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85화 (85/229)

〈 85화 〉 D­3

* * *

내게 그 날의 진실을 듣기 위해 찾아온 비올라의 앞에서 사하와 모르모트랑 섹스한 그 날 저녘에 호크나가 나를 깜짝 방문했고, 정욕에 불타던 그녀를 상대해 주다가 임신하고 싶다는 자극적인 한 마디에 되려 내 쪽에서 흥분해서 달려들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가 지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호크나를 깨운 후, 메이드들을 불러서 그녀를 씻기게 했다. 그래, 메이드가 아니라 메이드'들'이다. 내가 엘하임 왕국으로 향하던 와중에 붙잡아 노예로 만든 여섯 수인은, 메이드 장인 미아의 아래에서 이제 어엿한 한 명의 메이드들로서 거듭났다. 미아가 이제 이 넓은 저택의 관리를 자기 혼자 하지 않아도 된다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다만 블래키의 경우에는 아직 메이드 과정을 전부 수강하지 못 한 모양이다. 하긴, 원래 용병이나 도적단 여두목 등 거친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귀족의 메이드 일을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나와 호크나의 목욕 시중을 든 메이드는 빨강이, 초록이, 파랑이, 그리고 주황이였다. 그렇게 어울릴 거라고는 별 생각하지 않았건만, 수인들도 은근히 메이드 복이 잘 어울렸다. 사실 말이 수인이지, 귀나 꼬리, 그리고 손과 발 등이 조금 짐승의 형태를 한 것을 제외하면 외형 자체는 인간 쪽에 훨씬 가까웠다. 아마 수인 중에서도 짐승으로서의 피가 옅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메이드 복을 입히니, 그냥 케모미미 메이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빨강이와 초록이는 땀과 애액, 그리고 나의 정액으로 더러워진 호크나의 몸을 씻겨주면서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유명한 엘프의 우월한 몸매에 감탄사를 금치 못 했고, 주황이와 파랑이는 마찬가지로 더러운 내 몸을 닦아주며... 연신 군침을 삼켰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들도 손을 대지 않은지 벌써 사흘 째인가?

펠라 전용으로 만들려고 연습만 계속 시켰더니 나중에는 내 자지를 입에 넣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펠라 중독이 된 파랑이와 촉수 지옥에 한 번 빠지고서 상시 발정기가 되어버린 주황이는 내 몸을 씻기면서도 계속해서 어필을 해왔다. 내 등을 씻기는데 비누칠을 한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가슴을 사용하거나, 내 자지에 묻은 정사의 흔적을 지우면서 당장 입에 넣고 싶다는 듯 혀를 베,하고 내민 채 침을 뚝뚝 흘린다던가...

하지만 나는 그 신호를 전부 무시했다. 오늘은 호크나에게 어제 다 못 들었던 그 동안의 일을 전해 듣고, 앞으로의 방침을 진지하게 정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내가 아무리 뇌가 자지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에 미친 놈이긴 하지만, 해야 할 일도 전부 미뤄두고 섹스에만 매달리는 무책임한 놈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은 여신의 연극을 돕기 위해서지, 열 명도 넘는 여자들을 품에 끼고 이 여자 저 여자 실컷 맛보며 섹스만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게 끝나고 나면, 호크나랑 다시 할 생각이다. 이왕 임신시키기로 결정한 거, 임신이 확정날 때까지 뱃속에 씨앗을 퍼붓을 생각이니까.

그렇게 목욕을 마친 후, 나는 호크나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중세 배경의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긴 테이블은 이미 미아와 메이드들이 셋팅을 끝마친 상태였다.

"오늘 메뉴는... 오, 돼지고기 콩 조림에 훈제 닭고기 샌드위치, 꿀을 바른 사과 파이, 그리고 화이트 와인이라. 아침 식사로 내놓기에는 좀 많은 양이지만, 오늘은 배가 많이 고프니 오히려 좋군. 역시 미아야. 이런 세세한 것까지 일일히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는 점이 참 좋다니까."

"과찬이십니다."

어느 샌가 바로 옆에 선 미아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보니 호크나. 내가 엘프 족의 식성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고기를 못 먹는 건 아니지?"

"누굴 초식 동물로 보는 거야? 엘프도 사람인데, 풀만 먹고 살 수 없잖아. 엘프 족이 고기를 먹는 일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입에 대지도 못하는 건 아니거든. 게다가 나는 인간 사회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딱히 편식을 하지 않아. 오히려 이런 메뉴라면 제법 익숙해서 좋지."

"이종족의 식성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문제 없다니 다행이군."

"뭐, 이런 메뉴라면 어지간히 채식을 즐기는 엘프가 아닌 이상 문제 없이 먹을 수 있어. 그리고 나는 혹시나 쓸데 없이 고급지고 기름진 스테이크나 무슨 맛인지 모를 밍밍한 스프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귀족이라고 매일 스테이크를 썰지는 않아. 물론 그런 귀족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그나저나...응?"

막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려던 찰나, 비올라가 쭈뼛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 저택에 나와 여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없고, 그녀들의 생활 패턴도 제각각이다보니 식당에 모여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아가 미리 만들어 준 보존식을 알아서 꺼내 먹거나, 아니면 미아가 식사 시간에 갖다 놓는 1인분 식사를 방에서 해결하고는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한 진실?을 듣고 충격 받아서 뛰쳐나간 비올라가 나 외에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식당에 들어오니,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나, 호크나, 미아와 빨강이, 초록이, 파랑이, 주황이의 시선을 일제히 받은 비올라는 당장이라도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으나, 얼마 안 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빈 자리 중 한 곳에 앉았다.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 신경을 끄기로 했다.

비올라는 호크나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묻지 않았고, 호크나 또한 어째서 비올라가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 탓인지 두 사람 사이에서 왠지 모를...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이거 참, 밥맛이 뚝 떨어지게 만드는 분위기로군. 사정을 다 아는 나야 저들이 왜 저러는지 대략 알 수 있긴 하지만... 내 일도 아닌데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 과도한 참견은 악당이 아닌 용사가 할 일이니까.

"미안하다, 미아. 식사를 1인분만 더 갖다다오."

"....하아. 알겠습니다."

미아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뒤늦게 와서 식사에 합류한 비올라를 향해, 마치... 그래. 분명 '처음에 라면 끓일 건데 먹을 생각 있냐고 물었더니 "난 됐어"라고 말하길래 라면을 1인분만 끓였는데 먹으려고 할 때 방문 열고 나와서 "아, 나도 한입만"이라고 말하며 절반 넘게 뺏어 먹는 짜증나는 여동생을 보는 듯한 눈'으로 쏘아보고서, 수인 메이드들을 데리고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럼, 호크나. 어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줘."

'어제 이야기'라는 부분에서 비올라가 갑자기 흠칫하며 몸을 떨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럼 일단... 너희들과 흩어진 이후부터 시작할게."

*

미아가 비올라 몫의 식사를 가져오기 전, 호크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우선 내가 초대 용사, 비올라의 육체에 갇힌 헬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간 후 루크는 동료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격려하며 바이올렌스와의 전투를 준비했다. 바이올렌스는 쓰러진 직후 로얄 나이트들에게 업혀서 엘 하르다로 복귀하였으며, 수많은 의원들을 불렀지만 초대 용사가 입힌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은 탓에 왕궁에 틀어박혀 골골거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어둠 속성의 인간들에게 빛 속성 그 자체인 용사의 신성력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니.

바이올렌스는 생존의 위협을 느꼈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지키게 만들었다. 왕궁 입구가 아니라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로얄 나이트들이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엘하임 왕국의 수도 엘 하르다의 경비는 삼엄했다.

아무리 봐도 정면돌파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는 상황에서 루크와 일행은 브레인인 비올라 없이 어떻게 저 병력을 뚫고 바이올렌스를 상대할 것인지 고민했고, 그 때 나한테서 떠났던 초대 용사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전에 나를 향한 루크의 공격을 방해했던 것에 사과하며, 그 대신 바이올렌스를 쓰러트리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초대 용사는 선배로서 사흘 동안 루크에게 전투 기술과 신성력 운용 방식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 주었고, 루크가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다고 판단이 되자 그가 바이올렌스를 직접 상대할 수 있도록 수도 엘 하르다의 동쪽 입구에서 소란을 피워 입구를 지키던 로얄 나이트들을 꾀어내었다.그렇게 초대 용사가 홀로 수도에 있는 로얄 나이트의 절반을 엘 하르다의 동쪽으로 유인해서 붙들고 있는 사이, 루크 일행은 곧바로 바이올렌스가 있을 왕성을 향해 내달렸다.

물론 바이올렌스가 아무리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고 한들 이성적 판단을 아예 못 하는 상황도 아니니만큼, 로얄 나이트들 중에서도 진짜 강한 녀석들은 왕성 입구에서 대기시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입구를 사수하라며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왕성 입구를 막고 있던 것은 로얄 나이트는 내가 유독 짜증나다고 느끼는 은기사였다.

녀석은 루크 일행이 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너희들을 절대 못 지나간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고든의 희생으로 루크 일행은 시간을 오래 붙잡히지 않고 왕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희생이라고 말했지만,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고든, 그 존재감 옅은 전사 놈이 혼자서 은기사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한다. 나중에 듣자하니, 어차피 둘 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된 투사들이라서 단단한 탱커들 특유의 땀냄새가 진동하는 몸싸움을 벌였다고. 그렇게 십 분 정도 버티고 있자니 은기사의 쥐똥만한 신성력이 바닥이 나 버렸고, 신성력이 없으면 로얄 나이트 중에서 전투력이 최하인 은기사는 그렇게 존재감 0의 전사 고든에게 패배했다.

왕성 내의 로얄 나이트들은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길목마다 대기하고 있었고, 심지어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마기사가 설치한 온갖 성가신 마법 덫과 장애물 때문에 도저히 초대 용사에게 어그로 끌렸던 로얄 나이트들이 돌아오기 전에 돌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루크 일행은 이미 나를 통해 역겨운 시간 끌기 함정들을 경험한 전적이 있는 녀석들이다. 그리고 녀석들은 한 번 당한 수법에 두 번 당하는 얼간이들은 아니었다. 마기사가 함정을 깔아둔 곳은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 뿐이었고, 루크는 에일라를 등에 업고서 호크나와 함께 왕성 3층의 발코니를 통해 밖으로 나와서 벽을 타고 최상층까지 올랐...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뭘 어쨌다고?"

"벽을 탔다고. 왕궁 벽면에 있는 벽돌 사이 흠이나 중간에 고정된 화려한 장식물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것들을 발로 딛으며 위로 올랐지. 나야 나무 타는 것이 특기인 엘프이다보니 굉장히 간단했고, 루크도 에일라를 등에 업고 있긴 했지만 신성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덕에 문제 없이 올라갔어."

"허...."

오늘 미아와 메이드들에게 시킬 일이 하나 늘었다. 루크가 벽을 타고 내가 있는 방에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저택 외벽에도 함정을 설치하라고 일러둬야겠다. 움직이는 물체가 범위 내로 들어오는 저격 마법부터, 밟으면 쉽게 박살나는 가짜 발판 등... 준비할 것이 많아 보인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지?"

"뭐... 그 이후부터는 별 거 없었어. 그 마기사라는 놈은 결국 자기가 설치한 마법 덫과 장애물들을 길을 막은 탓에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층에 있는 로얄 나이트들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었지. 그래서 사실상 우리들이 제대로 상대한 건 치명상 때문에 비틀거리는 바이올렌스와 그... 사기사였나? 그 놈들 뿐이었어. 그 사기사라는 놈들은 제법 성가시긴 했지. 특별히 힘이 세거나 튼튼한 건 아닌데, 서로 합이 기가막히게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하긴... 그 놈들이 합을 맞추는 면에서는 따라올 상대가 없긴 하지."

"루크가 한 놈에게 공격을 하면, 다른 놈이 와서 공격을 대신 맞받아치고, 그 사이 루크가 노렸던 놈이 루크를 향해 벌처럼 날카롭게 찔러오더라. 루크가 백스텝으로 그걸 피하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놈이 바로 루크의 등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심지어 지원 사격을 하려고 루크를 공격하는 놈에게 화살을 쏘니, 옆에 있던 다른 놈이 방패를 세워서 막더라? 처음에 몇 합을 겨누고서, 이걸 진짜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막막하더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약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녀석들의 강점은 특유의 끊이지 않는 콤비네이션으로 일 대 다수의 대인전에 능하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단일 대상을 향한 공격이 아닌 광범위 공격. 그러니까 마법이나 신성력 같은 공격에는 별 다른 대처법이 없지."

나는 호크나의 등을 곁눈질로 살피며 말했고, 호크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자존심 상했다고. 그나마 너의 부하들이 상대였다면 아끼지 않을 이유가 없긴 하지만, 단순 전투력으로 치면 훨씬 약한 인간 넷을 상대로 비장의 수단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 뭐, 덕분에 그 성가신 놈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긴 했지만."

엘프 족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쓸 수 있다는 비기, 바람의 화살. 엘프 족 전체에 고작 여섯 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보구 '시위 없는 활'을 통해,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바람으로 이루어진 무형(無?)의 화살을 발사하는 기술. 정해진 형태가 없기에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우며, 어지간한 방어구로는 막을 수 없고, 또한 궤적이나 속도마저도 제멋대로. 당하는 사람도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이해하기 힘든, 그야말로 최종 병기.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호크나 외에는 쓸 수 있는 자가 없는, 극도로 난해하고 복잡한 기술.

확실히 그걸 쓰면 빈틈 없는 연계고 뭐고 사기사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도 남는다. 내가 마수 조련사 레이의 카운터가 호크나라고 염두해두는 것도, 이 비기 때문이다. 아무리 암흑에 잠식되어 물리 또는 마법에 높은 내성을 지니게 된 마수라고 해도 저 바람의 화살 한 방이면 얼마나 튼튼하던 한 방에 나가리. 거의 반 즉사기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그 정신 나간 위력만큼이나 사용 난이도 또한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높고, 연사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는 설정이지만...

"바이올렌스 그 여자, 지켜줄 부하가 전부 사라지니 아무것도 못하더라. 그렇게 루크에게 혼돈의 파편을 빼앗기고, 엘하임 왕국에 걸린 바이올렌스의 지배 능력이 풀리는 것까지 본 후에 나는 비올라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숲을 경유해서 달려왔지. 그래서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몰라."

흠... 이렇게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으니, 결국 바이올렌스를 처리하는데 초대 용사의 공이 너무 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활하자마자 바이올렌스의 배에 칼빵을 놓고, 지배 능력 특성상 병력의 수가 곧 힘인 바이올렌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혼자서 맡고... 결과적으로 루크는 너무나도 쉽게 바이올렌스를 이긴 셈이다.

용사의 특성은 역경 극복. 닥쳐온 시련이 고될 수록, 그것을 견디었을 때 크게 성장하는 힘.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한 이의 도움을 받아 적을 쉽게 이겨버리면, 지금 당장은 문제 없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용사의 성장은 더뎌지는 결과에 도달한다. 그녀로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루미너스를 방해하고자 하는 다른 세계의 신을 제대로 도와준 꼴이다.

하지만 뭐... 아직은 괜찮다. 헬을 제압했을 때 듣기로는, 루미너스를 방해하려는 신은 자신을 포함해서 둘 뿐이고 대다수의 계획은 그녀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했으니까. 남은 한 명은 머리를 굴리기 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타입이라서, 도중에 난입해서 개판으로 만들면 만들었지 자기도 없기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루미너스 여신과의 연결을 방해한 것도 헬의 공작이었다고 했으니, 그녀가 의식을 되찾는 대로 다시 루미너스 여신과 연결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루미너스 여신은 다른 신들의 앞에서 이 연극을 선보이느라 직접 세상에 개입하지 못할 뿐,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몰래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루미너스 여신과 연결이 회복되는 대로 최후의 수단으로 남긴 '그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허락을 구할 것이다. 솔직히 그 방법이 아니면, 루크의 수준을 더 끌어올리기는 힘들어 보이니까.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용사 또한 마찬가지. 루크는 보통 사람이라면 도중에 좌절하고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험난한 시련을 정면에서 부딪히고, 그것을 이겨냄으로서 진정으로 '용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이 연극이 해피 엔딩으로 무사히 끝내는 유일한 길이며, 나와 루미너스 여신의 계약이었으니.

용사가 쓰러트려야 할 적 하나와 용사의 동료 둘이 나누는 식사는 생각보다 고요하게 흘러갔다. 물론 귀족인 나는 식사 중에 대화를 하는 것은 예절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쳐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워낙 심상치 않다. 타락의 속삭임으로 타인의 수없이 많은 감정을 파헤치며 그 안에서 욕망을 발견하여 증폭시키는 것이 내 특기이니만큼, 이제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대충 보인다.

호크나는 내게 애정을 갈구하고 싶을 테지만 차마 비올라의 앞이라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느라 애가 타고 있었고, 그에 비해 비올라는 호크나에게... 부담스러움? 기피감? 아니... 거리감?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흠...

...설마, 봤나?

젠장, 그냥 비올라가 벽에 그린 투시 마법을 차단해둘걸.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그냥 넘겼었는데, 설마 어젯밤의 일을 봤다면... 골치 아프네.

호크나부터 시작해서 에일라에, 이제는 비올라까지. 도대체 용사의 동료라는 여인들이 왜 나랑 이렇게 골치 아픈 인연이 생기는 지. 물론 호크나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 맞긴 한데, 아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에일라도 내가 입을 잘못 놀린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대체 비올라는 왜 저래? 뭐가 문제야?

젠장, 이게 다 헬 때문이야. 하필이면 비올라의 몸을 화신체로 삼아서 이런 일을 겪게 만들고. 깨어나면 다시 죽었다 살아날 때까지 자지로 혼쭐을 내주... 아니, 시발. 뭐라는 거지. 내가 진짜 뇌가 자지에 먹히고 있나?

".....하아."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호크나는 식사를 다 하지도 않고서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비올라는... 나와 호크나가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호크나는 그렇다 쳐도, 비올라는 분명 아침 식사가 절반도 넘게 남아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남겨진 음식들을 보고서 미아가 자기 요리 실력이 그렇게 형편 없었나 걱정할 지도 모르니 나중에 따로 격려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호크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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