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그게 뭔데 10duck bird꺄!!(7)
* * *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의 대규모 결계인 '방황하는 안개'의 입구, 도저히 안 쪽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그 짙은 안개 앞에서 용사 루크와 동료들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연기의 마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저 안개는 그 자체로 마녀의 마법이자 의지다. 그러니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기에 루크와 동료들은 각오를 다지며 저마다 서로를 잇는 밧줄을 꽉 붙잡았다.
그렇다. 지금 루크와 동료들은 긴 밧줄로 서로의 몸을 연결한 상태였다.
밧줄이라고 해도 잡화점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것이 아닌, 특별한 마법 가공을 거친 이 마법 밧줄은 제 아무리 저 안개 속이라 해도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 마법 가공을 담당했던 '연기의 마녀'가 자부했다.
"특별한 마법 가공?"
"그래. 닥터 알레이스타의 마법 이론을 참고하여, 자이언트 타란튤라의 실과 오크의 핏줄을, 마기노크래프트 공식에 근거해 4:6 비율로 엮은 후 아크레이들 공식에 따라...."
"그게 뭔데 씹..."
"무식한 걸 알아서 티를 내주는 구나. 이 정도면 7위계 마법사에겐 기초 중의 기초이거늘... 아, 그렇지. 5위계에도 도달 못한 허접 마법사는 모르겠구나?"
"...그래서 그 잘난 마법 밧줄을 왜 여태 안 써먹고 있었는데?"
'안개의 마녀'는 빈정거리는 비올라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내뿜으며 킬킬거렸다.
"밧줄이 멀쩡하면 뭐 하냐? 그 밧줄을 매단 놈들 목이 먼저 멀쩡하지 않게 됐는데?"
"콜록, 콜록! 아이 씨, 진짜 언젠가 죽여버릴 거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던가? 한... 100년 뒤에? 킥킥킥!"
도저히 머리가 좋기로 유명한 마법사들 간에 주고 받는 대화라기에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유치찬란한 내용에, 루크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를 거대한 결계 마법을 앞에 두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루크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정황상 '안개의 마녀'는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쪽의 사람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자신과 동료들을 해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는 상황이니, 그쪽의 인간인 '안개의 마녀'가 자신들의 목숨을 빼앗을 리가 없다.
비록 확실한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이윽고 루크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이런 생각은 좋지 않다. 동료들이 모두 자신을 믿고 있고 나서준 상황에서,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애들아, 모두 준비 됐어?"
"응, 준비 다 됐어."
"이 망할 밧줄이 진짜로 괜찮다면야, 뭐... 문제 없겠지?"
선봉에는 가장 튼튼한 고든을 두고, 귀가 밝은 호크나와 상황 대처 능력이 유연한 루크가 엘리아와 비올라를 지키는 진영을 갖춘 채, 용사 이일행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으로 발을 옮겼다.
*
현재 루크 일행의 진형 및 밧줄 방향
고든 →↓
호크나 루크
↑ ↓
엘리아 ← 비올라
*
"....생각보다 심각하네."
'안개의 마녀'가 펼친 광범위 결계 마법. '방황하는 안개'.
그녀가 거주하는 '안개의 저택'을 중심축으로, 수도 엘 하르다의 서부 전체가 그 안개에 집어삼켜진 상태다.
밖에서 조차 안쪽을 볼 수 없는 안개였지만, 내부의 상태는 상상 이상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정말로 다섯 걸음 앞까지. 그 이상은 안개에 가려져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
루크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으며 호크나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이 안에서는 엘프인 나와 인간인 너의 시야에 큰 차이가 없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퍼억!
말을 하던 도중 호크나는 느닷없이 등에 매고 있던 활을 들어 바로 옆 안개를 후려쳤다. 그러자 "으억!" 하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누군가가 안개를 헤치며 고꾸라졌다.
"...이렇게 청각은 멀쩡해서, 누가 접근해도 금방 눈치챌 수 있다는 거지."
"이 사람은...?"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녀석은 아니야. 의도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감추고 접근했으니까. 이 짙은 안개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핑, 핑, 쐐애애액!
"크아악!"
"으윽, 으으으...!"
호크나는 또 다시 말을 중간에 끊으며 보이지 않는 안개 속 너머를 향해 화살 두 발을 연달아 발사했고, 곧이어 두 명의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돌아왔다.
"근처에 있던 녀석들은 이걸로 끝. 총 세 명이고, 전부 무기를 들고 있고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이 안개가 펼쳐진 지 일주일 정도가 다 되어간다고 했지. 그리고 그녀의 허가가 없다면 안개 속에서 나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했으니..."
"어쩌다 운 나쁘게 안개 속에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하게 되니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습격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하지만 생존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때에 한탕 해보겠다고 금품을 노리는 놈들도 있을 테지. 이 녀석들처럼 말이야."
호크나는 기절시킨 사람의 품에서 찾아낸 피에 젖은 돈과 금 반지 등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작 일주일.그들이 이 안개에 갇힌 것은 길어봐야 일주일에 불과하다.
허나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마법의 안개 속에서 보내는 일주일은, 사람을 때려본 적도 없는 선량한 시민들을 거리낌 없이 남의 금품을 노리는 도적으로 만들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처벌받아 마땅한 죄를 저질러도 누군가 그것을 책망할 수 없는 이 미지의 공간에서, 그들은 법률과 도덕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욕망을 드러냈다.
....욕망이라. 호크나는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옅게 몸을 떨었다. 수도 엘 하르다에 도착하기 전, 마수 조련사 레이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그나 아마게돈의 목소리.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 막아도 들리며, 듣는 사람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그 불길한 속삭임.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안개는 그의 목소리와 닮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안개를 펼쳤다던 '안개의 마녀'는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니까.
라그나 아마게돈은 레이보다 먼저 수도를 향해 출발했었으니, 지금 즈음이면 이미 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하인 마수 조련사가 이 안개 속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그도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호크나는 다리 사리가 저려오는 자신의 몸에 환멸감이 느껴지면서도,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에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그나마 안개가 짙어서 망정이지, 만일 동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어?"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호크나는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리 춤으로 손을 뻗자, 잡히는 것은 중간에 끊어진 밧줄이었다.
밧줄이... 안개 속에서 흩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허리에 묶어 연결했던 밧줄이 어느샌가 잘려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는 한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온 습격자들도 찾아내는 청력이 있음에도 누군가의 접근은 확인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나치리만큼 깔끔한 밧줄의 절단면을 보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밧줄은 그 '연기의 마녀'라는 여자가 특별한 가공을 거친 물건일 텐데,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 분명 이 안개에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다.
호크나는 금세 혼란을 회복했다. 동료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혼자가 아니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제발, 혼자 떨어진 사람이 자신 뿐이기를...
혼자서 싸우는 것은 익숙하니 괜찮다. 하지만... 동료들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두 번 다시 지난 일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두 번 다시 그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바라는 게 뭐지?]
듣고 싶지 않은 비명 소리가 들린다. 나를 원망하고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이 서린 저주가 귓가에 맴돈다.
[네가 바라는 게 뭐지?]
이제 더는 싫어. 더 이상은...
[네가 바라는 게 뭐지?]
내가 바라는 것, 그건...
....듣고 싶지 않아.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원망하며 저주하고....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부담감을 심어주는 기대도, 나를 책망하고 질책하는 말도,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거짓말도, 뒤에서 몰래 수근거리는 뒷담화도....
이제는.... 다 지긋지긋해.
나라고 이러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 뿐이야.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어. 그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큰 바램이었을까?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었을까?
그런 내 앞에, 그가 나타났다.
다른 어떤 목적 없이, 그저 순수하게 나 자체를 바라는 그 사람이.
비록 적이지만, 멋대로 기대하다 실망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요구하며, 나의 의견을 들어줬던 그 남자가.
[네가 바라는 게 뭐지?]
이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그저 그의 품에 안겨,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달콤한 속삭임만 들으며 눈을 감고 싶어.
눈앞의 안개가 변한다. 안개는 이윽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의 모습이 된 안개가 나를 향해 말했다.
"너의 바램, 내가 이루어주지."
호크나는 그 따스한 품에 자신의 몸을 맡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욕망.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다.
공포가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브레이크라면, 욕망은 인간이 멈춰서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엑셀인 셈이다.
인간의 선택이란 곧 욕망과 공포, 둘 중 어느 쪽이 큰 것인가에 따른 결과.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도 성공했을 때의 결과를 원하기에 도박에 가까운 모험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 발길을 돌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고른다. 양자택일이란 그런 것이다.
만일 자신은 욕망이 아닌 정의와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용감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기사도 넘치는 사람에게 박수를 쳐준 후에 실컷 비웃어줄 것이다.
정의? 신념? 그것을 따른다는 것도, 그 내면을 파고 들면 그 '정의'와 '신념'을 어기지 않고 지키고 싶다는 '욕망'이 밑에 깔려 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즉,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것 또한 넓게 보면 하나의 욕망이지.
지키고 싶지 않아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해야 한다고? 그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에서 '옳지 않다'고 규정한 행동을 함으로서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욕망'이겠지.
무논리에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사실 전부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 논리에 오류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뭐...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이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이라는 지성체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욕망을 품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지.
아무리 위험한 취향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누구에게 밝히거나 강요함으로서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살인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인간이 있다고 한들, 만일 그 사람이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 위험한 욕망을 이겨내고 평범하게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죄가 없지 않은가?
그래. 욕망은 나쁘지 않아.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나쁘지 않아.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니까 호크나, 너는 나쁘지 않다."
나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호크나를 품에 끌어 안은 채, 그녀의 뾰족한 귓가에 속삭였다.
"욕심, 욕망, 욕구, 탐욕, 바램, 소망, 희망, 꿈, 목표.... 모두 같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마. 네가 바라는 것을 거짓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
나는 멍하니 내 품에 안겨 있는 호크나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용사 루크의 동료들 중에서 가장 오랜 삶을 살며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했고, 그 덕에 순수한 전투 능력만 따지고 보면 용사보다도 더 강한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가녀린 한 명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 날의 경험, 그리고 한 번의 유혹과 거절. 설마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이토록 흔들리고 약해져 있을 줄이야. 이 정도면 티가 날 법도 한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용사 일행의 둔감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니면 호크나가 그들이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잘 숨기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호크나 헌트레스. 바깥 세상과 모험을 동경하여 제 발로 숲을 나온 엘프.
하지만 처음 만난 동료라는 작자들은 그녀를 속여, 으슥한 곳에서 덮쳐 물건과 첫 경험을 빼앗았지.
두 번째로 만난 동료라던 놈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신뢰를 배신했지.
세 번째 동료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 그녀를 버렸고, 네 번째 동료들은 그녀가 엘프라는 이유로 과도한 환상을 품고 무리한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해 놓고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며 떠나갔지.
먼저 다가와서,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저주를 퍼붓으며 떠난다. 인간인 내가 봐도 좇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호크나가 만났던 동료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인간 말종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동료를 잃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루크 일행과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인간들 때문이지.
처음으로 그 어떤 다른 꿍꿍이 없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온 동료들. 그 탓에 그녀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을 주었던 동료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이 그녀의 여린 마음을 짓밟았지. 그렇게 완전히 마음을 닫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그랬던 호크나를 루크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용케 동료로 영입했지만, 그는 그녀의 동료가 되었을 지언정 구원자가 되어주지는 못 했다. 만일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악몽을 극복했다면, 고든이 사라졌을 때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줬을 리가 없을 것이고, 나와 몸을 섞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 그리고 그 날 밤의 경험이, 그녀를 무너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자, 호크나. 너의 입으로 직접 말해 봐라. 네가 바라는 건 뭐지?]
"...내가, 바라는 것..."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롱한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그 안을 채워나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은밀하고 더러운 욕망.
"...안아줘."
공허한 눈동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리고 망가진 듯한 미소.
"기대 하고, 실망 하고, 기대 받고, 실망 시키고, 이제는... 나도 지쳤어. 바깥 세상도, 모험도, 이제 전부 지긋지긋해. 나를 안아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나를 꼭 안아줘."
용사는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결국 구원하지 못 했다.
나는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에 나는, 그녀에게 도피처를 제공할 뿐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와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그녀가 바라 마지 않는 안식처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