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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11화 (111/229)

〈 111화 〉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1)

* * *

헤르몬 왕국으로부터 북서쪽으로 걸어서 하루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숲. 그곳은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들끓는 탓에 마수의 숲이라고 불리며, 건장한 성인 남성들조차 종종 실종되곤 하는 위험한 곳이었으나 아마게돈 영지의 영주인 라그나 아마게돈의 심복 중 하나인 마수 조련사 레이가 다녀간 후로 마수의 출현이 완전히 끊긴 덕에, 이제 이곳은 헤르몬 왕국으로 향하는 모험가들이 들려서 휴식을 취하는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있는 작은 집들 중 가장 구석지에 속한 집 앞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루크, 안에 있지?"

그녀의 이름은 호크나. 용사 파티의 레인저인 엘프였다. 보통 엘프라 함은 숲속에서 독자적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며 인간들과 잘 교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라 한다면, 호크나는 그 인식과 정 반대되는 엘프였다.

끝이 뾰족한 귀나 햇살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금발은 분명 다른 엘프와 같지만 일반적인 엘프가 가지는 요정을 연상케 하는 티 없는 새하얀 백옥 같은 피부에 비해, 그녀의 몸은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와 몸 곳곳에 난 자잘한 상처가 가득해서 동화 속의 요정보단 오히려 숙련된 노련한 전사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주 식단이 채식인 엘프에 비해 호크나는 고기도 나름 즐겨 먹는 것을 보면,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엘프의 몸에 빙의한 인간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누구보다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 섞여 살면서, 인간 사회에 가장 잘 녹아든 엘프이자 이름 난 베테랑 용병인 호크나가 엘프의 종족적 특성으로 하루가 아닌 한 시간만에 주파할 수 있는 이 숲을 바로 통과하지 않고 굳이 모험가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이 숲속의 쉼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휴식이 목적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어떠한 인물에게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끈기가 인정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노크 소리를 그만 듣고 싶었던 건지는 몰라도 마침내 그녀가 두드리던 집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 머물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크나? 무슨 일입니까? 혹시 또 높으신 분들이 절 찾으시는 건 아니겠죠?"

호크나가 찾은 인물의 정체는 루크. 성은 없는 변방 영지 출신의 평민이나, 얼마 전 세상을 위험에 빠트린 옛날 이야기 속의 괴물 불멸의 용을 무찌르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용사...로 알려진 남자였다. 문을 열고 나온 루크의 모습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인 채 상의를 탈의하여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를 완전히 드러내고 거기에 오른손에는 부러진 목검이 들려 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계속 수련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호크나는 한숨을 푹 쉬며, 지독하리만큼 강렬한 땀 냄새를 풍기는 사내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 양반들이 널 찾는 게 하루 이틀이야? 그럴 목적으로 찾아온 거 아니야."

호크나는 장수하는 엘프답게 인간 사회에 오래 녹아들었고, 용병이다보니 한 곳에 머무르기보단 여러 왕국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덕인지, 나름 각국의 중요한 인물들과 연줄이 있는 편이다. 평소에 본인이 그것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 만일 그녀가 마음 먹고 그 연줄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라그나 아마게돈을 제법 곤란한 상황에 쳐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였다.

"사흘 뒤면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랑 다시 싸우는 날이잖아. 너 설마 정말로 거길 혼자서 갈 셈이야?"

"......"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사실을 일부 숨겨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조차 양심이 허락치 않는 답답하리만큼 깨끗한 성격의 소유자 루크는 그 날 라그나 아마게돈에게 들었던 재 대결 약속과 거래에 대하여 동료들에게도 알렸고,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라그나 아마게돈을 상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다만 호크나 혼자 그를 찾아온 이유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바쁜 사정으로 차마 직접 찾아올 수 없던 전 동료들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여신관 엘리아는 용사의 활약 이후 성녀로 추양받으며 교단의 여러 고위 인사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용사도 도망치는 속도가 조금만 늦었어도, 지금 즈음 모험자들의 쉼터에서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이 개최한 성대하고도 답답한 파티 안 시골 평민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치판 속에 휘말려 고통 받고 있었을 것이다.

전사 고든은 더 이상 목숨을 내건 전투는 지긋지긋하다며, 약혼자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마 지금 즈음이면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라 아주 바빠서 찾아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인 비올라도, 무너진 마탑을 다시 재건하겠다며 자신과 뜻을 함께 할 마법사들을 찾아 각 나라들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마탑의 붕괴 이후 마법사들의 입지와 금지된 마법에 대한 규제가 불안한 상황이기에, 그녀의 과업 또한 방해할 수 없었다.

결국 동료들 중에서 가장 시간이 남는 사람은 당장 할 일이 없는 호크나였고, 귀족들의 파티에서 술잔이나 기울이며 얼굴에 가면을 쓴 사람들 상대로 하하호호 웃는 것 따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그녀는 자진해서 용사를 설득하는 일을 맡아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물론...

"네. 저 혼자서 그를 상대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용사가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은 없었다.

"너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딱히 너한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니까 절대 불쾌하게 듣지 마."

"예."

그리고 '불쾌하게 듣지 마'라는 말은 '이제부터 너한테 불쾌한 말을 할 거야'라는 말과 사실상 동음이의어라고 할 수 있다.

"루크, 너 미쳤어?"

"....."

"라그나 아마게돈은 물론 부하들의 영향력이 많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힘 자체가 그렇게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물론 그 녀석의 싸움 실력 자체는 굉장히 형편 없지. 파편을 가진 녀석들과 마수들을 썰어가며 실전 경험이 다져진 너와 달리, 직접 나선 전투 경험 자체가 굉장히 적어서 전투 능력 자체는 굉장히 약한 편이야. 하지만 그 녀석에겐 그 실력의 차이를 메꾸고도 남을 정도의 강한 힘이 있고, 그 힘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휘두르지. 루크, 너와는 정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가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란 보장은 전혀 없잖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자신에게 솔직하지는 않다고."

호크나의 말은 백 번 들어도 백 번 옳은 정론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라곤 하지만, 이번에 그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그도 그럴 게... 그런 거래를 한다면 어느 쪽이든 그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없으니까요."

만일 루크가 동료들과 함께 싸우러 간다면, 라그나 아마게돈도 모든 부하들을 동원하여 맞설 것이다. 그 경우 자신들이 패배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루크가 혼자서 그를 상대하러 간다면, 설령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그를 죽이더라도 그 원한을 갚아줄 동료들이 남는다.

라그나 아마게돈이 아무리 영향력이 강해서 헤르몬 왕국이 오히려 싸움을 피하는 수준이라고는 해도, 세상을 구한 용사를 죽인다는 악행을 저지르면 말이 달라진다. 다른 왕족들은 남의 나라에까지 너무 영향력을 끼치는 눈에 거슬리는 이국의 귀족을 처리할 아주 좋은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고, 다른 이들이 전부 나서서 공공의 적을 처리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헤르몬 왕가 홀로 그와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게 되니 싫더라도 그들 또한 자신들의 안에 둥지를 튼 크고 사나운 짐승을 향해 검을 뽑아 들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를 적대시하는 것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그를 제외한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즉, 루크의 죽음은 곧 아마게돈 영지와 그 이외의 전체의 전쟁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정말로 부하들의 간섭 없이 아마게돈 남작 한 명과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승산이 오르고, 설령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그를 쓰러트릴 발판이 된다. 그게 네 생각이라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물론 그 남자가 선한 사람은 아니긴 하다만, 너의 책무를 다한 시점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그를 쓰러트리려고 할 필요가..."

"아뇨."

처음엔 그저 비밀스러운 관계인 라그나 아마게돈과 동료인 루크가 어느 한 쪽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충돌을 하려는 것을 막고자 찾아왔던 호크나는, 루크의 왼손에서 주황빛 신성력이 폭발하기 전의 불길처럼 불길하게 일렁이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러고 그와 함께 싸울 때, 그가 쓰던 신성력은 분명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던 것 또한 떠올렸다. 루미너스 여신에게 받은 신성력은 분명 황금색이었을 텐데, 그럼 저 주황색 신성력은 뭐지?

"루크, 너 혹시 우리에게 말 못할 사정이..."

"아뇨, 그런 것 없습니다. 그 외에 용건이 없다면, 이만..."

"야, 잠깐만...!"

끔찍한 고통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듯한 표정과 함께, 루크는 곧바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어안이 벙벙하던 호크나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모험가의 쉼터를 떠났다. 호크나가 떠난 후, 그녀를 반 강제로 쫓아내다시피 보내버린 루크는 이윽고 주황빛 신성력이 터질 듯이 넘실거리는 왼팔을 금빛 신성력을 품은 오른팔로 붙잡아 억누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끄흐윽...!"

신성력이란, 본래 신의 힘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서 그 힘의 일부를 빌려 쓰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빌렸다면, 그에 대한 대가가 있기 마련. 신의 힘은 그 신을 향한 믿음에 비례하여 커지기에 보통은 다른 신이 아닌 자신만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대가로서 요구하지만, 루크에게 힘을 준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는 달랐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섬길 것이 아닌,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라는 '악'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설령 그가 그 제안을 제대로 수락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그녀에게서 받은 힘을 사용한 시점에서 계약은 성립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나는 하겠다는 말은 안 했으니 할 필요 없잖아?'라며 넘어갈 수 있을 테지만, 자신에게는 더더욱 가혹한 루크였기에 그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자기 스스로에게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와 한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라그나 아마게돈을 죽이라는 명령을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정의는, 그 집행 과정에서 오로지 선만을 행할 것을 규정하지 않았다. 즉, 악을 처리하는 과정에 방해가 된다면 설령 그게 선이라고 해도 무자비하게 베어넘기는 것이, 그녀가 요구하는 정의인 것이다. 호크나의 말은 결과적으로 라그나 아마게돈을 죽이는 것에 방해가 되는 말이었고, 이에 그녀에게서 받은 힘이 반응하여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루크는 루미너스 여신에게서 받은 힘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신성력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억누른 것이고.

마치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처럼, 쉽게 갈무리 되지 않고 폭주하려는 듯한 신성력을 있는 힘껏 억누르며 루크는 진땀을 뺐다. 아마게돈과 싸우지 말자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거칠게 날뛴다면, 과연 라그나 아마게돈과 마지막 싸움을 벌일 때는 이 힘이 얼마나 거칠게 날뛸지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또 그거냐?"

"...."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루크의 스승, 초대 용사 셀레나가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주황빛 신성력이 날뛰는 그의 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루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셀레나는 먼저 손을 뻗어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셀레나의 몸에서 나온, 루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색은 같으나 그 빛의 밝기가 차원이 다른 신성력이 난폭하게 날뛰는 주황빛 신성력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분명 신성력 자체의 양 대비 질은 정의의 여신을 자청한 그 여자, 유스티아의 것이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루크가 그 몸에 담을 수 있는 그녀의 힘의 크기보다, 셀레나가 품고 있는 루미너스의 힘이 훨씬 많았기에, 셀레나는 손쉽게 유스티아의 신성력을 짓누를 수 있었다.

"막상 가르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 정말 괜찮겠어?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통제를 잃게 되면..."

"...해야, 합니다. 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루크는 눈을 찡그린 채 끙끙거리면서도 결코 그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다들 저를 용사라고 하지만, 저는 저 스스로를 용사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정작 세상을 구한 건 모두가 악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였으니까요. 그러니 하다 못해... 마지막 순간만은 그의 요구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비록 제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아마도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그는..."

이윽고 루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라그나 아마게돈 본인이 들었다면 깜짝 놀라서 까무러칠 만한 말이었다.

"저와 싸워서, 패배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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