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97화 (97/229)

〈 97화 〉 그런데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1)

* * *

"그러니까... 짐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면, 아마게돈 남작을 처치해야 하니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한 것 같은데... 맞나?"

"그렇습니다."

"허허..."

헤르몬 왕국의 국왕은 스스로를 용사라고 소개한 눈앞의 사내를 젊은 나이에 정신이 나간 미치광이로 치부하고 쫓아낼 지, 아니면 아마게돈 남작을 죽이고 싶어하는 귀족이 왕실의 힘을 빌리고자 고용한 겁 없는 사기꾼으로 규정하고 목을 쳐버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마게돈 남작의 가문은 본래 헤르몬 왕국의 개국에 큰 공헌을 한 명예로운 공작가였지만, 왕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곳이다.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라그나 아마게돈은 이국에서 얻은 사특한 힘으로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공작가 중 하나를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 버렸고, 헤르몬 국왕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가장 든든한 아군에서 가장 두려운 적이 된 그를 상대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그가 왕가에서 개최한 파티에 참가하여 드러낸 뜻은 의외였다. 비록 왕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왕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딱히 왕국을 집어삼킬 생각도 없었다.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혹은 그가 방해가 되어 제거하려고 들었던 귀족들이 하나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야 했다만, 라그나 아마게돈은 그것 외에는 헤르몬 왕가에 해가 될 짓은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가 저지르는 영지전이 비록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야 있다만, 그는 오로지 본래 아마게돈 공작가의 소유였던 영지만을 목표로 움직였다. 실제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수많은 귀족들이 탐내는 금광이 매장된 영지가 있었으나, 그는 그 노른자 영지가 본래 자신 가문의 영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이상의 침공을 멈추었다.

그 이후로도 헤르몬 국왕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떠보았고,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이 왕국을 손에 넣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아마게돈 가문이 가장 강력했던 때로 되돌리는 것 뿐이라고. 놀랍게도, 그가 날뛰는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헤르몬 왕가다. 잘하는 것이 아부하는 것 밖에 없는 간신배부터 왕위를 탐내는 배은망덕한 귀족까지, 굳이 왕가가 나서서 힘들게 처리할 필요 없이 그가 깔끔하게 치워주고 있었으니까.

그는 목장에 나타난 사자다.

이빨 빠진 늙은 양치기 개 대신, 울타리 너머의 굶주린 늑대들로부터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양들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비록 이따금 배가 고프면 목장에 사는 양들을 잡아 먹지만, 늑대들이 울타리를 넘어와서 잡아 먹을 양에 비하면 그 수는 굉장히 사소하다. 굶주린 늑대 떼에게 양들을 전부 잡아먹히느니, 양 몇 마리를 거대한 사자에게 밥으로 주는 대신 목장을 지키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은 굳이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사실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용사라고 소개한 남자의 요청은, 여태껏 목장을 잘 지켜주던 사자가 단지 양 몇 마리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이유로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자가 죽고 난 후에 찾아올 늑대 떼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고, 애초에 혼자서 그 사자를 죽일 힘도 없으면서, 단지 그것이 옳다고 주장할 뿐.

상대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귀찮은 이상론만 주구장창 내뱉을 뿐인 성가신 애송이다.

세상은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착하게 산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 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헤르몬 왕국의 국왕에게 있어서, 죽일 수도 없고 죽일 이유도 없는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과 오늘 처음 만난 자칭 용사 중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이득이 될 지는 그 늙은 머리로도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늑대들로부터 양떼를 지켜주는 사자를 굳이 건드렸다가 피를 볼 이유 따윈 없으니.

"한 왕국의 국왕의 앞에서 당신의 신하를 살해하겠다는 대담한 선언을 한 용기는 가상하구나. 아직 이 나라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점을 선처하여 죄를 묻지 않을 터이니, 다시는 짐의 앞에서 그런 망발을 하지 않도록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여라."

헤르몬 왕은 이 자칭 용사를 도와줄 생각 따위 전혀 없다. 혹시나 그가 정말로 아마게돈 남작을 처리해 준다면,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에게 처참히 박살나서 제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 헤르몬 왕가가 왕권을 강하게 굳힐 수야 있겠지만, 그걸 위해서 아마게돈 남작에게 검을 들이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솔직히 국왕에게 있어서 이 자칭 용사가 아마게돈 남작을 정말로 처리하든, 아니면 여타 다른 도전자들이 그러하듯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 그가 손해를 볼 일은 없다.

"하지만 왕이시여, 아마게돈 남작이 언제까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더 늦기 전에 그를 막지 않으면, 후에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만."

국왕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건 이 나라의 외부인인 자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지. 그리고 한 나라의 지도자 앞에서 허가도 없이 멋대로 용건을 꺼내는 행위는, 어느 나라에서든 좋게 봐줄 수 없는 무례한 행위일세. 이 나라의 법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해도 봐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네. 이제 그만 물러가도록."

"...알겠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감한 것인지, 용사는 체념한 얼굴로 동료들과 함께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옥좌에 앉은 국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빌헬름 녀석이 또 이상한 짓을 벌이여는 듯 하여 골치가 아픈 데, 용사인가 뭔가 하는 저 청년은 또 뭔지... 쯧."

*

"후...."

왕궁을 나온 루크는 쓸데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프레드릭 왕자는 자신 외에는 도울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악당이 세상이 자기 거라도 된다는 듯 설치고 다니는 데, 그를 쓰러트리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이 분명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헤르몬 왕가는 구태여 아마게돈이라는 벌집을 건드리는 것을 꺼려했고, 귀족들 중에서 도움이 될만한 인물은 이미 프레드릭 왕자의 밑으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로얄 나이트는 아직 엘헤임 왕국 치안 안정화에 힘을 쓰고 있으며, 모험가들은 아무리 돈으로 움직인다고 한들 타국의 귀족과 연관되어서는 좋을 게 없으니 나서지 않으리라. 인정하기 정말로 싫지만, 프레드릭 왕자의 말이 옳았다. 그가 아니면, 아마게돈 남작을 상대로 싸울 루크를 도와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아마게돈 남작의 목을 자신들이 벨 수 있게 신병을 양도해달라는 제안에서 루크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지만, 그럴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그를 쓰러트릴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그들도 아무런 불만 없이 제안을 승낙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마게돈 남작의 공개 처형은 2순위고, 1순위는 아마게돈 남작의 죽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타협도 거짓말도 하지 않는 용사는 그러지 않았다. 설령 그를 생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아마게돈 남작의 신병을 양도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확실하게 끝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며, 용사된 자로서 남을 속이고 기만할 수 없다는 두 생각이 맞물리며 나온 바보같이 정직한 결론이었다.

"루크!"

"...비올라, 그리고 호크나! 둘 다 무사했구나!"

지원 세력을 구하지 못해 침울한 용사의 앞에 무사히 돌아온 두 명의 동료는 그의 침울한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들었다.

"비올라, 이제 괜찮은 거야? 다른 세계의 신이 몸에 깃들었다던데, 그 문제는 잘 해결된 거야?"

"아, 응. 그 문제는 이제 괜찮아. 내 몸에서 완전히 나갔거든. 그보다... 루크, 이걸 봐."

비올라는 오래간만의 재회에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문서 더미를 루크에게 건네었다. 루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문서를 받았고, 그 안에 적힌 내용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게 뭐야? 비올라, 여기 적힌 게 전부 사실이야? 이 문서는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빙의 문제가 해결된 후,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의 방에 몰래 숨어들었어. 녀석의 저택은 워낙 바깥 경계가 철저하다보니, 정작 내부에는 경비라고 할 만한 게 없었거든. 그 문서도 그 방에서 찾은 거야. 그리고 그 문서의 내용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전부 사실이야."

"....젠장."

루크는 이를 악물며, 문서를 다시 한 번 정독했다.

문서의 내용은 아마게돈 남작이 자신의 힘을 네 개의 왕국 전체로 퍼트려,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그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악에 물들인다는 계획의 전말부터 아마게돈 남작의 지하에 있는 공간에 대한 정보와 그가 다루는 힘의 특성 등... 루크와 일행에게 절실한 온갖 정보들이 전부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의 공략집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고마워, 비올라."

"으, 응?"

"이런 엄청난 정보를 가져오느라 고생했어. 그리고 호크나 씨도, 비올라를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이 없었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에요."

"아하하... 난 별로 한 것도 없는 걸."

"내가 없는 동안 너희끼리 바이올렌스를 쓰러트렸으니까... 나는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루크는 문서의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다시 세웠다. 본래는 지원 세력을 구해서 아마게돈 남작에게 정면 승부를 걸 예정이었지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승기가 존재하지 않는 자살행위였을 것이다. 그의 지하에 있는 끔찍한 피조물들, 저택 근방에 널린 무수히 많은 마수들과 아마게돈 남작가의 사병.... 무엇보다도, 아마게돈 남작과 그의 강력한 심복들. 설령 프레드릭 왕자가 힘을 더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난 번에 그러했듯 소수의 인원으로 목표인 라그나 아마게돈만 쓰러트리는 것이 가능성이 높다.

그걸 위해서라도... 프레드릭 왕자와 그의 부하들이 절실했다. 결국 루크는 잠시 후, 프레드릭 왕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그와의 교섭 자리를 마련했다.

*

­오, 일이 제법 성공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것 참 불행 중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말 볼 수록 웃기는 녀석이군. 다른 사람이 주는 정보는 하나 같이 믿지 않으면서, 정작 동료가 가져온 정보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다니.

보통 용사 같은 타입은 머리가 텅 비어서 다루기 쉬운 편에 속하지만, 정작 이 용사 놈은 머리 속이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다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난 그냥 녀석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녀석이 갈 수 있는 길을 하나로 줄여버리기로 했다.

내가 마련한 길을 가던가, 아니면 그냥 뒤지던가.

녀석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이 어렵다면, 예측이 가능하도록 갈 수 있는 길을 제한하면 되는 거였다.

"다음에 용사가 찾아올 때면, 확실하게 이 연극을 마칠 수 있겠지. 에이 설마, 전에도 한 번 진 적이 있는데 또 똑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하겠어?"

*

"으윽...!"

"......"

그런데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왜죠? 도대체 왜?

나는 상처 투성이인 용사와 동료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기 직전인 광경에서, 데자뷰를 느꼈다. 전에도 이러지 않았나?

내가 분명 프레드릭 왕자와 그 부하들이라는 지원 세력도 만들어 줬고, 내 파이널 플랜이 적힌 문서에다가 나와 부하들이 사용하는 힘과 파훼법, 그리고 약점 등까지 적어서 비올라를 통해 전달했다. 게다가 지금 용사의 아군 중에는 초대 용사인 셀레나도 있다. 혼자서 불멸의 용을 몇 번이고 때려잡았던,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아군으로 있단 말이다.

그런데 루크, 너는 왜 또 나한테 진 거지?

"...하, 하하."

이상하잖아.

신성력을 다루는 법, 내 약점, 저택에 있는 함정의 위치와 병력의 상세한 정보, 내가 진행할 마지막 플랜의 상세한 계획까지. 나는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죄다 넘겨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 해줬으면 설령 내가 용사의 입장이었어도 아마게돈 남작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으면 패배했지, 보스와 싸우기도 전에 중간 보스들한테 엉망진창이 되어서 전의상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몬스터 같은 것이라곤 전혀 없는 현대에서 살던 나라고 해도 그 정도는 가능했을 거라고!

그런데! 나처럼 다른 세상에서 불려온 것도 아니고, 원래 이 세상에 살던 인간이었으면서! 심지어 전체적인 스텟만 보면 나에게 전혀 꿀리지 않을 수준인데, 도대체 왜 지는 거야!

프레드릭 왕자와 그 부하들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들이 날뛰게 했지. 내 병력을 바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나는 그래서 그 의도에 따라, 저택에 있는 사병과 마수의 절반을 그곳에 보냈다.

그런데 유인 작전으로 내 전력을 깎아 놓은 후 몰래 내부로 침입하겠다고 이용한 통로가, 지하 감옥이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지하 감옥? 분명 거기에 뭐가 있는지 비올라가 다 말해 줬을 텐데도, 굳이 거길 통해서 왔다고?

그것도 그냥 오는 게 아니라, 감옥을 지키는 모르모트랑 싸우면서 감옥에 갇혀 있던 것들을 풀어줬다가 되려 그 녀석들한테 공격당하고...

어떻게든 초대 용사 셀레나가 그것들을 대신 상대해주는 사이에 지하를 나온 후에...당장 최상층에 있는 내 방으로 달려와도 모자랄 판에, 내 심복들을 먼저 처리하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게다가 심복 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쓰러트리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합류해서 내 방에 도착해?

이 새끼는 진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일을 이렇게 환상적으로 망칠 수가 있지?

"하....."

아마게돈 남작이 쓰러지면 그 심복들은 후일을 도모하며 뿔뿔히 흩어질 테니, 한 명당 한 사람을 맡아서 동시에 쓰러트린다고?

그건 씨발, 너네 전투력이 우리 쪽을 압도적으로 상회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전투력이 비등비등하기는 커녕, 오히려 딸리는 시점에서 보스인 나를 조금이라도 빨리 쓰러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도 힘들 판에, 내 부하들부터 먼저 정리하겠다는 오만한 자만심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그토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와 부하들한테 깨져 놓고서 무슨 생각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게다가 인원 배치도 참...

일단 내 심복 중에 모르모트는 지하 감옥에 있는 것들과 함께 초대 용사를 상대하는 중이기에, 남은 주요 전력은 심복인 사하, 마르스, 레이, 미아 넷에 엘헤임 왕국에서 데려온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까지 다섯.

미스트리나를 상대로 같은 마법사인 비올라를 보내고, 마르스는 가장 방어력이 높은 고든이 상대하고, 사하를 호크나에게 맡기고, 미아의 상대로 에일라가 나서고, 레이를 상대로 용사 본인이 나선다?

진짜.... 머리에 든 게 없나?

저혈압 환자가 고혈압이 될 정도로, 나는 혈압이 올라서 뒷골이 당겨왔다.

일단 이 인원 선별에는 큰 문제가 있다.

싸움의 무대는 내 저택의 내부이다. 즉, 실내전이다.

이전 도전에서 레이 때문에 나에게 참패한 용사는 레이가 가장 성가신 존재라 여기고 자신이 맡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그 당시에 그들을 상대할 심복이 레이 밖에 없었을 뿐이고, 사실 실내 전투에서 더 골치 아픈 것은 놀랍게도 미아니까.

미아는 비전투 인원인 메이드에 속하지만, 수인 자매들과 블래키가 오기 전까지 이 저택을 홀로 관리했기에 그녀보다 이 저택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지금 미아의 곁에는 여섯 명의 수인 메이드와 용병 및 도적 여두목 출신의 블래키가 있는 상황.

용사의 동료 중에서 가장 화력이 낮고 안정성이 높은 에일라가, 혼자서 여덟 명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에일라는 그나마 어둠의 힘을 가진 적에게 유리하지만, 메이드 중에 어둠의 힘을 받은 이는 오로지 파랑이 한 명 뿐.

루크는 나한테 험한 꼴을 당한 수인들이 나를 위해 싸울 리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안개의 저택에서 파랑이가 그를 상대한 시점에서 수인들이 모두 내 아군이 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 아군이 되었다면, 내 심복 중에서 누구를 보좌할지도.

미아의 지휘 아래 일곱 메이드들의 협공 끝에, 에일라의 몸을 지키던 장벽은 부숴졌다. 그녀가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메이드들이 그녀를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아를 공략할 거였다면, 다수의 전투에 호크나 또는 비올라가 적합했을 것이다.

호크나를 사하에게 보낸 것은 암살과 암행에 특화된 사하를 상대하는 데 원거리 공격과 추적에 특화된 호크나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이 또한 공간이 협소한 실내에서 활을 쓰는 호크나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용사의 실책이다. 저택 내에서 사하를 상대한다면 어줍잖게 추적하기 보다는 차라리 튼튼한 갑옷으로 온몸을 뒤덮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래, 고든처럼.

거기에 마르스를 상대로 고든을? 그 녀석이 아무리 방어력이 높다지만, 광전사라 불리는 마르스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 없다. 그녀의 검을 상대로는, 어줍잖은 갑옷보다는 차라리 에일라의 신성력 장벽이 더 오래 버텼을 것이다. 아니면, 비올라가 마법을 갈기던가.

그리고 레이... 레이의 강점은 다수의 마수를 부린다는 것. 하지만 그 마수들은 하나 같이 어둠에 물든 마수이며, 이들을 상대로는 비올라의 광역 마법 또는 에일라의 신성력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물론 용사인 루크 또한 신성력을 다룰 수는 있으나, 그걸 검에 둘러서 하나 하나 베어서는 도대체 어느 세월에 레이를 쓰러트릴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큰 실책은 미스트리나를 상대로 비올라를 보낸 것. 같은 마법사라고 해도, 미스트리나는 '마녀'라 불릴 정도로 수준 높은 마법사이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조차 쉽게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마법진을 손쉽게 개량하는 그 뛰어난 마녀를 상대로, 아직은 미숙한 마법사를 보낸 것은 그가 마법에 대해서 1도 모르는 전사이기에 할 수 있었던 최악의 실수였다.

결과적으로 용사 일행은 내 수족들을 먼저 자를 셈으로 각개격파를 감행했다가 오히려 각개격파 당해버렸고, 이대로 퇴각할 수는 없었기에 마지못해 내 방에 쳐들어왔다.

내가 전력을 발휘하면 용사와 동료들이 온전한 상태라도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인데, 괜히 가만히 있던 내 부하들을 건드렸다가 빈사 상태가 되어서는 덤벼온 모습은... 전에 저택의 함정과 레이의 마수들에게 시달려서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로 내 앞에 도달했던 때를 연상케 했다.

분노를 참다 못한 내가 용사를 향해 쌍욕을 토해내려는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흡사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우렁차고도 섬뜩한 포효에, 나도 용사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시발, 이번엔 또 뭔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