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62화 (62/229)

〈 62화 〉 아아~ 망해써요~(3)

* * *

'타짜'

흔히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전문 도박꾼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사기 도박으로 승부 조작을 하는 도박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 타짜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로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타짜는 승산 없는 게임에 절대 뛰어들지 않습니다. 타짜가 나섰다는 것은, 사실상 그 판은 그들이 이길 수 밖에 없는 형태로 짜여져 있다는 뜻이죠."

상대가 가진 패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길 때만 강하게 나서는 것은 초짜다. 진짜들은 다르다. 그들은 상대의 패를 몰래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질 패를 자신이 직접 고른다. 그리고 처음에는 일부러 져줌으로서 상대가 더 깊은 수렁에 발을 들이도록 유도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방심한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 그것이 진짜 타짜다.

"과연 방해꾼들은 무슨 수를 써서 네 명의 악역 보스를 약화시키려고 했고, 제 차례에서 그것이 실패했는가. 간단해요. 그들은 그 두 녀석에게 직접 손을 썼습니다. 자신의 힘을 불어 넣어 약화시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을 놓음으로서 용사가 힘들이지 않고 쉽게 그들을 쓰러트리게 만든 것이죠."

[하지만 자네는 오히려 용사를 이겼지. 그럼 이미 쓰러진 둘과 자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지?]

"간단합니다. 저는 그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거든요. 갑작스레 생겨난 중요한 인물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불려온 대타,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본디 그들의 세계에 속한 피조물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제게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군. 신이 손을 쓸 수 있는 범위는 자신이 맡은 분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상과 직접 만든 피조물 뿐이라 하지 않았나? 하지만 무대를 준비한 존재는 루미너스지. 그러니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 방해꾼은 루미너스가 되는 셈이지 않나?]

"하지만 루미너스 여신의 자작극은 아닙니다. 그녀는 이 연극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쪽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네의 말에는 모순이 생기지.]

"네. 저도 그래서 처음에 혼란에 빠졌죠. 하지만 루미너스 여신이 제게 내려준 이 신탁이 힌트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타짜들은 지지 않는 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수법은 다양하죠. 몰래 카메라 같은 것으로 상대의 패를 확인하는 것은 애교이고, 패를 섞을 때 손기술을 이용해서 원하는 패로 나오게 하거나,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포섭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기도 하죠. 그리고 타짜들이 사용하는 기술 중에는... '바꿔치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패를 다른 패로 바꾸는 손기술이죠. 방해꾼들이 한 짓도 똑같습니다."

처음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고, 그들은 신이다. 참새는 봉황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왕은 거지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방해꾼들이 한 짓은 바꿔치기입니다. 용사의 손에 쓰러질 적들을, 자신들이 만든 적으로 바꿔치기 한 셈이죠. 그것도 기존에 있던 적들과 외모부터 능력이나 성격까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거의 동일인물이나 다름 없는 타인으로."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루미너스의 피조물이라면 손을 쓸 수 없지만, 자신의 피조물이라면 얼마든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 가설에는 하나의 근거가 있죠. 바로 접니다. 애초에 제가 이 연극에 참여하게 된 이유부터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존의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을 대체하기 위해서였죠. 그렇다면 기존의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은 어디로 갔을 까요?"

[...그렇군. 루미너스가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방해꾼들은 중요한 등장인물 몇을 자신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녀석들로 바꿔치기하려 했고, 그 공백을 도중에 눈치챈 루미너스는 황급히 자네라는 대체제로 그 틈을 메운 거야.]

"방해꾼들도 당황했을 겁니다. 진짜 라그나 아마게돈을 치우고 가짜 라그나 아마게돈을 그 자리에 놓으려고 했는데, 가짜를 데려왔더니 그 자리를 또 다른 라그나 아마게돈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연극은 시작되었고, 앞의 두 녀석들은 계획대로 손쉽게 쓰러졌죠. 그리고 루미너스 여신의 선택은 객관적으로 보면 섣부른 응급 조치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있는 줄도 몰랐던 방해꾼들의 계획을 중간에 틀어막은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죠."

[그야말로 '신의 한 수'로군. 큭큭큭.]

그렇다. 이게 바로 방해꾼들이 루미너스 여신의 연극을 방해하기 위해 준비한 계획의 전말, 그 첫번째. '악역 바꿔치기'다. 고작 한 여신이 준비한 연극을 망치겠답시고, 그녀의 세계를 복사한 평행 세계를 만들고 그곳에 있는 자신이 만든 등장인물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바꿔치기 당한 원래 등장인물, 그리고 가짜 등장인물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평행세계는 필요가 다했으니 그대로 처분했을 테지.

필요에 의해 창조되고, 필요가 다해 멸망했다. 고작 한 여신을 방해하기 위해, 최소 하나 이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비합리적인 운명. 나는 그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방해꾼들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번째 계획은 저로 인해 실패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계획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혼자 있는 동안에 알 수 없는 존재에게 공격당한 것, 그리고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바이올렌스가 '대본'에 없는 이상 행동을 벌이는 것이 그 증거죠. 그 자들은 바이올렌스를 이용해 다시 한 번 연극을 망칠 계획일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연극을 망칠 것이라 보고 있지?]

"간단합니다. 용사를 죽이는 거죠. 이미 용사는 그들의 방해 공작에 의해 기대치보다 약해진 상태이니, 본래보다 조금 강한 적을 등장시키는 것으로 용사 파티를 완전히 전멸시킬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등장하는 조금 강한 적은... 루미너스 여신이 준비한 '설정상 최강자'인 '전 용사'. 엘하임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바이올렌스의 조상인 '전 용사'을 되살려서 '현 용사'의 적으로 내세울 셈이겠죠."

[.....]

검은 그림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더니, 이내 손뼉을 마주치며 웃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일부 거세한 것을 빼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자네가, 설마 여기까지 도달할 줄이야. 정말 놀라워. 언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그것도 공포를 적출한 덕분인가?]

"공포가 없어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이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철저히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번 일이 제 능력상 할 수 있는 일에 속했을 뿐이죠."

[그래서, 자네는 이제 어쩔 셈이지? 루미너스에게 소원권을 얻기 위해서라도 연극을 무사히 끝마쳐야 하지만, 최소 하나 이상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그것을 막으려하고 있지. 자네는 어떻게 막을 셈인가.]

"그건 말이죠..."

나는 그림자에게 내가 세워둔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러자...

[....푸흡, 크흐흐... 하하하! 으하하하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 놀라워! 전혀 예상치 못 했어! 자네는 정말 천생 엔터테이너로군! 그래, 진짜 엔터테인먼트는 관객이 예상을 깨부숴야 하는 법!]

아무래도, 나는 나의 팬을 자청하는 관객의 마음에 아주 쏙 든 모양이다.

[결정했어. 자네라면 조금 더 날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자네에게 조금 더 투자하겠네.]

따악. 그림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붉은 고깃덩어리로 이루어진 벽면들이 요란하게 요동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맥박과 시뻘건 살갗이 드러난 덩어리들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크기와 형태의 표정 없는 하얀 가면들이 벽과 바닥과 천장을 가득 메웠다. 그림자가 위로 손을 뻗자 가면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나온 새카만 어둠이 그림자의 손 위에 모여들었다. 마치 심장이 뛰듯, 요동치는 검은 힘의 맥박이 이내 잠잠해지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조각으로 변했다.

"이건..."

그것은 내게 아주 익숙했다. 내가 항상 줄을 연결하여 목에 걸고 다니던 혼돈의 파편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내게 다가와, 내 가슴 팍에 그 조각을 꽂았다. 조각은 내 연약한 살을 헤집어 상처를 내지 않고 마치 물 속에 스며들듯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파편이 들어온 부위를 만져보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의 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목에 걸고 있던 조각에서 뽑아서 쓰던 힘이, 이제는 내 몸 어디에서든 느껴진다.

파편이 내가 된다?

[이제 자네는 목에 걸고 다니던 그 조각과 별개로 평소에 쓰던 힘을 사용할 수 있네. 본래의 힘을 강화하고, 거기에 몇 가지 권능을 추가해 줬고, 또한 자네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힘도 조금 일깨웠다네. 자네의 팬으로서 주는 특별한 선물이라네. 이런, 슬슬 시간이 다 되었군. 다시 돌아가서 자네가 맡은 의무를 다할 시간이야.]

기존에 나의 상태는 라그나 아마게돈이라는 재능도 주인도 없는 몸뚱아리에 깃들어 혼돈의 파편에서 뽑아낸 힘을 기반으로 얻어낸 것을 휘두르던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눈앞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내가 평소에 쓰던 힘을 육체가 아닌 영혼 그 자체에 불어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령 내가 무대에서 맡은 바를 다 하고 그 소원으로 다른 세계로 향하더라도, 나는 이제 라그나 아마게돈으로서 쓰던 어둠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축복을 이렇게 가볍게 선물로 준다니, 대체 이 자는 정체가 뭘까?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존재이길래, 이런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행하는 것일까?

"혹시 당신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의 이름 말인가?]

서서히 눈앞이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사람의 형상을 띈 검은 그림자는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아버지, 눈 먼 혼돈의 사자이자 대리인. 천 가지 모습의 군주이자 총체적인 혼돈의 군주, 그리고 기어오는 혼돈.... 에이, 씨. 이제 이런 소개도 귀찮아 죽겠군. 다음에 나를 만날 때는, 가볍게 '니아' 정도라고 부르게나.]

...망했군.

그것이 외신(外?)의 영역에서 튕겨져 나가 다시 원래 세계에서 의식을 되찾은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

천둥과 독기가 서로 맞부딪힌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을 순식간에 검게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지만, 그 잿더미를 파헤치며 타버린 시체들 이상의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시체를 조종하는 검은 로브의 여인도, 두 손에 뇌격을 두른 근육질의 남자도, 그 얼굴에 지친 기색이 뚜렷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비록 이 공간에서는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름 최소 한 개 이상의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더 격이 높은 존재도 아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는 것은 신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항복... 하겠다고, 말 해...!"

"어림... 없는.. 소리...!"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는 두 존재가 마침내 싸움을 멈춘 것은.

[그래서 너희 대체 언제까지 싸울 셈이야?]

그들이 창조주의 눈을 속이고 만든 이 비밀 공간에 난입한 제 3자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뭣...? 여길 도대체 어떻게...!"

"이, 이 혼탁하고 혼란한 기운은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당신이, 당신 같은 존재가 어째서 이런 곳에...!"

오직 둘 만이 존재해야 하는 공간에 나타난 다른 누군가의 난입에 번개를 두른 남자는 당혹을 금치 못 했고 대낫을 든 여인은 상대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경악했다. 그것은 둘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으며 달아난다고 해서 뿌리칠 수 없는 존재였고, 수틀리면 자신들 정도는 흉측한 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존재였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도망치려는 낌새를 보인 순간 그대로 다진 고기가 되어버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것은 제정신이 아닌 존재였으니.

[중요한 건 내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느냐겠지. 너희들이 한 짓은 별로 재미가 없는 짓거리긴 한데... 덕분에 재밌는 녀석을 찾을 수 있었거든? 그래서 특별히 너희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우리를 잡지 않고 보내주겠다고?"

[뿐만 아니라 기회도 주겠다는 거지. 자, 받아.]

휘익, 텁. 수백 줄기의 검은 선 같은 것들이 얽혀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존재는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던져주었고, 그것을 받은 것은 낫을 든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어째선지 누르는 순간 돈 몇 푼을 대가로 자신의 정신만 5억년을 보낸 후에 그 기억을 잊게 해줄 것만 같이 생긴 불길한 빨간 버튼 하나 툭 달린 물체를 이게 뭔가 하는 눈으로 살폈다.

[판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판을 엎어버리면 되지. 그걸 누르는 순간, 단 10분 동안 이 세계와 바깥 세계의 연결이 끊어질 거야. 연결이 끊어진 동안, 바깥 세계의 존재는 이 세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확인할 수 없지. 뭐, 그 대신에 너희들도 자신의 세계의 힘을 가져올 수 없으니 본래 힘의 절반 밖에 발휘할 수 없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인간에게 지는 신 따위가 존재할 리 없잖아?]

낫을 든 여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정체를 감추기 위해 직접 나서는 대신 판을 조작하며 원하는 결과를 내려 했지만, 루미너스가 고용한 골치 아픈 훼방꾼 하나 때문에 계획이 전부 망하기 직전인 상황이다. 그런데 이걸 사용하여 그 골치 아픈 훼방꾼만 처리한다면, 얼마든지 루미너스의 연극을 망칠 수 있다. 그야말로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다. 누구보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악의의 결정체다. 그에게 광기는 친구요, 혼란은 자장가다. 그런 존재가,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런 물건을 아무런 이유도 대가도 없이 줄 리가 없다.

이건 함정일 것이다. 아니, 분명히 함정이다. '그'의 평소 행적을 생각하면, 이 물건 자체의 효과는 설명한 그대로일 테지만 사용한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지만,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 무언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어도, 정확히 무엇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그녀는 물건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도대체 저 비틀린 악의와 뒤틀린 광기의 결정체가 무슨 방법으로 자신들을 엿먹일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은 손에 든 물건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단지 그 물건을 준 당사자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이 물건이 필요했다. 바깥 세계의 시선 때문에 직접 움직일 수 없으며 연극이 끝나기 전까지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없는 그들이 바깥 세상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있는 물건을 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마 그것까지 전부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것을 건넸으리라.

탈수로 목이 바싹 마른 사람에게 건네는 독이 든 성배다.

지금 당장의 급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으나, 결국 파멸하는 미래를 바꿀 수 없는 무의미하고 추한 발버둥이다.

[그걸 어떻게 써먹을 지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잘 결정해. 뭐든 좋으니까, 지금처럼 서로 싸우기만 하지는 말고. 솔직히 너희들의 싸움...]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귓가에 들리는 알 수 없는 이명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구역질 나는 공기의 흐름에,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만 같은 절로 긴장하게 되는 감각에, 낫을 든 여인과 뇌권의 사내는 비명은 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더럽게 재미가 없어서, 둘 다 확 죽여버리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

조금 전까지 들뜬 것이 다 거짓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섬뜩하리만큼 예리한 살기와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그러진 광기에, 그녀는 빈 속을 게워낼 것만 같았다.

[...그럼, 나는 이만 눈치껏 빠질게! 둘이서 알아서 잘 해봐! 기왕이면 아주 크게 터트리라고. 그 편이... 재밌을 테니까?]

인간을 어설프게 흉내낸 불쾌하기 그지 없는 형태로 상큼발랄한 소녀 같은 말을 내뱉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가 비밀 공간을 떠났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 앞에서 위축되었던 두 남녀는 그제서야 보이지 않는 힘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젠장, 젠장...! 이 미친 자식,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뭘 어쩌라는 거냐고!!"

"우읍, 우웨에에엑...."

평범한 인간 앞에선 절대적인 초월자인 그들조차도, '그'의 앞에선 훅 하고 불면 꺼지는 위태로운 촛불의 불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신의 경지에 이른 후 오랜만에 떠올린 존재의 소멸의 위협에 사내는 바닥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자신의 두려움을 분노로 표출했고, 여인은 헛구역질을 하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방해가 되는 자를 미리 쳐내기 위해 평소처럼 가볍게 수작을 부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루미너스를 낚기 위해 던진 낚시 바늘을,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두려운 존재가 물어 버리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이건 전부 네 탓이라며 서로 책임 전가를 하며 다시 싸울 것만 같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이 골치 아픈 사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유일한 파트너와 말다툼을 해봤자 눈앞에 닥친 무거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기는 커녕, 그 미친 놈이 다시 찾아와서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방식으로 그들을 요리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