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이 녀석, 한 대만 맞아! 안 되겠어, 두 대! 세 대!(2)
* * *
라그나 아마게돈! 제 말 들리시죠?
새로운 몸을 얻은 헬이 깨어나고, 나는 그녀에게 부탁하여 끊어진 회선을 다시 복구했다. 그리고 다시 연결이 되기 무섭게, 오랜만에 들려오는 루미너스 여신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다급했다.
"예예, 루미너스 님. 잘 들립니다."
후, 드디어 다시 연결되었군요. 상황이 급하니, 간결하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갑자기 무슨..."
용사 루크의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싸울 의지를 잃고 다 포기할 지도 모른다고요!
"...."
순간 내가 그녀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한다고? 목표인 혼돈의 파편 네 개 중에서 세 개를 회수해 놓고서, 나를 쓰러트리고 불멸의 용만 죽이면 전부 끝나는 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머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포기하겠다고?
".....후."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아직은 화를 낼 때가 아니고, 화를 낼 대상도 그녀가 아니었기에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루머니스 여신에게 물었다.
"일단은 곧바로 루크가 있는 곳으로 향할 테니,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루크가 지금 어떤 상태인 지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일단 당신이 저택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내 방 바닥에 숨겨둔, 미스트리나의 저택으로 이어지는 비상용 워프 마법진에 손을 올리고서 마력을 불어 넣으며 루미너스 여신으로부터 루크가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전달 받았다. 그리고 그건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그 녀석의 상태를 듣자니, 도중부터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개의 저택에 도착한 나는 미스트리나에게 뒤처리를 맡기고서, 곧바로 루미너스의 안내를 따라 루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다 망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 앉아서 의미 없는 사과만 계속 한다?
아주 지랄도 염병이다.
그렇게 최대한 빠르게 내달려 도착한 한 주인을 잃은 늙은 귀족의 저택에서 처참한 꼴이 된 바이올렌스와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절망한 용사를 보고서,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내질렀다.
처음이었다. 다른 목적이 아닌, 오직 누군가를 향한 순수한 분노만으로 상대를 상처 입히겠다는 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것은. 애초부터 나는 직접적인 다툼과 폭력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었고, 비록 악인이라지만 내 목숨을 노리거나 나를 등쳐먹을 속셈으로 접근한 녀석들이 아닌 이상에야 어지간한 실수나 잘못은 용서할 정도로 화를 잘 못 내는 너그러운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눈앞에서 돼도 않는 어리광이라 부리고 있는 저 썩을 애송이를 몇 대 후려 갈기지 않고선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일 수록, 화가 났을 때의 모습은 무섭기 마련이다. 화를 잘 내지 않는다는 것은 화를 참는 인계점이 높다는 것이지, 화를 낼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용사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가 살면서, 설마 이토록 누군가에게 격렬하게 분노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덕분에 나의 인계점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에 감사 인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어둠을 휘감아 내지른 주먹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강타하며 루크의 턱에 그 충격이 전해진다. 루크는 방어를 했음에도 전달되는 고통에 제법 당황한 듯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자세를 고쳤다. 셀레나가 가르쳤다고 했던가? 그 짧은 시간 만에 저 얼간이를 저 정도로 성장시킨 것을 보면, 그녀는 한 명의 전사로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스승으로서도 좋은 사람이리라. 물론, 그 제자라는 녀석이 도저히 못 봐줄 정도로 한심하지만.
"이런 한심한 새끼. 뭐? 나 때문에 다 망했어? 내가 용사가 맞는지 모르겠어? 시발, 네가 애새끼냐? 어?"
마법을 통한 공격이 아닌, 양팔을 어둠의 마력으로 강화하여 두들겨 팰 뿐인 지극히 단순한 공격. 처음엔 당황하던 용사도 내가 쓰는 공격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괜히 옆이나 뒤에서 마법이 날아오지 않을까 경계하여 펼쳐두었던 신성력을 한 대 모아 방어력을 높였지만, 녀석이 방어력을 높일 수록 나도 단순하게 어둠을 더욱 휘감아 그만큼 공격력을 더 높이며 주먹을 휘둘렀다.
"세상에 언제나 맞는 선택만 하는 인간이 어딨냐? 누구나 실패는 한다. 단지 그 실패를 하고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당신이 뭘 안다고...!"
"시발, 네 뇌는 금붕어냐? 내가 몰락한 우리 가문 되살린 걸 잊어먹었냐?"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말은, 실패를 하고서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한 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 사람과, 설령 몇 번을 실패해도 성공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네가 용사인지 모르겠다고?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네가 용사지, 아니면 누가 용사겠냐? 네가 하는 말은, 너를 선택한 여신이 사람 보는 눈 하나도 제대로 없다는 것과 뭐가 다르냐?"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나 때문에 고통 받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힘들어진 사람이 있는데, 그걸 그냥 무시하라고?!"
캉! 카앙! 용사의 외침과 함께 황금색 장막이 그 색이 더 짙어지며 튼튼해졌지만, 나는 이제 내 몸보다 두꺼워진 검푸른 어둠으로 그 얇은 방어막을 내리쳤다.
"누가 무시하랬냐? 오히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 앉아서 입으로만 '전부 내 잘못이다!'라고 찡찡거리면, 그걸로 네 죄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죄를 하고 싶으면, 말 뿐인 사과만 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란 말이다, 이 얼간아!"
콰장창! 내 쪽에서 공격하고 용사가 방어하는 일방적인 공방이 이어지다, 결국 루크의 방어막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루크는 백스텝으로 나와 거리를 벌린 후, 뾰족하게 벼려진 성검의 끝으로 날 겨누었다. 마치 다가온다면, 당장이라도 내 심장을 꿰뚫어 버리겠다고 경고하듯.
실제로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용사 녀석이 방어는 형편 없지만, 찌르기 하나 만큼은 무시할 수준이 못 된다. 물론 찌르기의 위력 자체는 내 쪽이 더 강할 테지만, 용사 쪽은 파워보단 스피드에 치중되어 있다. 내가 만일 제대로 된 방비도 없이 접근한다면, 반격할 새도 없이 나의 유일한 약점인 신성력으로 강화된 예리한 칼날이 내 가슴을 관통하리라.
하지만, 나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 오히려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 성격이기에,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제 2의 수단, 제 3의 수단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용사가 움직였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여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혼자서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그는, 나의 심장을 향해 성검유니코르의 칼날을 내질렀다.
섬광과도 같은, 신속하고 예리한 찌르기.
허나, 녀석의 칼날이 내 가슴을 관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읏...?!"
나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든 루크는, 빛의 속도로 바닥에 넘어졌다. 옛날 코디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바닥에 고개를 박은 탓에, 루크는 코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몇 줄기의 어둠이, 루크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어... 떻게? 속도는, 분명 내가 더 위였는데...!"
"아무리 빠르면 뭐하냐."
빠악!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있던 루크의 얼굴을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그렇게 예상 경로가 뻔히 보이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는 게 당연하잖아. 벌써 그 정도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이 떨어진 거냐?"
"...으아아아아!"
부웅, 붕! 쐐애액!
혹시나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망설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내지르는 검격. 그것은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그 궤도가 너무도 눈에 선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휘두른다고 맞겠냐? 그동안 배운 기술은 다 어디다 팔아 먹었냐, 이 병신 새끼야."
"닥쳐! 닥치라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잘난 듯이 말하지 마!"
쐐애애애액! 말벌의 독침처럼, 나의 목을 향해 정확히 찔러 들어오는 예리한 칼날. 나는 어둠을 휘감은 손으로 칼날을 잡고서, 그대로 그의 손에서 성검을 빼앗았다.
"그래. 시발, 나는 너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근데 너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땡그랑. 나는 빛을 잃음 성검을 바닥에 내던지고서, 용사의 멱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제발 어리광은 적당히 하고, 얼른 정신 좀 차려라 이 멍청한 용사 놈아."
"크으, 으으으...!"
"....하, 이건 진짜 쓰기 싫었는데."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서, 타락의 속삭임을 사용하던 감각을 떠올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가라 앉은 호수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가라앉은 것들 중에서 하나를 잡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는 것. 비록 그 과정에서 바닥의 모래가 피어오르며 물이 더러워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내 머리 속에서, 용사의 심리 상태가 하나의 호수가 되어 나타났다. 그 호수에는 많은 것들이 가라 앉아 있었다. 정의감, 의무감, 책임감, 죄책감 등등... 뭐가 이리도 많은지. 용사 녀석은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책임감이나 죄책감 같은 것들이 제법 강한 편이라서, 인생 살기 참 힘든 타입이었다. 적당히 자신에게 타협하고 합리화하면서 보내도 될 것을, 굳이 자신에게 가혹하게 대하며 사소한 것조차 놓치지 않고 바로잡으려는 그 모습이... 너무나 답답하면서 동시에 참 용사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리 한심해도 이 놈은 용사의 그릇이다. 단지 지금은 끔찍한 광경을 본 탓에 정신에 너무 큰 충격이 가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잠시 헷갈리고 있을 뿐. 평소라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이기적인 욕망 등을 꺼내던 내 손이, 이번에는 다른 것을 붙잡았다. 용사의 마음 속 호수 밑에서, 나는 유독 크고 빛나는 것을 잡아 끌어 올렸다.
정의.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
그것은 기쁨, 슬픔, 분노, 욕망과 같이 인간이 본래 가진 감정이 아닌, 도덕심이나 죄책감과 함께 외부에서 주입되어 얻게 되는 것. 본능보다는 이성에 가까운 영역. 본래라면 내가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분야. 허나 용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나는 그의 마음 속 깊이 가라 앉은 그의 정의감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으윽...!"
루크는 정신적인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나는 쓰러진 루크의 허리 춤에 성검유니코르를 다시 매달아준 후에 바이올렌스에게로 돌아갔다.
기이할 정도로 크게 부푼 배 탓에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무너진 벽에 기댄 채, 뼈와 가죽만 남은 팔과 다리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고서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나는 내가 알던 여인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루크의 손에 쓰러진 후에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악마보다 더한 인간이라는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 꼴을 보면 도저히 그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지금 바이올렌스의 상태는... 매우 심각하다. 급성장 마법 탓에 지나치게 빠르게 자란 태아는 모체로부터 수개월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받았어야 할 영양분을 하루 이틀 만에 탐욕스럽게 빨아들였고, 그 탓에 바이올렌스는 생명이 위독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출산을 성공하든, 혹은 도중에 유산을 하든 그녀는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성공적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그 아이는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바이올렌스의 부푼 배는, 일반적인 임산부 배의 두 배에 가까웠다. 아기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성인 남성 하나가 들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이 마법을 걸었다고 했나? 내가 마탑을 부수지 않았다면, 그 녀석은 이미 마탑에서 쫓겨나고 없을 것이다. 급성장 마법은 어디까지나 실험용 동식물에게나 허용되는 마법이고, 그 마저도 많이 불안해서 부작용이 많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급성장 마법은 성장 한계를 정하지 않은 상태로 성장 속도만 지나치게 높여놔서,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녀의 몸에서 나온 아기는 육체만큼은 이미 성숙한 어른일 것이다.
정신은 아기인데, 몸은 어른. 게다가 몇 가지 영역에서 장애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이건 뭐... 아무리 마법에 문외한인 나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엉망진창인 마법이다. 만든 놈한테 따지고 싶긴 하지만, 이미 죽은 놈한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야, 바이올렌스. 내 말 들리냐? 들리면 눈을 두 번 감빡여라."
깜빡. 깜빡.
"아직 청각은 멀쩡한 모양이네. 그나마 다행이군. 좋아, 너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어. 첫 번째, 이대로 내가 널 뱃속의 아이와 함께 천국으로 보내준다. 고통 받을 일 없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바이올렌스는 첫번째 선택지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직 내 말은 다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지.
"다음으로 두 번째, 너나 아이 중 하나를 포기하여 다른 한 쪽을 살린다. 네 뱃속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고 너를 다시 살릴 수 있고, 반대로 너를 죽이고 네 뱃속의 아이를 살릴 수도 있지. 물론, 내가 아는 너라면 이 선택지를 절대로 고르지는 않겠지."
바이올렌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왜 굳이 말하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역시 악당이 되고 나서, 입이 좀 지나치게 가벼워진 것 같긴 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너도, 네 뱃속의 아이도 살린다."
사실 굳이 바이올렌스를 살릴 이유는 없다. 그리 친한 사이였던 것도 아니고, 살려줘 봤자 그녀가 내게 그에 대한 보답을 할 방법도 없으니 내게 직접적인 이득이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를 살리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두부 멘탈 용사 때문이다.
자기가 쓰러트린 적이 자기 때문에 이런 비참한 꼴을 겪었다며 질질 짜는 저 찌질한 용사가 또 의지를 잃고 절망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나는 녀석의 실수를 대신 보완해주는 것이다.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의 뒷처리라니, 이게 무슨 후임 뒷바라지 하는 선임도 아니고... 애초에 서로 선후임 비슷한 관계인 것도 아니지만, 이 망할 연극을 제대로 끝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할 수 밖에 없지.
"네가 원하는 선택지만큼 눈을 깜빡여."
깜빡 x3
혹시나 한 번 깜빡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바이올렌스는 눈을 세 번 깜빡였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그 어떤 비참하고 고된 상황이라도, 언젠가 모든 것을 자기 발 아래에 두겠다는 쓸데없니 높은 욕망 하나만으로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아득바득 살아남는 것.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그 행동 하나만은, 내 마음에 들었다.
"네 성격상 원치 않게 생긴 뱃속의 아이에게 자기 목숨을 희생할 정도의 애착 따위 없지만, 그렇다고 저 혼자 살겠다고 자기 뱃속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찝찝하니 어쩔 수 없이 3번을 골랐겠군. 참고로 3번 선택지에는 미쳐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있어."
텁. 나는 바이올렌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를 향한 그녀의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걱정마. 죽을 만큼 아프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야. 뭐... 어차피 고통은 한 순간이니까."
혼돈의 파편을 잃고 힘 없는 평범한 여인이 된 바이올렌스의 몸에, 나는 어둠을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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