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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57화 (229/229)

〈 157화 〉 조삼모사(3)

* * *

랜드필을 쇠락하게 만든 주 요인인 유독 가스, 그것을 처리하고자 폐광으로 향한 우리는 전혀 뜻하지 않은 존재와 마주쳤다. 그것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마석과 유독 가스를 배출하는 거대한 짐승이었다. 괴물의 습격에 당황하기도 잠시, 최후의 순간 결국 내가 나서서 괴물을 끝장냄으로서 유독 가스 문제는 해결되었다.

가스를 생성하던 괴물이 죽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랜드필에서는 길거리에서 굳이 방독면을 쓰고 다닐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유독 가스를 처리함으로서, 이제 우리들은 외면하고 있던 문제와 당면하게 되었다.

"랜드필이 여태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유독 가스가 진동하는 열악한 환경을 이용해 불법적인 거래를 이용하는 부유한 고객들이 있던 덕분이었지. 하지만 가스가 사라졌으니, 이제 그들도 랜드필을 찾을 이유가 없어. 그들이 이곳을 이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유독 가스로 인해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이 도시에 들어오기 힘든 열악한 환경 탓이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랜드필은 다른 나라들이 통치권을 포기한 독자적인 곳이고, 아직은 제대로 된 체제가 없는 곳이니 고객들이 당장 떠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그들을 오래 붙잡을 수도 없지. 랜드필은 유독 가스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고, 부족한 식량과 생필품은 불법적인 거래를 하는 이들에게 안전한 거래 장소를 주선함으로서 받은 대가로 구하던 것이었으니.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게 아니야."

"예?"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의아함을 품던 에스크에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친절히 설명했다.

"말했잖아. 이 랜드필이 버려진 것은, 다시 복구하기 힘든 척박한 지형과 더불어 일상 생활이 힘든 유독 가스가 지속적으로 분출된 탓이지. 그런데 이제 그 문제의 가스가 처리되었으니..."

"...랜드필을 거두기를 포기하고 방치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이곳을 탐낼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애초에 이 랜드필은 마법 왕국 마기스토스에 마기스라이트라는 마석을 공급하던 작은 광업 도시였지. 비록 그 마석 광산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아직 이 랜드필의 지하에는 매장된 자원이 남아 있다. 그걸 노리는 놈들이 있을 테지. 그게 아니더라도... 여태 유독 가스라는 위험한 환경 때문에 감히 이곳에 들어올 생각을 못하던 것들이, 이 좁고 황폐한 땅을 차지하고서 영주 노릇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지."

"랜드필은 여전히 버려진 도시이고, 각 나라와 도시에서 버려진 이들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최후의 장소이니까요."

"이제 내가 왜 유독 가스 문제를 처리하기 전에, 이 도시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는지 알겠지?"

랜드필이 점차 발전하며 살기 좋은 도시로 변해갈 수록, 이 도시를 차지하고자 덤벼드는 이들은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를 온전히 지켜내며 사람이 제대로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선, 역시 그 때까지 우리들을 지켜줄 든든한 아군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우리를 돕겠습니까? 랜드필에 대한 외부의 인식은, 그야말로 밑바닥입니다. 인생을 실패한 낙오자들, 혹은 상종도 하기 싫은 구역질 나는 범죄자들이나 모여드는 곳이 랜드필인데, 대체 누가 굳이 나서서 이곳을 돕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를 돕는 것이 손해가 난다면, 우리를 돕지 않았을 때 더 큰 손해가 나오게 만들면 그만이지."

"예?"

의아해하는 에스크를 뒤로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조직원들이 옮긴 마석들과 괴물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내 최후의 일격으로 몸이 이등분 나서 사망한 괴물, 그 괴물의 혀에는... 특이한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날개가 달린 지팡이, 그리고 그 지팡이를 휘감으며 올라가는 두 마리의 뱀.

카두케우스.

하늘과 땅을 잇는 생명을 상징하여, 탄생과 죽음 그리고 질병과 치유의 순환을 의미하는 상징. 그리고 이 세계, 아티피아에는 이 카두케우스를 대표적 심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마법 왕국 마기스토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까진 모르지.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일이 있었어."

마기스토스에 주기적으로 마석을 공급하던 소규모 광업 도시는, 어느 날 일어난 지진과 함께 무너지며 광산 안 쪽에서 피어오른 유독 가스 때문에 결국 버려지고 방치되었다. 그런데 그 유독 가스는 자연적으로 나오던 것이 아니라 폐광 최심부에 살던 한 괴물이 인공적으로 뿜어내던 것이었고, 그 괴물의 혀에는 마기스토스에서 심볼로 사용하는 카두케우스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랜드필의 쇠락은 어쩔 수 없던 불의의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일어난 모종의 사건이 있었고, 그 결과가 랜드필에 일어났던 지진이며 이 폐광에 살던 저 괴물이 그 증거이다.

엘레이스타는 그 당시 마기스토스의 수장이 아니었으니 그에게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에 마기스토스 왕국이 얽혀 있다는 것은 잡아 뗄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표할 생각은 없다. 랜드필의 쇠락의 원인이 마기스토스 왕국에 있다는 것을 알리면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그래봐야 적을 더 늘리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다. 어찌 되었건, 이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과거의 마기스토스에서 벌인 누군가에 의한 일이니까.

지금의 랜드필은 파도가 한 번 쓸고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연약한 모래성이다. 그리고 나는 랜드필이 외부의 침공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틸 견고한 성이 되기 전까지, 이 사건을 밝히지 않는 것을 대가로 엘레이스타로부터 랜드필을 지켜줄 것을 약속 받을 것이다. 마기스토스의 수장으로서 그는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벌인 끔찍한 사건을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고, 나에겐 이 도시를 바꾸기 전까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줄 아군이 필요하기에.

마기스토스의 비호에 대한 마땅한 대가로서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재로서, 그들의 힘을 빌려 랜드필을 지키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역시 엘드랜드인가."

황금의 나라 엘드랜드. 자본주의의 괴물이라는 말이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그곳의 국왕 빌가메스는 일곱 도시의 대표자들 중 단 두 명 뿐인 구인류... 그러니까 아티피아에 다른 세계 출신의 이방인들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 세상에 살던 사람이다. 다른 국가들이 세월의 흐름에 무너져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계속 유지되다 못해 그 어떤 다른 나라도 감히 정면으로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대량의 부를 축적한 저 황금의 나라는 버려지고 몰락한 랜드필의 전력으로는 감히 상대조차 하기 힘든 강대국이다.

설령 랜드필이 제대로 된 도시로 거듭났다고 해도, 엘드랜드를 상대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엘드랜드를 거치지 않는 황금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금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경제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이니까. 대체 그 왕국의 왕인 빌가메스가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지는 몰라도, 그를 상대로 도시의 전력으로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하, 진짜 가기 싫다."

그러니까, 싫어도 내가 직접 갈 수 밖에 없다.

빌가메스가 원하는 것은 나다. 내가 제 발로 찾아가면, 그로서 더 이상 이 버려진 도시를 들쑤실 이유가 없다. 내가 괜히 싫다고 뻐팅겨 봤자, 괜히 랜드필의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랜드필에는 마법 왕국 마기스토스나 과학과 혁신의 도시 메타버스 시티처럼 앞서가는 기술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환상의 열도 마보로시마나 유서 깊은 고대의 지저 도시 샴발론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수호할 특별한 결계가 있는 것도 아니며.

무림의 천마나 데스페라도의 정시우처럼 자본력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일인 군단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하, 이래서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힘든다.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크게 제한이 되니까.

폐광을 나온 후 괴물의 사체와 괴물이 생성한 마석은 U.F의 보스 마이어에게 잘 보존해 두라고 맡겼다. 카두케우스의 문양이 새겨진 괴물의 사체는 향후 있을 마기스토스와의 동맹 협약을 위한 중요 재료이고, 산처럼 쌓인 저 마석을 가장 비싼 값에 사줄 만한 곳도 마기스토스 밖에 없으니까. 에스크와 조직원들에겐 입단속을 시킨 후, 평소의 업무로 복귀하라고 지시하고서 나는 모노가 기다리고 있을 거처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선생!"

"응?"

누가 나를 급히 불러 세우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후우, 후우. 드디어 찾았다. 선생, 이제 랜드필에서 완전 유명 인사더라? 불과 며칠 만에 내 고향에서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정도라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야?"

"그러는 당신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장 센?"

장 센.

스카이론에서 근무하던 간수,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두 번째로 각성시킨 능력자. 그 능력은 [왜곡 곡예]. 자신의 손으로 투척한 사물에 미치는 온갖 물리 법칙을 왜곡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강력한 능력이다. 굉장히 유용해서 나도 잘 써먹고 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이 왜 여깄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 사람의 고향이 여기 랜드필이었지?

"브레이크윙 교도소장이 시킨 일 때문에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그 새 여기도 많이 변했네. 사람들의 얼굴색이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 그리고..."

"능력자가 참 많죠?"

"그러게. 이만한 인원을 도대체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 거야? 이 랜드필 사람들이 내가 아는 그대로라면, 진즉에 뭔가 사고를 쳤을 텐데..."

랜드필은 낙오자와 실패자, 그리고 결함이 있는 이들이 모여드는 곳. 그 결함이란 신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몸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아이에게 욕정하는 범죄자나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쾌락 살인마 같은 극단적인 녀석들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 있는 놈들이 여태까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유? 간단하다.

"뭐, 다들 자기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안 그러면 내 손에 뒈지니까.

카룬이 벌인 인질극과 그 때 내가 모두의 앞에서 그녀에게 가한 '처벌' 이후에도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 못하고 제 세상인 것 마냥 날뛰던 것들은 진즉에 다 뒈졌다. 어차피 한 번 능력을 각성한 시점에서, 그런 놈들은 이미 쓸모를 다 한 셈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어떤 능력자를 키워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떤 능력을 각성하느냐이니까.

"그런데 브레이크윙 교도소장이 시킨 일이라고요?"

"엉. 오랜만에 휴가를 나가는 김에 이 서신들을 전해 달라고 하더라."

"예,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장 센에게서 받은 편지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나저나 장 센 씨, 못 보던 사이에 능력이 많이 강해지셨네요."

"어? 그게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셔요?"

"애초에 제가 그 능력을 각성시켜 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를 통해 각성한 능력자들의 강함은, 우물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우물 아래의 물이 그 사람이 품은 '마음의 힘', 그리고 그 물을 담을 두레박은 그 사람이 품은 욕망,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줄이 내가 삼키게 한 씨앗이다.

품고 있는 욕망이 간절하고 강렬할 수록, 한 번에 퍼올리는 힘의 크기가 많아진다. 그리고 현재 장 센의 두레박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5할 정도 커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장 센 씨. 당신 정도라면,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네요."

"다음, 단계요?"

개화, 만개, 그리고 해방과 침식.

나를 통해 능력을 각성한 상태는 개화. 이제 막 꽃이 핀 시점이다.

그렇게 각성한 능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을 때, '만개'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만개의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흑기사, 기억하시죠?"

"물론이죠. 칠흙의 갑옷을 입고서, 온몸을 내던져 자신의 소중한 여인을 지키던 그 모습. 아마 그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그 때의 흑기사가, 바로 만개의 상태입니다."

만개의 단계로 들어서면, 개화의 단계에서 다루는 능력이 단순히 물리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인 형체를 갖는다. 흑기사의 그 갑옷은, 그 당시 그가 품고 있던 욕망...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모습이다.

지금의 장 센은, 흑기사와 마찬가지로 만개의 단계로 들어설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만개의 단계에 들어선 장 센이 나와 동행하면, 나는 안심하고 엘드랜드에 방문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를 노리건, '만개'의 단계에 이른 능력자 하나를 상대론 의미가 없으니까.

"...어, 선생. 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뭐죠?"

"그, 만개라는 거... 혹시 개화할 때보다 아파?"

나는 말 없이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얼굴이 사색이 된 장 센은 달아나려는 순간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허, 어딜 가시나. 더 강해질 기회를 주겠다는게, 거절하시면 제가 섭섭하죠."

"이, 이거 놔! 만개고 뭐고 관심 없으니까, 살려줘!"

"하하, 누가 들으면 제가 당신을 죽이려는 줄 알겠습니다?"

걱정 마.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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