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뒈(4)
* * *
"여튼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어떻게 써먹어야 할 지 대충 감이 오나?"
"...예."
루크는 입술을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인 자신이 쓰러트려야 할 적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가 알려준 방식이 정말로 효율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스스로 다루면서도 어떻게 다루는 것인지 설명하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여신에게 받은 신성력이었는데, 아마게돈 남작이 알려준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니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신성력의 흐름이 손쉽게 몸에 익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런 지식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이 즈음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여신이 봉인하라던 혼돈의 파편을 사용하면서 용사보다 신성력을 더 잘 다루는 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신성력이 마법과 비슷했더라면 흑마법사인 그가 신성력을 잘 아는 것도 수긍할 수 있었겠지만, 이 또한 아니었다. 신성력이란 외부자의 입장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마법과 꽤 유사할 수 있으나,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과 신앙을 이용하는 신성력은 그 구조와 구동 방식이 천지차이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아마게돈 남작은 정상적인 마법사도 아닌,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가 만들어 준 마법식에 혼돈의 파편에서 끝없이 나오는 마력을 불어넣어 다룰 뿐인, 사실상 유사 마법사였다. 그런 그가 도대체 어떻게, 정작 사용자인 용사조차 잘 알지 못하는 신성력의 운용 방법을 알 수 있을까? 고민하던 루크의 머릿속에선, 이상한 가정이 떠올랐다.
오직 용사만이 쥘 수 있으며 악한 사람은 쥐는 순간 끔찍한 꼴을 당하는 성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다룰 수 있으며, 오직 여신의 충실한 신도와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만이 다룰 수 있는 신성력을 쓰는 방법을 아는 자.
그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용사 뿐.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난 용사는 오직 둘 뿐이다. 사악한 용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타나 그것을 지하에 봉인한 초대 용사. 그리고 그 용이 부할할 때가 다가옴에 따라 새로이 선택 받은 용사, 바로 자신 뿐. 그 사이의 길고도 짧은 기간 동안, 성검의 주인인 용사는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분명 여신의 교단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게돈 남작은 대체 정체가 뭐지?
"내가 가진 파편에서 나오는 힘은, 여신의 신성력과 유사하며 정 반대지. 신성력을 쓰는 방법을 아는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이다."
"정말로요?"
"그래."
루크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다만, 자신이 밝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적에게 배운 기술로 그 적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용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싸매며 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
"....흠."
용사가 시가레테의 탑 안으로 돌아간 후, 나는 미스트리나의 저택으로 향하던 도중에 있던 한 공원에 들렀다. 특별히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머릿속의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적당한 벤치 하나를 골라 잠시 앉아 눈을 감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처음엔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이 긴 여정이,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다. 여신과의 거래를 수락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고, 용사가 아닌 다른 이에게 죽지 않기 위해 가진 수단을 모두 끌어모아 힘을 키웠다. 지금 돌이켜봐도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행적이지만,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예쁜 여자들과 수시로 잠자리를 가지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지만, 그 과정이 너무 순탄치 못 했다. 마르스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그녀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레이를 손에 넣기 위해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추악한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나를 암살하러 온 사하를 내 밑에 두기 위해 이 손에 수 많은 암살자들의 피를 묻혔다. 지금도 지하실에 있는 '그녀'와 나 없는 사이 내 저택을 지키는 '미아'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꽤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
고생한 만큼 그 결과가 값졌지만, 이젠 슬슬 내려 놓을 때가 다가온다. 나는 용사의 마지막 시련이 될 것이고, 그의 성검이 내 심장을 꿰뚫을 테지. 그리고 완성된 용사는 마침내 이 세상을 사악한 용으로부터 구해내어,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나는 그 끝을 보기 위해 이곳에 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동안의 노동의 대가로서 여신에게 한 가지 소원을 빌기 위해서. 처음엔 그저 나 혼자 어디 다른 세계에서 평화롭고 여유롭게 삶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이곳에서 만든 모든 인연들,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한 그녀들도 함께 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저하거나 여유부릴 틈은 없다.
"후... 언제쯤 연락이 다시 복구될 지 도통 모르겠네. 망할 방해꾼 놈들 같으니.... 하여간에 신이고 인간이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야. 뭐, 별 수 있나. 내가 다 감내해야지. 그게 루미너스 여신과 했던 약속이니까...."
빠직.
"....어?"
뒷편에서 들려온,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이 자동으로 향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선 사람의 모습을 본 순간, 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상대도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아아..."
뒤로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상대의 모습에, 나는 지체할 틈이 없다는 판단과 함께 목에 건 파편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혼돈의 파편으로부터 검은 마력을 뽑아내는 사이 상대와 나의 거리는 또 다시 세 걸음 정도 벌어져 있었고, 나는 서두른 덕분에 늦지 않게 미스트리나가 만들어준 마법식에 마력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상대의 다리가 멈추고,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져 나오려던 입이 다물어졌다. 지면에 생겨난 마법진들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손이 목격자를 제압하였다. 이번에 미스트리나가 다시금 개량해 준 덕분에 이 하급 마법 '구울의 손길'에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일반 민간인은 볼 수 없다는 효과가 더해진 덕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상대가 갑자기 발을 멈춘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수십 개의 손에 붙들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었던 척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나는 목격자를 안개의 저택 앞까지 데려온 후,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서부터 들었냐?"
용사 일행 중 한 명, 루미너스 여신을 섬기며 신성력으로 아군을 보호하고 상처를 회복하는 자애로운 여신관 엘리아는,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었다.
*
'이, 이게 무슨 일이죠....? 도,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처음엔 그리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훈련하던 루크가 어쩐지 개운치 않은 얼굴로 탑 안으로 들어왔고, 최근 그가 걱정이 되었던 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캐물었을 뿐입니다. 루크는 큰 일이 닥쳐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보다는 혼자서 끙끙 앓으며 힘들어하는 타입이었기에,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얼버부려도 끈질기게 물어본 덕에 그의 고민을 캐낼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신성력을 쓸 수 있고, 용사인 나만이 쥘 수 있다는 이 성검을 들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루크의 질문은 만약의 사정을 가정하고 있었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겪었으나 도저히 남들에게 그대로 설명하기 힘든 일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사정이라 하거나, 혹은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털어놓는 일종의 기법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내용은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그 남자가 신성력을 쓸 수 있으며 성검을 쥘 수 있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루크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곧 제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잊어달라며 급히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루크가 걱정이 되었던 저는, 진상을 파악하고자 아마게돈 남작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말로 그가 신성력을 쓸 수 있으며 성검을 들어도 멀쩡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환각이나 혹은 정신 조종 같은 불길한 마법으로 루크에게 거짓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광장에서 그의 뒷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언행과 행적이 깔끔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인 것인지 조용히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은 비록 뒤에서 본 것 뿐이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루크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따지려고 했습니다. 동료의 동행 없이 그를 따로 만나는 일은 굉장히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어떠한 이유로 저희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저는 발이 바닥에 붙은 채로 굳어버렸습니다.
"후... 언제쯤 연락이 다시 복구될 지 도통 모르겠네."
연락? 복구? 무슨 이야기일까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듯 했습니다.
"망할 방해꾼 놈들 같으니..."
방해꾼이라... 무언가 그의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는 걸까요? 혹시 이대로 조용히 듣고 있으면 그가 꾸미고 있는 그 계획이라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침묵하던 저의 귀에 이어서 들려온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여간에 신이고 인간이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야."
...신이라고요? 이 사람,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뭐, 별 수 있나. 내가 다 감내해야지. 그게 루미너스 여신과 했던 약속이니까...."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생소하게 들리는 그 이름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루미너스 님. 저희 교단이 섬기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신님. 그런 여신 님과... 약속을 했다고요? 이 사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단순히 신성 모독으로 넘길 수 없는 이야기에, 저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금기를 알아버린 것만 같은 불안감에, 이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진 저는 루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따지려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에게 들키지 않고 다시 돌아가려고 뒷걸음쳤습니다. 그러나 오른발을 뒤로 한 걸음 내딛은 그 순간.
빠직.
".....어?"
"아, 아아...."
저는, 어리석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나머지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발을 뒤로 내딛었고, 바닥에 널부러진 나뭇가지 중 하나를 밟아서 부러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아마게돈 남작은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고, 저는 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려는 듯한 깊고 탁한 눈동자.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저는 두렵고, 또 두려워서.... 마음 속으로 루미너스 여신 님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짖으며, 뒷걸음쳤습니다. 저를 알아본 그는 곧바로 목에 건 무언가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그것은, 여신 님이 용사로 선택 받은 루크에게 모으라고 지시했던 물건. 먼 옛날 나타났던 사악한 용의 힘이 담긴 보옥의 조각.
혼돈의 파편이라 불리는 그 물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하고도 악한 검은 마력이 그의 손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고, 그 무시무시한 존재와 혼자서 맞설 용기와 의지가 없던 저는 곧바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면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검은 손들이 달아나려는 제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려던 입을 틀어 막고, 그것을 뿌리치려던 손마저 붙잡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저에게 다가온 그는 제 어깨에 팔을 둘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저에게 그것은 먹잇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는 포식자의 구속에 불과했습니다. 그대로 무력화된 상태로, 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원을 나와, 동료들이 있는 '연기의 마녀'가 머무르는 탑의 정 반대 방향, '안개의 마녀'가 머무르는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전신을 붙잡은 수많은 손들은, 오로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허용했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두려워졌습니다. 아마게돈 남작이 자신의 적인 용사 루크와 그 동료인 저희들을 해치지 않고 살려두고 있었던 것은 필시 어떠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리라 저희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가 과연 그 계획이라는 것으로 추정되는 내부자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듣고 만 저를 그대로 동료들의 곁으로 무사히 돌려보내 줄까요?
최소 정신 조작에,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한 공포가 온몸을 사로잡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마치 호랑이의 쩍 벌려진 입에 머리만 집어 넣은 것만 같았습니다. 섣부른 행동을 했다간 진짜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저는 그를 조용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택을 둘러싼 마법 안개 앞에 도달했을 때, 여태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싸늘하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제게 물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들었냐?"
전지전능하신 루미너스 여신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보호하소서. 따스하고 거룩하신 자애로 저를 인도하시고, 제가 가는 길이 어둠으로 휩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저의 영혼을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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