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그런데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3)
* * *
용사가 사라졌다.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서 다시 말하지만, 용사가 사라졌다.
불멸의 용이 풍기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공포에 질려 어딘가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거나 저 먼 곳으로 달아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그래, 사라졌다. 정말로 갑작스럽게. 내가 마지막으로 본 용사의 얼굴은 공포에 질린 한심한 겁쟁이 행색 따위가 아니라, 분명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이 맡은 바를 다 하려는 어엿한 한 명의 용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용사'만'이 사라졌다. 그의 동료들은 남아 있는데, 오직 용사 루크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일행들에게 용사는 어디 갔냐고 물어봐도 자신들도 모르겠다는 무의미한 답변 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셀레나에게 회복을 받은 후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 있던 루크만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이후였다....라고 말이다.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 같으니.
아, 호크나는 빼고.
"그 애송이, 진짜 도망친 건 아니겠지?"
"최강의 용사라던 양반이 그렇게 자기 후배를 못 믿어서 어떻게 해?"
"그런 우유부단한 후배 따위 원한 적도 없거든.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정말 이번 대 용사라던 그 아이가 도망쳤던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로 사라졌던, 주인공이 사라졌으니 큰일 난 거 아니야? 당신과 여신이 계획한 연극은 어쩌고?"
콰아아앙! '검은 군대'를 간신히 뚫고 우리 둘의 바로 앞까지 간신히 도달했던 거대한 트롤은 지면에서 천공을 향해 승천하는 거대한 빛의 창에 턱을 꿰뚫리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냥하려면 한 마리당 최소 스무 명의 사람을 동원해야 간신히 죽일 수 있는 튼튼하고 질긴 괴물을 일격에 죽여버리는 엄청난 일을 벌였지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동료들이 다 죽은 후에도 혼자서 죽지 않고 살아나는 마룡을 몇 십 번이고 죽였던 지상 최강의 전사인데, 트롤을 원펀킬 내는 것 정도야 뭐...
원래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 되지만, 저 높으신 분들이 이런 혼란스러운 전란 속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일일히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나는 마음 편히 내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전해 들은 바가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엔 아직 이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뭐? 연극의 주연은 갑자기 어디론가 뿅 하고 사라졌고, 최종장에서 등장 예정이었던 흑막은 일찍 나와서 마구 날뛰며 다 뒤엎고 있는데 아직 괜찮다고? 그게 말이 돼?"
"나야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아직 다 끝났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포기하기엔 이르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하던 도중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직전인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발판 삼아 셀레나의 신성 마법을 뚫고 순식간에 근처까지 접근한 비열한 고블린 무리를, 나는 악마를 연상케 하는 크고 흉악한 손으로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 흩뿌렸다.
"용사 루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여기, 어쩌다가 최전선이 되어버린 헤르몬 왕국의 국경에서 불멸의 용이 싸지른 이 똥들을 치우면서 버티는 거지."
내 말에, 셀레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불평을 내뱉었다.
"...아, 씨. 옷에 피 튀었잖아. 처리를 할 거면 좀 제대로 하던가."
"전장에서 옷에 피 튀는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트집 잡지 말고, 버티는 데에나 집중해. 어차피..."
나는 저 멀리서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곳을 향해 가까워져 오는 불멸의 용을 바라보며, 이어질 뒷말을 삼켰다.
대지에 내리쬐는 태양빛을 전부 가리고 싶기라도 한 건지, 푸른 하늘을 전부 뒤엎을 듯한 크고 시커먼 뇌운.
그리고 그 뇌운에 연결된 시퍼런 신의 분노에 결박 당한 채, 흑막으로서의 위엄을 모두 잃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마냥 이곳을 향해 질질 끌려오는 검은 마룡.
정말 미치고 팔자 뛸 노릇이다.
신의 힘은 세상의 섭리를 거스른다. 애초에 세상을 만들고 파괴하는 신이, 세상에 얽매일 이유가 없으니. 그렇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있어서, 신이 그 힘을 휘두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어찌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불합리한 재해이다.
용사가 쓰러트리지 않으면 세상을 멸망시킬 흉악한 마룡조차, 저 신의 궁전에 묶여 꼴사납게 구르는 모습을 보라. 도대체 저 광경을 보고서 어디에서 '합리적인 결과'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말인가? 입에서 뿜어내는 붉은 광선으로 산 두 세 개는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움직임을 봉하고 강제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인데, 심지어 그 수단이 다른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번개로만 이루어진 사슬이라고? 그리고 그 사슬이 연결된 건, 왕국 하나는 순식간에 어둠에 잠기게 할 정도로 크고 넓은 저 먹구름이고?
역시 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 부족한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득한 영역에 있었다. 그래도, 그 힘을 휘두르는 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나조차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계략을 세우고 외부의 간섭을 막아줄 파트너인 헬이 이쪽의 편으로 돌아섰으니, 머리를 쓰기보단 몸을 쓰는 타입인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겠지. 헬이 세워두었던 계획은 대다수가 무너졌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죽치고 있더라도 연극이 끝난 후 루미너스 여신이 헬이나 나의 증언 또는 다른 증거들을 토대로 신성한 신의 시험에 다른 신이 난입하여 훼방을 놓았다는 사실을 밝힐 테니까.
경쟁자를 미리 쳐내려다 오히려 전부 말아먹을 상황에 처한 그가 내린 판단은, 그 무식한 머리로 낼 수 있는 결론은 당연히 '다 때려부수자'였다.
루미너스가 만든 세계 자체를 다 파괴해서, 그녀의 시험에 다른 신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체를 전부 말소할 셈이다. 그렇게 루미너스가 산산조각이 난 자신의 세상을 수습하는 사이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이겠지. 헬이나 내가 증언을 해도, 자신이 간섭했다는 물질적인 증거가 없다면 말 뿐인 의심에 불과하다고 시치미를 뗄 생각이다.
지극히 단편적이고, 단순한 사고 방식.
그러나 단순한만큼 효과적이다.
거슬리는 것은 부셔서 없앤다는 단순무식한 방식이지만 거기에 상식을 거스르는 신의 힘이 더해졌을 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끔직한 재앙이 펼쳐진다. 그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포악한 불멸의 용은 자신을 구속하는 신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번개의 사슬에 완고하게 저항할 수록 깊은 상처가 생기고, 보통이라면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문제는 그 대상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마룡이기에, 마룡의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 나온다.
그리고 마룡이 흘린 피가 대지에 닿고, 생명을 얻고 마물이 태어난다. 그렇게 생겨난 마물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유전자에 내제된 '세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에 따라 침략 및 파괴 활동을 개시한다. 태어난 마물의 절반은 엘헤임으로 향하고, 다른 반은 이곳... 헤르몬으로 향한다. 피를 흘리는 마룡의 몸이 헤르몬에 가까워질 수록, 헤르몬을 침공하는 마물의 수가 늘어난다.
제발 어디에 있던, 그 망할 놈의 용사가 얼른 돌아와서 불멸의 용을 끝내줘야 한다. 안 그러면... 마룡이 직접 날뛰기도 전에 마룡의 몸에서 나온 마물들 만으로도 왕국들이 전부 다 망하게 생겼다.
*
"....여긴 어디지?"
동료들과 라그나 아마게돈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그 용사는, 지금 스스로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마게돈 남작의 저택을 나서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이런 곳이다.
그 이런 곳이 어디인가 하니, 신전인가 싶으면서 성당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법정 같은... 어딘가 숭고한 느낌이 드는 기이한 장소였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기둥, 곳곳에 장식된 화려한 황금 장식품,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진 붉은 원단 등등...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장소는 어디인가, 도대체 어쩌다가 갑자기 이런 곳에 자신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루크는 다시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기이한 장소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내부가 무척 넓고 복잡하며 문도 많은 곳이라 잘못 발을 들이면 순식간에 길을 잃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그를 어딘가로 인도하려는 듯, 그 많은 문의 대다수가 굳게 닫혀 잠겨 있었기에 루크는 그냥 열린 문으로만 이동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여일곱 번째 문을 지난 시점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루크의 귓가에 들려왔다. 혹시나 이곳의 사람에게서 이 장소를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루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크는 벽이 없는 대신 여러 개의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사방이 탁 트인 어느 장소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그 장소에는 한 쌍의 여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그리고 여인의 목소리에, 루크는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낯선 장소에 낯선 사람들이지만, 그 목소리만은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루크는 당혹스러웠다. 설마 그 목소리를 이런 곳에서 듣게 될 줄은 예상도 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너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저의 영역을 침범하셨잖아요! 이건 명백한 월권 행위라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니... 진심이신가요?]
[그래, 진심이다. 난 그 녀석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지. 곰곰히 생각해 봐라. 고작 하나다.]
[그 하나 또한 저의 소중한 생명이죠.]
[단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눈을 돌리기만 하면, 더 많은 생명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수 있어도?]
낯선 여인의 말에, 낯익은 목소리의 여인은 그녀를 경멸스럽게 쏘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이제야 알겠네요.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있는데, 어째서 그분의 소망을 이룬 이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는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물론 그게 더 쉽고 확실하겠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분이 바라시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 하는 거에요.]
[...말 조심 해라. 난 최선을 생각할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협한 것 뿐이잖아요. 최상의 결과를, 최선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차선에서 만족하고 머무르기에, 결코 그분이 바라시는 곳까지 도달할 수 없는 거에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잖아요! 왜 그걸 모르시는 거죠?]
[.....말이 통하지 않는 군. 그렇다면, 당사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수 밖에.]
[뭐라고요? 당신, 설마...!]
[이제 그만 나오시지, 우리 용사 님.]
갑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에 루크는 움찔하면서도 조금 더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으나, 낯선 여인은 그가 그렇게 잠자코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용사 루크.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이만 나오도록. 너와 긴히 나눌 대화가 있다.]
[루크? 말도 안 돼. 설마 루크를 여기로 데려온 거에요? 오, 세상에. 당신, 정말 제정신인가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알고는 있는 거에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하아.... 뤀, 이 자의 말 듣지 마세요!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그건 당사자가 선택할 일이지.]
루크는 망설였다. 이대로 누군지 모를 저 여자의 말대로 기둥에서 나와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것인가, 아니면 다른 여자.... 아니, 빛의 여신 루미너스의 말대로 그냥 걸음을 돌려 다른 출구를 찾을 것인가.
또 다시 선택의 시간이다. 이전부터 몇 번이고 찾아왔던,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않고 재촉하던 선택의 시간. 어느 한 쪽만을 반드시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에, 혹시나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에 대한 망설임 등이 그를 다시 에워쌌지만....
'나를 악인이라 매도하는 건가? 상관 없다. 사실이니까. 그래, 나는 악하다. 구제할 길 없는 악인이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먼 옛날 들었던, 한 치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는 그 당당하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루크를 선택의 중압에서 다시 일깨웠다.
그렇다. 이런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낭비할 시간 따위 없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아마게돈 남작과의 전투를 하기 앞서 어째선지 난데 없이 봉인에서 풀려난 불멸의 용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용사인 그는 한시라도 빨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루크는 기둥에서 나와 두 사람을 향해... 아니, 정체 모를 여인과 루미너스 여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루크의 물음에, 루미너스 여신과 다투던 여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널 이곳으로 불러낸 당사자,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다.]
스스로를 여신이라 칭하는 여인은 손에 든 황금으로 이루어진 판결봉으로 루크를 가리켰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이에게, 정의를 실현할 힘을 주는 존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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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한 마디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의란 선도 악도 아니다. 그저 정해진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의 반대가 악이 아니라 또 다른 정의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의 정의가, 어떤 사람에겐 선할 지라도 어떤 사람에겐 악할 수가 있으니.
그리고 현재 그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은...
[내가 너에게, 너의 정의를 실현할 힘을 주마. 단, 하나의 조건이다. 바로 그 인간, 라그나 아마게돈을 죽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혼돈 신의 추종자인 그 인간을 죽이고 너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내가 너에게 힘을 빌려주는 조건이다.]
머릿속에 혼돈을 담당하는 고대의 외신을 쳐죽이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는, 가장 정의와 동 떨어진 존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