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71화 (71/229)

〈 71화 〉 잘 봐라, 용사. 야스각이다.(4)

* * *

계획에서 조금 틀어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일이 훨씬 잘 풀렸다. 그것도 굉장히 불안할 정도로 수월하게 말이다.

솔직히 비올라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줘서 그녀를 화신으로 만든 방해꾼 여신을 불러내는 것까진 계획에 있었지만, 그대로 비올라의 몸에 깃든 그녀를 범하는 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초월자 특유의 '어차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질 테니 상관 없다'는 자만심을 이용해서 그녀의 계획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지만, 막상 비올라의 몸에 갇힌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순간적인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범하고 말았다.

그동안 루미너스와 함께 세운 계획이 자꾸 흐트러진 바람에 쌓이고 쌓이던 각종 스트레스, 내가 눈을 맞출 수 있기는 커녕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볼 일이 없는 위대한 초월자를 마음대로 범할 수 있다는 상황, 그리고 상대가 어차피 나를 방해하는 적이기에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겹쳐지며, 뇌에서 '미친 놈아 좇된다고!'라고 외치기도 전에 하반신이 먼저 'Just do it!!'을 외쳤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지옥의 여신 '헬'을 범했는데... 이 충동적인 행동이 오히려 내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정신은 헬이지만 몸은 비올라고, 그것 때문에 눈이 돌아간 루크가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고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식겁했다. 아마 스스로 공포를 적출하지 않았다면 그의 무시무시한 살의에 기가 죽어 자지가 픽 하고 식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셀레나가 눈치 있기 루크를 막아준 덕에, 나는 그 사이에 헬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지옥의 여신을 자지로 정복하다니. 점점 내 정체성이 악역 배우가 아니라 뇌가 머리가 아닌 자지 안에 있는 성욕에 환장한 미친 놈이 되어 가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해도 차마 그 사실을 부정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지긋지긋한 방해꾼 중 하나를 자지로 패배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그녀와 파트너가 세운 대략적인 일의 전말을 전해 들은 후, 우선은루크 일행에게는 그들의 동료인 비올라가 실은 오래 전에 이단의 상징이자 이제는 사라진 주술사들의 물건인 뼈 토템을 통해 이계의 신에게 힘을 빌리며 조종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셀레나에게 알려줘야 할 정보는 루크 일행이 들으면 곤란한 것이기에, 루크 일행을 보낸 후에 따로 전해줄 생각이다.

"...그래도 그렇지, 굳이 그녀를 범해야 했습니까? 비록 정신은 다른 존재라고는 해도, 그 존재가 쓰고 있는 몸은 엄연히 제 동료인 비올라의 것이란 말입니다."

루크는 이해는 하겠지만, 납득은 할 수 없다며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셀레나도 내게 의문의 눈길을 보냈다. 그녀도 내가 굳이 비올라의 육신을 범했다는 사실이 못마땅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죽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그럼 뭐, 인간의 몸에 깃든 신을 제압할 다른 방법이 있나? 그릇의 안전을 고려하며 그녀를 제압하려 했다면, 그녀는 되려 그릇의 안전을 인질로 우리들을 압박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녀의 몸이 더럽혀지더라도, 그녀의 몸에 깃든 신을 제압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비올라는 내게 범해질 당시의 기억이 없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말을 맞춰주면 당사자에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큰 문제가 없다니요? 한 여인의 순결을 멋대로 앗아간 주제에...!"

"뭐라는 거야?"

난 비올라의 처녀성 상실 유무에 발끈하는 용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새끼 칼도 유니콘 뿔 같은 거 쓰더니, 혹시 처녀충인가? 막, 그 뭐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 아니면 성적으로 보지 않는건가? 그렇다면 참 유감인데. 나는 도망을 치거나 저항을 하기는 커녕, 이제는 내 위에 올라타 스스로 허리를 열심히 위아래로 흔드는 데 정신이 팔린 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찰싹 때리며 웃었다.

"애 처녀 아닌데?"

"....네?"

"처녀라면 처녀막이 있었을 테고, 내가 박았을 때 처녀막이 찢어져서 처녀혈이 흘렀겠지. 그게 없다면 무슨 뜻이겠어?"

"..."

"네가 찾는 동료의 처녀막, 내가 찢기도 전에 이미 없어졌다. 지가 혼자 자위하다 뚫었는지, 아니면 마탑에서 만난 어떤 놈팽이랑 놀아나서 찢었는지 몰라도 내 탓은 아니거든? 처녀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내가 순결을 앗아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은 나도 사양이다."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비올라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그렇게 다루는 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자꾸 사소한 것에 꼬투리를 잡으니 이야기가 자꾸 같은 곳을 빙빙 돌며 진행이 되지 않는다. 시발, 지금 내가 비올라의 몸이랑 섹스한 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냐고, 이 눈치 없는 용사 새끼야! 제대로 된 사물 하나 보이지 않는 이상한 주변의 풍경이라던가, 그를 손쉽게 제압한 셀레나의 정체라던가, 내가 비올라의 몸에 헬을 가둔 이유라던가, 설명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닌데 자꾸 쓸데 없는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내 위에 올라탄 여인에게 풀었다. 내가 허리를 강하게 튕겨 올리자, 헬은 허리가 홱하고 휘어졌다. 섹스의 참맛을 알아버린 그녀의 보지는 나의 자지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그 안의 아기씨를 뽑아내고자 강렬히 조여왔다.

찌걱! 찌걱! 쯔걱! 쯔걱!

[흐으응♥ 하응♥ 흐아앙♥ 흐기이이이잇♥]

"그럼, 뭐,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 둬?"

"자, 잠깐..."

[흐으응♥ 하아아앙♥ 가, 가버려어어어엇♥]

"섹스하던가, 뒤지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하지 않겠어? 안 그래? 응? 당사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벌인 행위를 자꾸 그렇게 따지고 들 거야?"

"아니, 그건 누가 봐도 부득이하게 벌인 것이 아니라..."

팡! 팡! 파앙! 찌걱! 찌걱! 쯔걱! 쯔걱!

[흐갸아아아앗....♥ 나, 나아아... 쥬, 쥬거버려어어어.....♥]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발 허리 좀 멈추십시오! 그러다가 비올라의 몸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나의 억울함이 담긴 간절한 허리 놀림과 비올라의 몸에 갇힌 헬의 황홀한 절정에, 루크는 식겁하며 겨우 내 말을 납득했다. 진작에 좀 그럴 것이지.

"네가 선인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다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질이 나쁘구나."

셀레나는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시선에서 경멸과 혐오가 절로 묻어 나왔지만, 분노와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당장 나를 죽일 생각은 없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속았다며 분노하던 그녀는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여신마저 자신을 이용하려 들었다는 사실에 큰 분노를 느꼈지만, 막상 그 여신이 내 밑에 깔려서 앙앙거리는 모습을 보니 감정이 참 복잡한 모양이다.

"나는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리고 당신에게 중요한 건 내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게 아니잖아?"

"....하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가, 하필 이런 호색한이라니. 좋다. 무슨 짓을 하던 상관 없지만, 내게 그 끔찍한 것을 들이대는 순간 나는 가차 없이 그걸 잘라낼 거다. 명심하도록."

"상관 없어. 내가 당신에게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셀레나는 확실히 예쁘다. 그녀의 몸은 도저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땅 밑에 묻혀 있던 사람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활기와 생기가 넘쳤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절한 크기에 아래로 쳐지지 않고 곧바로 선 예쁜 형태의 유방, 뒤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음습한 욕망이 절로 샘솟게 만드는 색기 넘치는 엉덩이, 모델이라고 주장해도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을 각선미 넘치는 긴 다리... 그녀의 미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 그야말로 신이 만든 걸작.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지만, 나는 딱히 그녀에게 성욕을 품지 않았다. 뭐랄까... 지금의 그녀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분명 외모 하나 만큼은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아름다웠지만, 도저히 성적인 대상으로 볼 수가 없었다. 뭐라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데... 간단하게 말해서 별로 꼴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금 비올라의 몸에는 다른 세계의 여신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 여신의 목적은 루미너스 여신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 여신을 다시 풀어줬다간 무슨 일을 벌일 지 알 수 없으니, 안전을 위해서는 지금처럼 비올라의 몸에 계속 가둬두는 편이 좋겠지. 적어도 그녀를 담을 다른 그릇을 구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비올라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까지...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음... 지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서 진행한다고 쳐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테지. 그러니...으음."

나는 지나친 쾌락에 뇌가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인지, 주변의 시선 따위 이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열심히 허리를 위아래로 놀리며 내게 혀를 섞어오는 헬의 모습에 곤란함을 느꼈다.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어, 나는 잠시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바닥에 눕힌 후 온 힘을 다해 허리를 휘둘렀다.

퍽! 퍽! 퍼억! 퍽!

조금 전까지의 찰지고 질척거리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살과 살이 거세게 맞부딪히는 천박하고 음탕한 소리에 호크나와 엘리아, 그리고 셀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엘리아는 눈앞에서 태연히 벌어지는 너무나도 외설적인 광경에 충격을 먹은 것이라면, 호크나는 부러움과 질투가 가득한 시선으로 내 밑에 깔린 헬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고, 셀레나는 호기심과 경멸기 반 정도 씩 섞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헤으으응♥ 가, 가버려어어어어어엇♥]

푸샤아아아아악!

헬은 갑작스러운 격렬한 피스톤 운동에 결국 분수를 뿜어내며 요란하게 가버렸고, 나는 축 늘어진 그녀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조금 전에 끊긴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그렇지. 최소 일주일은 걸릴 거다. 그러니 나는 우선 그녀를 데리고 내 저택으로 돌아가, 그녀의 몸에서 지옥의 여신을 꺼내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동안 너희들은 뭐... 저기 있는 셀레나에게 각자 적당히 훈련을 받은 후에 바이올렌스를 쓰러트리고 오던가 해라. 아마 그녀를 쓰러트린 후라면 다 되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별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 그것 외에 방법은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루크는 나를 향해 적개심 가득한 시선을 보낸 후 말을 이었다.

"...만일 비올라의 몸에 허튼 짓을 해 놓는다면, 저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을 대로."

"그럼, 이야기는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셀레나는 빛의 검을 휘둘러, 비올라를 제외한 용사 일행을 엘하임 왕국에 있는 시가레테 타바코나의 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그릇에 갇힌 여신, 그리고 나만이 남은 공간에서 다시 내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듣는 귀도 없을 테니 전부 말하시지. 내가 모르는 것, 네가 알고 있는 것, 전부."

"....좋아.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래. 내가 처음 루미너스에게 소환되었을 때..."

*

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그 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이다.

아무리 약한 신이라도,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신도 쉽게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신과 세상의 규칙이다.

그렇기에 신의 힘을 구분하는 척도는 '얼마나 많은 세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나'와 '얼마나 정교한 세상을 만들 수 있나'로 구분된다.

신이 만든 세상의 퀄리티는 그 신이 가진 힘에 비례한다. 루미너스 같은 하급 신은 고작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며, 그 세상의 질조차도 다른 세계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마법'이다. 다른 세상의 마법은 오로지 마법사가 개인이 가진 마력으로 발현하는 힘이지만, 루미너스의 세상은 그 정도로 정교하고 완벽한 곳이 되지 않기에 마법의 원리가 다른 세상의 존재로부터 힘을 빌려오는 형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루미너스가 나 이외의 다른 세계의 인간을 고용하지 않은 것도, 수용량의 문제다. 하급신인 그녀가 만든 세상은, 본래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 양이 극히 한정되어 있기에 나 이외의 다른 인간을 부를 수 있는 상태가 못 된다. 다른 상급신의 세상의 경우, 다른 세계에서 온 전생자니 전이자니 희귀자니 하는 이레귤러가 하나도 아니고 수백 씩 존재하기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정교하고 튼튼한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더 많은 세상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 신으로서의 등급을 올리면 된다? 그리고 그 등급을 올리는 방법은?

신으로서의 자격의 증명. 상위 신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자신이 받은 시험을 무사히 잘 통과하면 된다.

루미너스의 연극은 그녀가 더 높은 등급의 신이 되기 위한, 다른 상위 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펼치는 거대한 시험이다.

게다가 현재 그녀의 시험을 지켜보러 온 신 중에는 그녀가 속하고 싶은 파벌의 중심이 되는 신도 있다. 이 시험에서 자신의 능력을 잘 입증해내는 것으로, 그녀는 신으로서의 등급이 한 단계 오름과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파벌에 들어감으로서 그 파벌의 다른 신들과 교류하며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물론 더 완성도가 높은 뛰어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결국 신들의 세계는,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것만이 목표인 곳이다. 그것이 태초의 신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내려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모든 신들의 사명.

단 하나의완벽한 세계를 만드는 것.

그 하나의 세계를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수 백억, 아니, 수천 억 개의 세상이 탄생하고 멸망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

"...'단 하나의완벽한 세계'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그 목표를 위해 만들어진 수 많은 실패작 중 하나라는 뜻이군."

"그리고 내가 본래 살고 있던 세계도 그렇겠지. 솔직히 별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치면 너는 어째서 멀쩡한 거지?"

셀레나는 나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 말은 곧 자신의 존재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만들어지다가 무참히 버려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언제든 대체할 것이 넘쳐 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이 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뿐인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는데, 다른 세상에서 불려왔을 뿐인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자신의 존재가 하찮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진실을 그토록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지?"

"...아, 내가 잊지 않고 말을 안 했네."

나는 셀레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루미너스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 후, 본격적으로 내가 이 이야기에 투입되기 얼마 전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기 전에, 그녀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지."

"요구?"

"그녀와의 약속을 원활하게 이행하기 위해, 내 감정을 제어해 달라고 말이야. 정확히는... '공포', '좌절', '절망', '죄책감'과 같은 방해가 되는 감정을 지워버리고, '욕망', '책임', '의지'와 같은 필요한 감정들을 그만큼 강하게 만들었지. 그래서 뭐...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별 다른 감정은 들지 않더라.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분명 나도 포함된 이야기지만, 나랑 별 상관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거든."

"...너."

셀레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제 이해가 되지? 네가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던 이유, 이 세계가 그 대본이라는 것대로 흘러가야만 하는 이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초에 루미너스가 이런 연극을 하는 이유도, 더 높은 등급의 신이 되어 자신의 피조물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바라는 마음 때문이야. 그녀는 자신의 피조물을 정말 끔찍이도 아끼는 상냥하고 인간적인 여신이니까. 아마 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어가는 순간에, 그 부름에 대답하지 못해서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을까? 다른 신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그 상황에 개입하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테니까."

"...짜증나는 이야기군."

셀레나는 몸을 홱 돌렸다.

"이용당하고, 버려졌다고 믿어서 증오하고 원망했는데. 그게 다 나와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고? 내게 응하지 않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신이란 것들은... 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 밖에 모르는 건가?"

"애초에 인간과 신은 엄연한 다른 존재잖아. 가장 높이 있다고 해서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있다 해서 모든 하늘을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셀레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가 담겨 있었지만, 그것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미약해져 있었다.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는 못 했지만,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이봐요, 루미너스 여신님.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막판에 내 뒤통수를 치는 짓거리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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