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63화 (208/229)

〈 163화 〉 [1주년 외전 ] 메이드 / 엘프

* * *

노블리스 오블리주.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으로, 부와 권력에는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수반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유사했다.

강자는 약자를 지켜줘야 한다. 힘이 있는 자는 힘이 없는 자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어야만 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가 걸어온 길이자, 그녀가 나아갈 길을 비쳐줄 램프였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저 여자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맞습니다. 저희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저 여자를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들에게는 너그러운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그리고 그 날, 그녀의 램프에 불이 꺼졌다.

강자로서 누구보다 약자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정작 지키고자 했던 이들에게 배신 당한 날.

끝도 없이 전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사악한 악당에게서 힘 없는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에게서 따로 보답 받을 보상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일부러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긴 용병 생활로 단련된 육체를 혹사해가며 사악한 흑마법사의 군세를 막아내었고, 그 악당의 침략을 하루 늦출 수 있었다. 비록 그를 이길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계속 버티다보면 전쟁을 서둘러야 하는 상대가 먼저 물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버텨내기만 하면, 이 마을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제 몸을 필사적으로 내던지며 사악한 흑마법사의 군세와 맞선 끝에 이대로 계속 버티면 마을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정작 그녀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힘으로는 흑마법사를 절대 이길 수 없고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되는 것은 순식간이며, 흑마법사의 군세를 겨우 겨우 힘들게 막아내는 그녀를 믿느니 차라리 그에게 정면에서 대적한 그녀의 신변을 그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마을의 안전을 보장 받는 것이 안전하고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들을 도와주고자 나선 영웅의 호의를 이용한 것이다.

그날 그녀는 약자라고 해서 반드시 선하지는 않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런 인생의 쓰디 쓴 교훈을 가르친 선생들은.

­어, 어째서..! 저, 저희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이러시는 겁니까!

­싫,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마르스 님! 살려주세요! 저희를 도와주세요!

­도와줘! 도와달라고! 우리들을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도와주겠다며! 도와주겠다며! 살려줘! 살려달라고!

똑같은 환경과 과정을 거치더라도 타인이 반드시 자신과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의 적이었던 사내는 자신들의 수호자를 제 손으로 팔아 넘긴 어리석은 이들을 일부로 한 명, 한 명 씩 잔혹하게 죽였다. 멋대로 기대하고 넘겨 짚은 그들에게, 세상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 몸에 직접 가르쳤다. 물론, 수업료는 그들의 목이었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방패를 제 손으로 버렸던 사람들은 죽기 직전 흑마법사가 아닌 그녀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자신을 배신했던 주제에 다시 도움을 요청하는 그 뻔뻔하기 그지 없는 비명 소리가, 그들이 내지르는 최후의 불협화음이 그녀의 귀를 관통했다.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아아!!

지켜야 할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이 아닌 통쾌함을 느꼈다.

어떤 순간에도 지킬 것이라 생각했던 신념은 무너지고, 그 사이로 배신감과 증오가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일어나라.]

그랬기에 그녀는 적이었던 사내가 내민 자신에게 건넨 다정한 손길을 잡았다.

힘없고 어리석으며 이기적인 비겁자들이 스스로를 지켜줄 방패를 버리고 제 목숨도 내다 버린 날, 약자들의 수호자이자 의로운 용병 마르스는 죽었다.

그리고 라그나 아마게돈의 남작의 군대를 이끄는 선봉 대장이자 수많은 모험가, 용병, 기사들의 악몽으로 남을 전장의 붉은 귀신 마르스가 태어났다.

"..르스. 일어나요, 마르스!"

"허읍?!"

"마르스, 일어났어요? 피곤하면 방에 가서 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어요?"

"아, 미아... 주인님은...."

잠결에 머릿속에서 필터링도 거치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미아는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또 꿈에 주인님이 나오신 모양이네요. 얼른 정신 차리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아, 꿈이었구나."

아마게돈 남작가의 가주, 라그나 아마게돈이 이 세상을 떠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는 그 빈 자리를 메꿀 새 사람을 찾았지만, 대다수는 그 공백을 잊지 못했다. 다른 일에 필사적으로 매진하며 그 공허한 느낌을 잊으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그가 남긴 것을 이용해 스스로를 위로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순간적인 만족감 이후 찾아오는 더 큰 공백감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한 바가지 왈칵 쏟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마르스의 눈앞에 있는 미아였다.

아마게돈 남작가의 메이드 장이며, 영주 대리인이며, 아마게돈 남작이 가장 총애한 여인. 아마게돈 남작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대신하여 홀로 이 영지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여자.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그의 상실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

"설마, 또 어제 밤에 안개 근처를 순찰하신 건가요?"

"미안. 마법 안개가 가진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안개는 아직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거든."

"후우. 그럼 제게 따로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렇지 않아도 너는 남작님이 떠나기 전에 남기신 일들을 처리하느라 눈을 붙일 틈도 거의 없잖아. 이런 사소한 일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도 있으니까."

"네, 네. 알겠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이 영지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여전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쪽이, 오히려 영지 사람들의 불안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입을 쩌억 벌리며 하품을 하는 마리스를 보며, 미아는 문득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호크나가 요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호크나? 개는 왜 찾아?"

"최근 저희 영지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엘프 종족이 몇 명 있거든요. 아무래도 인간보다는 같은 동족이 나서는 쪽이 그들이 상대하기 편하고, 우리 쪽에서 고생할 일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마르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흠, 호크나는 엘프지만 인간 사회에서 산 기간이 긴 탓에 사실 종족만 엘프지 하는 행동거지는 그냥 귀가 좀 뾰족한 인간에 가까울 텐데... 최근에는 북쪽 끝자락에서 머물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 지금 가서 불러 올까?"

"아뇨.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니, 일단 한숨 푹 쉬고 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불러주세요."

"그래, 알겠어."

마르스가 제대로 휴식하기 위해 방으로 떠나자, 미아는 한숨을 쉬며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엔 산처럼 쌓인 문서들이 그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정기적인 보고서, 결제 확인 서류, 영지민의 요청 등등... 원래부터 이런 쪽에 영 젬병인 이 영지의 주인을 대신해서 그녀가 맡고 있던 업무였지만, 최근 들어 그 양이 유독 늘어났다.

"오늘따라 뭐가 이리 많은지. 어디... 마법 안개 서쪽 부근에서 외부인들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이 확인됨. 상단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마차 안에 갑옷과 무기 등을 숨기고 상인 행세를 하여 안개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한 이웃 영지의 사병들이 확인되었기에 곧바로 내쫓았음. 후... 마르스에겐 미안하지만, 깨어나면 이웃 영지에 찾아가서 그들에게 주제 넘게 굴지 말라는 경고를 좀 전해 두라고 부탁해야겠네."

아마게돈 남작이 숨을 거둔 후에도 그가 남긴 육신을 통해 유지되는 마법의 안개 결계 덕에 아마게돈 영지는 외부의 침공에 완벽한 대비가 가능했지만, 그의 공백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전이라면 감히 그런 건방진 시도는 할 생각도 못하고,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조용히 숨 죽이고 있던 이웃 영지가 안개를 뚫고 내부에 침입하려는 시도를 할 정도라니. 시간이 흐르면서,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세상에 새긴 공포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그나 아마게돈이 모습을 드러낸 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를 두려워하던 이들은 용사의 죽음 이후 몸을 사리다 아마게돈의 공백을 느끼고서 혹시나 그가 움직일 수 없는 데에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랫 사람들을 시켜서 내부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물론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가 있는 동안 그런 침입 시도가 감히 성공할 리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헤집고 다님에도 아마게돈 남작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점에서 외부 사람들 사이에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이다.

처음엔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가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 예견한 마법 안개가 쭉 이어진 덕에 아마게돈 남작이 아직 건재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던 이들이,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새 그 공포를 잊고 추악한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하다니.

아마게돈 남작 쪽의 사람이 아닌 이들은 결코 내부로 들여보낼 수 없다. 만약 그의 적이었던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이 영지에 발을 들이면 이곳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테고, 아마게돈 남작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마법의 안개는 강력한 결계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그 마법을 창시한 마녀 미스트리나다. 수많은 병력들이 수시로 침공을 시도하면, 아무리 그녀라도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부 병력이 내부로 침입하는데 성공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지도 않으니까.지금으로선 아마게돈 남작에 의해서 이 왕국에 오직 하나 밖에 남지 않게 된 그 마지막 공작가가 움직이기 전에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머리가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 전에 남겨두고 간 막대한 일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책임감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미아는 잠시 바람 좀 쐴 겸 어지러울 정도로 서류와 문서로 가득한 집무실을 나와 저택 지하로 향했다. 한 때는 아마게도 남작이 자신의 힘을 시험하던 실험체와 그로 인해 이성을 잃고 그의 불멸의 군대의 일원이 된 이들을 관리하던 그 감옥은 섬뜩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리고 감옥의 가장 안 쪽, 위치상 이 영지의 중심지인 그곳엔 거대한 수정 하나가 있었다.

안 쪽이 반투명하게 비치는 어두운 색상의 거대한 수정은 그것을 휘감은 암녹색 덩굴을 통해 내부에서 흘러 넘치는 검은 마력을 계속 밖으로 배출하고 있었고, 그 마력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에 스며들며 이 영지를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거대한 마법 안개 결계를 작동하는 연료가 된다.

그리고 마법진의 정중앙에 위치한 수정 안에는, 이 영지의 모두가 그토록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 사람이 있었다.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

한 때 개국 공신이던 공작가였으나 다른 두 공작가의 함정 및 왕가의 외면에 의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연이은 직위 하락과 이웃 영지의 침공으로 몰락한 아마게돈 남작가의 마지막 후계자.

불멸의 용이라는 거대한 악에게서 받은 힘으로 잃은 것을 되찾고 그 이상으로 빼앗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한 명백한 악인.

자신의 적에겐, 그의 것을 노리는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아군에게는 더 없이 자비롭고 배려심이 깊었던 남자.

그리고...

"씨이... 도대체 언제 돌아올 거에요? 나를 갖고 싶어서 내 가문을 멸문시키고, 그걸로도 모자라 내가 의탁할 다른 가족을 전부 없애서 내가 돌아갈 곳을 빼앗고... 내 몸을 자기 좋을 대로 희롱하며 자기 취향에 맞게 멋대로 길들이고, 그리고 또, 또... 마지막엔 내 마음까지 빼앗아 가 놓고서...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게 할 거냐고요."

한 악인이 제 욕망에 따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동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악인을 미워하고 증오하다 못해 결국엔 사랑하게 되어버린 한 가련한 여인.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수정을 끌어 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얼른 돌아오란 말이야, 이 나쁜 새끼야..."

한 맺힌 여인의 비통한 울음이, 넓고 고요한 지하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라그나 아마게돈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세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람 사이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 아마게돈 남작에게 안겼던 여자들 중에서 그리 깊은 관계가 아니었던 사람들은 아마게돈 영지를 떠나서 다시 자신들의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마게돈 남작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이들, 언제 돌아올 지 모를 그를 계속 기다리기로 결심한 이들은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남아 영지를 지키기로 했다.

"여기서 또 뭐해?"

"아, 블래키. 별 거 아니야. 그냥...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블래키 또한 아마게돈 영지에 왔던 목적이 아마게돈 남작과의 육체 관계 하나 때문이었기에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지금 굳이 이 영지에 묶여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휴, 또 우수에 젖어선... 엘프들은 다 그렇게 감성적이야? 이게 그 요정 감수성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푸흡, 요정감수성이라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굳이 아마게돈 영지를 굳이 떠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용병 생활을 하다가 마르스를 만나 용병 일을 접게 되고, 그래서 도적단 여두목을 시작했더니 마르스의 주인인 아마게돈 남작에게 부하들이 몰살 당한 터라 그녀에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기반이나 의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그래서 블래키는 자진해서 아마게돈 영지에 남아 이곳에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이유인데? 갑자기 주인님 좆 맛이 그립기라도 했어?"

"ㅈ... 야, 말 좀 가려서 해. 애 딸린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좀 전의 네 얼굴이나 보고 말하시지. 사지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애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섹스에 굶주린 음란한 유부녀의 얼굴이었거든."

아마게돈 영지 내에서 거칠고 털털한 성격의 블래키가 어울릴 만한 사람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성격 자체는 잘 맞을 터지만 오래 전에 전장에서 마주했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슬금슬금 기피하게 되는 경비대장 마르스, 과거에 유사한 일을 겪었다는 연결점이 있지만 웃으면서 언급할 주제가 아닌 데다가 분위기상 편하게 말을 나누기 어려운 상대인 이 영지의 섭정인 미아 등등의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블래키가 선택한 파트너는 같은 용병 출신인 호크나였다.

엘프지만 그 종족 특유의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는 없었고, 그녀 자신도 전에는 용병으로 일한 적이 있다보니 대화 주제나 공감대도 은근히 맞았으며, 더군다나 호크나가 워낙 성격이 좋았던 덕에 블래키는 그녀와 빠르게 친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와, 근데 이제 진짜 임산부라는 티가 나기 시작하네. 그 상태면 앞으로 순찰은 무리겠네."

블래키의 말에, 호크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앞으로 격한 움직임은 무리겠어. 뱃속의 아이한테 어떤 영향이 갈 지 모르니까.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호크나는 어느 샌가 꺼내든 활의 시위를 마치 현악기 다루듯 손가락으로 퉁퉁 튕기며 말을 이었다.

"이러저리 뛰어다니는 건 무리지만, 활의 시위를 당기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거든."

"하, 하하..."

"요즘 들리는 바로는 공작가도 슬슬 발을 담가볼 생각인 것 같은데, 이참에 한 번 제대로 본 떼를 보여줘야 다시는 발을 담가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

왕국에서 공작의 직위를 가졌던 사람이 개국공신인 세 명 밖에 없었다. 두 공작의 시기로 한 공작가가 남작위까지 떨어졌고, 몰락한 남작가의 최후의 후계자가 숨겨둔 독니를 드러내며 또 하나의 공작가를 순식간에 물어 죽인 이후로 공작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아마게돈 남작이 다시 공작위를 받는 것을 거부한 후로, 그 누구도 감히 공작위를 넘볼 수 없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공작마저 언제 아마게돈 남작이 돌연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 먹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마당에, 누군가 겁도 없이 공작위를 노렸다간 라그나 아마게돈에 의해 자신이 속한 가문이 역사에서 한 줄의 기록조차 남지 않고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아마게돈 남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왕가와 공작은 그의 존재를 두려워했고, 이미 라그나 아마게이라는 선례에 아주 호되게 데였던 그들은 아랫사람들의 잦은 도발에도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조차 어쩌면 그가 노리는 바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강한 공작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몸을 사리던 공작이 슬슬 아마게돈 남작의 공백에 의구심을 품으며 마법 안개를 뚫는 일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아마게돈 영지에 남기로 결정한 영지민들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아, 우리 애 아빠는 언제 돌아오려는 건지. 적어도 애가 나오기 전에는 돌아와야 얼굴도 좀 보고 그럴 텐데..."

"...진짜로 돌아오는 거 맞지?"

"그럼, 물론이지."

호크나는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를 떨며, 불록 튀어나온 배를 애타게 쓰다듬었다.

"돌아올 거야. 돌아와야만 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의 귀환에 모든 것을 걸었잖아. 레이, 신 사하, 모르모트, 미아, 마르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어. 나보다 더 오래 그와 지낸 사람들도 버티는데,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은 내가 포기할 수는 없지."

"분에 넘치는 은혜라니...?"

호크나는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나 원래 유사 불임이었거든."

"....뭐?"

불임은 불임이지, 유사 불임은 또 뭐야?

자기가 지어낸 요정 감수성 이상으로 해괴한 단어 선택에 블래키가 별 이상한 것을 다 듣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호크나는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설명했다.

"원래 엘프라는 종족이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긴 대신에 임신이 잘 안되는 체질이라서 번식력이 낮은 건 알고 있지? 근데 나는 동족들 사이에서도 그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야. 도적들에게 붙잡혀서 미약을 먹고 마흔 명에게 번갈아 가면서 나흘 동안 쉴 새 없이 범해져도, 어지간한 엘프도 임신시키는 오크들한테도 잔뜩 범해졌는데도 한 번도 임신한 적이 없거든. 그 때 알게 된 거지. 아, 나는 엘프들 중에서도 임신이 특히 어려운 체질이구나, 하고. 물론 그 덕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지만... 나중에는 무서워지더라."

"무섭다니, 뭐가?"

시선은 마법 안개에 놓은 채로 이곳에 없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호크나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오크에게 범해져도 착상이 실패할 정도로 임신이 어려운 체질이라면 나중에 내가 나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라는 뜻이잖아?"

비록 첫 만남은 적으로, 그리고 첫 관계는 반 즈음 강간이나 다름 없었기에 시작으로서는 그보다 최악일 수 없지만...

먼저 아쉬움을 느낀 것도, 육체 관계를 다시 요구하게 된 것도, 마음을 빼앗긴 것도 자신 쪽이었기에.

닳을 대로 닳아서 더 이상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던 자신을 한 명의 매력적인 여인으로서 대해준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얼굴은 그 정도면 괜찮은 않은 편이고, 성격은 좀 나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람에게는 친절하며, 그... 섹스를 굉장히 잘 하기도 하고.

이 남자의 아이라면, 낳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이 남자 사이에서 나온, 우리들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떠나기 전,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평생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배가 불러오며, 그 안에서 미약하게 전해져 오는 새로운 생명의 박동에,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게 분에 넘치는 은혜가 아니면 뭐겠어?"

"...하지만 그 사람에게 있어서 너는 1 순위가 아닐 수도 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 질투는 안 해?"

"1 순위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해. 그 사람을 절실히 기다리는 다른 여자들도 비슷한 심정일 거야."

오로지 자신 밖에 볼 수 없도록 푹 빠지게 만들어 두고서 이렇게 처량하게 방치하다니, 몇 번을 생각해도 참 괘씸한 사람이다. 나중에 돌아오면, 그 동안 쓸쓸하게 내버려 둔 몫을 톡톡히 받아내야 겠다는 호크나의 장난기 어린 말에, 블래키는 마지 못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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