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아아~ 망해써요~(1)
* * *
안개의 저택 앞까지 여신관 엘리아를 데려온 내 머릿속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좇됐다'.
그것도 그냥 좇된 것이 아니라, 아주 엄청나게 좇됐다.
옛날에 영화나 애니매이션등을 볼 때 악당들이 주변 상황을 잘 살피지도 않고 중요한 계획을 혼잣말로 떠벌이다 주인공과 관련된 사람에게 발각되는 장면을 보고 악당들은 왜 이렇게 멍청한 걸까 비웃었는데,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계획했던 일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며 긴장이 풀린 탓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뭐, 그래도 괜찮다. 지금 당장 수습하면 되니까.
"...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죠?"
엘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두려워 말을 더듬으면서도, 궁금한 것은 참지 못 하겠는지 내게 정체를 물었다. 어쩌면 호기심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발악일 지도 모르겠지만. 보통의 악당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기 계획을 다 털어 놓을 테지. 어차피 들켰으니 제거할 거, 저승 가기 전 마지막 선물 삼아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 없다. 미쳤다고 당사자인 그녀에게 이 세계가 신들이 만든 무대로 너희들은 연극의 등장인물이라고 털어놓을 수 있겠어? 하지만... 이것 참 기구한 인연이다. 마침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몰라 곤란하던 찰나였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단 둘이 있게 될 줄이야.
"내 정체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헤르몬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마탑을 무너트린 자. 그리고 너희들이 쓰러트려야 할 적,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지."
"그,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방해꾼이라느니, 여신 님과의 약속이라느니, 그게 다 무슨 소리죠? 당신은, 당신은 대체 뭘 알고 있는 건가요...?"
"....."
이걸 어쩐다...?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면 이 쪽도 어느 정도 정보를 털어놓아야 하겠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털어놓는지가 바로 문제다. 그녀를 설득시키기 위해 반드시 말해야 하는 정보가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처한 사정상 밝혀서는 안 되는 내용도 있을 테니까. 일단 이 세계가 루미너스 여신이 연극을 위해 만든 무대 세계라는 것은 당연히 숨겨야 하고, 내가 사실 루미너스 여신의 아군이라는 점은... 말할 수 밖에 없겠지만, 역시 그대로 밝힐 수는 없지.
"뭐,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오늘 있었던 일을 남들에게 발설하지 않는 것과 내가 부탁한 일을 들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네 질문에 3개까지 답해주지."
"...그 말, 정말인가요?"
"난 거짓말 안 해. 아니, 못 해."
나는 거짓말을 드럽게 못 한다. 누군가를 속이려고 하면 얼굴에 티가 난다더라?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안 한다. 대신에 상대가 제멋대로 상상하고 착각하고 헛다리 짚을 수 있도록 정보를 제한적으로 공유할 수는 있지만. 그게 거짓말 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적어도 '내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 없지. 이번에도 그럴 뿐이다.
"애시당초 너희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테지만,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죽이거나 부하로 만들던 내가 유일하게 너희들만은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너희들을 죽이는 일 정도야 정말 간단하지."
내가 손을 내젓자, 저택을 두른 안개의 일부가 내 손에 다가와 휘감겼다. 그리고 사람을 현혹하는 안개는 곧 날카롭고 위험한 흉기로 변했다.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 다가오자, 엘리아는 더욱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방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 한 번 가볍게 휘저으면, 그걸로 끝.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왜인줄 아나?"
"..."
"알고 싶다면, 내 거래에 응하면 된다."
"만일, 응하지 않겠다면요?"
"나야 증거를 인멸을 할 수 밖에 없지."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거짓말을 못 한다. 즉, 눈앞에 이 여신관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거짓말은 아니다. 이 여자가 자신이 들은 것을 용사에게 털어놓음으로서 연극이 망하게 둘 수는 없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다.
물론 용사 일행과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여신관이 사라지면 그 빈자리를 채워야하며 그만큼 전력이 줄어들 테지만,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이 늘어나더라도 목표를 어그러트리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너를 죽이면 그 뒷처리가 귀찮지. 가급적이면 죽이고 싶지 않으니,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좋겠군. 정 협력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로, 정말로 절 살려주시는 건가요? 거기에, 시키는 일만 하면 세 가지 질문에 답해주신다고요?"
"내가 아는 한에서, 그리고 답해줄 수 있는 한에서 말이지. 난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일부러 어기지는 않는다."
"...어차피 제게 선택지는 없는 거나 다름 없지 않나요."
여신관, 엘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제게는 당신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그 세 개의 질문 중 하나를 지금 하게 해주세요."
"그래, 좋다. 뭐가 궁금하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 우리의 잘난 용사 님께서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서, 내 뒤에 있는 불멸의 용을 처리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지."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에일라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 대한 모든 구속을 풀었다.
*
저택을 둘러싼 안개가 그의 손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목을 겨눌 때, 에일라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그동안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그가 자신들을 해치지 않았지만, 자신이 엿들은 그의 혼잣말은 그 알 수 없는 사정보다 중요해서 이대로 입막음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몸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루미너스 여신 님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이미 그녀의 신앙은 예전 같지 않았다.
'루미너스 여신과 했던 약속'
그가 언급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가 일종의 정신병이 있어서, 자신이 여신과 약속을 나눈 사이라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다는 쪽이 훨씬 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불신과 의심이라는 것은 한결같은 믿음 사이에 끼어든 아주 작고 불확실한 의혹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만일 그가 정말로 여신과 약속을 나눌 정도로 여신에게 가깝고 중요한 사람이라면, 여신이 자신을 따르는 많고 많은 신도 중 하나와 자신과 약속을 나눈 인간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 지 확신할 수 없다. 자애로운 여신께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실 리가 없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한 없이 가까우면서도 먼 여신이라는 존재가 한 명의 인간과 개인적인 약속을 나눴다는 시점에서 이미 자신의 믿음을 관철하는 것은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지만,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그 진의를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태껏 자신들을 거의 방치하디시피 했던 그가 이토록 진심으로 자신을 처리하려 들 리 없으니까.
애시당초 여신과 나눈 약속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녀를 믿고 따르는 신도들이 이렇게나 많은 데, 왜 루미너스 여신 님이 자신의 신도를 두고 굳이 저런 악한 남자와 약속을 나눈다는 말인가? 만일 정말로 그가 여신과 약속을 나누었다면, 대체 그는 정체가 뭐지? 그 약속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고?
머릿속이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그런 와중에,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들이 방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 한 번 가볍게 휘저으면, 그걸로 끝.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왜인줄 아나?"
"..."
정말로, 어째서일까? 그는 왜 자신들을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러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일까? 혹시 여신과 나눴다는 약속이라는 것이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알고 싶다면, 내 거래에 응하면 된다."
"만일, 응하지 않겠다면요?"
"나야 증거를 인멸을 할 수 밖에 없지."
죽인다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악행을, 어찌 이렇게 쉽게 내뱉는다는 말인가. 혹시나 그가 일부러 악을 연기하는 위악자일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 사실을 후회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만큼 그는 살인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남자가, 사실은 선한 사람일리 없다. 그는 분명히 악이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구제할 방법이 없는 지독한 악.
"너를 죽이면 그 뒷처리가 귀찮지. 가급적이면 죽이고 싶지 않으니,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좋겠군. 정 협력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에일라는 저 말이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절 살려주시는 건가요? 거기에, 시키는 일만 하면 세 가지 질문에 답해주신다고요?"
"내가 아는 한에서, 그리고 답해줄 수 있는 한에서 말이지. 난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일부러 어기지는 않는다."
"...어차피 제게 선택지는 없는 거나 다름 없지 않나요."
그렇다. 선택지는 없다. 그가 무엇을 시킬 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거절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죽음 뿐. 그렇다면 차라리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설령 약점이 잡히게 되더라도, 루크와 동료들이라면 자신을 분명 구해줄 테니까...
"좋아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제게는 당신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그 세 개의 질문 중 하나를 지금 하게 해주세요."
혹시나 그가 자신을 그저 속이고 이용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캐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제안을 가볍게 승낙했다.
"그래, 좋다. 뭐가 궁금하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죠?"
이미 이 세상에 적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엘하임 왕국의 지배자인 바이올렌스 여왕 밖에 없으며,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기묘한 힘을 갖고 있다던 그녀조차도 오래 전에 그와 한 번 충돌했다가 패배하고 물러나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을 정도로 그는 강하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가진 것들이 다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라며 뒷담화를 하기도 하지만, 엘리아는 오히려 그 점이 소름이 돋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은 스스로 쌓은 것이 아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이란 그만큼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마련.
그렇다면 이 남자는, 지금의 이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한 것일까?
교단의 옛 문헌에도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해 강한 힘을 얻은 흑마법사들은 많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라그나 아마게돈과 같은 홀로 마탑을 무너트리는, 다른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위업을 이룬 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에일라는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대체 눈앞의 이 남자는 무엇을 이루고 싶었기에, 그만한 힘을 얻어낸 것인가.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 우리의 잘난 용사 님께서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서, 내 뒤에 있는 불멸의 용을 처리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지."
그 순간, 엘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을 뻔 했다.
*
엘리아가 엿들은 그의 혼잣말은 아주 작은 돌이었다. 그러나 우연찮게 던져진 그 돌은 그녀의 마음이라는 작은 샘에 파문을 일으키고, 깨끗한 물은 바닥에서 일어난 흙으로 더러워졌다.
아주 작은 의혹이 믿음을 무너트리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잃은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면도, 다른 사람에게 감추고 싶던 부분도, 모두 드러난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녀의 앞에 선 라그나 아마게돈이라는 사내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다루는 것에 아주 능한 남자다. 그 중에서도 그가 특히 잘 파악하는 사람의 마음이 바로 욕망이다. 인간이 품은 욕망, 인간이 가진 가장 기초적인 감정 중 하나이며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 동시에 과할 경우 주인을 파멸로 밀어버리는 그 마음.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자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은밀한 욕망까지, 그는 사람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에 아주 능했다.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도 물론 아주 익숙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믿기 힘든 온갖 혼란스러운 정보로 인해 믿음을 잃은 여신관의 마음 속 욕망을 읽어내는 것 정도야 무척 손쉬운 일이었다. 마음이 흐트러진 사람만큼, 속내를 읽기 쉬운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그저...
'.....뭐야, 이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대답이 결정타가 되어 그녀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그로서도 예상 외의 상황이었다. 아마게돈 남작은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보험을 해두는 김에, 기회가 있으니 그녀의 욕망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비록 신을 섬기는 자의 욕망을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아마게돈 남작은 처음으로 타인의 욕망에 불쾌함을 품었다. 혹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이상한 욕망을 품고 지내는 걸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그가 마주한 그녀의 은밀한 욕망은 굉장히.... 특이했다. 그는 이전에 한 번, 이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어두운 욕망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까지도.
본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호크나처럼 타락할 여지를 두려고 했지만, 아마게돈 남작은 그 마음을 싹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엘리아의 검은 욕망에 부채질을 하는 대신, 자신과의 거래를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한 보험만 걸어두고서 그녀의 내면에서 다시 눈을 돌렸다.
엘리아를 돌려보낸 후, 아마게돈 남작은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쪽 취향이 아니거든. 생긴 것은 마음에 들지만, 타락의 속삭임을 쓸 수는 없겠군. 애초에 용사의 동료이기도 하고. 뭐... 호크나에게 손을 댄 시점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쟤는... 어후, 진짜 아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