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56화 (56/229)

〈 56화 〉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뒈(1)

* * *

나는 빨강이를 감옥 방에 넣고 돌아온 초록이에게, 이번엔 촉수 성감 개발 절정 지옥 속에서 그대로 마음이 꺾여버리고 온몸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에 오늘 안기에는 무리인 주황이를 빨강이가 있는 곳 바로 옆 방에 두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깨에 손을 얹기만 해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조수를 내뿜는 주황이를 감옥 방까지 데려가는 것은 엄청나게 고역이었을 것이다.

"주황이는 끝났고, 빨강이는 이틀 정도 더 숙성시켜야 할 테고, 검둥이는 가장 마지막. 남는 시간에는... 용사 놈을 다시 자극해야겠네."

내가 용사를 계속 도발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게 용사를 강하게 만드니까. 그에게 있어서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악인이라는 사실을 계속 인식시켜 줘야만 한다. 그래야 힘의 차이 때문에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를 향해 전의를 불태울 수 있다. 두려워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머뭇거리거나 뒷걸음치지 않도록,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내가 뒤에서 떠밀어 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게 은근히 완급 조절이 중요하다. 너무 지나치게 자극해 버리면 지난 번 파랑이와의 결투 재판에서처럼 앞뒤 안 보고 내게 덤벼들 수도 있으니까. 나를 향한 적의를 계속 불태우도록 도발하되, 용사가 이성을 잃고 내게 싸움을 걸지 않도록 섬세한 조율이 필요하다.

오늘은... 무작정 모욕하고 깔보기보단, 희망을 심어주는 편이 좋겠다. 나를 쓰러트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없도록, 계속해서 앞으로 걷게 만드는 희망이.

*

"....하아."

엘헤임 왕국, 수도 엘 하르다,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의 탑을 나오며 용사 루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가끔이면 자신이 정말 용사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자신이 가진 자리의 무게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특히 연기의 마녀가 보낸 그 수많은 마도 생물 병기들이 불시에 들이닥쳤음에도, 손가락을 튕긴다는 가벼운 제스쳐 하나 만으로 그 방대한 적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그 모습.

그가 악인만 아니었다면, 그 광경은 경외심을 품고도 남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악이었고, 자신이 쓰러트려야 하는 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무찌를 수 있을까? 그와 자신 사이에 느껴지는 압도적인 벽의 차이에, 용사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루크는 탑의 입구로 나와, 뒷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타바코나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마법 허수아비 인형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뚫지 못한 마법의 안개를 한 순간에 없애버린, 용사의 힘에 투자를 아끼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거주지에, 식사에, 이제는 이런 수련용 도구까지.

다소 부담스럽긴 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기에 용사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잡념은 여기까지. 내구성 증가와 자동 수복의 마법이 걸린 수련용 마법 허수아비의 앞에서, 용사는 머릿속의 쓸데없는 생각을 비우며 자신의 허리춤으로 양손을 뻗었다. 왼쪽 허리에는 오직 찌르기에 최적화된 형태의 검인 성검­유니코르가, 그리고 오른쪽 허리에는 세검으로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적을 상대로 쓰기 위한 예비용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굳이 수련용 허수아비에 성검까지 쓸 필요는 없었기에, 루크는 유니코르를 벽에 걸쳐두고 예비용 장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흡!"

검을 발도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빠르게 휘둘러진 신속의 검격이 허수아비의 오른쪽 허리에 명중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불쾌한 반동이 손으로 돌아왔지만, 칼날은 허름한 허수아비의 나무로 만들어진 골격에 단 1mm도 박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용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타바코나 쪽에서 특별히 준비한 물건을 일부로 부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나름 힘을 담은 공격인데 이런 허수아비에 제대로 된 흠집 하나 내지 못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라그나 아마게돈과 자신을 비교하며 용사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그의 얼마 없는 자존심이 퍽 상하는 일이었다.

용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다시 되돌렸다. 이번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속도보다는 힘에 치중한 묵직한 일격이 허수아비의 어깨에 내리 꽂혔다. 그래도 이번엔 더 힘을 실은 탓인지, 미약하게나마 칼날이 허수아비의 목재 골격에 파고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조금 전과 그리 큰 차이는 없는 수준. 저도 모르게 오기가 생긴 루크는, 검을 다시 되돌리며 이번엔 검에 신성력을 담았다.

신성력. 그것은 여신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내려주는 은총, 사악한 어둠을 몰아내는 눈부신 빛의 힘. 성검이 아닌 무기는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총량이 굉장히 적기에 그리 많은 힘을 담아낼 수 없지만, 신성력을 덧씌우는 것만으로도 이 싸구려 철검조차 사람 크기만한 초대형 대검과 비슷한 위력을 낼 수 있게 된다. 물론 무게는 그대로인채로.

악을 쓰러트리기 위해 신이 내려준, 인간계의 상식을 무시하는 힘. 그것을 예비용 장검에 두른 루크는 다시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번엔 휘두르지 않고, 허수아비의 중심을 꿰뚫을 기세로 내질렀다. 비록 찌르기보다는 베기에 특화된 검이지만, 신성력을 담은 만큼 그 위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조금 전의 두 일격이 고작 1mm만큼 박혔다면, 이번 공격은 무려 1cm나 파고들었으니까.

하지만 루크는 곧 이런 허수아비 따위를 상대하는 데 신성력까지 사용하는 것이 마치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 용사는 입에서 벌써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들려올 리 없는 이의 목소리에 반 즈음 나온 한숨을 도로 삼키며 루크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루크 자신이 언젠가 넘어야 할 거대한 벽, 쓰러트려야만 하는 적인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따지고 보면 적진의 한복판이나 다름 없는 이곳에서,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여유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이쪽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허수아비에 무작정 화풀이 한다고 실력이 늘어나나?"

"시비를 걸 목적이라면, 그냥 가십시오. 제 일에 상관하지 마시고."

"아니, 솔직히 너무 못 봐줄 정도라서 그렇게 못 하겠는데?"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으나, 용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터트렸다. 상대해서 좋을 일이 없긴 하지만, 도저히 듣고 그냥 넘기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마법을 포함한 종합적인 전투 능력에 한해서 일 뿐. 결투 재판 때 본 그의 싸움을 보니, 무기를 휘두르며 몸을 움직이는 육체 능력의 기술 면에서는 그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검술에 대한 훈수를 대니, 화가 나지 않을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아군이 해도 웃고 넘어가기 힘들 훈수를, 자신보다 검술도 뒤쳐진 적의 입에서 나온다면 참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나야 검술 따위 모르지.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

"왕국의 기사들처럼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되는 대로 무작정 휘두르는 것이 네 검술이잖아? 물론 상대가 평범한 적이라면 검술을 연마하며 자기 수련을 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겠지만, 너는 상황이 다르지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하찮다는 듯 비웃는 그의 모습에, 루크의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목표는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검성이 되는 것도 아니라, 여신의 신탁을 따라 세상을 구하는 거잖아? 네 힘은 그러라고 준 거고. 그런데 왜 정작 그 힘은 쓰지 않고, 애먼 곳에 힘을 쓰는 거지?"

"...신성력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란 말입니다. 힘을 두르는 것도, 그것을 다룰 기반을 충분히 다져야 가능할 일이란 말입니다."

"지랄하네."

라그나는 그를 비웃으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엔 그가 벽에 걸쳐둔 성검­유니코르가 있었다.

성검은 오로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만이 쓸 수 있는 물건. 주인이 아닌 이상 그것을 결코 제대로 휘두를 수 없으며, 악인이 쥐는 순간 천벌이 내려진다. 하물며 용사로서 쓰러트려야 할 적이, 성검에 손을 대고서 무사할 리가 없다. 하지만 루크는 그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다면 속이 조금은 후련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러나, 그가 원하는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자, 봐라."

"...어?"

루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엔 자신이 어느새 환각 마법에라도 걸렸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라그나 아마게돈이 손에 든 저 검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만이 쓸 수 있다는 자신의 검, 성검­유니코르인 것이 틀림 없다.

...그런데, 왜 아마게돈 남작이 저걸 들 수 있는 거지?

성검은 오로지 선택 받은 주인만이 쥘 수 있다. 일전에 그가 가진 검을 탐낸 한 도적이 몰래 숨어들어 성검을 훔쳐가려고 했고, 성검의 손잡이를 쥔 그 도적은 결국 심각한 화상으로 인해 한 쪽 손을 영원히 쓸 수 없게 되었다. 만일 그가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면, 손 정도가 아니라 팔 하나를 절단해야 했을 것이다.

고작 도적조차도 함부로 손을 댄 순간 손이 타들어가는 것이 성검인데, 하물며 여신이 봉인하라 명한 혼돈의 파편 중 하나의 주인인 아마게돈 남작은 도대체 어떻게 저 검을 멀쩡히 들고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악한 이일수록 반발감이 커지는 성검이, 어째서 주인도 아닌 저 남자의 손에 멀쩡히 들려 있단 말인가?

"너는 여신의 신성력을 무슨 필살기 같은 건 줄 아는 모양인데, 그렇게 쓰면서 도대체 어떻게 실력이 늘겠냐? 잘 보라고. 네가 다루는 힘은 말이지."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어.

허나 그런 나의 생각을 부정하듯, 그의 손에 들린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분명히 신성력이었다.

"...어, 어떻게...?"

"신앙과 공포는 종이 한 장 차이. 결국 그 두 힘의 근원은 대상을 향한 신뢰에서 나오는 법.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과,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의 숨통을 끊을 것이라는 확실한 두려움은 성질은 반대이나 그 활용법은 크게 다르지 않지. 그러니 성검과 같은 매개체를 통하면 악한 마력을 신성력으로 전환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질량을 가진 듯 했다. 만일 그것이 물리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루크는 이미 온 몸의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잘 봐라. 단순히 힘을 두르고 쏘아 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형태로 덧씌우고 날카롭게 벼려내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그의 손에서, 세검의 형태를 띈 유니코르는 흑백의 빛에 휩싸이더니, 이윽고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유니콘의 뿔을 상징하는 듯한 뾰족한 칼날은 둘로 갈라지며, 중간에 벌어지나 끝부분에 다시 만나는 형태의 창날이 되었고, 한 손으로 잡기에 적당했던 짧은 손잡이는 그의 키보다 길게 늘어났다. 라그나 아마게돈은 그 창의 끝을 허수아비의 중앙에 겨눈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창을 잡은 손을 뒤로 빼며 자세를 잡았다.

신성력이, 빛의 힘이, 어둠을 다루던 이의 손에 모여든다. 창날은 순식간에 눈부신 빛에 휘감겼고, 그것은 루크가 지금껏 성검을 사용했던 그 수많은 기억들이 차마 상대 되지 않을 놀라우리만큼 완성된 형태였다. 정말로 전설 속의 용사, 신화 속의 영웅의 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자신조차 아직 해낼 수 없는 가장 성스럽고 이상적인 형태의 무기가, 자신이 쓰러트려야 할 악당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루크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네가 신성력을 다루는 방식은, 얇은 캔버스에 물감통을 뒤엎고 그림을 망쳤다며 종이를 버리는 것과 다름 없다. 새하얀 종이에 색을 칠하는 과정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고 섬세한 집중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 무작정 색으로 다 채운다고, 같은 그림은 아니잖아? 이렇게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야지. 기술도, 힘을 담는 총량도 딸리는 녀석이 힘을 쓸 때마다 무작정 최대 출력으로 뿜뿜 뿜어재끼는 데, 평범한 무기가 그걸 버티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겠다. 알겠냐? 무기의 능력을 용도와 필요로 맞게 신성력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 '강화'가 바로 네가 다루는 힘의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에 든 창을 내질렀다. 창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으나, 길이가 불과 1.5m에 불과한 창은 5m나 떨어진 허수아비의 가슴팍을 정확히 관통했다. 루크가 아주 옅은 깊이의 구멍을 내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 허수아비의 가슴팍이, 그가 내지른 창에 완전히 뚫려 있었다.

"봐, 그렇지? 이런 식으로 응용을 하란 말이야. 백날이고 칼에서 레이저 쏘듯이 힘을 찍찍 갈겨대기만 할 게 아니라."

물론 거기에 성검 자체의 위력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루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보다 약한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꼈는데, 그 적이 자신만 쓸 수 있을 줄 알았던 기술마저 훨씬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진짜 용사는 자신이 아니라 라그나 아마게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루크는 그 모습을 보며 단단히 넋이 나갔다. 라그나 아마게돈은 손에 들린 창을 다시 세검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서, 그것을 루크의 손에 쥐어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세상을 구하는 용사에게 있어서 약하다는 것은 큰 죄야. 그러니까 더 강해지라고. 나 따위를 금방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발버둥치며 노력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뭐, 이 세상이 멸망하겠지?"

라그나 아마게돈이 떠난 후,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던 루크는, 어느샌가부터 성검에 신성력을 두른 채 허수아비를 향해 미친 듯이 찌르기를 날리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