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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58화 (203/229)

〈 158화 〉 엘드랜드의 자본력은 세계 제이이이일!!(1)

* * *

심의 능력자의 능력을, 나는 현재 그들의 능력을 개화, 만개, 해방과 침식의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만개 단계의 능력자는 내가 처음에 흑기사를 임외로 각성시켰을 때를 제외하고선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가장 처음에 개화 시킨 능력자들 중 한 명이자 오랜만에 만난 장 센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충분한 준비를 갖춘 것을 보고서 나는 그를 한 단계 높이 오를 수 있게 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만개 단계의 능력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엘드랜드 방문이 보다 안전해질 테니까.

"옳지, 조금만 더."

"허억, 허억, 허억...!"

만개의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침식 단계로 들어서며 대형 사고를 칠 수 있기에, 나는 각성한 능력자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 만개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막아 두었다.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충분히 제 능력을 제어할 수 있다, 라는 판단이 선다면 나는 그 안전장치를 해제한다. 지금의 장 센 처럼.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장 센 씨."

"흐으... 다시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어. 후...."

환골탈태라는 말이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 완전히 달라짐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인데, 무협지에서는높은 경지에 이룬 고수가 많은 내공과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몸 자체가 무공을 익히기 적합한 육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 때 육체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몸에 쌓인 노폐물이 외부로 배출되는 데, 개화 단계에서 만개 단계로 오른 장 센의 현재 모습이 그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육체가 변화하며 노폐물이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엄청 아프고 힘들어서 땀을 엄청 쏟았다는 것 뿐. 탈수가 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땀을 잔뜩 흘려서, 그 모습이 꼭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그래도 그만한 고난을 경험한 값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 반박할 수가 없는 게 진짜 슬프네."

개화가 이제 막 꽃이 피어날 때라면, 만개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났을 때.

개화 단계가 능력을 막 각성한 이후의 시기라면, 만개는 그 능력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다.

"장 센 씨, 오늘 막 도착한 거죠? 휴가는 앞으로 며칠 남았습니까?"

"어, 이번에 일주일 정도로 썼는데."

"딱 좋군요. 그럼 저랑 어디 좀 같이 갑시다."

"응? 어디?"

능력을 한 단계 성장시켜 주었으니, 그 보답을 받을 차례다.

"황금의 도시 엘드랜드."

*

랜드필에서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불법적 거래 장소 주선은 바로 오늘 아침 10시 무렵이었다. 그리고 랜드필을 병들게 만들던 유독 가스가 점차 옅어지기 시작한 것은 11시 무렵이고. 랜드필의 많은 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몇 안 되는 벌이 수단 중 하나인 불법 거래도 이제 곧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새로운 벌이 수단을 찾기 전까지 랜드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동안 축적한 얼마 되지 않은 재물을 전부 소모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 달. 그리고 마기스토스 왕국에 폐광의 괴물이 쌓아둔 마석들의 처분을 맡긴다면 추가로 한 달 정도 더 버틸 수 있다. 무너진 폐광을 다시 복구하여 마석 채굴 사업을 이어나가려고 해도, 그 기반을 다질 예산조차 부족한 상황이며 그렇게 열심히 복구한다고 해서 얼마나 뽕을 뽑을 수 있는지도 불명이다.

즉, 최대 두 달 안에, 가급적 빨리 랜드필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예산을 정기적으로 수급할 수단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 황금의 도시 엘드랜드에 방문하는 것이, 그 방법을 찾을 열쇠라고 결론을 내렸다.

엘드랜드는 돈이 썩어 넘치는 나라.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막대한 부를 소모하여 보충하는 곳이다. 그러니 나는 오직 랜드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원을, 그들의 황금과 거래하여 랜드필을 유지할 계획을 세웠다. 엘드랜드의 왕, 빌가메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랜드필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를 해소할 수 있었으니. 그리고 황금에 대한 대가로서 제공할 자원은, 이미 정해져 있다.

"후, 여기가 엘드랜드인가. 생각보다 덥군."

나라는 존재 탓에 외부의 세력들이 수시로 랜드필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엘드랜드에 방문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릴 수 없고 이곳에 오래 머물 수도 없지만 엘드랜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한 나라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에 황금빛 모래가 아름답게 빛나는 사막 왕국.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다던데, 그럴 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불길한 진녹색 유독 가스가 진동하는 낡은 폐도시와 비교하면 더더욱.

엘드랜드에 방문한 사람은 나, 모노 릴리스, 길잡이 역할을 해줄 세미라와 이번 방문에 한해서 내 호위를 맡은 장 센까지 해서 총 네 명이었다. 인원이 더 많아 봤자 괜히 시선만 쏠릴 테고, 빌가메스를 만나기 전까지 내 정체를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나는 흔하디 흔한 관광객 중 한 명으로 보이도록 무난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야, 야. 저기 저 여자 좀 봐. 진짜 개쩐다."

"와, 미친 개이뻐... 마보로시마 쪽 사람인가? 뭔가 분위기가 그 쪽인 것 같은데... 가서 번호라도 따볼까?"

"아서라, 상식적으로 저런 엄청난 미인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상대해 주겠냐?"

아무리 펑퍼짐하고 칙칙한 색의 옷을 입어도 고대신에 의해 만들어진,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기에 최적화 된 모노 릴리스의 육체가 풍기는 매혹적인 페로몬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기에 저절로 우리 일행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선을 타고 이곳에 오는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아서 모노는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고, 괜히 잘못 덮치려고 들었다간 낡은 붕대로 휘감고 관에 넣어 두어도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몰골이 될 때까지 쥐어 짜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근데, 솔직히 저건 반칙이긴 해. 나는 분명히 남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굉장히 헐렁한 티셔츠를 입혔는데, 그걸로도 감히 저 압도적인 흉부를 가릴 수는 없었다. 세미라가 입으면 짧은 원피스로 보일 정도로 큰 옷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슴 쪽으로 끌어 당겨지며 졸지에 배꼽을 드러내는 크롭티가 되어버렸잖아.게다가 저거 캐릭터 티셔츠라고. 옷 앞쪽에 그려진 귀여운 개구리 캐릭터의 그림이 늘어나면서 제발 죽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고.

게다가 짧은 반바지로 인해 튀어나온 눌린 허벅지 살이며, 인상을 바꾸기 위해 평소에 그냥 풀어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으니 평소에 보이지 않던 새햐앟고 섹시한 목선이 드러나기도 하고... 하, 시발. 보기만 해도 아랫쪽에 피가 절로 쏠리네. 그대로 눕히고 그 위에 올라 타서, 저 뽀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겨드랑이 사이로 넣은 손으로 저 탐스러운 젖탱이를 마구 희롱하며 후배위로 박으면 분명 존나 개쩔 것 같은데...!

"엄마야. 저것 좀 봐. 옆에 있는 남자도 그, 거기가 장난 아닌데?"

"왜 저런 미인이 저런 남자랑 같이 있나 싶었는데, 그럴 법도 하네. 생긴 거랑 다르게, 밤에 힘 좀 쓰나 봐?"

"어, 어머... 남사스러워라."

닥쳐. 나라고 내 좆 크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 줄 아나. 맨날 끌어 안으며 뒹굴던 여자가 옷을 갈아 입고 머리 조금 묶으니까 평소랑은 색다른 느낌의 매력이 느껴져서, 당장이라도 범하고 싶어서 도저히 발기를 참을 수가 없다고.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생전 처음 와 본 사막의 풍경에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모노는 문득 안절부절 못하는 내 얼굴과 바지 위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툭 튀어나온 곳을 차례로 응시하더니, 이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비음을 흘렸다.

"흐흥. 우리 자기, 평소와 색다른 내 모습이 엄청 꼴리나 봐? 정 못 참겠으면 어디 조용한 곳에서 시원하게 한 발 빼줄 수도 있는데..."

모노는 한 손으로 고리를 만들고 앞뒤로 흔들며 혀를 내미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노골적인 사인을 나에게만 보이도록 보내며 웃었다. 그 음탕한 모습에 순간 강렬한 음욕이 끓어 올라 길거리고 뭐고 간에 그대로 덮쳐버리고 싶었으나, 혀를 깨물며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

"마음 같아선 절실하게 그러고 싶지만, 이번엔 동행인이 있으니까 참자."

"히잉, 아쉬워라~."

말로는 아쉽다고 하면서, 마치 나를 도발하듯 튼실한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참... 이 서큐버스가 언제부터 이렇게 요망한 짓도 할 줄 알게 된 거지.

"저기,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는 잘 알겠지만 적어도 그, 밖에선 자제 좀 해줄 수 없나요?"

끼어들 타이밍을 놓쳐서 나와 모노의 자극적인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세미라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부탁했다. 하긴, 그녀 입장에선 외국에서 손님 몇 명 데리고 왔는데 고향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데려온 외국의 손님들이 저질스러운 농담을 하고 있는 상황일 테니.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떳떳하게 들기 힘든 모양이다. 정말,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여자다.

"그럼 일단 숙소부터 잡도록 하지. 왕과 만나는 일이 하고 싶다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필요한 절차가 있을 것 아니야? 넌 우릴 적절한 숙소까지만 안내해 주고, 돌아가서 내일 내가 바로 빌가메스 왕과 접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둬라."

"네, 물론이죠."

그녀가 갑자기 뒤통수를 칠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세미라가 빌가메스에게서 받은 명령은 랜드필의 선생을 데려오라는 것.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제 발로 동행한 시점에서, 굳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겠답시고 다 해결된 일을 냅다 뒤집어 버릴 얼간이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현지인 세미라의 도움으로 가장 값이 싸면서 환경이 좋은 숙소를 찾았고, 2인실 하나와 1인실 하나를 잡았다. 물론 2인실은 나랑 모노가, 1인실은 장 센이 쓸 방이다.

"와, 분명 밖은 엄청 더웠는데 여기 안은 굉장히 시원하네? 신기하다!"

"마기스토스에서 만든 마력을 전력으로 변환하는 마도구와 메타버스 시티에서 만든 최신형 에어컨이 같이 있으니까."

황금의 왕국 엘드랜드.

이 세상의 모든 황금이 반드시 한 번 씩은 거쳐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유한 나라.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기술의 집합체가 동시에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자국에 없는 것을 외국에서 사들여서 그 공백을 채운다. 그 압도적인 자본의 힘은, 압도적인 강자나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킬 안전한 수단이 없는 랜드필로서는 도저히 받아내기 힘든 무거운 힘이다. 그 힘이 폭력의 형태로 랜드필을 위협하기 전에, 엘드랜드의 왕 빌가메스와 만나 대화를 통해 원활한 관계를 맺는 것이, 이번 여행의 최우선 목표다.

"응? 달링, 저기 저 사람들은 뭐야?"

모노는 거의 평생을 스카이론의 새장에서만 보내었기에 바깥 세상이 익숙치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랜드필에 왔을 때도 이렇게 호기심 넘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지. 그러고보니 새장을 나와 랜드필에 정착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네. 시간 참 빨리 간다니까.

"어디, 뭘 말하는... 아아."

모노는 창 밖의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물었고,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밖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순간 얼굴이 굳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모노가 발견한 것은,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에 무거운 쇠사슬이 묶인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자제를 힘겹게 운반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리고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감시하는 감독관이었다. 하, 저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엘드랜드.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그리고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노예 제도가 합법인 나라.

물론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노예는 없고, 오로지 왕국 소유의 공용 노예 뿐이지만.

"저건, 노예야."

"노예?"

"모종의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 당한 채, 가축 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노동력을 착취 당하는 살아있는 도구를 의미하는 말이야."

저들은 아마, 이전에 살인이나 강도짓 등의 죄질이 심한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들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대표자들이 저런 꼴을 그냥 넘겼을 리가 없을 테니. 물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엘드랜드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외면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선 그럴 일이 없다. 애시당초 일곱 도시의 대표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불법 노예 해방 및 노예 사냥꾼들 척살이었는데, 불법으로 노예를 만드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리가.

만일 불법 노예를 그냥 방치했다가, 이 세상이 그 때처럼 뒤집어 질 수도 있을 수 있으니.

"흐음, 노예라..."

모노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짐을 옮기는 노예들을 보며, 무언가 생각에 깊게 잠겼다. 그녀는 저 광경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노예들에 대한 동정심? 아니면 인간이 같은 인간을 가축 이하의 도구로 취급하는 모순에 대한 경멸?

"다음에는 노예와 주인 플레이를 하는 건 어때? 자기가 나를 막! 노예처럼 막! 험하게 대하는 거야!"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울고 불고 빌어도 도중에 그만두지 않을 건데, 괜찮겠냐?"

"오히려 좋아!"

그래. 노예 제도고 뭐고, 나랑 상관 없는 일이지. 애초에 여긴 내가 사는 나라도 아닌데, 내가 괜히 참견해서 뭘 어쩌겠다고. 이 나라의 왕인 빌가메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당사자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제 넘게 끼어드는 것은 오지랖이고, 민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정의감이 철철 넘쳐 흐르는 용사들이나 하는 일이지, 나와는 안 어울리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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