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벚꽃이네? 벚꽃이여?(2)
* * *
비라는 아무래도 엘헤임 왕국의 수도인 엘 하르다까지 도보로 걸어갈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몇 주가 걸릴 줄 알고...
답답하긴. 나는 근처 도시에서 망가진 아티팩트들을 급처했다. 나는 아티팩트들을 평범한 장신구로 위장하기 위해 보석 몇 개를 박아 뒀었고, 비록 그 이상한 번개에 맞아서 마법식이 죄다 손상됬지만 아티팩트 자체는 겉으로 보기엔 새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뭐? 3000 골드? 지금 나랑 장난쳐?"
"크흠. 그렇게 말하셔도 말이죠, 아무래도 엘로드 상회에서 보증한 물건이 아니라면, 음, 별로 신용이 가지 않으니까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 물건이 진짜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정겨하게 꾸며낸 위조품인지. 그래도 저니까 이 정도를 낼 의사가 있는 거지, 다른 곳이라면 받아주지도 않을 겁니다."
말로는 곤란하다는 식으로 하고 있지만, 얼굴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 씨발 새끼는 나를 아주 호구로 보고 봉을 뽑으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뭐? 마법으로 만든 위조품? 보석상 하는 놈이 금 반지 팔러 온 손님의 금이 탐나서 '이거 도금된 물건일 지도 모르니 제시가의 30%만 내겠습니다.'라고 씨부리는 거랑 뭐가 달라? 씨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돈만 밝히니까 그따구로 머리가 벗겨지는 거지.
그리고, 엘로드 상회? 저번에 나랑 거래 중에 사기치다 걸려서 상회주하는 놈이 나한테 손모가지 날아갔던 그곳? 그딴 병신 같은 곳의 물건만 받는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 대머리가 얼마나 형편 없는 상인인지 알 수 있었다.
물건 보는 눈이 없으니, 내가 내놓은 물건이 비싼 줄은 알아도 정확히 얼만지 모르겠으니 일단 이것저것 트집 잡아서 헐 값에 살 생각이겠지. 게다가 내가 외국에서 온 수행원도 하나 없는 거지같은 꼴의 귀족이니 돈이 급해서 주는 대로 받을 거라 생각하고 말이야.
안 그래도 씨발 어떤 개같은 신놈이 방해해서 죽을 뻔한 것 때문에 짜증나는 데, 이딴 버러지 같은 놈이 나를 얕봐? 산 채로포를 떠야...
"저, 저기... 잠깐만 진정하세요."
나는 이 망할 대머리 상인놈의 머리를 달걀 깨트리듯 박살낼까 고민하다, 내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화를 누그려트렸다.
"...후. 비라, 아무래도 내가 조금 추한 꼴을 보일 것 같은 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어?"
"네? 하지만..."
"걱정마. 최대한 자제할 테니까."
"..."
비라 양이 마지못해 밖으로 나서자마자, 나는 목에 건 혼돈의 파편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어 마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마력으로 가장 먼저 한 것은 이 상점 안에 작은 결계를 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으며 방음이 되게 만들었다.
"호오, 그 목걸이는 제법 값이 나가 보이네요. 그것까지 판다면 특별히 500 골드는 더 얹어드릴 수도 있..."
콰직.
대머리 상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 했다. 벽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그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붙잡아, 그대로 책상에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으, 으윽...! 이, 이게 무슨..."
[야.]
쿠웅!
그리고 나는 고작 한 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너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뜯어먹으려고 구는 꼴이 참 좇같단 말이지. 하마터면 동행인 앞에서 험한 말이 나올 뻔 했잖아.]
"으, 으윽...!"
대머리 상인은 내가 뿜어내는 탁한 마력에 짓눌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쿠웅! 콰직!
"으, 으으윽...!"
[뭘 꼬라봐?]
쿵! 쿠웅! 쾅!
"그, 그만..."
[하, 눈깔 똑바로 안 뜨지? 어디, 네가 주제 파악을 하는 것과 네 맨들맨들한 머리통이 깨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빠를지 한 번 확인해 볼까?]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멍청한 제가 감히 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부디 목숨만은...!"
바닥을 길거면 알아서 길 것이지, 굳이 직접 손을 쓰게 만들기는. 내가 검은 손을 해제하자 대머리 상인은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바닥에 주저 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흐음. 이대로 너를 살려두면 분명 경비대에 신고하겠지. 그럼 귀찮아지니 그냥 너를 죽여버리고 금고에서 필요한 만큼 돈을 꺼내가는 쪽이 편하겠지.]
"히, 히이이이익...!"
[하지만...]
따악. 나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풀었다. 결계를 해제하고, 대머리의 이마에 난 상처를 회복시킨 나는 이제는 익숙한 '무시무시한 악당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죄 없는 내 동행인이 골치 아픈 일에 처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특별히 한 번만 기회를 줄 수도 있어. 난 내가 내놓은 보석에 걸맞는 돈만 받고 떠날까 생각중인데, 네 생각은 어때?"
"무,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돈을 준비하겠습니다!"
대머리 상인은 그렇게 말하며 상점 안 쪽의 공간으로 뛰어갔다.
물론 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안 쪽에 비치된 마법 수정구로 경비대에 신고를 하려 했기에, 나는 목덜미를 붙잡힌 채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얼간이의 목을 가볍게 몸에서 분리시킨 후 그의 금고에서 열어 여비를 챙겼다.
난 분명 살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걸 내다 버린 건 그 자신이다. 그냥 얌전히 돈만 제대로 줬다면 비싼 보석과 함께 제 목도 보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미 내 기대를 저버린 사람에게 굳이 두 번째 기회를 줄 필요는 없지. 팔려고 꺼냈던 아티팩트도 다시 챙긴 나는 가게를 나오며 '영업중'이라 적힌 팻말을 뒤집어 '자리 비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가게를 나오니 역시나, 골치 아픈 상황이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봐, 아가씨. 혼자야? 어때, 우리랑 잠시 놀지 않을래?"
"죄송하지만, 일행이 있어서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할게요."
"크큭. 너무 그러지말고, 잠깐만 시간 좀 내달라고, 응?"
비라의 외모는 싱그럽고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이었고, 예쁜 꽃 주변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 나는 한숨을 쉬며 비라에게 걸어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거친 용병들로부터 보호했다.
"잠시 실례하지. 혹시 내 일행에게 용무라도 있나?"
"음? 뭐야, 이 비리비리하고 음침한 놈은?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 비켜. 우리 상대는 거기 있는 이쁘장한 아가씨라고."
용병은 우왁스러운 손길로 내 멱살을 붙잡았다. 그 행동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뭐, 내가 누군지 모르니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이헝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손으로 잡으면 내 옷이 더러워지잖아. 이 옷, 내가 꽤 아끼는 거라고.
[적당히 해라.]
"으으윽...?!"
아까 가게 주인을 족치기 위해 뽑았던 마력 중에서 남은 것을 조금 손에 두른 채, 용병의 손을 세게 움켜 쥐었다. 그러자 용병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붙잡힌 팔을 빼내려 낑낑거렸지만, 나는 그의 손목을 놔주기는 커녕 더욱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친절하게 말을 하면 좀 듣는 것이 어떠냐? 아니면... 팔 하나 즈음은 못 쓰게 되어야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것이냐?]
"이, 이거 놔....!"
[그건 반말이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는, 정중하게 말을 해야겠지?]
꽈아아아아악!
"으으윽...! 제, 제가 잘 못 했습니다! 부, 부디 이 손을 놔주십시오...!"
"진즉에 그럴 것이지."
"크읏...!"
툭. 내가 손을 놔주자, 용병은 잡혔던 부위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나와 비라를 둘러싼 용병들이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공격하는 순간 바로 마법으로 제압할 준비를 했지만, 용병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물러날 녀석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마을을 나서고 추격해 올 수도 있으니... 나는 남아있는 잔여 마력을 써서, 용병 중 한 명에게 어둠을 조금 심었다. 이 정도면 문제 없겠지.
"다친 곳은 없나?"
"네, 덕분에요. 함께 동행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흑마법사는 다 그렇게 강한가요?"
"음, 아닐걸? 다른 흑마법사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냥 내가 좀 특이한 편일 거야. 자, 돈도 충분히 마련했으니 얼른 마차를 빙려서 이 마을을 뜨자고. 저 놈들이 혹시 다른 녀석들을 모아서 보복하러 올 수도 있으니."
"네, 그게 좋겠네요."
그나저나, 이 도시는 치안이 그리 좋지 않군. 대낮에 험악한 남정네가 외지에서 온 여자에게 당당하게 치근거릴 정도라니. 바이올렌스가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위해 치안 유지에 써야 할 병력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 체감되었다.
미친 짓이지. 설정상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이 세상에 한해서 최강의 존재인 전 용사를 되살려내, 그것을 지배하여 자신의 장기말로 쓰겠다?
바이올렌스는 그딴 헛소리에 넘어갈 인물이 아니다. 최근에 일어난 수인 사냥이 한 귀족의 뇌피셜 때문에 일어났다는 소식은 전부 그녀가 꾸며낸 것.
사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은 근처에서 세력을 점차 키우는 수인 부족이 나중에 도적단이 되어 왕국을 약탈할 지 모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본보기로 가꺼운 부족 하나를 숙청한 것 뿐이다. 그리고 처형당했다던 귀족은 사실 그녀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녀석이었을 것이고. 수인에게 시민권을 준 것? 실수에 대한 사과를 빌미로, 그들을 자신의 지배 영역에 넣으려던 것이지.
그녀가 저지르는 행동들은 하나같이 충동적이고 섣부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마저도 모두 그녀가 의도한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힘은 있지만 아직 능력은 부족한 여자애'처럼 보이도록 연기함으로서 자신의 적과 아군을 쉽게 구분하고 자신의 행동에 철없는 폭군의 변덕이라는 변명을 부여할 뿐.
그래서 이번 소문도 그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인 모양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을 가능케 하는 존재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는 모양이니까.
하필이면 내가 혼자인 데다가 그녀가 있을 수도로 향하는 중에 공격받았다는 것을 보면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봉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녀가 전 용사를 지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나를 공격한 신이 뒤에서 조종한 결과일지도 모르지.
그래, 그 신이 문제다. 분명 이 세상은 루미너스 여신이 만든 곳이고, 연극이 시작된 이상 창조주인 그녀조차도 함부로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나타나서 중요한 배우 중 하나인 나를 죽이려고 들었다?
루미너스 여신이 연결이 끊기기 전에 내게 경고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신은 아마 루미너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존재겠지. 나를 죽이려 하고, 바이올렌스에게 전 용사를 되살려 꼭두각시로 삼도록 유도한 이유는 그녀의 연극을 망치기 위함이고.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아? 이 연극의 성공 유무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진다고. 게다가 난 루미너스 여신과 약속했다. 악역 배우이자 내부 조정자로서, 이 연극이 무사히 끝나도록 도울 것이라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 나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적인 존재를 배제할 방법을 궁리하며 비라와 함께 수도로 향햐는 마차에 올랐다.
*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숲 한 가운데에서 온몸이 새카맣게 바싹 탄 채로 끄러져 있었다. 살갗이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검게 타버린 모습은 참으로 참혹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그 상태로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손에 쥐어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그가 목에 건 목걸이가 풍기는 가운은 불길하기 그지 없었으나, 그래도 죽음을 앞둔 이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순 없었다.
그녀는 그의 요구대로 그의 손에 목걸이를 쥐어주고, 추도문을 읊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모습이 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영혼이 부디 생전의 죄를 용서받고 낙원으로 향하기를 기도하던 찰나.
그가 깨어났다. 분명 죽었을 터인 남자의 목소리에 비라는 화들짝 놀라 넘어졌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새카맣게 탄 그의 몸이, 오래 전 전설 속 용사의 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던 선택받은 성녀가 아닌 이상에야 결코 치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그의 육체가, 순식간에 낫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이다. 하지만... 진짜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의 피부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 곳곳에 새겨진 문신처럼 보이는 무언가. 그것은 분명 마법 회로였다.
양 손에는 각각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의, 가슴팍에는 온갖 종류의 회복 마법의 마법식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몸에 마력 회로를 새기면 마력을 활성화시키는 순간 영창도 마법진도 필요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그 편이성의 대가로 터무니 없이 처참한 마력 효율을 보이는 탓에 이젠 거의 버려진 방식이었을 텐데...
남자의 몸이 회복되는 것은 아마 몸에 새긴 저 마법식을 발동시킨 영향이다. 하지만... 저 마법식으로 저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필요한 마력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왕국 하나는 통채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쓸 수도 있을 마력이, 지금 고작 사람 한 명을 치료하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력의 공급처는 아마도 저 목걸이. 그녀가 손에 직접 쥐어 주었던 그 불길한 물건이리라.
이 남자는 대체 누굴까? 그리고 저 목걸이는 무엇일까?
우연에 의한 만남, 그리고 세상의 모든 만남은 필연이라지. 비라는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 앞애서 보란듯이 돌아와 태연하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이 특이한 남자가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되었는지도.
같이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아니, 아니다. 괜히 섣불리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벌써 설렐 필요 없다. 확실한지 아닌지는, 서서히 알아가면 그만이다. 마침 혼자 여행하는 것은 조금 불안했으니. 게다가 마침 목적지도 같았겠다, 비라는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불편하기 그지 없는 마차 안에서 편히 잠든 그를 비라는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덜컹덜컹.
두 사람이 대여한 마차는 그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물건이었으나, 그럼에도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에 비하면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딱딱한 바닥은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를 때려 도저히 잠이 들 상황은 아니었지만, 비라의 맞은 편에 앉은 동행인은 이런 불편한 공간에서도 잘만 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어디 부유한 가문의 자제 같은데, 생각보다 주변 환경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라는, 잠든 그를 천천히 살피다가 문득 어딘가에 시선이 꽂혔다.
"....으음?"
두 다리 사이, 이상하리만큼 크게 부풀어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무언가에 비라는 잠시 혼란이 왔다.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비라는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눈동자를 움직여 그곳을 흘겨보았다.
비라는 남자와 여자의 몸의 차이도 모를 정도로 성에 무구한 처녀가 아니었고, 남자가 자는 중에 성기가 저렇게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남자의 생식기라는 것이 저렇게나 컷던가?
그녀가 책으로 배운 남자의 물건과 비교하면 그의 것은 옷에 가려져 있음에도 족히 두 배는 넘은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비라라고 해서 성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참,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지만, 솔직히 이상할 것 없다. 그의 얼굴은 나름 미형이고, 그녀의 미적 취향에 가까운 편이라 좋냐 싫냐를 따져보면 좋은 쪽이었다.
거기다가 험악한 남자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 자신을 지켜기 위해 그들을 가볍게 쫓아내는 모습까지. 솔직히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꽤나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후훗."
게다가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은 꽤 보는 맛이 있었다. 평소의 그는, 뭐랄까,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본 모습을 휜 가면으로 가린 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연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렇기에 지금처럼 무방비하게 잠든 그의 얼굴은 가면 안쪽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 비라는 그의 잠든 얼굴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