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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15화 (115/229)

〈 115화 〉 1부 에필로그 ­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 * *

헤르몬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 아마게돈 남작과 세상을 구한 용사 루크가 동시에 소식이 끊어진 지,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용사의 동료였던 여신관 엘리아는 용사가 실종되기 바로 전 날에 남겼던 부탁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아마게돈 남작가로 병력을 향했다. 아마게돈 남작의 심복들은 물론 아주 강하지만, 그가 가진 사악한 힘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용사와 싸우는 데에 전념하는 동안이라면, 그의 심복들 또한 평소보다 약해질 것이라는 엘리아의 이야기에 따라 교단을 설득해 병력을 움직였고, 호크나 또한 마지못해 안면식이 있는 유명한 용병들을 움직였으며 비올라는 흩어진 마법사들을 모아 그들이 처한 비극의 원흉인 아마게돈 남작가에 복수하자며 방랑하는 마법사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모인 아마게돈 남작 타도 세력은 의외로 위협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아마게돈 남작의 저택 바닥을 더러운 흙발로 더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게돈 남작의 영지 전체가 짙은 마법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가 만든 거대한 마법 결계가 외부의 적에서부터 주인 잃은 영지를 수호하는 탓에, 용사의 동료들의 목적은 실패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 했지만.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는 마탑 붕괴 사건 이후 가장 강력한 마법사 두 명 중 하나였고, 다른 한 명인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조차 아직 그녀의 결계를 해제할 수 없는 마당에 마법의 안개를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가레테는 "저 마법은 대량의 마력을 소모하니, 아마게돈 남작이 없는 상황에서 저 결계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야. 길어봐야 하루겠지."라고 예측했었다. 그리고 아마게돈 영지를 뒤덮은 안개가 일주일동안 사라지지 않은 후에서야 그 발언을 철회했다.

무한한 마력을 가진 아마게돈 남작이 아닌 이상 저런 방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시키는 결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게돈 남작과 루크가 사라진 후로 계속.

"...무슨 생각이야."

그리고 아마게돈 영지를 외부와 거의 단절시키고 있다시피 한 마법의 결계를 통해 들어온 여인은 눈앞에 있는 로브를 입은 여성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무엇이 말인가요?"

"왜 나를 통과시켜준 거냐고. 아마게돈 남작을 따르는 당신들 입장에서 나는 적일 텐데, 왜 나를 굳이 들여보내 준 거야?"

그 말에 로브를 입은 여인,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는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적이라니, 그럴 리가 없죠. 당신은 손님이에요. 자격을 지닌 손님. 그렇기에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고,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야, 당신도 그분의 애정을 듬뿍 받은 사람이니까요."

"읏...!"

그녀의 치부를 들추는 노골적인 발언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악물었다.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그리고 잊고 싶지만 동시에 잊고 싶지 않은 과거. 그녀가 안개로 뒤덮인 이 땅에 찾아온 것도, 어찌보면 그 때의 미련에 가까우리라.

"제 말이 틀렸나요, 여기사님? 아니면... 로얄 나이트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어. 여왕이 사라진 후 얼마 안 가 로얄 나이트는 해체되었으니."

과거의 기억을 따라 안개로 뒤덮인 영지에 찾아온 여기사, 그녀의 이름은 안제.

한 때 바이올렌스의 로얄 나이트이자, 아마게돈 남작을 향한 공격을 지휘했다가 총책임자로서 부하들을 대신하여 온갖 치욕을 당하고, 그에게 육체적으로 패배한 한 여인이었다.

*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과 용사 루크는 불멸의 용이 봉인된 신전 근처 전사의 무덤이라 불리는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혈투를 벌였고, 결과적으로 공멸했다.

용사는 세상을 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은 큰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공포로서 군림하고 있던 아마게돈 남작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가 두려워 함부로 행동하지 않던 이들이 다시금 기회를 엿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최후를 확인했던 초대 용사 셀레나는 두 사람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대신, 그들의 시신을 아마게돈 영지로 가져갔다. 용사의 유해는 영지 내의 공동 묘지 한 곳에 묻혔고 아마게돈 남작의 몸은 사전에 이야기되었던 대로, 아마게돈 영지를 지킬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동력원이 되었다.

아마게돈 남작은 이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였고, 영지를 지키는 마법의 결계가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루크와 전투를 하기 전 셀레나에게 그녀가 궁금해 하던 것을 전부 알려주는 대신 자신이 죽은 후 그 몸을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고, 미스트리나는 아마게돈 남작으로부터 그가 죽은 후 그의 몸으로 영지를 지킬 수호석을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오직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고 영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자격이란, 아마게돈 남작 및 그 사람들에 대한 적의 및 악의의 유무.

그렇기에 로얄 나이트 출신이었던 안제는 자신이 결계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그동안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을 증오하고 미워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영지를 지키는 결계를 막힘 없이 통과했다는 것은 사실 본심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안제는 추억을 회상하듯 찾아온 아마게돈 영지에서, 전혀 만날 것이라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당신은..."

".....!!"

폭군 바이올렌스. 한 때 불멸의 용에게서 받은 지배의 힘으로 자신과 피가 이어진 이들을 전부 숙청하고 엘헤임 왕국의 독재자로서 군림한 폭군. 그러나 용사 루크에게 패배하여 힘을 잃고, 이후 기회를 노리던 엘헤임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가 소식이 끊겨버렸던 여자. 한 때 그 지배의 힘으로 인해 원치 않게 충성을 바쳐야 했던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제가 그녀를 향해 무언가 말을 하거나 혹은 어떤 감정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녀는 안제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화들짝 놀라며 달아나 버렸다.

"자, 잠깐...!"

안제는 뒤늦게 달아난 바이올렌스의 뒤를 쫓아 달려갔으나, 체력이 거의 바닥날 때까지 뛰어서 간신히 그녀가 어떤 오두막에 황급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오두막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나름 기사로서 체력이 단련되어 있던 자신이, 체력이 허약한 바이올렌스를 뒤쫓았음에도 붙잡지 못하다니.

그리고 그 의문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에 해결되었다.

"바이올렌스가... 두 명?"

"너는.... 안제."

"......"

안제가 뒤를 쫓아 왔던 바이올렌스가, 완전히 똑같이 생긴 또 한 명의 품에 안겨 있었다.

"쌍둥이...? 하지만, 분명 자신의 가족을 전부 숙청했었는데...."

"쌍둥이 자매가 아니라, 어머니와 딸이랍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뒤에서 나타난 미스트리나가, 안제의 궁금증을 해결시켜주었다.

"어머니와 딸...? 말도 안 되는 소리. 바이올렌스의 어미는 아주 옛적에 죽었고, 그 몇 달 사이에 저렇게 큰 딸이 생길리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게 마법의 힘이지요. 물론, 정상적인 마법은 아니었고 그녀도 그런 결과를 원한 적은 없었지만요. 자, 모녀는 바쁜 것 같으니 잠시 나갈까요."

그리고 안제는 미스트리나에게서 그동안 바이올렌스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 들었다. 용사 루크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진 후, 엘헤임 왕국 귀족들이 벌인 내전의 전리품으로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끝내 엘헤임 왕국의 왕위를 탐내는 늙은 귀족에 의해 원치 않은 아이를 뱄다는 것과, 위험한 마법의 영향으로 아이의 성장이 일반적인 아이보다 빠르다는 것.

"겉으로 보기엔 쌍둥이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저 아이는 아직 1살도 되지 않았답니다."

"1살도 안 된 아이라고? 하지만, 내가 붙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렸는데...."

"저 아이의 몸은 과도한 성장 마법 탓에 너무도 빠르게 성장해버렸지요. 정신은 성장하지 못 했지만, 몸은 다 큰 아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마법이 동원되어야만 했죠. 지금 저 아이의 정신 나이는... 아마 이제 7살 즈음일 겁니다."

"하...."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던 여왕이 실종된 지 몇 달 만에 몸은 성인인데 정신은 일곱 살인 딸을 갖고 있다니. 들으면 들을 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야기에, 결국 안제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아마게돈 남작께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녀를 거두어 구하셨지요."

"아마게돈 남작이 구했다고? 도대체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건 극비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말해줄 거라면 끝까지 말을 해 줘야... 잠깐! 저 사람은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안제는 또 다시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 배우, 무희, 예술가, 용병, 거기에 고위 귀족 영애 등등 하나 같이 유명한 사람들 투성이었다. 심지어는 용사의 동료인 비올라와 호크나마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라그나 아마게돈과 인연이 있는 여자들이라는 점이었다. 혹시... 하고 그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려는 안제에게, 안내역을 자처하는 미스트리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생각한 게 맞아요."

"뭐, 뭐가...?"

"바깥에서 결계를 너머 여기에 들어온 여자들, 전부 당신처럼 아마게돈 남작 님한테 안겼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찾아온 여자들이라고요."

"....."

그 말에, 안제는 그들에게 보내려던 경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향했다. 자신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마게돈 남작 님께 적의가 없는 사람만 들여보내기로 한 결계인데, 어쩌다보니 남작 님께서 안으셨던 여인들만 찾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관광지 같은 느낌이 되어버리더군요."

"그 인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몸을 섞었던 거야?"

"음... 안제 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먹었던 빵의 갯수를 기억하시나요?"

"말을 말자."

이윽고 미스트리나는 안제를 아마게돈 영지의 중심, 아마게돈 남작가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아마게돈 남작 님께서 생전에 가장 총애하는 여인들과 머물던 저택이랍니다. 물론, 이미 안제 씨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잊을 수가 있겠어? 내가 저 저택의 지하 감옥에서... 으윽."

그 날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아래가 젖어와서, 안제는 입술을 악물며 상념을 떨쳐냈다.

"그보다, 생전이라고? 그럼 아마게돈 남작은..."

"돌아가셨답니다."

"그럼 이 영지를 지키는 결계는 어떻게 유지하는 거지? 엘헤임 왕국의 마녀는 그 남자가 가진 무한한 마력이 없다면, 그 마법의 안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가 죽었다면, 도대체 그 안개는 어째서..."

"죄송하지만, 그 또한 극비 사항이라서요. 관계자 외에는 알 수 없고 추가로 저 저택 또한 이제 허가된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답니다."

그 말에, 안제는 저 저택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으리라 확신했지만... 차마 미스트리나를 뿌리치고 저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안개는 아마게돈 영지 전체를 휘감고 있으며, 안개의 안은 전부 마녀의 관리 영역. 그녀가 어딘가 다른 것에 집중이 쏠려 있지 않는 이상, 저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줄 동행자 없이 이 안개 속 영지에 홀로 들어온 안제가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고, 결국 그녀는 미스트리나의 안내를 따라 그 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저택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 저택의 가장 안 쪽, 아마게돈 남작이 생전에 쓰던 방 안에 영지를 지키는 결계를 유지하는 동력원.

짙은 암적색 수정 안에 잠들어 있는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의 유해를 뒤로 한 채.

"그런데 저기서 파는 저 흉물은 대체 뭐야?"

"아, 저거요? 요즘 인기가 많은 이 지역 특산품이랍니다."

"특산품? 저게? 아무리 봐도 생긴 게..."

"아마게돈 남작 님의 실제 물건을 베이스로 한 자기 위로 도구랍니다. 단순히 넣었다 뺐다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움직이게 만드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어서 방문한 여성들 사이에서 꽤 인기랍니다. 아직은 재현율이 40% 밖에 되지 않지만, 영지를 방문한 여성 손님들은 최소 하나 이상은 반드시 구매하시더라고요. 안제 씨도 어떠신가요?"

"....."

이후 안제는 가진 돈의 절반을 털어가며 특산품 딜도를 가장 비싼 걸로 세 종류나 구입했다나 뭐라나.

*

셀레나가 아마게돈 남작의 유해를 들고 돌아왔을 때, 처음엔 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도 잠시, 그들은 이내 아마게돈 남작이 생전에 남겨둔 지시에 따라 앞으로를 대비하였다. 그리고 그의 여자들이 낙담하지 않고 일어서도록 기둥이 되었던 한 여인, 아마게돈 여인이 가장 총애하였으며 그를 대신하여 영주 일을 도맡아 하던 메이드 미아는 오늘 치의 문서를 전부 처리한 후 아마게돈 남작의 유해가 담긴 수정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벌써 주인님의 온기를 느끼지 못한 지 한 달이나 지났네요. 마음 같아선 주인님의 곁으로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모두가 힘든 데, 저 혼자서 편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주인님께서도 그걸 원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처럼 노력했답니다. 주인님을 대신해서 영지를 관리하고, 모두를 매일 위로하고... 솔직히 엄청 지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겠죠. 저 만이 할 수 있고,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미아는 수정의 표면을 손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은 주인님이 많이 원망스러워요. 저를 믿는다고, 제게 가장 크고 무거운 짐을 주고서 훌쩍 가버리셨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절대 용서 못 하겠거든요. 그러니까...."

이윽고, 딱딱한 수정 너머 이제는 안을 수 없는 그를 바라보며, 미아는 눈물을 머금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약속하신 대로, 꼭 돌아와 주세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그동안 수고했다고, 믿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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