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64화 (64/229)

〈 64화 〉 아아~ 망해써요~(5)

* * *

바이올렌스의 부재로 인해 끝날 길이 보이지 않던 엘하임 왕국 장기 체류는 오늘을 기점으로 끝나게 되었다. 마침내 사하가 바이올렌스가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캐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수고했다, 사하."

"아닙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중요한 정보를 더 빨리 드리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바이올렌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예기치 않게 길어진 체류도 네 덕분에 오늘로 끝났으니, 네 공이 크다. 그럼..."

나는 사하에게 쉬어 두라고 명령한 후, 그녀가 가져온 지도를 살폈다.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엘하임 왕국. 수도 엘 하르다의 북쪽은 전 용사가 불멸의 용의 추종자들 수 백 명과 사흘에 걸쳐 혈전을 벌였던 '전사의 무덤'이라는 언덕과 불멸의 용이 봉인된 지하 신전만이 있을 뿐, 아주 작은 마을 하나 없는 척박한 땅이다. 현재 바이올렌스가 있는 곳은 '전사의 무덤'. 지하 신전에 불멸의 용을 봉인한 후 행방이 묘연해진 전 용사에 대한 무언가 흔적을 찾은 것인지, 그녀는 로얄 나이트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

근처에 제대로 된 마을 하나 없기에 필요한 생필품은 소수의 로얄 나이트들이 전사의 무덤과 수도 엘 하르다를 왕복하며 보급해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사하가 그녀에 대한 정보를 구해온 것도 보급품이 담긴 마차를 끈질기게 미행한 덕에 겨우 성공한 결과다. 보통 지도자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나라는 개판이 되기 마련인데, 엘하임 왕국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얻은 여왕이 최소 일주일 이상 자리를 비웠음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정말 평소와 같았다.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정보 차단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바이올렌스는 이번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지.

"바이올렌스 직속 최정예라고 해봤자, 사실 내 기준에서는 몇 놈 빼고는 그리 위협도 되지 않는 놈들 뿐이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지. 그 얼마 안되는 놈들이 굉장히 귀찮으니."

가장 대표적인 놈들을 몇 꼽는다면, 우선 4 기사인 엘라, 아이리스, 엔도, 케일이다. 로얄 나이트 중에서도 가장 합이 잘 맞는 놈들로, 이 네 명이 연계해서 덤빈다면 내 부하 중에서 순수 전투력면에서 최강인 마르스조차도 조금 애를 먹을 정도다.

다음으로 은기사 아르젠트. 루미너스 교단 성기사 출신으로, 루크처럼 신성력을 사용하며 싸우는 검사다. 다룰 수 있는 신성력의 총량 자체는 루크에 비하면 턱없이 적어서 길어봐야 하루 10분 정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문제는 그 신성력을 다루는 숙련도 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반대로 신성력을 활용하는 그 10분 동안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 없다. 내가 전력으로 힘을 쏟아붓는다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녀석을 혼자서 상대한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마도기사 목스. 분명 마법사인데,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육체 단련을 끊이지 않고 하다가 기사가 된 제정신이 아닌 놈. 근접전이면 단련된 육체와 마법이 인챈트 된 무구로, 상대가 거리를 벌리면 마법을 쏴대며 싸우는 하이브리드형 캐릭터다. 보통 이런 캐릭터는 이도저도 아닌 좆망캐이기 마련인데, 이 놈은 그 에매한 위치를 남들의 몇 배나 되는 노력으로 상쇄해버렸다. 로얄 나이트 내에서 가장 강한 화력을 담당하며, 광범위 공격 마법을 쓸 줄 알기에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놈이다.

마지막으로 로얄 나이트의 단장인 흑기사. 이 새끼가 젤 문제다. 이 미친 새끼는 바이올렌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사생아인 탓에 계승 순위가 최하위인 시절에도 따르던 녀석이다. 칙칙한 흑색 갑옷을 항상 입고 다니는 괴짜인데, 실력 하나 만큼은 얼마 없는 진짜로, 로얄 나이트 중에서 내 부하들 중 가장 강한 마르스가 일 대 일로 이길 수 없는 유일한 놈이다. 이 녀석이 없다면, 로얄 나이트의 전력이 절반은 줄어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4기사 놈들은 레이에게 맡겨야겠군. 아무리 연계가 좋아도 압도적 물량 앞에선 의미 없으니. 마도기사는 암살에 능한 사하가 은밀히 처리하면 되겠지. 문제가 있다면 은기사와 흑기사인데... 하루 10분에 한해서 무적이나 다름 없는 귀찮은 놈과 나도 상대하기 조금 꺼려지는 놈만 남았군. 용사 일행을 끌어들이면..."

일단 흑기사는 안 된다. 용사 파티에게 놈을 상대하게 한다면, 순식간에 전멸한다. 흑기사 녀석의 위치는 전에 우리 영지에서 레이가 길들이는데 성공한 그 거대 마수와 비슷하다. 보스보다 더 강한 몬스터, 우스갯소리로 진보스라 불리는 놈들. 흑기사 하나와 바이올렌스 셋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바이올렌스를 고를 정도로, 흑기사는 굉장히 강한 놈이다. 도대체 마법도 못 쓰는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지.

그럼... 역시 루크는 은기사를 상대시켜야겠군. 녀석과 싸우다 보면 신성력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있겠지. 문제는 흑기사가 바이올렌스의 곁을 지키고 있을 거란 점인데... 그럼 역시 내가 나설 수 밖에 없나. 마르스를 바로 데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흑기사를 대처할 마땅한 상대가 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누구에게 누굴 맡게 하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점이다. 바이올렌스도 머리가 텅텅 빈 년이 아니기에, 내 앞에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곧 각개격파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로얄 나이트들을 한 곳에 모아둔 후, 나와 싸울 때는 어떻게 해서든 한 공간에서의 난전을 유도할 것이다.

레이가 4기사를 상대할 경우 높은 확률로 은기사가 함께하여 그들을 도울 것이고, 전략상 중요한 화력 담당인 목스는 암살자인 사하에게 노려지지 않기 위해 가장 안전한 장소인 흑기사와 바이올렌스의 옆에서 공격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투의 양상은 답이 없어진다. 각개전투면 몰라도 그런 난전 속에서 용사 일행이 반드시 나의 편을 들어주지라는 보장이 없으니, 결국 전투는 삼파전으로 흘러가겠지.

그 전투에서 용사와 일행이 죽지 않도록 지키면서, 용사 일행의 다음 시련이 되어줄 나의 병력의 손해를 최소화하고, 바이올렌스의 주요 병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니.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골치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한창 영지 침공으로 바쁜 마르스를 불러올 수도 없다. 그녀가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 정도면 이미 바이올렌스가 전 용사의 유해를 발굴해 다시 부활시켜,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으리라.

...그래. 중요한 건 그 '전 용사의 유해'다. 바이올렌스가 정말로 '방해꾼' 녀석들의 도움을 받은 건지,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문제의 그 유해를 찾느냐 마느냐가 이번 일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깨웠다. 나는 문 너머를 향해 물었다.

"누구지?"

"..나, 나야."

"뭐야, 호크나 너였나?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며, 호크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굉장히 옷차림이 얇은 그녀였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에이, 노출이 심해봤자 얼마나 심하겠냐고? 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 하니까 하는 말이다. 의복이 의복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있어서, 다리 사이에 절로 피가 돌았다. 내일 컨디션을 생각해서 오늘은 여자를 안을 생각이 없었지만... 호크나는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대놓고 나를 유혹하기 위한 복장으로 찾아옴으로서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

"...이, 이거 이번에 한 번 사본 옷인데 어, 어떻게 생각...해?"

오, 제발. 평소에도 짧은 소매의 셔츠와 반바지 같이 가볍고 편한 옷차림을 선호하는 호크나였지만, 오늘 입은 옷은 그 정도가 한층 강했다. 핫팬츠에 크롭티라고? '날 따먹어주세요', 이런 건가? 털 한 가닥 자라지 않은 매끄러운 겨드랑이와 잘록한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라인, 그리고 보는 사람이 절로 침을 삼키케 만드는 튼튼한 허벅지까지... 너무 잘 어울리다 못해 그렇지 않아도 엘프 특유의 예쁜 미모에 강렬한 색기가 더해져, 나는 하반신에 피가 절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녀의 눈을 본 순간, 나는 인내심이 툭 하고 끊어졌다.

"어, 어어...?"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가 서 있는 입구까지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방문을 닫고 곧바로 걸어잠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기대 반 부끄러움 반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호크나의 얇은 허리와 어깨에 손을 얹어 안고서 그녀를 침대까지 밀어냈다.

"이미 한 번 몸을 섞었던 사이인 남자가 혼자 있는 방에, 그 남자의 성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옷차림으로 왔다는 건, 나를 유혹하려고 한 건가?"

"..."

"호크나?"

".....이, 일일히 허락 받지 말고 그냥 하면 되잖아, 이.... 이 바보야. 구, 굳이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해야겠어?"

나는 호크나를 침대에 눕힌 후,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치며 몸을 꼭 끌어안았다. 얇고 가는 라인에 피부는 부드럽지만, 그렇다고 연약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호크나의 몸은 평균적인 엘프 특유의 병약한 이미지에서 꽤 멀었다. 눈으로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접촉하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고되고 거친 삶의 영향으로 단련된 몸은 나의 욕망을 마음껏 쏟아 부어도 망가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럼 호크나, 네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겠다."

"...흐, 흠... 하,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던가..."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말한 그녀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단어가 나오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후우, 짜증 나."

무수히 많은 종류의 무기들이 묘비 마냥 바닥에 거꾸로 꽂혀 있는 넓고 황량한 언덕. 엘하임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전사의 무덤' 앞에 설치한 베이스캠프 안에 준비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바이올렌스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2주 다. 수도 엘 하르다에 있는 성에서 나와 이런 짜증 나는 장소에서 지내게 된 지 벌써 2주일이나 지났다는 뜻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던 혈족이라는 것들을 전부 목을 쳐내고 왕위에 오른 후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언제든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던 바이올렌스에게 있어서,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2주나 지낸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차마 다시 엘 하르다에 있는 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 달 전부터 은밀히 시작했던 전 용사의 유해 발굴 작업은 좀처럼 순탄치 않았다. 거기다가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힘을 얻고 난 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자신의 영지를 벗어나는 일이 없던 그 망할 남자가 느닷없이 영지를 나와 엘하임 왕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주변에 깔아둔 정보원들을 통해 접했을 때, 바이올렌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불행히도 '도망'이었다.

단순히 그가 자신과 같이 혼돈의 파편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지배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은 파편을 가지고 있던 다른 두 명,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복수심에 눈이 먼 병사와 미친 학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가 라그나 아마게돈을 두려워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된 일이 원인이었다.

비록 지배 능력으로 직접 제어할 수 없어도, 그는 이미 몰락한 가문의 귀족이며 자신은 한 나라의 여왕. 권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기에, 굳이 그를 직접 지배할 수 없더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연이은 영지전으로 다른 귀족들을 잡아 패죽이며, 어느새 헤르몬 왕가에서도 그를 어찌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는.

몰락한 귀족이었던 그는 어느새 자신이 속한 왕국을 유지하는 두 개의 공작가 중 하나를 단신으로 무너트리는 지경에 이르었고, 바이올렌스는 그제서야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그는 언젠가 스스로 왕을 자청하며 헤르몬 왕가를 집어삼킬 것이며 그것은 곧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이올렌스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 로얄 나이트를 보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영지에 무단으로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다른 일을 명목으로 헤르몬 왕가에 사절을 보내는 과정에서 그의 영지를 지나던 도중 그의 사병들과 시비가 붙었고 그것이 곧 왕국과 왕국 사이의 문제라 할 수 있을 법한 큰 싸움으로 번진다.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은 로얄 나이트들에 의해 사병이 쓸려나가며 병력을 잃고, 헤르몬 왕가에서는 그것을 문제 삼아 그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녀가 짠 본래의 시나리오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싸움이 번지는 과정에서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라고 할 수 있는 로얄 나이트들이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그의 손에 생포당하는 참사는 적어도 그녀의 계산에 없었다는 것이다.

로얄 나이트들이 중요 인물들을 죽여 입막음 함으로서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 올 수 있었다면 몰라도, 시비를 걸었다가 제대로 된 피해도 없이 전부 산 채로 붙잡히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더욱이 라그나 아마게돈이 이를 외교적 문제 삼아 자신을 향해 공격을 가해 온다면, 주 병력의 반을 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권력을 지켜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바이올렌스는 급히 라그나 아마게돈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어떻게든 인질로 잡힌 로얄 나이트들을 최소한의 몸값만 내고 돌려받을 수 있었다.

적의 기량을 멋대로 지레짐작하고 공격했다가 자신이 건드린 것이 벌집도 아니고 잠자는 마수의 콧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일은 바이올렌스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첫 패배이자,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한 공포감을 심어주는 사건이었다. 그 두려움은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헤르몬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이후로는 더욱 커졌고.

그런 그가 엘하임 왕국으로 온다는 소식에 바이올렌스는 그 날의 트라우마가 다시 되살아났고, 주요 병력들을 모두 데리고 왕성을 빠져나와 전 용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이 한창이던 이 '전사의 무덤'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녀가 이곳에 있어도 그녀가 가진 지배 능력은 여전히 발휘되기에 자리를 비운 동안 왕위를 빼앗긴다거나 하는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만, 바이올렌스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부하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음에도 언제 어디서 그가 나타날 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더군다나 그는 성적 생활이 굉장히 방탕하기로 유명하지 않던가? 만일 그를 만나게 된다면 단지 패배하여 목숨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굴욕적인 짓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그녀의 두려움을 부채질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라그나 아마게돈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전까지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바이올렌스는 왕국에 심어둔 정보원들을 통해 계속해서 그의 행적을 감시했다. 혹시나 무대포로 왕국에 처들어가, 그대로 자신의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를 왕으로 자청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다행히 그가 왕궁을 공격하기는 커녕 오히려 왕국 내부의 치안을 어지럽히던 두 마녀의 갈등을 해결했지만, 바이올렌스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선행을 배푸는 선한 인간이 아니니까.

혹시 저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아닌 걸까? 그 요구를 거절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나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애초에,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의 나라에 온 거야? 도대체 뭘 원하길래 아직도 나의 나라에서 나가지 않는 거지?

생각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다. 그 점이 더욱 짜증나서, 바이올렌스는 솟구치는 짜증을 숨김없이 표출하며 텐트를 나섰다. 본래 로얄 나이트들이 머무르기 위해 만들었던 베이스 캠프이니만큼 여왕인 그녀가 머무를 정도로 퀘적한 시설은 아니었던 데다가 식사로 가져올 수 있는 보급품도 다른 왕국에서 자신의 부재를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적정량만 가져올 수 있었기에 바이올렌스는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리고...

"여왕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 이번엔 또 뭐야?"

"그 남자, 라그나 아마게돈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충신, 흑기사는 너무나도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녀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방향은 북쪽. 오늘 아침에 막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 남자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최소 다섯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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