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그런데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2)
* * *
[....이런, 이게 누구람?]
잊혀진 신전 지하, 루미너스 여신의 비좁은 봉인 안에 몸을 구겨 넣어진 채로 해방의 날만을 고대하던 마룡은 어느날, 눈앞에 나타난 기이한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온몸에서 푸른 번개를 파직파직 흩뿌리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는 이내 마룡이 수천 번을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던 루미너스 여신의 봉인을 가볍게 통과하여, 마룡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나? 너 같은 피조물이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위대한 존재지.]
[그런가? 그래서, 그녀는 어디에 있지? 왜 평소엔 오지도 않던 당신이... 아, 그런가. 큭큭큭, 그런 거였어.]
그 말에 마룡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음을 흘리자, 그 행동에 불쾌함을 느낀 초월적인 존재는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도 우습지, 하찮은 피조물이여?]
[글쎄. 한 두 개가 아니라서. 어느 쪽일까? 어울리지도 않게 고고한 척 하는 것? 아니면 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로부터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애써 태연하고 여유로운 척을 하는 것? 그도 아니면...]
세상을 부수고 만들 수 있는 초월자에게 있어서 일개 피조물 따위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급이 떨어지는 여신이 만든 피조물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자신을 우습다는 듯 내려다보는 것은 더더욱.
헬과 함께 루미너스의 계획을 망치려고 했던 초월자, 뇌신 라이키린은 감히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찮은 병신 취급하는 벌레 같은 피조물에게 분노를 느끼며, 자신의 내부에서 신으로서의 힘을 끌어올렸다.
[미개한 것. 나는 신이다! 너 따위가 감히 우습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이 비좁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아둔한 꼭두각시 주제에, 감히 누구를 바보 취급 하는가!]
[크큭.]
라이키린은 신의 분노를, 푸른 전격을 사방에 요란하게 흩뿌리며 마룡을 위협했다. 신의 권능을 몸에 두른 그의 목소리는 초월자의 영역에 미치지 못한 마룡의 영혼 속까지 울려퍼졌지만, 그럼에도 마룡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순식간에 지워버릴 수 있는 존재를 향해 다시 한 번 비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 네가 정말 신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넌 나를 만든 신은 아니지.]
쿠르르르릉. 마룡이 비좁은 봉인 안에서 그 거구를 일으키자, 라이키린이 낸 천둥 소리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굉음이 지하 전체에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나를 창조하지도 않고 다스리지도 않은 신에게, 내가 경배를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더냐?]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한 쌍의 샛노란 눈동자로부터 풍겨져 오는 압도적인 위세에, 도저히 하급 여신의 손에서 탄생한 피조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묵직한 위압감에, 초월자는 순간 자신이 고양이 앞의 생쥐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사실은 굳이 따지자면 자신이 고양이고 저쪽이 생쥐일 터인데, 어째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하찮은 피조물 주제에 감히...!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보여주마. 신의 힘을, 그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아라!]
그 말과 함께 초월자의 몸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뇌격이 뿜어져 나왔고, 푸른 전격은 이내 수천 가닥의 사슬이 되어 마룡을 향해 쇄도해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불합리한 공격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육신을 집어 삼키는 것을 느끼며, 마룡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역시, 자칭 신들은 하나 같이 성격이 꽐라군.]
직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봉인 너머, 같은 적에게 두 번째로 패배하기 직전인 용사와 용사에게 쓰러져야 하나 또 다시 용사를 쓰러트릴 위기에 처한 악당의 귓가에까지 울려퍼졌다.
*
불멸의 용.
루미너스 여신이 진행하는 이 연극에서 용사가 마지막에 쓰러트려야 하는 최강이자 최흉의 적. 자신을 가둔 여신의 봉인을 풀기 위해 많은 것을 잃은 네 사람에게 혼돈의 파편을 쥐어줌으로서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용사가 네 개의 파편을 모두 모아서 잊혀진 신전에 도착하는 순간 봉인에서 풀려나며 그 앞을 막아서는 살아 움직이는 재앙.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다 붙였지만, 쉽게 말해 게임으로 치자면 최종 보스인 놈이다.
어쨌든 이 불멸의 용은 최종 보스답게, 봉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경우가 단 두 가지 뿐이다. 용사가 혼돈의 파편을 모두 모았거나, 아니면 용사가 죽었거나.
물론 그 문제의 용사가 너무 멍청이라 지금 나한테 또 패배하기 직전이긴 하지만, 적어도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문제의 혼돈의 파편도 아직 다 모으지 못 했고. 그러니 불멸의 용이 지금 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건 그야말로 버그, 그 자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세상이 무너지는 건가 착각할 만큼 우렁찬 굉음이 귀를 때린다.
하늘을 전부 뒤엎어 버릴 기세로 피어오른 크고 검은 먹구름에서 쏟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분노.
푸른 벼락이 황폐한 땅을 강타하고, 갈라진 균열 사이로 이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을 전부 모아 응집한 것 같은 새카만 것을 강제로 끄집어 낸다.
빛의 여신 루미너스가 만든 봉인이 찢어지고, 아직 등장할 시기가 아닌 배우가 푸른 전격의 사슬에 묶인 채 무대 위로 내던져 졌다.
"....이런, 미친."
새카만 먹구름, 그리고 푸른 번개.
내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다. 엘헤임 왕국으로 향하는 길, 부하들과 잠시 떨어져서 홀로 행동하는 사이 나를 습격해 온 정체불명의 먹구름. 그리고 신성력이 아닌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간 불합리한 공격.
지옥의 여신 헬과 함께 루미너스의 연극을 망치고자 한 또 한 명의 초월자. 헬은 그 녀석은 계략을 쓰는 타입이 아니기에 포기하지 않고 방해를 해 온다면 함정을 파기보다는 그냥 난입해서 판을 뒤엎어버릴 것이라고 했지만.... 설마 그게 이런 식일 줄이야. 나는 적당히 한 인간의 몸을 빌려서 용사를 직접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아직 불멸의 용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용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어떤 존재도 죽일 수 없는 괴물을 깨운다고? 그것도 이 세상을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괴물을?
그 초월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겠다. 어차피 계획을 세워 줄 헬이 투항했으니, 가만히 있어도 꼬리가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 그렇다면 차라리 루미너스의 이 세상을 다 작살내서,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증거 자체를 남기지 않을 속셈이다.
"저, 저건 대체...!"
"정신 차려라, 용사. 저게 네가 쓰러트려야 할 마지막 적, 불멸의 용이다."
"불멸의 용...? 저 무자믹지한 괴물이 불멸의 용이라고?"
물론 나도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의 배역을 연기하면서 불멸의 용을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비좁은 봉인의 틈 사이로 본 것과 이렇게 밖으로 나온 것은 차이가 엄청났다. 봉인에서 해방된 마룡은 고통과 분노로 가득한 포효를 내지르며, 주둥아리를 쩌억 벌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이...
"저런 걸... 상대해야 한다고?"
...그대로 엘헤임 왕국과 헤르몬 왕국 근처의 산맥 몇 개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어디선가 밥을 떠 먹여줘도 뱉어버리는 얼간이 용사의 투지가 툭 하고 꺾여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부디 착각이기를 바라며 나는 용사를 향해 말했다.
"용사, 우리끼리의 싸움은 일단 멈추도록 하지."
"뭐?"
"불멸의 용의 목적은 단 하나, 이 세상의 파괴. 놈을 막지 않으면, 모든 게 사라질 거다. 그러니 우선은 녀석을 막는 게 먼저다."
"...알겠다."
어딘가의 보라색 주걱턱 외계인마냥 손가락 한 번만 튕겨도 이 용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보다 불멸의 용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나는 용사와의 전투를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다만... 역시 용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그를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피스는 누군가의 희생. 적의 공격에 아군 한 명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루크를 위험에서 구함으로서, 한 명의 희생으로 루크는 비로소 진정한 용사로서 거듭난다.
본래라면 바이올렌스의 전투에서 얻었어야 할 깨달음이지만, 초대 용사 셀레나의 공격으로 약해진 바이올렌스는 용사의 동료 중 한 명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그를 구해낼 정도로 용사 일행을 밀어붙이지 못 했다. 그래서 대신 내가 용사의 동료 중 한 명의 목숨을 빼앗고, 동료의 희생에 분노한 용사의 검에 맞아 숨이 끊어지며 비로서 루크를 용사로서 완성시킨다는 계획을 세웠건만을...
문제의 용사는 나를 먼저 처리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쓰러진 후 내 부하들이 달아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만히 있던 부하들을 공격했다가 얻어터질 대로 얻어 터져선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내 앞에 도달한 상황. 동료 한 명이 희생하기는 커녕, 공격 한 번에 용사 파티가 전멸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루미너스를 방해하려는 또 한 명의 초월자가 갑자기 불멸의 용을 깨우는 바람에 싸움이 흐지부지 되어서, 용사에게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용사를 죽이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당장 눈앞에 처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제는 스토리 막바지에 등장할 예정인 최종보스가 날뛰기 시작한다는 더 큰 문제가 다가왔다.
그리고 불멸의 용을 막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가 가진 힘은 혼돈의 파편에서 나오는 것이며, 혼돈의 파편이란 본래 불멸의 용이 가진 힘이다. 즉, 내가 쓰는 힘은 원래 불멸의 용이 다루는 힘이라는 뜻이다.
물론 나한테 과도한 관심을 쏟고 있는 외신의 선물 덕에 이제 이 파편이 없어도 다른 방식으로 비슷하게 힘을 사용할 수야 있지만, 그럼에도 나 혼자서 불멸의 용을 막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애초에 불멸의 용은 그렇게 설계된 존재다.
세상의 악의가 뭉쳐 만들어진 재앙. 그것을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굳건한 우정, 강력한 적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울 용기, 사악한 악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올곧은 정의, 쓰러진 이들을 위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오직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이 모든 것을 가진 용사만이, 불멸의 용을 쓰러트리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 그것이 루미너스 여신이 정한 세상의 법칙이며, 절대 바꿀 수 없는 규칙.
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그 신이 정한 규칙은 절대적이다. 이것만큼은 다른 신이라고 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법칙. 설령 루미너스 여신보다 더 강한 신이 이 세상에 온다고 해도, 저 불멸의 용은 죽일 수 없다. '불멸의 용은 오로지 자격을 갖춘 용사만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루미너스 여신이 정한 이 세상의 룰이니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용사 일행이 몸을 추스리고, 나 또한 용사 세력과의 싸움을 멈추기 위한 준비로 바쁜 사이 초대 용사 셀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에 있던 것들을 막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 짧은 시간 내에 그걸 다 처리한 건가?"
"예정 외의 사태가 일어나서, 용사와의 전투는 후로 미뤄졌다. 지금은 어째선지 몰라도 갑자기 봉인에서 풀려난 저 마룡을 막는 일이 최우선이다."
"역시... 좀 전의 그 포효는 불멸의 용, 그 괴물의 것이었나."
"그나저나, 지하에 있던 것들은 어떻게 했지? 설마 다 죽였나?"
그럼 좀 곤란한데.
"죽이지는 않았어. 그저... 신성 마법으로 구역을 나눠서 잠시 가둬뒀을 뿐이야."
"다행이군. 앞으로의 전투에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할 테니. 셀레나, 너에겐 용사 쪽을 맡기마."
"나는 네 부하도, 동료도 아니야. 그리고 너보다 약하지도 않지. 그런 내가 네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 않아?"
"부탁이다."
"....."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알았어. 대신 저 빌어먹을 도마뱀만 어떻게든 저지하고 나면, 전에 다 하지 못 했던 질문을 다시 할 테니 준비해둬."
"물론이지."
그 말을 끝으로 셀레나는 용사와 동료들 곁으로 달려갔고, 나는 지하로 향했다.
지하 감옥의 입구에 도착하니, 성가시리만큼 찬란한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병장기들이 철책마냥 지하로 통하는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장벽 너머, 초대 용사조차 구역질을 참지 못한 흉측한 것들이 꿈틀거리며 불쾌한 공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젠장. 원래 이 녀석들은 용사 녀석이랑 싸우던 도중에 쓸 놈들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쓰게 되는지..."
모르모트가 지키고 있던, 지하 감옥에 있던 것들이 뭐냐고? 간단하다.
내 별명, '검은 군대'의 라그나 아마게돈.
이 지하에 있는 것이, 나에게 그 별명을 붙여준 '검은 군대'다.
*
마물.
마수와 유사하나, 짐승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한 괴물들.
대표적인 예시로 오크, 고블린, 오우거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럼 여기서 문제. 이 마물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세계마다 마물들의 설정은 다르지만, 이 세계에서의 마물의 설정은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불멸의 용.
무슨 수를 써도 죽지 않으며, 오로지 세상을 파괴하는 것만이 목적인 마룡.
이 마룡이 흘린 피에서 태어난 것이 마물이요, 마물이 풍기는 마기로 인해 변이를 일으킨 것이 마수다.
즉, 마물이란 불멸의 용으로부터 비롯된 괴물이다.
불멸의 용은 결코 죽지 않지만 무적은 아니였고, 그 크고 시커먼 육신 곳곳에는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가득하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봉인의 틈을 지나 바깥 세상으로 흘러나오고, 이 피에서 마물들이 태어나며, 마물들이 활개침으로서 짐승들이 마수로 변화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괴물들에 대한 기본적인 설정, '불멸의 용 만악설'이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간단하다. '마물'이란 '불멸의 용'이 흘린 피에서 태어나는 괴물. 그리고 지금 '불멸의 용'이 예정보다 빨리 봉인을 깨고 나온 상황. '불멸의 용'은 용사와 싸울 것이고, 전투 과정에서 계속해서 마물을 생산하게 된다. 마물을 처리하는데 신경이 쏠리면 불멸의 용이 상처를 회복하고, 불멸의 용을 공격하는데 집중하여 마물을 방치하면 그 수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물론...
"사라져라!"
"가라."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다는 뜻이다.
불멸의 용이 풀려나자 마자 마물들의 수가 급증했고, 마수 조련사 레이의 영향으로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살아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마물들의 터전이 사라진 헤르몬 왕국에조차 마물의 군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블린, 오크, 오우거, 트롤 등등. 짙녹빛 피부의 아인족들이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며 덤벼왔지만, 그들은 얼마 안 가 풍요로운 대지를 위한 거름이 되었다. 하늘에서는 수천 발의 빛의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날개를 가지고 있거나 덩치가 큰 마물들을 무너트리고, 땅에서는 그저 마주하기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절로 샘솟는 불길한 검은 군세가 달려오는 아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내었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이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야!"
"나도... 몰라!"
용사에게 쓰러져야 할 악역인 나와 설정상으로 존재했다고 언급만 하지 실제로 등장할 예정은 없던 전 용사 셀레나가 이렇게 바삐 마물의 군세를 처리하는 데에는 다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지만...
용사가....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