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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03화 (103/229)

〈 103화 〉 브레스!! 피해욧!! (2)

* * *

[크아아아아아아아!!]

용사가 귀신 같이 외친 부활의 주문 탓에, 드디어 무력화되었나 싶었던 불멸의 용이 다시금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잠깐만... 귀를 찢는 저 굉음에 묻어나오는 이 감정은 분노라기보단... 고통? 셀레나와 싸울 때 수천 번을 쓰러져도 다시 멀쩡히 일어나던 그 무적의 괴물이, 고통스러워한다고?

나는 다시 일어나는 불멸의 용에게서 그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루크의 일격에 빈사 상태가 된 불멸의 용이 너무도 일찍 일어났던 것은, 역시 저 쪽의 수작이었나. 하늘을 전부 메울 듯한 거대한 뇌운(雲)에서 나온 수십 줄기의 전격의 사슬이, 온몸이 너덜너덜하게 엉망진창인 불멸의 용을 강제로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실을 당겨 망가진 꼭두각시를 억지로 일으키듯.

불멸의 용은 물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괴물이지만, 그게 고통을 느끼지 않은 무적의 생명체라는 뜻은 아니다. 녀석의 몸은 한계에 이르었을 때, 즉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도달했을 때 휴식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휴식 상태에서 놈의 신체는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무적의 상태가 되며, 그렇지 않아도 징그러울 정도로 빠른 신체 재생력이 몇 십 배로 가속해서 몇 분만에 모든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재생해버린다. 그렇게 신체가 다시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고 나서야 휴식 상태가 끝이 나고, 불멸의 용은 죽음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된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불멸의 용은 죽어도 살아난다기 보다는... 알기 쉽게 게임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무슨 수를 써도 체력이 1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체력이 1이 되면 모 게임의 무적의 모래시계를 쓴 것마냥 어떤 수단으로도 해를 입지 않는 상태가 되며 빠르게 HP를 회복하고, 생명력이 전부 회복되었을 때 무적 상태가 풀려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 세계의 신도 아닌 초월자가 그런 세세한 메커니즘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리가 없고, '어차피 죽지 않는 놈이니까 상관 없겠지'하는 심정으로 불멸의 용을 무적 상태에서 강제로 깨워서 다시 싸우게 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불멸의 용은 이미 빈사 상태지만, 저 번개의 사슬 때문에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다시 싸워야 한다. 설령 불멸의 용이 우리와 싸우는 것을 거부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녀석의 몸은 상처를 입으면 사람에게 적대적인 마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저항하더라도 저 번개의 사슬 때문에 생기는 상처에서 생긴 마물들이 생기니.

결국 불멸의 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저 번개의 사슬을 먼저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 즉... 이 세계를 망치려는 다른 세계의 신과 싸워야 한다.

"셀레나. 혹시 불멸의 용을 혼자서 10분만 상대해 줄 수 있나?"

"뭐? 그럼 너랑 재는 그동안 뭐하려고... 설마? 아니지?"

이래서 셀레나는 상대하기 편하다. 초대 용사 특유의 예민한 감과 노련한 경험 덕분에 내가 힘들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눈치를 채주니까.

"나는 불멸의 용 본체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주기 어렵고, 루크 저 녀석은 그냥 답이 없지. 그러니 이 셋 중에서 실질적으로 불멸의 용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지. 그러니 네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내가 불멸의 용을 조종하는 저것을 없애버리겠다."

"....혼자서 가능하겠어?"

나는 루크의 뒷목을 덥썩 움켜쥐며 대답했다.

"혼자 안 가."

"자, 잠깐...!"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셀레나에게 뒷일을 맡겨두고서 루크를 데리고 움직였다. '검은 군대'를 모아 발판 겸 다리로 만들어, 그 위를 뛰어 불멸의 용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먹구름까지 단숨에 달려나갔다. 물론 저 쪽이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한들 이렇게 우리 쪽에서 대놓고 쳐들어 오는데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고.

­쿠르르릉..!

혹시나는 역시나. 우렁찬 천둥 소리와 함께 구름 사이로 새파란 전격이 섬뜩하게 번뜩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에, 곧 이전에 맞았던 그 공격이 날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바이올렌스의 돌발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엘헤임 왕국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부하들과 떨어진 사이 마물을 타고 날아가던 나를 격추시켰던 그 공격.

신성력 이외의 모든 피해에 면역이 되는 '암흑화'라는 사기적인 능력으로 받아낼 수 없었던, 이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공격.

나는 저 번개를 막을 수 없다. 내가 다루는 힘은 이 세상의 규칙에 따르는 것이지만, 저 공격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회피도 물론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의 방향과 궤도를 확인한 후에 그것을 피할 수 있냐고. 물론 셀레나, 그 여자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노련한 전사도, 지혜로운 현자도, 경건한 신도도 아니다. 그저 내게 부여된 역할을 다 하는 한 명의 배우일뿐.

그리고 내가 맡은 배역은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오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행동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활용하는 악역.

"비기! 프렌드 쉴드!"

"그게 무슨... 으아아아아악!"

방어 불가능한 번개 공격이 쏘아지기 직전,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전격이 모여든 부분이 크게 부푼 그 순간, 나는 루크를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며 그의 몸을 방패로 내세웠다. 그 직후, 천공의 궁전에서 발사된 신의 분노가 우리 둘을 향해 내려왔다.

­콰르르르르릉! 콰과과광!

세상을 반으로 가르듯, 엄청난 기세로 쏘아진 전격. 그것은 어지간한 것은 단숨에 검게 탄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야, 살아 있냐?"

"끄, 끄윽...! 라, 라그나 아마게돈, 당신...! 이 빛은 언젠가... 꼭 갚을 겁니다...!"

"좋아. 죽지 않았으면 됐지."

나는 이전처럼 허무하게 픽 하고 맞고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오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광선 마냥 날아가는 무시무시한 전격. 그 공격은 이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자의 것. 하지만 이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녀석의 힘 뿐만이 아니다.

루크가 불멸의 용의 공격에 몇 번이고 얻어 맞고 나가 떨어졌어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그가 다 갈무리하지 못하고 온몸으로 풀풀 풍겨대는 이 짙은 신성력 때문이다. 정확히는, 빛의 여신 루미너스가 아닌 다른 신의 신성력이다.

불멸의 용이 깨어났을 때 갑자기 사라졌다가 하늘에서 홱 하고 떨어진 것을 보니 저쪽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내가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의 몸에 넘쳐흐르는 신성력은 루미너스 여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즉, 저 번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규칙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란 뜻이다.

뇌운에서 발사된 푸른 번개는 내가 방패로 내세운 루크가 온몸에 두른 다른 신의 힘과 충돌하여, 서로 상쇄되었다. 물론 루크를 잡고 있는 동안 내 손이 타들어가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저 전격에 또 맞아서 그대로 죽음의 문턱 앞까지 다이렉트로 가는 것보단 이게 낫다.

"직접 맞아보니 알겠지만, 저 푸른 번개는 보통 공격이 아니다. 나는 저 공격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으니, 네가 대신 맞아줘야겠다."

"당신..! 설마 그것 때문에 저를 데려왔던 겁니까?!"

"귀 아프게 소리지르지 마. 제 역할 하나 제대로 못하는 용사를 최대한 활용해주고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 인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이라고."

그래, 루크는 방패다. 나를 대신해서 이 세상을 망치려는 신의 공격을 맞아줄 인간 방패.

"불멸의 용을 멈추기 위해선, 저 구름 안으로 들어가서 원흉을 해치워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선, 내가 저 안까지 도착해야 하지. 이제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경호원?"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하지만..."

스르르릉. 루크의 손에서 성검­유니코르가 빛을 뿜더니, 이내 그 모습이 바뀌었다. 적의 약점을 뚫기 위한 세검이, 지금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되었다.

"싫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겠죠."

"잘 아네."

황금빛 십자가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며, 루크는 내가 만든 길을 먼저 달려나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첫 번째 공격 이후로도 여러 차례의 전격이 날아왔고, 그 중에는 처음의 것보다 몇 배는 굵고 두꺼운 공격부터 도중에 갑자기 궤도가 꺾이며 뒤에 있는 나를 노리거나 방패에 닿기 직전에 수십 줄기로 분리되어 내게 날아온 공격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루크가 내세운 방패, 성검이 변형된 그 방어구가 마치 자석이 쇳덩어리를 끌어드리듯 내게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받아냈던 덕분이었다.

그건 대본에 없던 용사의 기술이지만, 나는 그 점을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셀레나가 가르쳐 줬겠지. 애초에 셀레나는 설정상으로만 언급이 있었으며 그녀의 부활은 대본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쓰는 기술도 딱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니, 그녀가 그 많은 미지의 기술 중 하나를 루크에게 전해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좋아, 곧 목적지다."

루크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달려드는 열 네 번째 공격을 튕겨내어 없애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마침내 마룡을 조종하는 뇌운에 도달했다.

*

[젠장...! 하나부터 열까지 되는 게 없어!]

루크와 라그나 아마게돈이 뇌운의 끝자락에 도달할 무렵, 그 뇌운의 중심에 있던 이번 일의 원흉은 온갖 험악한 욕설을 쏟아내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그의 발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사방으로 시퍼런 스파크가 파직, 파직하고 위협적으로 흩뿌려졌다.

[적당히 좀 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왜 모르나!]

천둥과 번개, 벼락의 신 라이키린은 그르릉거리며 위협적으로 외쳤으나 전격의 사슬로 팔 다리를 구속 당한 채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힘든 중성적인 외모의 어린 인간의 외형을 한 존재는 킥킥하고 비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정말 사람 다룰 줄 모르는 구나. 그렇게 목소리만 버럭버럭 높인다고 해서 모든 일이 바라는 방향으로 해결될 것 같아?]

[닥쳐!!]

콰르르릉! 라이키린이 고함을 내지르며 사슬을 쥔 오른손을 힘껏 당겼고, 강렬한 전격이 어린 존재의 몸을 강타했다. 노련한 전사라도 순식간에 정신이 새하얗게 타버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으나, 그 존재는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내 조금 전과 같이 입가에 그를 향한 비웃음을 띄우며 비아냥거렸다.

[큭큭큭, 간지러워 죽겠군. 그렇게 전기로 마사지 좀 해준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거였다면, 진작에 그랬겠지.]

[내가 닥치라고 했을 텐데!!]

파지지지지직!

다시 한 번 온몸을 휘감는, 내부부터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전격에, 어린 존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털어내며 애써 여유롭게 웃었다.

[....하. 당신의 피조물들이 참으로 불쌍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군. 내 창조주는 답답하지만 착하기라도 하지, 당신은...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로군.]

[하찮은 한낯 피조물 주제에 감히....!]

[그 말만 벌써 스무 번은 넘게 한 것 같은데. 신이라는 양반이 이렇게 창의성이 없어서야 쓰나?]

파직! 파지직! 파지지지지지직!

[그나저나, 이러고 있을 여유가 있나? 곧 있으면 그 두 인간이 여기까지 도달할 터인데? 차라리 나를 다시 내 육체에 돌려 놓고, 그 두 인간을 먼저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하! 내가 너를 상대하면서 고작 그 미물 두 마리조차 처리하지 못할 거라고 보는 거냐?]

[응.]

콰르릉! 파직, 파지지지직!

[....씨이. 지가 물어봐 놓고서 짜증을 내? 그럴 거면 애초에 나한테 묻지 말던가.]

어린 존재, 불멸의 용의 인격은 자신에게 쉴새 없이 가해지는 전기 충격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코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가 화를 낼 법한 말들만 골라서 하면서 더욱 그를 부추겼다. 왜냐하면 생각치도 못 했던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기에, 그것을 위해서라도 기다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을 향해 점차 가까워지는 익숙한 기운.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불멸의 용은 일부러 라이키린을 도발하며 그가 집중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다. 그럴 때마다 온몸이 지져지는 끔찍한 고통이 되돌아왔지만, 불멸의 용은 괜찮았다.

고통은 익숙했으니까.

*

콰르르릉! 콰과광!

"이야, 아주 난리가 따로 없네."

"지금 여유롭게 그런 말을 할 때입니까?!"

뇌운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전격의 향연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나의 그런 느긋한 감상에, 초조해진 루크는 자동으로 목소리가 올라갔지만.

먹구름 안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바닥부터 벽과 천장 모두 구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름 안이니까 당연한 건가? 근데 그 구름을 발로 딛고 서는 것이나 손으로 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전혀 아닌데. 상식적으로 구름을 고체마냥 만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의 힘이 규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흔들렸지만, 오래도록 그럴 여유는 없었다.

구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교묘해졌다. 단순히 전격이 멀리서 날아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벽과 바닥과 천장을 통해 흘러와서 감전시키거나 전기로 이루어진 장벽 등이 길을 막는, 그야말로 번개로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일이 다 벌어지고 있었다.

벽을 통해 오는 전격도 루크의 방패가 전부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지만, 저 전기 장벽은 조금 골치 아프다. 루크의 방패는 '아군에게 행해지는 공격'을 대신 맞아준다는 데, 저 장벽은 아군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그냥 접근한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장애물 같은 거라서 피해를 전가할 수가 없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전기로 막힌 장벽이 나타나면 옆으로 돌아가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번개 공격은 프렌드 쉴드로 막아내며, 우리들은 안 쪽 깊숙히 걸음을 옮겼다. 루크는 살면서 한 번 맞을까 말까 한 번개를 수천 번이나 대신 맞은 것 때문에 다소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신성력이 피해를 다 덜어준 덕에 그냥 조금 지쳤을 뿐이지 생명에 지장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잠깐만, 이제 애를 어떻게 하면 좋지?

일단 불멸의 용을 잠재운 후에 다시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할 텐데, 내가 이 녀석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으려나? 어디서 다른 신의 신성력까지 받아온 것 때문에, 지금의 루크는 내 입장에선 모든 가시에 치명적인 독을 묻힌 고슴도치나 다름이 없었다. 본인의 전투력은 여전히 형편 없지만, 내 약점인 신성력이 너무 강해진 탓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녀석을 제대로 상대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지금 루크가 나 대신 번개 공격을 맞아주고 있음에도 내 몸이 만전의 상태가 아닌 것도, 루크가 온몸에서 풀풀 풍기는 저 지겨우리만큼 짙은 신성력 때문이다.

이를 어쩌나. 이렇게 되면 이 골치 아픈 방해꾼을 해치운 후에도, 연극이 제대로 흘러갈 지 모르겠는데.

"....어?"

그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흩는 그 집요한 시선에 섬뜩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목에 걸고 있던 혼돈의 파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체...!"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줄을 꿰어 목걸이로 만든 혼돈의 파편이 반응을 하는 것처럼, 루크의 품에 있던 다른 세 개의 혼돈의 파편도 강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뭔가.... 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던 그 때.

투두둑!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파편과 루크가 가진 파편을.

루크의 품에서 세 개의 파편이 튀어나오고, 이어서 내 목에 걸린 파편이 줄을 끊고 날아갔다. 그것을 다시 허공에서 붙잡으려던 찰나,마치 거인의 손에 짓눌린 듯한, 온몸이 무거워지는 감각에 나와 루크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파편을 빼앗겼다.

"....제길!"

그 정체 모를 힘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와 루크는 혼돈의 파편이 날아간 방향으로 황급히 달렸다. 계속해서 쏟아지던 온갖 종류의 번개 공격이 어느새 멈춰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려나가던 우리는 한 넓은 공동에 도착했다. 그곳엔... 우리가 기다리던 존재가 있었다.

[제길, 이게 무슨...! 어떻게 일개 피조물 주제에 이 정도의 힘을...!]

[거, 씨발 아가리 좀 여물지?]

등 뒤로 자신의 몸보다 큰 날개를 활짝 펼친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존재와.

그 존재를 푸른 번개의 사슬로 구속하려고 애를 쓰는, 사나운 인상의 백발의 사내.

나는 저 사내가 이번 일의 원흉, 지옥의 여신 헬과 함께 빛의 여신 루미너스의 연극을 망치는 계획을 실행하던 방해꾼인 번개의 신 '라이키린' 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나는 신이다! 너 같은 하등하고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감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

콰직.

[뭐래, 병신이.]

.....그리고 나는 저 누군지 모를 존재의 날개에 한 방에 짓눌려, 꽥 하는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찌부러진 자칭 신 따위에게 그동안 고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가장 쪽팔렸다.

신이... 많이 약골이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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