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야, 깐프... 넣을게. (3)
* * *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의 저택, 그녀가 나를 위해 만들어 둔 방 안에서 나는 용사와 만났다. 용사 녀석은 고민이 제법 많았는지 일부로 동료들 몰래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왔고, 선약이 있었던 나는 용사를 그냥 돌려보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쫄보 녀석이 기껏 용기를 내서 찾아왔는데 내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내일 찾아오라며 돌려보내면,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 낮은 이 용사는 더욱 기가 죽을 테지.
어쩌자고 친구도 아닌 남정네의 기를 살려주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하지만 별 수 있나? 문제의 저 용사가 힘을 내야 이 연극도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법이니.
나는 간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책상에 앉은 상태로 용사를 맞이했다. 역시나 이 용사는 동료들 없이 홀로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긴장을 하다 못해 조만간 스트레스로 죽을 예정인 소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지만, 나는 애써 참았다. 이러한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나도 모르니까.
"새삼스럽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서로 자기소개라도 해 볼까? 나는 라그나 아마게돈. 아마게돈 남작가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후계자이며, 가문을 몰락으로 몰아간 왕가와 귀족 놈들을 싹 다 쳐 죽이고 헤르몬 왕가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며 침실에 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들여보내는 등의 방탕한 생활을 보내는, 나이 스물 넷에 흑마법사 겸 귀족이며, 네가 쓰러트려야 하는 악당 중 한 명이지."
"...지금 저를 바보취급 하시는 것입니까?"
"바보 취급이라니, 섭섭한 소리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소개라도 하자고.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서로의 관계를 좀 더 확실히 하자, 이거지."
루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용사 루크. 나이는 스물 셋이고 성은 없습니다. 루미너스 여신 님의 선택을 받아 용사가 되어, 신탁에 따라 곧 부활할 불멸의 용과 그를 따르는 네 명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덜컹.
"...그래, 루크.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 '파괴자' 세르베르크와 '광인' 실립. 두 놈 모두 너의 검에 쓰러졌지? 그 녀석들은 비록 자신들만의 세력을 가지지 않았지만, 개인으로서의 무력과 영향력은 충분히 강력했어. 그러니 그 녀석들을 쓰러트린 네가 나를 다음 목표물로 삼았을 때, 나는 철저히 대비했지."
용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처음에 나의 저택에 침입했던 때가 떠오른 모양이다.
"더 많은 마수,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무구, 그리고 더 많은 함정과 마법. 오로지 너 하나를 쓰러트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쏟아부었는지 아마 상상도 하기 힘들 거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준비를 하고 너를 맞이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만이 남았다."
나는 한참을 연습한 끝에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남들이 볼 때 소름이 절로 끼칠 만큼 섬뜩한 눈길로 그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무슨 놈의 용사가 이렇게 약할까, 하고 말이야."
"큭...!"
"아, 딱히 너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 진짜로 순수한 의문이었어. 세르베르크는 굉장히 강력하지만 개인이고 능력의 범위도 한정적이니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치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었겠지. 실제로 너는 그 당시 세르베르크의 토벌대에 참여하였고. 하지만... 실립의 경우엔 조금 이야기가 다르거든."
그래. 이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내가 용사와 처음 싸운 순간, 본래라면 나를 가볍게 쓰러트렸어야 할 용사가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하고 도주한 이유. 처음엔 단순히 나를 공략하기 위한 스킬인 '정화'의 권능을 얻기 전이기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내 예상보다 한참 약했다.
얼마나 약했으면, 그 당시 처음 만났던 루크가 사실 용사가 아니라 진짜 용사가 나를 방심시키기 위해 보낸 데코이가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물론 루미너스 여신이 곧바로 정정해주었기에 그가 용사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만큼 그는 약했다.
그의 전투력은, 내가 철저히 준비를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약했다. 그 사실에 난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일까, 하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 답을 찾았다.
"실립의 능력은 왜곡. 온갖 자연 법칙이나 진리를 뒤틀고 변질시키는 힘. 그 능력은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상대하기 굉장히 골치 아파지거든. 어지간한 공격은 그 방향이나 궤적을 뒤틀어 다시 적에게 되돌리는 반사는 기본이요, 사람의 성별을 바꾸거나 혹은 두 사람의 영혼을 바꾸는 등의 온갖 해괴한 짓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런 녀석을 쓰러트린 용사가, 내가 걸었던 가벼운 환각에 저항하지 못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나는 손에 든 벚꽃이 만개한 나뭇가지로 책상을 툭, 툭 두드리며 웃었다.
"그 녀석들은 확실히 너의 손에 쓰러졌어.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너만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니지."
"그들은 내가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짆아?"
"..."
용사의 모험에 제 3자의 개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는 아마도, 잠시 부하들과 떨어져 홀로 있던 나를 공격한 녀석과 동일 인물이거나 공범이라는 뜻이지. 처음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몰랐는데, 루미너스 여신과 다시 통신을 연결하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 신탁이랍시고 내려온 이 물건을 본 순간에 상황 파악이 끝났다.
신들이라고 해서, 꼭 인간이랑 다르다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루미너스의 목적은 이 연극을 무사히 끝내는 것이며, 그녀 외에 이 세계에 개입하는 자들의 목적은 그녀의 연극을 망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노출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제거하려고 한 이유는, 그만큼 내가 그들에게 방해라는 뜻이다.
용사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저, 그 망할 작자들이 손을 썼을 뿐. 용사가 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중요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그 작자들이 용사가 성장하지 못 하도록 그 두 녀석들을 중간에 약화시켜서 쉽게 쓰러트리게 만든 것이다.
용사란 고된 역경을 딛고 일어나며 성장하는 것인데, 그 고난의 정도를 일부러 낮춤으로서 결과적으로 용사의 성장을 방해하여 전투력을 낮추는 결과를 낸 거지. 아마도 그들이 잘 먹혀들었다면, 용사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묘하게 쉬울 정도로 약해진 네 명의 악당을 무찌르고 불멸의 용의 앞에 섰다가, 처참하게 패배하며 극도의 피폐물이나 찍었을 것이다.
츄르릅.
그걸 내가 중간에 막아선 것이고.
여기서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Q 그럼 그 새끼들은 왜 나한테는 그런 약화를 걸지 않았을까?
A 신이란 본래 자신이 맡은 영역이나 자신이 창조한 것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이 세계는 루미너스가 만들었고, 그 와중에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 루미너스조차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누군지도 모를 놈들이 나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다.
Q 그럼 앞에 그 두 놈들은 어째서 영향을 받았는데?
A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개. 첫 번째는 세르베르크와 실립이 그 누군지 모를 신들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야에 속해있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세르베르크와 실립이 그 누군지 모를 신들의 창조물'이라는 것.
첫 번째 가정이 정답일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그 녀석들의 목적이 전형적인 왕도 용사물을 막바지에 급 드리프트 꺾어서 극 피폐물로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니, 당연히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라는 캐릭터도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번개를 떨궈 죽이려는 것은 처음부터 그럴 셈이었다기 보다는 그냥 중간에 수틀려서 막 저지른 것에 가까운 느낌이다.
여기서...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와 여신이 보낸 이 벚꽃이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계단이 되었다.
"...누가 개입을 했다는 겁니까? '파괴자' 세르베르크 때는 토벌대와 함께 행동하였으니 그럴 수 있을 지 몰라도, '광인' 실립의 경우엔 길드의 긴급 의뢰를 받고 오직 저희들만이 그를 상대하러 나섰습니다. 주변에 그 누구도 없었으며, 만일 있었다면 실립과 싸우던 저희가 몰랐을 리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누가, 어떻게 저희들의 전투에 개입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나는 여기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그냥 감출까.
이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나는 그저 수상할 정도로 강해서 쓰러트리기 힘들어 분량 뻥튀기를 하는 악당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루미너스 여신의 개인적인 관계로 인해 벌어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내가 외부인이라고 대놓고 밝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며, 그것은 루미너스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다.
루미너스 여신과 한 약속은 소원권을 대가로, 내가 그녀의 연극을 도와주는 것.
그런데 이 연극이라는 게, 단순한 보여주기가 아니다. 일단은 연극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루미너스 여신, 그녀가 한 명의 어엿한 신이며, 더 강한 힘을 가져도 문제 없이 신으로서의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험.
세계를 하나 창조하고,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하나의 큰 이야기를 무사히 진행시키는 것, 그것이 이 시험의 내용이다. 물론 사정을 밝히면, 루미너스 여신을 방해하던 이들은 즉각 그 행적을 들키고 그들이 저지른 것에 알맞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하지만, 그게 꼭 최선의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제 3자가 훼방을 놓았다고 해도 자신이 만든 세계 하나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면, 앞으로 그녀의 신으로서의 생활에 큰 타격이 온다. 게다가 이런 식의 시험을 치루는 신들이 한 둘 이 아니라, 그 훼방꾼들을 잡겠다고 연극을 중단할 경우 다음 기회를 얻을 때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 가장 최선의 선택은 그 훼방꾼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무사히 연극을 끝낸 이후에 녀석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지.
결국 나는 루미너스 여신의 개인적인 사정과 나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 연극을 망치려고 수작질을 부리는 신의 존재 등을 관객들에게 밝히지 않으면서 이 연극을 무사히 끝마쳐야만 하는 것이다.
...제길, 이게 무슨 이지 난이도로로 시작한 게임이 중간에 예고도 없이 코리안 난이도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소원권 하나를 대가로 하기에는 도저히 수지가 안 맞는 일이다. 물론 이미 내 입으로 한 약속이니 물론 지키겠지만, 적어도 이 일이 끝나면 소원권을 두 개 정도는 더 받아내야겠다.
그리고... 사정을 밝히면 안 된다고 하지만, 죽을 뻔한 일도 아무렇지 않다는 식으로 넘어갈 정도로 나는 대협 같은 마음 넓은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야.
"나야 모르지. 혹시 알아?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존재가 몰래 장난을 친 것 일수도?"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혼잣말이었다."
용사는 내가 흘린 말에 대체 무슨 소리냐며 의아해 했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애초에 이건 그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저 악역 배우. 내게 주어진 배역에 따라, 악역으로서의 역활을 다 해내면 그만. 하지만 연극 중에는 가끔 돌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 그럴 때 중요한 건, 역시 배우들의 대처 능력이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도, 그 상황을 애드리브로 자연스럽게 흘러 넘기는 것. 연극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훌륭하게 연극을 마지막까지 이어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배우다.
비록 내가 진짜 사악한 악당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악역 배우이지 않을까?
나는 벚꽃 가지를 든 오른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용사와 누군가의 주의를 계속 그 쪽으로 돌렸다. 마치 그것이 뭔가 중요한 것이라도 된다는 듯. 그리고 나머지 빈 손으로는, 책상 밑에서 수고하고 있는 암컷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 싼다.
*
"나야 모르지. 혹시 알아?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존재가 몰래 장난을 친 것 일수도?"
[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에,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와, 소름. 나 팔에 소름 돋은 것 좀 봐. 이런 반전이 있다고 못 들었는데, 혹시 서프라이즈인가? 나 진짜 개 소름돋았엉.]
[메타픽션인가. 잘 먹히는 요소지. 그 놈의 좇세계물보다는 몇 배는 낫네.]
[시발, 이세카이물 무시하지 마! 처음에 할 때는 혁신이니 뭐니 엄청나게 칭찬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러기야!]
[참신한 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똑같은 흐름에 똑같은 패턴인데 그게 참신하냐?]
그의 발언조차 사전에 준비된 연극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웃고 떠드는 이들.
[설마....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보다도, 누가 몰래 장난을 쳤다고? 저거...]
그의 발언을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내용에 대해서 고심하는 이들.
[아니 그래서 메타피션이 뭔데 새개끼들아! 또또 지들이 아는 거 나왔다고 신났어 아주.]
[너만 모르는 거야 이 병신아.]
[병신이 아니라 역병신이거든!]
[결국 병신이라는 건 똑같잖아, 이 병신아.]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하며 서로 투닥거리는 이들까지.
'....아, 제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큰 반응을 보여주는 이는, 다름 아닌 이 연극의 각본가이자 동시에 총괄 감독인 빛의 여신 루미너스였다.
'제가 보내준 메세지를 알아채 준 것은 좋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이러다가 진짜 큰 일이라고요!'
그 남자가 라그나 아마게돈의 배역을 맡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진짜 라그나 아마게돈이 난데 없이 소실된 영향. 만일 그가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째서 예고도 없이 다른 세계의 인간이 이 시험에 관여하게 되었는 지 그 과정이 밝혀질 것이며, 자신이 만든 세계의 영혼이 하나 사라졌는데 그 이유도 알아내지 못하고 제대로 준비도 끝마치지 못한 상태로 연극을 시작했다는 것까지 들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시험이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탈락될 수도 있다. 그토록 힘들게 준비한 시험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악인 점은... 지금 루미너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남자를 믿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 관객'분의 도움을 받아 단절된 통신을 복구하고 있지만, 아주 작정하고 틀어막은 탓에 무대가 된 연약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다시 통신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무대가 된 세계의 시간을 기준으로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 그렇게 통신을 복구하면 상세한 사정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짤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그가 이상한 짓을 벌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처럼 용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책상 밑에 있는 용사의 동료 엘프에게 자신의 남성기를 빨게 한다던가 하는...
'미쳤어, 미쳤다고.'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두 가지 감정은 물론 욕망과 공포다. 자동차로 치면 욕망은 엑셀이요, 공포는 브레이크인 셈이다. 그는 루미너스의 연극을 돕기로 약속하며, 그에 대한 지원으로 자신의 감정 중에서 공포와 죄책감 같은 악역으로서 연기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감정을 없애줄 것을 요구했고, 루미너스는 그것을 들어주었다. 그런 짓을 벌이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노빠꾸로 막나가게 된다는 것도 모른 채.
그나마 대다수의 관객이 용사의 시점에서 연극을 지켜보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저게 들키면 이 관람석은 대 혼돈의 도가니일 것이다. 정통 용자물인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동료 여자가 적 보스에게 농락당하는 네토라레물이 되어버렸다고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그녀 외에 저 사정을 아는 관객은 단 두 명.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악역인 라그나 아마게돈의 시점에서 이 연극을 지켜보고 있으며 그에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저 관객과, 용사의 동료인 호크나가 최애캐인 저 관객.
앞의 그는 이해할 수 있어도, 뒤의 저 관객은 왜지? 솔직히 루미너스는 아직까지도 저 관객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최애캐가 적한테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있는 데, 왜 그것을 밝히며 날뛰지 않는 거지? 보통은 저런 걸 보면 화를 낼 텐데...?
루미너스 여신은 몰랐다. 최애캐가 좋은 길만 걸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애캐가 능욕당하는 것을 보는 배덕감에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정의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온 그녀가 이해하기에, 그 어둠은 너무 추악하고 추잡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