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30화 (130/229)

〈 130화 〉 이 서큐버스는 무료로 해줍니다(5)

* * *

지하 도시 랜드필은 법이 없는 무법 지대이나, 그렇다고 그곳을 통치하는 이가 아무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정상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얻은 통치가 아닌, 그저 일방적이고 사적인 방법으로 손에 넣은 지배이긴 하지만.

버려진 도시 랜드필의 주요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불법 마약, 그리고 특산품인 유독 가스이다. 랜드필의 유독 가스는 잠깐 맡는다고 바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으나, 몸에 지속적으로 쌓일 수록 여러 증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며 이 쌓인 독성을 치료할 방법이 극소수이기에 더욱 악랄하다. 한 인간이 평생을 일해서 번 돈으로도 구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격의 치료제를 쓰지 않으면, 평생을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독한 가스가 진동을 하는 곳이다보니 다른 왕국이나 나라에서 진작에 손을 뗀 지 오래, 그렇게 방치한 탓에 오히려 일반적인 나라에서는 허용치 않는 불법적인 물건을 유통하는 곳으로서 최적이었다. 이 마약이라는 것이 불법적인 만큼 돌아오는 수익이 꽤 크기에 현재 랜드필에서는 마약의 유통권을 두고 여러 조직이 치열한 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때 신앙을 가진 이들이 찾는 장소였으나 이제 본래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없어진 이 옛 교회에 둥지를 튼 이들 또한, 그러한 영역 싸움에 참가하는 조직 중 하나인 '송곳파'다.

공중 도시 스카이론에 있다는, 최악의 범죄자들이나 간다는 최대 규모의 수용소 '새장'에 갇혀도 이상하지 않을 죄질을 지은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이 조직은 상대를 상처 입히는 것은 물론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 어떤 거리낌도 없는 조직으로, 한 손으로 상대의 멱살을 잡고 송곳을 역수로 쥔 반대쪽 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내리 찍어 버리는 그 잔혹한 모습은 조직의 실질적인 영향력과 별개로 무척 강렬한 인상과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기에 다른 조직들에 비해 '쥐새끼들'한테 창고를 털리는 일이 현저히 적을 정도였다.

"하아...."

허나 현재 그 송곳파는 유례 없는 위기에 처했으니, 랜드필의 서쪽 구역을 차지하는 그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어온 신생 조직 '러스트리온'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크랙 새끼. 그 잘난 실력으로 메타버스 시티에서 계속 살던가, 왜 랜드필에 와서... 그것도 하필 내 구역에서 이 지랄이냐고...!"

'러스트리온'는 메타버스 시티에서 현상 수배를 내렸던 범죄자 '크랙'이 랜드필로 도망쳐 와서 세운 조직으로, 기술과 혁신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메타버스 시티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들의 장비인 전신 파워 슈트는 도저히 재료를 랜드필에서 수급한 것들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고, 랜드필의 서쪽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송곳파는 순식간에 그 조직력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들이 송곳으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한 조직인데, 상대가 전신에 금속으로 방어구를 입고 오니 답이 없는 것이다.

"제길, 왜 하필이면...!"

"도움이 필요한가 보네?"

"...누, 누구냐!"

오로지 자신 혼자 뿐이어야 하는 어두컴컴한 개인 집무실. 문은 열린 적이 없고 창문 또한 굳게 잠겨 있던 것을 확인했으며 이 집무실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곳도 없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그것도 자신의 조직원이 아닌 낯선 이의 목소리에 송곳파의 두목 에스크는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시 후 창문 밖에서 내리친 번개의 빛에 비추어, 에스크는 어느새 목소리의 주인인 한 쌍의 남녀가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 그리 경계하지 마. 난 네게 도움을 주려고 온 것이니."

"그 전에 넌 누구냐고! 먼저 정체부터 밝혀라!"

"좋아, 그럼 자기소개부터 시작할까?"

그 어떤 남자도 음심을 품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인을 옆에 낀 채, 묘한 품격마저 느껴지는 그 기묘한 남자는 에스크를 향해 마른 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은 라그나 아마게돈. 이 랜드필에 오늘 막 도착한 새 입주민이야. 이쪽은 내 파트너인 모노."

"안녕~?"

"그리고 당신은 송곳파의 두목, 에스크... 맞지? 난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볼일이 좀 있거든."

도저히 타인의 영역에 멋대로 찾아왔다고 믿기 어려운, 너무나 편안하고 여유로운 자태. 오죽하면 당사자인 에스크로서는 오히려 이곳이 상대의 영역이고 자신이 불법 침입자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떤 수단으로 자신의 개인 집무실에 몰래 숨어 들어왔던, 상대는 외부인. 거기에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모를 자다. 어쩌면 그 망할 러스트리온 놈들이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보낸 자객일 가능성도 있다.

"너무 경계하지 마. 난 당신에게 도움을 주러 왔거든."

"도움?"

"최근 나타난 신생 조직 때문에 입지가 영 불안하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그 말에 에스크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이, 랜드필에 오늘 막 온 사람마저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문이 퍼졌다니. 조직으로서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져도 아주 심하게 떨어졌다.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신생 조직... 이름이 뭐였더라? 러스트리온? 그 녀석들한테 그대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죄다 쫓겨날 거 같은데... 내 말 맞지?"

"그래서, 외부인인 너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내가 이 랜드필에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거든. 하지만 이곳에 막 도착한 나는 여기 사정을 잘 몰라. 그러니 이곳 사정을 잘 알고, 거기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나를 위해 일하는 대신에, 너희 조직이 사라지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다, 이런 뜻이지."

"싫다면...?"

에스크의 말에, 그 남자는 그 정도의 대답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상관 없어. 이건 그런 거래거든.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녀석을 찾아가면 돼. 물론,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을 테지만."

"..."

송곳파의 두목, 에스크는 '감'에 많이 의존하는 사내이다. 실제로 이 '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꽤 많았기에,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 감이... 지금 외치고 있다. 눈앞에 나타난 이, 정체 모를 수상한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어차피 이대로 가면 러스트리온 놈들한테 조직이 궤멸 당하는 것은 예정된 일이기에, 힘들게 일궈낸 이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런 수상쩍은 거래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전부 잃느니,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추한 발버둥이라고 쳐야만 한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잘 읽어 보고, 마음에 들면 사인해."

*

지하 도시 랜드필. 내가 곧이 이 오염되고 버려진 도시를 거처로 정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이런 퀴퀴한 유독 가스가 진동을 하는 도시에 누가 살고 싶어서 살겠는가? 다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기에 도달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갈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쓰레기통. 버려진 이들이 살아가는 최후의 도시. 그야말로 인생의 끝자락에 내몰린 이들이나 사는 이런 곳에서, 치안이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다. 힘을 가진 강자가 힘 없는 약자를 일방적으로 착취하고, 힘 없는 약자들은 쥐 떼처럼 무언가를 훔치거나 하이에나처럼 강자가 남긴 것에 달려 들어 그 잔해를 뜯어 먹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

이곳에 유일한 법은 법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말은... 세 가지 조항을 제외하더라도 하나라도 법에 위반되는 죄를 저지르는 순간 조건부 석방이 취소되는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나의 행동을 제한하는 수단이 하나 줄어드는 유일한 장소라는 뜻이다.

"러스트리온. 메타버스 시티 출신의 범죄자 '크랙'을 중심으로 파워 슈트를 장비한 소규모 조직인가."

"조직원의 수는 고작 20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중 다섯은 전신 파워 슈트를 장비하고 있기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비록 재료는 랜드필에서 구했다고 해도, 그 기술력은 메타버스 시티의 것. 전신 파워 슈트를 입은 녀석 홀로 우리 조직원 스무 명은 가볍게 때려 눕힐 수 있는 수준이라고."

"현재 머릿수가 50명인 송곳파로서는 도저히 답이 없을 테지. 그럼 간단한 문제네."

"간단한 문제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이쪽의 조직원 한 명이 전신 슈트 사용자 하나를 상대할 수 있게 만드는 거지."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나는 씨익 웃으며, 손에 검은 씨앗 하나를 만들었다.

"혼자서 그 파워 슈트인가 뭔가 하는 장비는 종잇장 구기듯 박살 내버릴 정도로 강하게 만들면 그만 이잖아?"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신생 조직 러스트리온에 의해 입지가 위험해져 있던 송곳파는 단 일주일만에,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힘으로 러스트리온을 몰아 붙여 단 하루 만에 조직을 궤멸 시켰고 러스트리온의 우두머리였던 크랙은 본보기로서 랜드필의 서쪽 구역의 가장 높은 건물에 산 채로 전시되었다.

자랑거리라고 해봤자 송곳으로 상대 뚝배기를 작살 내는 것이 전부였던 송곳파가, 무려 전신 파워 슈트로 무장한 러스트리온을 개박살낸 것이다.

송곳파가 러스트리온에게 흡수당하거나 궤멸당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서쪽 구역의 지배자가 될 러스트리온과 거래를 틀 준비를 하던 다른 구역의 조직들은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혹을 금치 못 했다. 비록 소규모에 불과하나 자신들이 전부 연합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저 오버 밸런스 장비로 무장한 자들을, 랜드필의 다섯 구역을 나눠 지배하는 조직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던 송곳파가 도대체 어떻게 승리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각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서쪽 구역에 있던 거지들로부터 '송곳파의 조직원들이 이상한 능력을 썼다', '송곳파의 조직원이 능력을 쓰자 금속으로 온몸을 무장한 놈들이 막 나가떨어지더라', '송곳파의 우두머리가 최근 랜드필에 도착한 처음 보는 외부인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더라'라는 등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송곳파 조직원들이 기존에는 없던 묘한 기술을 썼다는 것과 최근 랜드필에 도착한 처음 보는 외부인이 그와 연관이 있음을 추측했다.

송곳파가 서쪽 구역을 다시 수중에 넣고 조직의 재정비를 위해 일주일의 시간을 소모한 후, 송곳파의 우두머리가 다른 조직들의 우두머리를 한 곳에 초대했다. 아주 귀한 손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이것이 송곳파가 다른 구역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신들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인지, 아니면 그들이 서쪽 구역의 지배권을 둔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준 그 '귀빈'과 커넥션을 이어주려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송곳파의 우두머리가 예고한 날이 되었을 때, 다섯 구역의 지배자 중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서쪽의 초대에 응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그 귀빈이라는 분께서는 어디에 계실까?"

북쪽 구역을 다스리는 조직 '홍등회'의 여주인 양마담.

"설마 우릴 속인 것은 아니겠지, 에스크."

중앙 구역을 담당하는 조직 'U.F'의 보스인 메이어.

"나 참, 송곳회도 이제 다 컸군. 감히 우리들에게 오라 가라 명령을 내릴 정도라니."

남쪽 구역을 지배하는 조직 '도계'의 두령 도성운.

서쪽 구역의 패권을 되찾은 송곳파의 두목 에스크를 축하할 겸 그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 '귀빈'을 만나기 위해, 랜드필의 다섯 조직의 우두머리 중 무려 네 명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하아,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데."

"뭔가? 또 자기 취향의 어린 남자애라도 구한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오는 와중에 한 남녀가 밖에서 대놓고 몸을 섞는 걸 봤거든. 어찌나 격렬하게 해대던지, 보는 내가 다 불끈거리더라고. 그 모습을 보니까 좀 꼴려서... 얼른 돌아가서 귀염둥이들을 끼고 놀고 싶다고!"

"....발정 난 년."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도성운의 반응에, 양마담은 되려 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비아냥거렸다.

"그 발정 난 년이 대준다고 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지를 내릴 녀석이 어디서 불평이야. 뭐, 어차피 너에게 대줄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지."

"허허, 다들 그래도 한 조직의 우두머리들인데 조금만 언행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시끄러워, 이제는 서지도 않는 영감탱이."

"끄응..."

"크크큭. 다들 그동안 살만 했나 보군. 기다리게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불평이라니."

세 사람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사이 자신이 언급한 약속 시간보다 딱 1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에스크는 자신의 부름에 응한 세 명과 비어있는 한 자리를 흩어 보고선, 피식 하고서 여유로운 미소를 띄웠다.

"뭐, 동쪽 녀석은 오지 않은 것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고. 그런데 설마 너희 나머지 셋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이 자리까지 행차하실 줄이야. 그만큼 '귀빈'이 보고 싶으신 거겠지."

"무거운 엉덩이라는 말은 취소해 줄래? 안 그래도 요즘 신경 쓰는 부분이라고."

물담배를 피우며 투정 부리듯 궁시렁거리는 양마담의 말을 가볍게 흘러 넘기며, 에스크는 여유롭게 미리 준비된 자신의 자리에 턱 하고 앉았다.

"너무 그렇게들 성급하게 굴지 마. '귀빈'은... 아니, '선생님'은 이제 곧 도착하실 예정이니까. 나는 당신네들에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 미리 알려야 할 것을 알리기 위해 먼저 도착한 거고."

평소와 다른 에스크의 모습에, 세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그가 언급한 '귀빈', 아니,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본래 랜드필의 다섯 조직 중에 가장 조직으로서의 힘도 개인으로서의 무력도 부족한 탓에 다른 이들과 비교되느라 늘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에스크가 평소라면 짜증을 내며 받아 쳤을 양마담의 시시껄렁한 농담을 가볍게 무시한 것부터 평소라면 짜증으로 가득 했을 얼굴에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이 대처할 수 있다는 듯한 저 여유로운 미소를 시종일관 띄우고 있는 모습까지. 전에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사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태도 변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저 에스크가 문제의 외부인을 '선생님'이라며 높여 부르는 것.

오죽하면 랜드필의 지배자는 그가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에스크는 누구보다 투쟁심과 자존심이 강한 사내였다. 그런데 그 사내가 자칫 비굴하다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낮추며 이방인을 높여 부르는 모습에, 평소 그와 자주 충돌했던 도계의 두령인 도성운은 심기가 뒤틀릴 정도로 괴리감을 느꼈다.

"결국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구나, 에스크. 아주 충실한 신하가 다 되셨어. 랜드필의 서쪽 지역을 지배하는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놈이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를 이방인 따위에게 굽신 굽신 고개나 숙여대고, 부끄럽지도 않나?"

평소의 에스크라면, 이런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결코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도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조직이란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조직의 끈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상대를 모욕하는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야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 분을, 선생님을 뵙게 되며 깨달았다. 이 랜드필에는, 반드시 선생님이 필요하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분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희생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마치 감동적인 연설을 끝마치듯 장엄하게 내뱉는 그 한 마디에, 도성운은 당혹감을 넘어 공포마저도 느껴졌다. 그것은, 광신. 우상을 마주한 광신도의 확고한 믿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광기마저 엿보이는 그 굳건한 믿음에 도성운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주일 만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한다고?

"오, 아직 늦지 않았네."

불길함을 느낀 도성운이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나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초면의 남녀 한 쌍이 랜드필을 지배하는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모인 이 바에 들어섰다. 낯선 이의 등장에 우두머리들이 데려온 각 조직의 조직원들이 저마다의 무기에 손을 갖다 대며 경계를 하는 찰나.

"아, 선생님! 딱 맞춰 오셨습니다!"

에스크는 마치 우두머리에게 경의를 표하는 조직원처럼, 이제 막 바에 들어온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도성운 뿐만이 아니었다. 마이어의 눈이 충격으로 커지고, 양마담은 넋을 잃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 파이프를 바닥에 툭 하고 떨구었다. 한 조직을 이끄는 남자가, 이토록 다른 이에게 쉽게 머리를 숙이다니. 한 때 다투었던 적으로서 도저히 그 꼴 보기 싫은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던 도성운은 허리에 매단 자신의 도(?)에 손을 갖다 대었으나...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를 듣는 순간, 그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도성운은 그에게서 풍기는 사특하고 위험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고, 양마담은 남자의 팔짱을 낀 무척 매력적인 외모의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였으며, 마이어는 바 내에 퍼져나가는 묘한 분위기에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단지 등장 만으로 순식간에 랜드필의 지배자들을 굶주린 맹수 앞의 무력한 힘 없는 사냥감으로 만들어 버린 사내는, 이내 가소롭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가, 마치 처음부터 자신을 위한 자리였다는 듯 좌석의 가장 중심 석에 털썩하고 앉았다.

테이블의 중앙 자리에 다리를 꼬고 걸터 앉은 사내와, 그 옆에서 사내에게 매달리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 그리고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등지며 얼굴에 그늘이 가려진 그의 모습은 묘하게 지배자의 포스가 넘쳤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오래 조직을 이끌었던 마이어는 순식간에 내부의 분위기를 휘어 잡은 그에게서 자신이 젊을 적 막 조직의 우두머리에 올랐던 순간을 겹쳐 보았다. 그리고 이미 늙을 대로 늙은 자신과 달리, 눈앞의 남자는 아직 젊었기에 그 대비는 확연했기에. 자신의 조직원들이 자신에게 그리하였던 것처럼, 마이어 또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있었다.

"한 명이 빠지기야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 그럼 쓸데없는 이야기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나는 이 도시, 랜드필을 바꿀 생각이 있다."

랜드필을, 바꾼다.

전혀 생각치 못한 이야기에, 에스크를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서렸다. 바꾼다고? 이 도시, 랜드필을? 도대체 어떻게?

"분명 어째서 바꾸려고 하는지,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지 등등 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나중에 차차 설명하지. 어쨌든 중요한 점은, 나는 이 도시를 세상의 쓰레기통에서 다시 사람이 사는 도시로 바꿀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다른 곳에서 버려진 것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시궁창이 아닌, 사람이 제대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로. 그리고... 그걸 위해서, 그동안 도시를 지배해 온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이거지."

"...우리가, 왜 당신을 도와야 하지?"

여전히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도성운은 간신히 턱을 움직여 자신의 의견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씨익 웃으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듯한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도성운은 자신을 짓누르던 알 수 없는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도시를 바꾸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은 남겨둘 테지만 필요하지 않는 것들은 전부 없애버릴 거니까. 예를 들어."

그는 뒷말을 구태여 내뱉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그 정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이는 없었으니까. 그의 입은 웃고 있으나,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필요 가치를 철저하게 저울질 하는 듯한 그 시선에, 도성운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