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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49화 (49/229)

〈 49화 〉 야, 깐프... 넣을게. (2)

* * *

눈부신 빛의 기둥이 짙은 안개를 뚫으며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고, 빛의 기둥은 곧 따스하고 포근한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빛이 닿는 곳에 있던 마녀의 검은 안개는 마치 더러운 얼룩이 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지고, 엘 하르다의 서쪽 거리에 다시금 밝은 태양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적의 빛.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두려움을 심어주고, 마음 속에 품은 불길한 욕망을 이끌어 내는 저주 받은 안개를 몰아내는, 여신의 기적.

안개 속에서 언제 어떻게 공격 받을지 몰라 집의 문과 창문을 걸어 닫고 두려움에 떨던 시민들은, 곧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빛에 이끌려, 하나 둘 씩 문의 잠금을 풀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어둠을 걷어내는 눈부신 빛을 보았다.

그 빛의 눈부심과 따스함이,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던 불안과 공포를 떨쳐내며 다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신앙이란, 믿는 힘.

한 치의 의심 없이, 그저 순수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힘이야말로 신앙심의 근원.

그리고 지금, 엘하임 왕국의 수도 엘 하르다에는 깨끗한 신앙심을 가진 수많은 신도가 생겨나고 있었다.

*

전혀 예기치 못한 용사의 활약은 수많은 임시 신도를 만들어 내었고, 그들의 힘은 곧 루미너스 여신에게로 흘러 들어왔다. 신앙심이란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며, 곧 신을 신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힘. 그리고 신이 가진 힘의 근원.

물론 도시 하나 규모의 신도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힘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며칠 전 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방해하는 세력이 알 수 없도록, 지금으로서 유일하게 자신의 아군이라 신뢰할 수 있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세지를 신탁으로 내리느라 많은 힘을 소모했던 그녀에게 이 일은 힘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루미너스 여신은 용사가 이뤄낸 결과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평소에는 꼭 한 마디를 더 붙이긴 하지만 결국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그 남자와 달리, 자신을 존중하지만 결코 자신의 의도대로는 움직여주지 않는 그 답답한 용사가 어쩐 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감사를 하기에는, 그동안 그녀를 속 썩인 일이 한 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네요. 제가 내린 신탁을 그 남자가 무사히 회수했고, 용사도 그의 도움으로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루미너스는 얼굴이 어두웠다. 처음엔 이 연극이 자신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그저 자신의 역량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명확한 증거가 나온 이상 범인을 색출할 수 밖에 없다. 이미 후보가 몇 명 있기야 하지만 그들이 벌인 짓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고, 또 그들이 자신의 세계에 무슨 뒷공작을 벌여 놨을 지 알 수 없다. 물론 그녀의 힘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탐색하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공간 정도는 쉽게 찾아낼 수야 있지만, 안타깝게도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이 그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돌릴 시점이면,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도망치겠지.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들이 벌인 짓에 대한 물증을 확보하는 것보다는, 이 연극을 무사히 끝내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겠지만... 그 남자에게 둘 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사인을 보냈으니, 루미너스는 그가 자신의 의도를 요령껏 파악하고 잘 행동해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었다.

*

가히 기적에 가까운 빛의 힘이 안개를 몰아내며, 미스트리나의 저택도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맨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저택의 응접실에 있던 루크는 하늘을 겨누며 들고 있던 성검을 든 팔을 내리며, 자신을 노렸던 적을 살폈다.

"으, 그흐으...!"

"자, 잠깐? 당신, 괜찮아요?!"

뜻밖에도, 그 수인 여성은 지금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안개 속에서 자신을 공격하던 여인이 살이 익어가는 고통에 발버둥치는 모습은 루크로서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더욱 황당한 점은 그녀를 그런 상태로 만든 것이 바로 루크 본인이었다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내뿜은 눈부신 빛. 빛의 힘은 기본적으로 어둠을 품지 않은 존재에게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지만, 그녀는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가진 어둠의 힘을 받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높은 물리력 내성으로 어지간한 공격에도 멀쩡했을 그녀의 몸은 하필이면 그 힘에 가장 극상성인 빛의 힘을, 그것도 루크가 한계까지 발휘한 최대 출력의 신성력을 바로 정면에서 받아낸 영향으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녀의 몸을 지켜주던, 검붉은 색이 감돌던 푸른 털은 이미 강렬한 빛의 열기에 모조리 불타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피부는 붉게 물든 정도를 넘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의료 지식이 전무한 루크의 눈에도, 그것은 도저히 치료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피부 자체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어, 사실상 두 팔을 절단하는 것 밖에 답이 없을 정도로 그녀의 상황은 심각했다. 온몸을 불태우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두렵다는 듯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에, 루크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아, 아파... 아파...."

내가... 저렇게 만든 건가? 저 끔찍한 상처가, 정말로 내가 낸 것이라고?

"흐윽, 흑... 아파, 아프다고오오...."

난....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그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이 안개를 걷어낼 생각 뿐이었는데. 난 그저 이 안개를 없애려고 했던 거지, 이렇게 사람 하나를 불태울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살려... 줘.... 너무 아파.... 아파아아...."

게다가 그녀는 무작정 죽여야 하는 적으로 볼 수도 없어. 어둠에 물든 마수들이야 처리하는 것 외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지만, 그녀는 달라. 나를 대화가 가능했고, 나와 싸우는 것을 그리 바라지 않았으며, 그 남자에게 고통 받은 피해자였던 사람.

"살려... 주세요... 주인... 님..."

나는, 그런 사람을 저 꼴로 만든 것이다.

도저히 나을 수 없을 상처. 설령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고는 한들, 저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면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강인한 육체가 가장 큰 장점인 수인에게서, 그 장점을 빼앗은 것이다.

선한 의도로 행한 행동, 그러나 의도치 않게 나온 결과와 피해자,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해지며, 털어낼 수 없는 죄책감이 목을 죄여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살이 타들어가는 아픔에 몸을 움찔할 때마다, 루크는 속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런."

....그의 목소리다.

고개를 들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그나 아마게돈, 내가 쓰러트려야 하는 적. 그러나 루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끌어낸 그는, 그리고 자신이 의도치 않게 저지른 실수로 고통받는 피해자를 앞둔 그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 짓을 벌여주셨군."

"주인, 주인님.... 아파, 아파요... 저, 저 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주인님, 제발... 제발 살려주세... 요...."

"자자, 진정하렴.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안심해."

아마게돈 남작의 손에 불길한 검은 힘이 모여들었고, 그 힘을 느낀 루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빛의 힘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그에게 있어서, 아마게돈 남작이 다루는 어둠의 힘은 너무나도 꺼림칙한 것이었다. 아마게돈 남작은 어둠에 휩싸인 손으로 수인 여성의 몸에 난 상처를 쓸어 내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그녀의 몸에 흡수되며, 도저히 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처들이 서서히 수복되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감기라도 하듯, 검게 타들어간 피부색이 서서히 원래 색을 되찾으며 그 위로 수인 특유의 풍성한 털이 한 가닥 씩 다시 자라는 모습은, 루크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 인니임..."

"자, 이제 괜찮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모두 끝나 있을 거다."

자신이 쓰러트려야 하는 적이, 너무나도 불길한 힘으로, 자신의 실수로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하는 모습에, 루크는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정의를 논하는 주제에 피해자를 만들었고, 내가 악이라 규정한 자는 나로 인해 생겨난 피해자를 치료했다.

이래서야.... 누가 악당이고 누가 정의인거지?

그의 품에서, 편안한 얼굴로 잠드는 그녀의 모습에, 루크는 울컥했다. 죄책감이, 자괴감이, 회의감이 그를 용사라는 직책에서 평범한 인간 남자, 아니, 그 이하로 끌어내리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용사 루크. 너는 아무래도 여러 의미로 내 예상을 벗어난 존재인 모양이다. 내 기대에 못 미치는 듯 싶다가도, 내 예상을 벗어나는 너의 모습은 참으로 종잡기 어려워. 그러니 더 이상 멀리서 관찰하고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무슨, 말을..."

그는 수인 여성을 안아든 채, 그가 서 있던 응접실을 나서며 말했다.

"이 저택의 3층, 그곳에 조금 화려한 장식이 된 문이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이곳을 찾는 일은 거의 없지만, 미스트리나가 내가 올 때를 위해 만들어준 내 방이지. 나는 이 아이를 다른 녀석들에게 맡겨둔 후,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준비가 끝나면, 그 방을 찾아오도록.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앞서, 너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콰앙!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루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뤄낸 빛의 기둥으로 인해 안개가 걷혔다면....

"...하아. 그 담배 애송이가 결국 일을 치뤘군. 뭐, 괜찮아. 다시 안개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그런 안개가 없어도 그 녀석이 만든 장난감을 처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그녀,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가 만든 그 수많은 기괴한 생물 병기들을 고작 장난감이라 부르며 별거 아닌 듯 넘기는 모습은 여유가 있다 못해 철철 넘쳤다. 그리고 그것이 속이 텅 빈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담담하게 자신의 감상을 말한 것 뿐이고, 그가 밭에 난 잡초를 뽑는 것보다 조금 귀찮게 여기는 그 일이 정작 자신에게는 승리를 보장하기 힘든 위험한 전투라는 것이 루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나의 실수로 인해 상처 입은 피해자를 회복시키며,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나도 가볍게 행하는 자. 비록 그의 힘이 그 자신이 본래 가진 힘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한 힘이라 할 지라도, 본래 힘이란 것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결국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도루묵인 것. 그리고 설령 같은 힘이 있다고 해도, 루크는 과연 자신이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정말로 나 같은 게 용사가 맞는 걸까?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루크는 한숨을 내쉬며 성검을 허리춤에 단 검집에 납도했다. 잠시 후 응접실을 나선 그는 동료들이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며, 그들이 자신처럼 각자 다른 수인들과 안개 속에서 전투를 벌였음을 듣게 되었다. 다만...

호크나. 그녀는 어째서인지 루크와 대화를 꺼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리를 피했고, 루크는 그것이 호크나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으로 여겨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자존감이 더더욱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

"하아, 하아, 흐으으..."

루크와 있는 자리를 황급히 피한 호크나는, 서둘러 근처에 있는 아무 방이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혹시 도중에 누군가 들어와 서로 못 볼 꼴을 보게 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문의 잠금을 확실히 해 두고 나서야 호크나는 자신이 지금 있는 방이 일종의 물품 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근처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그녀는, 이윽고 문에 등을 기대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다리 사이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치마 아래, 새하얗고 끈적한 액체를 뚝뚝 떨구며 호크나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얼굴을 붉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숨소리는 고된 일에 지친 사람의 것에서 서서히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것으로 바뀌어 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흉악한 것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새길 듯이 안으로 파고드는 그 감각은 무척 짧은 순간이었으나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을 더더욱 크게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몸을 빠져나간 지금은, 그녀에게 원래 몸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사라진 듯한 허전함을 안겨주었다.

순간적인 만족, 그리고 이어지는 공허함.

호크나는 더 이상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무뎌진 그녀의 정신을, 그는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다시 날카롭게 깎아내었다. 그리고 호크나는 더 이상 그런 류의 감정에 익숙해질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스스로 동료라는 존재를 만들지 않고 오랫동안 홀로 용병 생활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호크나는 외롭고 고독했다.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순간적인 예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달아오른 몸뚱아리,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숨소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찌르르하고 떨려오는 아랫배의 감각.

"이제, 더는, 못 참겠어...."

그것은 독이 든 음료가 담긴 잔이다. 그리고 독이 들었음에도 그 음료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감미로워, 설령 그것을 마시는 순간 목숨을 잃는다고 할 지라도 상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동안 호크나는 잔을 든 채 망설였다. 아무리 갈증이 느껴져도 그녀는 참고 또 참았다. 목이 말라도 독을 마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 그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는 말했다. 욕망은,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반대 심리. 사람이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것의 반대로 하고 싶어하는 현상.

물론 호크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숲을 나온 지 오래 된 떠돌이 엘프 용병이기에 고향에 있는 엘프 장로들도, 인간 왕국의 왕도 감히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속박하는 것은 누군가의 명령만이 아니다.

호크나를 속박하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 내가 원하는 모습이자 가장 자신답다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모습.

하지만 한 때는 확고했던 그 '자신다운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은 그 남자에게 너무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고,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고고하고 고귀한 떠돌이 용병 엘프가 아니었다. 그저 한 남자의 온기를 잊지 못해 밤새 그를 바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천박하고 음탕한 암컷뿐이다.

계속해서 그 사실을 부정하고 외면하던 호크나는 결국 이 마법의 안개 속에서 자신이 추악하다고 여기던 그 욕망과 마주하였고, 그 남자가 자신의 몸에 새겨 놓은 욕망에 완전히 물들었고 완전히 더럽혀졌다.

...아니, 이제 이런 표현은 맞지 않다.

더럽혀진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인지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고고하고 용맹한 전사로서 동경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속에 가려진, 이성에게 어엿한 한 명의 여인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낡은 창고 안에서, 그 남자가 자신의 품 속에 넣어두고 간, 그의 채취가 남아있는 장갑의 냄새를 맡으며 달아오른 자신의 몸을 열심히 달래는 시점에서, 그녀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없었다. 본연의 욕망을 완전히 받아들인 그녀는, 이제 결심했다. 어차피 이 쾌락을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만, 차라리 그것을 즐기겠다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건 말건, 그녀는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투명한 애액이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음부를 열심히 쑤셨다. 물론 그 흉악한 거근을 맛 본 그녀의 몸이, 고작 그런 자극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안개가 걷히기 직전, 그가 그녀에게 속삭인 말 때문에.

[오늘 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3층에 있는 나의 방을 찾아온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마. 싫다면 찾아오지 않아도 상관 없다. 부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바라마.]

이미 선택은 끝났다.

*

그 날 밤, 호크나는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가 루크와 동료들을 위해 내주었던 탑의 방에서 조용히 나와 미스트리나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열려있는 대문을 지나, 3층에 있는 한 방으로 향했다. 그래, 그가 있는 방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한 남자의 남성기에 달라붙어 열심히 봉사하는 네 명의 여인들을 바라보았고, 얼마 가지 않아 자신 또한 그 행렬에 참여하였다. 그 남자는... 아니, 주인님은 스스로 옷가지를 벗은 채, 네 발로 기어서 다가와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를 정성스럽게 혀로 핥는 타락한 암컷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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