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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01화 (101/229)

〈 101화 〉 그런데 쨔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5)

* * *

하늘에서 용사가 떨어졌다.

그것도 화려하게 다이빙해서 엄청 멋진 포즈로 착지한 게 아니고, 알을 훔쳐가는 못된 녹색 돼지를 혼내주기 위해 새총을 타고 슈웅 하고 날아가는 화난 새들마냥 전속력으로 날아와 지면에 얼굴을 쳐박았다. 다만 용사의 몸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신성력으로 휩싸여 있다 보니, 신성 마법의 대가인 셀레나나 그 신성력이 약점이라 관련 지식이 많은 내가 아닌 이상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용사가 하늘에서 유성처럼 내려와 우글거리는 마물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것처럼 보일 지라도, 내 눈에는 그냥 용사가 추락하며 하필 그 자리에 있던 운 없던 마물들이 용사가 몸에 두른 속이 뒤집힐 정도로 진한 신성력에 펑펑 터져나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셀레나는 자기 후배의 꼴사나운 모습에,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눈을 돌려버렸다.

"으윽, 도저히 못 봐주겠네. 정말 저걸 믿어도 되는 거야?"

"...."

그녀의 말에,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를 매우 기다리던 입장으로서 방금 전, 보는 사람이 다 낯부끄러워지는 퍼포먼스를 보고서도 그가 유일한 답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창피한 것도 있었으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사의 몸에서 진동하는 저 짙은 신성력.

마물이란건, 아무리 약해도 일단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생물이다. 게다가 저기, 헤르몬 왕국 최전선에서 날뛰는 마물들은 우리가 차마 다 잡지 못하고 놓친 송사리들인지라 그렇다고 쳐도, 번개 사슬에 의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마룡 바로 아래에 있던 우리가 상대하는 마물들은 급이 다른 놈들이다. 물론 그 급이 다르다는 것도 대게 한 방에 죽냐 아니면 두 방에 죽냐의 차이지만, 그 한 방의 차이를 수치로 합산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포 수십 발을 꽂아 넣어야 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아무리 높게 쳐줘도 도저히 나나 셀레나와는 동격이라고 할 수 없는 저 용사가 아무리 신성력을 최대 출력으로 방출한다고 해도 마물들이 몸에 닿기도 전에 풍선마냥 펑펑 터져나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저 녀석, 상공 몇 천 미터에서 떨어졌는지 알수도 없는데 목이 부러져서 그대로 뒈지긴 커녕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물론 세상을 구해야 할 용사가 정말로 최종 보스 앞에서 낙사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저 용사가 그 아득한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게 무슨 개그 만화 보정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점은...

"젠장, 또 변수가 늘어난 모양이군."

용사의 몸에서 느껴지는 흘러넘치는 신성력은, 한 종류가 아니었다.

*

[하아, 하아... 후우. 나 답지 않게 제법 흥분한 모양이군.]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는 가쁜 숨을 고르며 다시 평온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되찾으려 했지만, 빛의 여신 루미너스는 방금 전 자신이 선택한 용사를 지상에 있는 힘껏 내던져버린 그녀를 도저히 이전의 상대하기 어렵고 고고한 여신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보다 유스티아 님, 왜 제 용사에게 멋대로 당신의 힘을 주신 거죠? 그 아이는 제 용사에요. 제가 선택한 용사라고요. 유스티아 님이 아무리 저보다 신으로서 격이 높다고 하신들, 제 동의도 없이 저의 피조물에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잖아요.]

[저딴 것도 용사라ㄱ... 아, 아니. 크흠.]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실패하여, 바닥을 향해 경멸 어린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던 유스티아는 이내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너의 시나리오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용사는 준비되지 않았고, 그에 비해 악역은 너무나도 굳건한 철웅성이며, 이제는 외부에서 개입한 다른 신이 훼방을 놓고 있지.]

[그래도...!]

[아직도 모르겠나, 루미너스?]

유스티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등위 승격 시험은 탈락이다.]

[.....예?!]

[정확히는... '무효 처리'되었다고 말해야겠지.]

유스티아는 뚜벅뚜벅, 루미너스의 옆으로 걸어오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째서 연극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험이 갑자기 무효 처리가 되었냐고 따지고 싶겠지? 간단해. 연극은 어디까지나 등위 승격 시험의 과정.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의 네가 그 시험을 볼 자격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봐라.]

타악. 유스티아가 발을 가볍게 한 번 구르자, 바닥에 원형으로 투명하게 변했다. 이윽고 그곳엔 루미너스의 세계 안의 풍경이 비춰졌다.

[우선 첫 번째로, 너는 준비가 부족했다. 세상의 창조와 파멸은 모든 신들이 수천 번을 겪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 하지만 너는 네가 만든 세계가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다는 이유로, 그 멸망당할 세계조차 창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의 내용은 세상 하나를 만들고, 네가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이야기를 진행할 뿐인 간단한 것이지. 하지만 이 창세라는 것은 몇 마디 조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가 몇 번이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해서 얻는 경험이 중요하다.]

유스티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루미너스가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이 시험은, 애초에 실패를 경험한 적 있는 이들이 통과할 수 있다. 몇 번 창세를 시도하고, 실패하여 피조물과 문명이 멸망하고, 자신이 어디서 실수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너는 실패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도전하지 않았다. 그 탓에 너는 너무도 미숙했지... 자신이 만든 세상에, 다른 신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

[그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실수다. 신에게 있어서 자신이 창세한 세상이란 곧 자신의 홈그라운드. 그 어떤 강한 신이라도 너의 세계 안에선 너를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너는 누구보다 자신의 세상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건만을... 다른 신의 개입을 허용하고 말았지. 그 시점에서 이미 너는 등위 시험의 자격을 잃은 셈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 다음 이유가 뭘까?]

[그건....]

루미너스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겠나? 알려주지. 두 번째는 바로 '자신의 역량 파악'이다. 창세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만든 세상에 다른 신이 침입했던 사실조차 몰랐던 것까지는 뭐... 그래도 상황에 따라선 어떻게든 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네가 다른 신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세계를 잠시 멈추고 관객들에게 방해꾼의 개입을 알리는 것이 제대로 된 절차이나, 너는 그러하지 않았지. 본래 신성한 등위 승격 시험에 다른 신이 개입해서 훼방을 놓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그럼에도 네가 묵과한 것은... 그 사실을 알리는 순간 시험이 중단되기 때문이지.]

[.....]

[방해꾼의 개입을 몰랐다면 자격 미달, 알고서도 묵인했다면 역량 파악 부족. 결국 방해꾼들은 너의 세상에 침투한 순간부터 목적의 반을 완수한 셈이다. 물론... 너의 그 유능한 도우미 덕분에 나머지 반은 완수하지 못 하게 되었지만.차라리 숨길 거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완전히 숨겨서 은밀히 처리했다면 모를까, 어설프게 일을 덮으려고 한 너의 판단이 곧 너에게 자격이 없다는 증거가 되었지.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너의 그 유능한 도우미가 너의 시험을 무효로 만든 세 번째 사유였다.]

쿠웅. 유스티아가 한 번 더 발을 구르자, 바닥의 풍경이 확대되며 한 사람을 비추었다. 금발의 여용사와 등을 맞댄 채,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마물들을 잔혹하게 도살하는 남자 흑마법사.

[너는 네 세계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혀 상관 없는 세계의 인간을 끌어들였다. 이번 시험에서 탈락하거나 시험이 무효가 되면 언제 다음 시험을 치룰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기에, 조급한 마음에 다른 세상의 창조자에게서 피조물을 훔쳐오는 짓을 벌이고 말았지. 이는 아주 중대한 문제다. 신은 세상을 창세하되 최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피해야 했거늘, 너는 시험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도 아니고 멀쩡히 다른 신이 운영하던 세상에서 영계로 돌아가는 영혼 하나를 훔쳐내고 말았지. 물론 세계 전체에 비하면 인간 영혼 하나는 별 것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훔친 물건이 얼마나 값진 지가 아니다. 중요한 건... 네가 다른 세상에서 피조물을 훔쳤다는 사실이지.]

루미너스는 그제서야 유스티아가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다른 신의 허가를 구하지도 않고 멋대로 피조물을 훔쳐가는 것은 신계의 중대한 위법이나, 정의의 여신인 내가 아직 신계의 법도를 어긴 너를 처벌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줄 아나? 네게 피조물을 도둑 맞은 세계의 창조주, 지구의 신이 너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뭐, 정확히는... 지구의 무력 자체는 빈약한 편이나 문명이나 피조물들의 수준이 다른 세계에 던져 놔도 문제가 없을 최소치를 만족한다는 이유로 다른 신들도 이따금 피조물 몇을 데려가는 데다가 지구의 신 자체가 워낙 게으른 나머지 굳이 네게까지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한 것이지만....]

유스티아는 쓴 웃음을 지으며 황금 판결봉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어찌되었든 이하의 세 개의 사유로 인해, 지금 시점을 기준으로 빛의 여신 루미너스의 초월자 등위 승격 시험, 이하 연극은 무효 처리되었음을 알린다. 너의 용사에게 내 신성력을 준 이유는 간단하지. 세계의 주인이 능력이 부족하여 처리해야 할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가장 가까운 피조물인 그에게 대신 뒷처리를 맡긴 것이지. 너의 시험이 무효 처리되는 것과는 별개로, 세계의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를 지어야 하니까.]

[....말도 안 돼.]

루미너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럼 결국, 저 두 신이 나의 시험에 개입한 시점에서 나는 뭘 하든 실격이었다는 거잖아...]

[정확히는, 네가 그 사실을 사전에 확인하지 못 했다는 것 자체가 너에게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지. 그걸 알렸더라면, 근 시일 내로 시험을 다시 치루었겠지. 거기까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기회에 눈이 멀어 시야가 좁아진 너의 실책이다.]

[애초에 다른 신의 등위 승격 시험에 방해 따위를 놓으면 안 되잖아...!]

[그래. 그러니 저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시험이 무효가 되면, 다시 응시할 기회가 주어져야...]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지?]

유스티아는 싸늘하게 답했다.

[등위 승격 시험은 아무 때나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신으로서 더 많은 것을 할 능력과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될 때 그 적성을 상위 신들에게 시험받는 과정이지. 하지만 너의 시험이 무효 처리가 된 것은 저들의 방해 문제도 있었지만, 너의 역량 부족이 크다. 만일 네가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그들의 개입을 알렸다면, 우리들은 너에게 재시험을 치룰 수 있는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서 다시 시험에 응시하게 해주었을 테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우리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도 구분하지 못하는 신에게, 더 큰 힘을 휘두를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

루미너스의 눈에서 메마른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이 일말의 동정심을 자극하기라도 한 것인지, 유스티아는 옅은 한숨과 함께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우리를 원망하지 말도록. 이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너는 피해자에 가깝지.]

[그럼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이대로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고 끝나야 하는 건데...?]

[단지 너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쿠웅. 유스티아가 발을 한 번 더 구르자, 지상의 풍경이 비춰지던 바닥이 다시 원래의 새하얀 대리석으로 돌아왔다.

[너의 유능한 도우미는, 안타깝지만 내 쪽에서 개인적으로 처리할 예정이다. 너의 세상에서 벌인 일들은 모두 너의 연극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그 사악한 고대의 외신과 손을 잡은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가 떠난 후.

빛의 여신 루미너스, 그녀는 천공의 신전에 홀로 남아 눈물을 쏟아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노력이, 마침내 간신히 손에 넣은 기회가, 면식도 거의 없는 방해꾼들의 훼방으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에.

초월자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꾹 참고 있던 온갖 슬픈 감정이.

[흑, 흐윽... 흑....]

마치 둑이 터지듯.

[흑, 흐으으... 히끅, 흐으으으으...!]

한 번에 터져나왔다.

[흐으으으윽...! 흐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여 억지로 트집을 잡은 듯한 기구한 상황에, 마음 여린 여신은 참다 못해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 방울, 또 한 방울.

­툭, 투둑. 투두둑...!

여신이 흘린 눈물이...

­투두두두둑! 투두두두두! 쏴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생명들의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대지를 씻어내리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아아....!

하늘을 전부 뒤엎을 듯한 짙은 먹구름을 가르며, 한 줌의 유성처럼 지상에 내려온 용사가 순식간에 수 십의 마물들을 쓸어버린 직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마물들을 향해 오직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만이 뽑을 수 있다는 성검­유니코르를 겨눈 용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서사의 첫 장면, 그 자체였다.

"....하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용사, 루크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손에 쥔 검을 함께 내질렀고, 한 줄기의 눈부신 섬광이 마물들로 이루어진 구역질 나는 파도를 반으로 가르는 기적을 행하였다. 대포의 포탄에 직격으로 명중해도 버티는 튼튼한 오우거와 수십 발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도 금방 상처를 재생하는 트롤도, 높은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으로 쉽게 쓰러트리기 힘든 골렘과 어지간한 공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은 자이언트조차, 그의 일검에 허무하리만큼 쉽게 쓸려나갔다.

루크의 순수 전투력은 몸치인 라그나 아마게돈보다는 그래도 낫지만, 다른 종합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라그나 아마게돈에게 뒤쳐지는 정도이고 성능으로 따지면 초대 용사 셀레나의 완벽한 하위 호환, 아니, 열화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전장에 서 있는 루크는, 기존의 그 루크가 아니었다.

기존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황금색 신성력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이 거세게 요동치는 주황색 신성력이 뒤섞이며, 그의 모습은 라그나 아마게돈의 눈에는 걸어다니는 태양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전이라면 몰라도, 또 다른 신의 신성력까지 받은 듯한 저 상태로 싸운다면... 승리를 절대 보장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세계를 창조한 여신의 힘에, 정의를 자청하는 신의 힘이 한 몸에 깃들어, 라그나 아마게돈과 셀레나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전력이 된 것이다.

초대 용사이자 신성 마법의 대가, 셀레나.

헤르몬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 검은 군대의 라그나 아마게돈.

세상의 악을 멸하기 위해 강림한 빛과 정의의 용사, 루크.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세 명의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순간.

[크르르르르, 크르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오로지 마물들만 밑도 끝도 없이 내보내며 이따금 우렁찬 하울링을 내지르는 것이 고작이었던 불멸의 마룡이 마침내 검붉은 피막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자신을 구속하는 번개의 사슬을 단숨에 끊어냈다. 자신의 몸 길이보다도 훨씬 큰 날개를 펄럭이며, 검은 마룡은 대지에 내려 앉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마룡의 몸에서 풍기는 사기에 대지는 금새 검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재앙이,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의 앞에 그 압도적인 위압감을 숨김 없이 드러내었다.

이 대륙에 문명이 세워진 시점부터 끊임없이 마물들을 보내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악과, 그것을 막을 힘을 가진 세 사람의 대치.

그것은 마치 길고 길었던 지긋지긋한 악과의 악연을 마무리짓기 위한 운명의 무대와 같아, 훗날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영원히 오르내리리라.

물론 당사자들의 속내는...

'하.... 내가 진짜 저딴 놈을 믿고 싸워야 한다니...'

'이딴 것들이랑 함께 싸워야 한다고? 제발, 신이시여.'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거대한 괴물부터 상대해야 하는 거겠지...?'

비장한 각오는 새기기는 커녕, 불신과 무지의 개판 현재 진행형이었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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