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아아~ 망해써요~(8)
* * *
망했다, 망했어, 망했다고.
빌어처먹을, 바이올렌스 녀석이 결국 전 용사를 부활시키고 말았다. 그녀 딴에는 최강의 전사를 부활시켜서 자신의 능력으로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이었겠다만, 그게 가능했다면 나와 그녀가 가진 힘의 원래 주인인 불멸의 용이 진즉에 시도했을테지. 게다가 뭐가 문제인지 용사는 갑자기 바이올렌스를 칼로 찔러버리고! 바이올렌스는 여기서 죽으면 안되기에 일단 급하게 지혈을 했지만, 현 용사 루크보다 몇 십 배는 강력한 신성력을 뿜어내며 나까지 죽이려 드는 전 용사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결국 풍둔아가리술을 시도하게 되었다! 지난 회 요약은 여기까지!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라니?"
"말 그대로. 나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살던 인간이야. 어느 날 갑자기 루미너스가 이곳으로 불러내기 전까지는 그랬단 말이지."
이어지는 내 말에 (전)용사 셀레스트리얼 아르카나, 줄여서 셀레나의 찌푸려진 미간이 조금 펴졌다. 눈앞의 이 설정상 최강자를 내가 말로 설득해내지 못하면 이 연극이 전부 파토날 것이 뻔한 상황. 나는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비교하며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서 오해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이전에 그녀가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도록 나를 루미너스의 동업자가 아닌 루미너스에 의해 생겨난 또 한 명의 피해자라는 듯이 소개했다.
조금 전부터 셀레나의 언동은 마치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이용 당했다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루미너스 여신은 사람을 이용하고 쓸모가 다하면 그대로 버리는 인성이 못 되어 처먹은 신은 아니었다. 특히 그녀처럼 원래는 인간이었던 신이라면 더더욱. 그녀가 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루미너스가 널 불러냈다고...? 어째서지?"
"이봐, 질문은 서로 한 번 씩 주고 받아야 공평하지 않겠어?"
스르릉.
"지금 네가 내게 질문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목에 겨눠진 칼날, 그곳에서 나오는 눈부신 신성력에 목이 절로 따가워져 왔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셀레나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위압감은 설령 상대가 불멸의 용이라도 움츠러들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스로 공포라는 감정을 적출해 냈기에 나 자신의 죽음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내겐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네가 나를 해치우는 것은 매우 쉽겠지. 하지만 그럼 너는 원하는 정보를 평생 얻을 수 없을걸? 물론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크겠지만, 그만큼 궁금하잖아?"
그녀가 지금 나를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가진 정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보를 말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죽일 것이고, 아는 정보를 다 말해도 필요가 다 했다며 죽일 것이다. 결국 내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선, 내가 아는 한정적인 정보를 그녀에게 알려주는 과정에서 그녀를 나의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전투 센스는 영 꽝이지만, 이런 분야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내가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했을까? 그녀는 왜 나를 선택한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지?"
"...!"
평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들이 내 입을 통해 나오니, 셀레나는 제법 당황한 얼굴이었다. 타락의 속삭임을 자주 쓰다보니, 이 정도는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한 눈에 다 보인단 말이지.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전사이며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마룡조차 개패듯 두들겨 잡는 최강의 인간이라고 해도 어차피 결국 그 알맹이는 인간이다. 사람의 정신을 읽고 그 안의 어두운 마음을 부추겨 타락시키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게, 그녀의 생각을 읽는 것 정도는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셀레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극히 일부의 정보 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자신이 '전 용사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자신이 동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목숨을 걸고 거의 해낸 여정이, 어차피 그 여정을 명한 여신이 실패하도록 계획해 놨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라도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이 무의미해졌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과의 우정과 자신이 낸 결과 역시 모두 그녀의 손에 만들어진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그녀에게 분노와 증오를 들끓게 만들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그 이유를 전부 알고 있어. 그녀의 밑에서 계속 일하고 있으니까. 이 연극이 무사히 성공하도록, 내부에서 주변 상황을 조율하며 언젠가 찾아올 주역의 칼에 한 줌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는 것, 그게 내가 맡은 역할이니까."
"......"
그녀를 도왔다는 사실에 더불어, 그녀에 의해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까지 한 번에 알려줌으로서 그녀가 생각을 바꾸어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내가 가진 정보가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으며, 일부 조건 하에 그 사실을 말할 의사가 있다면, 그녀는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없다. 설령 그녀가 정말로 루미너스에게 복수를 성공한다고 쳐도, 복수의 쾌감은 한순간이다. 곧 자신이 어째서 그런 일을 당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평생 안고 가야만 한다. 결국, 그녀는 내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너와 나를 비롯한 이 이야기 속에서 운명의 실에 얽힌 사람들의 사정부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까지, 전부 다 알고 있지. 그리고, 어째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도."
"그럼, 원하는 게 뭐지?"
"일단... 곧 이곳에 루미너스에게 선택 받은 현 세대의 용사와 그 일행이 도착할 예정이야. 너희 후임과 그 동료들이지. 그 녀석들과 함께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갈 필요가 있어. 네가 그토록 경계하는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으로 말이지."
"...좋다."
셀레나는 그렇게 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고쳐 쥐었다. 칼날이 바닥으로 향하도록, 손잡이를 양손으로 쥔 그녀는 내가 뭐라고 경고하기도 전에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바닥에 내리 찍었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바닥에 퍼져나가며 마법진의 형상을 띄었고, 눈앞의 광경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지압판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듯한 고통이 온몸에 전해졌다.
빌어먹을, 나 신성력이 약점이란 말이야!!!
*
개기일식으로 빛을 잃고 어둠에 잠긴 세계에서, 용사였던 자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빛은 태양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 눈부신 빛은 전 용사와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그리고 그 빛이 보이던 방향으로 향하던 용사 일행을 휘감으며 한층 눈부시게 번뜩이다, 이내 조용히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태양을 가렸던 달이 다시 자리를 비켰지만, 빛에 휘감겼던 이들은 이미 빛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이것은 신성력을 마법 다루듯이 사용하는, 셀레나가 개발한 일종의 신성 마법이었다. 루크가 다루는 단순 신체 강화 따위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라그나 아마게돈이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신성력의 운용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방식의 기술이었으며, 동시에 셀레나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묘기였다. 신성 마법을 사용하여, 셀레나는 라그나 아마게돈과 그가 말한 이들을 그녀가 증오하는 자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한 곳으로 이동했다.
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창조주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있겠냐만은, 사실 신이라고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들은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장소만큼은, 그녀가 결코 모르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녀의 계획에 없는 곳이니까.
셀레나는 자신의 힘으로 데려온 남자,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파편으로부터 마력을 뽑아내어, 자신의 몸 곳곳에 데인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어우... 젠장할. 진짜 죽겠네."
"...괜찮나?"
"젠장할, 신성력을 쓸 거면 쓴다고 미리 경고 정도는 해달란 말이야. 이 몸뚱아리는 네가 쓰러트린 불멸의 용에게 힘을 받은 인간이라서 신성력에 굉장히 취약하다고.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굉장히 아팠잖아."
"미리 알았다면, 대비할 방법이라도 있단 뜻인가?"
"물론 있지. 그보다 루크 일행은.... 기절했네. 차라리 잘 됐군."
사내의 말에, 셀레나는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했던, 자신의 후임이자 현 세대의 용사. 그리고... 루미너스, 그 여자에게 이용 당하고 있는 또 다른 희생자. 하지만 기절한 루크와 그 동료들을 본 셀레나는 의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이 자가 이번 대의 용사가 확실한가?"
"응? 맞아. 그 쓸데없이 잘생긴 놈이 용사인 루크고, 나머지는 그 동료인 전사 고든, 레인저 호크나, 마법사 비올라, 그리고 여신관 엘리아야."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아직 듣지 못 했군."
"나는 라그나 아마게돈. 아마게돈 남작가의 가주야. 편하게 이름인 라그나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줄여서 라돈이라고 부르면 돼. 그보다 루크 이 녀석, 신성력이 약점인 나도 멀쩡한데 막상 신성력을 쓴다는 놈이 기절하면 어쩌자는 거야. 진짜 한숨만 나오네."
"...이 녀석은 용사치고는 너무 약한 것 같다만."
셀레나가 의문을 표하며 묻자, 스스로를 라돈이라 소개한 그 남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용사치고는 많이 약하긴 하지. 뭐, 그건 됐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 가보자고. 일단은... 네 이야기를 먼저 듣지. 그래야 네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내가 무엇을 알려줘야 할 지 알 수 있을 테니."
분명 검을 쥔 쪽은 자신인데 뭔가 주도권을 빼앗긴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지만, 용사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런 전투 외적인 부분에서는 일반인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니까. 괜히 주도권을 잡겠다고 협박을 해봐야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녀 정도의 강자면 상대의 폼을 보고도 대략 어느 정도인지 견적을 낼 수 있었고, 이 라돈이라는 사내는 저기 쓰러진 용사라는 녀석보다야 나은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멸의 용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절대로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불멸의 용을 수십 번이나 무너트린 자신이 내뿜는 위압감을 정면에서 마주하고도 조금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은 인간은, 이 자가 처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기 전까지는 죽일 수 없었고, 협박은 통하지 않으며, 거기에 상대가 협력적으로 나오는 데 굳이 그것을 망칠 이유는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셀레나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불멸의 용과의 최종 결전에 들어섰을 때, 나와 동료들은 최선을 다해 맞섰다. 마탑의 창시자이자 대현자 알레이스, 엘프 숲의 최고참 숲지기 위드, 거기에 루미너스 교단의 성녀 마리아까지. 그 당시에 나를 포함해 각 분야에서 최고라 불리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일행이었기에, 누구도 우리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지. 하지만..."
"불멸의 용은 이름 그대로 죽지 않았겠지."
"...맞아. 분명 놈은 너와 같이 신성력에 취약했지. 나와 동료들의 무기 뿐만 아니라 모두의 공격에 신성력까지 발라가며 공격을 하니, 녀석은 너무나도 손쉽게 무릎을 꿇었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놈은 죽지 않았어. 분명 진즉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까지 갔음에도, 녀석은 계속해서 일어났지. 마리아의 신성력에 팔이 불타 뼈가 드러나도, 위드의 화살에 맞아 한 쪽 눈이 멀어도, 알레이스의 마법으로 다리가 신체 구조상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여도, 심지어는 내가 신성력을 두른 검으로 배를 갈라 그 안의 내장을 전부 쏟아내게 만들었음에도, 놈은 죽지 않고 일어났어. 무슨 수를 써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였지."
"죽여도 죽지 않는 자와, 아무리 강해도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자. 승부의 결과는 뻔하지."
"정확히 알고 있네. 네 말이 맞아. 처음에 우리는 놈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압도했지. 개개인의 능력도 뛰어난 데다가, 그동안의 여정으로 합까지 잘 맞는 우리들에게 불멸의 용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은 간단했어. 하지만 녀석은 몇 번을 쓰러트리든 다시 일어났고, 전투가 장기전으로흘러가자 하나둘씩 지치기 시작했지.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결국엔 나 홀로 녀석과 싸우게 되었어. 죽여도 죽지 않는 놈과 며칠이고 이어지는 혈투는, 아무리 나라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미친 짓이었지."
*
죽은 자였던 셀레나에게, 그 일은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났던 악몽이었기에 그 기억은 손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정 수준을 넘어선 자들의 전투는 찰나의 실수가 곧 패배이자 죽음이었다. 불멸의 용은 몇 번을 쓰러트려도 죽지 않았고, 그 기세는 시간이 흐를 수록 약해지기는 커녕 더더욱 흉폭해져갔다. 아무리 신성력을 때려박아 죽여도, 잠시 후면 다시 일어나 덤벼오는 녀석을 상대로, 결국 가장 먼저 성녀인 마리아가 신성력이 바닥나서 목숨을 잃었다.
마리아를 잃은 후, 셀레나의 부담이 늘어났다. 자신의 공격 뿐만 아니라, 동료인 위드와 알레이스의 공격에도 신성력을 덧씌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부재로 인해 셀레나도 금방 지쳐갔고, 그로 인해 실수로 발을 헛딛어 넘어긴 그녀에게 불멸의 용이 일격을 가한 그 순간, 위드가 자신을 희생하여 셀레나 대신 그 공격을 맞았다.
또 다시 동료 하나를 잃었고, 알레이스와 셀레나는 희생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처절하게 불멸의 용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알레이스가 자신의 수명과 몸의 마력 회로를 전부 불태우며 가한 궁극의 마법조차도, 불멸의 용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 했다. 마력의 과부화로 피를 쏟아내며 쓰러진 알레이스를 향해, 불멸의 용은 거대한 발을 내리 찍었다. 그것이 셀레나가 본 마지막 동료의 최후였다.
홀로 남은 셀레나는 결코 굴하지 않고, 온힘을 다해 불멸의 용에게 맞섰다. 몇 번이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멸의 용의 약점이란 약점은 전부 공격했지만, 그럼에도 놈은 다시 일어났다. 휴식이라고는 불멸의 용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찰나 뿐이었던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다, 결국 지친 셀레나가 죽은 동료들에게 사죄하며 모든 것을 놓고 포기하려는 순간, 루미너스 여신이 그녀에게 불멸의 용을 봉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순간 용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드디어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을 앗아간 저 놈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닌,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왜 진즉에 알려주지 않았냐'는 분노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놈이 신성력을 사용해서 공격해도 죽지 않는 다는 사실과 함께 놈을 봉인하는 방법을 알려줬더라면, 오랜 세월 함께 여행해 왔던 동료들이 목숨을 잃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사실을 따지고 싶어도, 그녀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불멸의 용은 텅 빈 동공에 흉흉한 빛을 다시 띄우며 송장이나 다름 없는 그 상처 뿐인 너덜너덜한 거구를 다시 일으키고 있었고, 셀레나는 루미너스에게 그 사실을 따지는 것은 불멸의 용을 봉인한 후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 희생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우선은 불멸의 용을 처리하기로 했다. 진즉에 봉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셀레나는 불멸의 용을 근처에 있는 신전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지하 신전이 있는 곳에서 다시 한 번 놈을 쓰러트린 후, 셀레나는 자신이 가진 신성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놈을 지하 신전에 봉인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안배해 둔 것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 놈의 거구를 때려 박고, 신성력으로 빛어낸 빛의 사슬로 놈의 뼈만 남은 육신과 유일한 출입구를 완전히 봉인했다.
그렇게 불멸의 용을 봉인하는 데 성공한 셀레나는 다시 신전을 나와, 루미너스 여신에게 되물었다. 어째서 처음부터 놈을 봉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냐고, 왜 동료들이 모두 죽고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시점에서야 그것을 말해준 것이냐고, 불멸의 용과 전투를 하는 와중에 쌓이고 쌓인 울분을 모두 토해내며 그녀는 하늘에 대고 외쳤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하면 들려오던 목소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녀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어째서 여신은 대답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 용사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토사구팽.
쓸모가 다한 사냥개는 처리당한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부정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면, 루미너스 여신이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루미너스의 목소리를 기다렸으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은 닷새가 되는 날, 셀레나는 전사의 무덤으로 향했다. 불멸의 용을 따르는 추종자 수 백을 베어 넘기고, 마리아의 동정심 때문에 그들의 병장기를 묘비 삼아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으로.
셀레나는 그곳에서 구덩이를 하나 파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다 끝나기 전에, 혹시 루미너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의미 없는 기대감과 함께, 그녀는 무척이나 천천히 바닥의 흙을 파내었다. 그러나 그녀가 들어가고도 남을 큰 구덩이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루미너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셀레나는 자신이 용사로 싸우는 동안 언제가 손에 들려 있던 파트너를 묘비 대신 땅에 박은 후, 구덩이에 들어가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그 후 그녀는 눈을 감고서 마력을 이용해 주변의 흙을 자신의 위로 덮었다. 자신의 몸 위로 덮어진 흙의 무게 때문에 답답하고, 숨이 막혀왔지만, 그녀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루미너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셀레나는 '그녀'와 만났다.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그저 그녀가 만든 이야기의 소모품에 불과했음을 알려준 그녀와.
*
"...그녀의 이름은 뭐지?"
"그녀는 자신을, 뼈와 시체의 여신인 '헬'이라고 소개하더군.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들었다. 이 세상이 루미너스가 만든 하나의 연극이며, 나는 그 연극에 나오는 소모성 등장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세상이 그녀가 만든 연극의 이야기대로 흘러가며, 내 동료들이 헛되이 희생되었으며 내가 스스로를 생매장한 것도, 모두 그녀가 계획한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의 의지라 생각했던 것, 내가 이뤄낸 업적이라 생각했던 것, 나와 동료들의 우정까지,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엮은 운명의 실 아래에 이루어진 웃기지도 않은 인형극이라는 것까지 모두!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나를 속이고 이용했으며, 비록 거짓된 인연이라고 해도 내게 소중했던 동료들까지 전부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고 버려버린 루미너스를, 무슨 수를 써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복수할 수 있게 해주겠다던 '헬'의 제안에 수락했다! 그녀가 계획한 연극을 전부 망쳐버림으로서!"
"...."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내 머릿속에선 '망했어요~!'라는 익숙한 외침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나는 직감했다. 내가 조땠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