타는 고통,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몸의 감각, 그이고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검게 탄 마수의 시체...
이제야 내가 무엇에 당했는지 알겠다. 그럼 범인은 누굴까?
루미너스 여신? 아마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내게 위험을 경고했다. 내가 공격 받은 것은 그녀와 연결이 끊긴 후였고. 그러니 루미너스는 내 편이며, 나를 공격한 것은 그녀와 적대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언젠가 당할 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진짜로 당하니 기분이 제법 더럽다. 절로 화가 치밀어오르는 이 불합리함이다.
내가 당한 공격은 분명 벼락이다. 그리고 그 때 하늘에서 벼락을 토해낼 만한 먹구름은 나를 쫓아오던 그 기분 나쁜 구름 하나 뿐이었지.
문제는 그 구름이 분명 나랑 같은 높이에서, 그것도 내 뒤쪽에 있었고 나는 그 먹구름에서 쏟아진 벼락에 맞고 죽을 뻔한 것이다.
게다가 빛 속성이 아닌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을 터인 나를 죽기 직전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은, 나를 공격한 범인이 이 세상의 규칙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위치상 당할 리 없는 공격, 설령 닿더라도 본래라면 입을 리 없었던 피해. 이게 씨발 말이 되냐? 근데 그걸 말이 되게 할 수 있는 놈이 있네? 이게 뭔 소리냐고? 뭐긴 뭐야...
"...후우."
도대체어떤 빌어처먹을 개같은 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씨발 나름 신이라는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소리지.
그것도 자신이 관리하는 영역도 아닌 세상에 나타나서, 개인적으로 세상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도 어겨가면서 나를 죽이려는 신이라니.
진짜 최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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