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엘드랜드의 자본력은 세계 제이이이일!!(6)
* * *
내가 선보인 능력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검토하고 계산한 후, 빌가메스는 대대적인 침공 계획의 윤곽을 잡은 모양이다.
1. 사형이 예정된 극형의 죄수들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놈들을 추려서 씨앗을 삼키게 하여 능력자로 각성 시킬 준비를 시켜둔다.
2. 이 '폭탄'들을 침략 예정인 도시에 보낸 후에 정해진 타이밍에 내가 그들의 감정을 증폭시킴으로서 강제로 능력을 최대치로 폭주시켜 침식 단계의 괴물로 변화시킨다.
3. 괴물들이 날뜀으로서 어지간한 도시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고, 설령 어떻게든 운 좋게 괴물들을 제압한다고 해도 더 이상 전투를 치룰 여력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
4. 그 때 미리 준비해 두었던 20만 명의 군세가...
"잠깐, 뭐라고요? 지금 0이 하나 더 붙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짐이 다스리는 이 엘드랜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다. 이만한 대국에, 정말로 그만큼의 병사가 없을 것 같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십만의 대군이라니. 삼국지에서나 쓸 법한, 현실감이 상실되는 숫자였다. 물론 엘드랜드 왕국의 크기가 중국의 땅덩어리보다 조금 더 큰 편이라서 그만큼 많은 인구수가 있기는 한데... 이십만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하루 아침에 전부 준비시켜서 침공을 시작할 수 있다고? 아무리 평소에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가? 이게 그 자본의 힘이라는 건가?
"예전 같았으면 어떤 나라든 단숨에 쳐부술 수 있었지만, 신들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신의 권능과 가호를 지닌 이들이 지나치게 늘었어. 그리고 그들은 일반 병사들 수백에서 수천 정도와 맞먹는 전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만큼의 유지 비용이 들지도 않지. 그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들이 병력의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게 되었지."
인간 백 명은 강하지만, 맨손의 인간이 백 명이 모인다고 해서 탱크 하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
결국 시간이 지날 수록 다수의 병력을 보유하는 것보단 그 다수의 병력이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질 높은 소수의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통제도 쉽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빌가메스는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기존에 있던 대군의 일부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번 작전에 쓰이는 20만명은, 엘드랜드의 전체 병력의 2할 정도라나.
잠깐, 그럼 이 미친 나라는 병사 수만 백만 명이야? 백만 대군이라고? 그게 감당이 돼? 아, 하긴 감당이 되니까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 진짜 생각할 수록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머릿수가 아닐 수 없다. 백만 명이라니... 랜드필에 사는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데? 저게 진짜 감당이 된다고? 엘드랜드의 자본력은 진짜 세계 제일이구나!
"수백, 수천 명이 할 일을 홀로 할 수 있는 개인. 물론 좋지. 하지만 그 소수의 병력이 모두 한 곳에 묶이게 되면, 다른 병력이 없는 곳들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 없지."
즉, 내가 능력을 폭주시킴으로서 날뛰는 괴물들이 각 도시의 가장 강력한 소수 병력을 붙잡아두는 사이, 자신의 병사들로 지킬 사람 없는 도시들을 일방적으로 침공하여 자신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셈이다. 수백, 수천 명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개개인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다른 곳에 묶여 있다면, 그 사이 그들이 상대했어야 할 수백, 수천 명의 군세가 방어 병력이 빈 도시를 털어먹겠다니. 정말 무지막지한 작전이로군.
그 많은 병사들을 도대체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했더니, 비행선 몇 대를 통째로 대여하여 병사들을 옮길 이동 수단으로 쓸 모양인 듯 싶었다. 진짜 엘드랜드의 자본력은 세계 제일이 맞구나?
"이 일이 무사히 끝나고 이 세상이 짐의 나라의 밑에 머리를 숙이게 되면... 선생, 그대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겠노라. 크크크..."
지랄하네, 미친 놈이. 일이 다 끝나면 토사구팽할 생각이 만반이면서. 거짓말을 할 거면, 적어도 그럴 감정 정도는 숨겨야 할 거 아니야? 사람의 감정에 관여하는 능력이기에 타인의 감정에 더욱 민감한 나는 빌가메스의 텅 빈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내 공을 기리겠다는 말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거든.
빌가메스가 나를 이용해서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반대로 다른 누군가 나를 이용해서 빌가메스를 몰아내고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탐욕스러운 금태양 왕새끼가 거기까지 대가리가 돌아가지 않을 리는 없지. 최대한 내가 협조하도록 온건한 태도를 취하다가, 일이 다 끝나면 조용히 날 처리할 것이다. 혹시나 이 일이 실패하면, 나를 죽인 후 모든 일의 책임을 나에게로 돌리겠지.
"사형수들은 전부 준비되었나?"
"...예. 전부 씨앗을 심어 두었으니, 언제든지 감정을 최대로 증폭하셔 침식 단계로 이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훌륭해. 좋아, 그럼 일단 사형수들을 주요 국가들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근데 이 멍청한 왕 놈은 하나 게산에 빼먹은 것이 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감옥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거라."
"예."
세상 일이라는 건, 전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최선만을 바라볼 수는 없으며, 최악의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예고 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후."
감옥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감시할 인원들이 내게 싸늘하고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왜 나를 저런 아니꼽다는 듯 노려보는지 의아해 했으나, 이내 간수 하나가 입을 여는 순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잘나신 선생이 드디어 오셨군. 랜드필의 쓰레기 주제에, 분명 비겁한 수단으로 누비스 대장군님을 쓰러트렸을 거면서 위세란 온갖 위세는 다 떠는 자식."
"네놈 때문에 날린 돈이 얼마인 줄 알아? 난 그 양아치가 패배해겠다는 쪽에 배팅했는데, 느닷없이 끼어들어서 남의 재산을 날리다니."
"어떤 이상한 사술로 빌가메스 전하의 눈을 속이는 지는 몰라도, 우리들을 속일 순 없지."
우둑, 우두둑. 주먹에서 섬뜩한 뼛소리를 내며, 세 간수가 나를 향한 적의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비겁한 수단? 내가 뭘 어쨌다고? 당사자인 대장군도 반발하지 않는데, 왜 제 3자가 지랄이지? 애초에, 내가 어떤 비겁한 수단을 썼는지 증명할 머리는 있냐?"
"뭐라고? 이 새끼가..."
"돈을 날려? 그러게 베팅을 똑바로 했어야지. 네 얼굴에 달린 건 눈이 아니라 옹이 구멍인가 봐? 자기가 이상한 데에 돈을 걸어 놓고서, 내가 이겼다고 내 탓을 하다니. 덩치만 큰 애새끼가 따로 없네."
"이 씨발놈이...! 말 다했냐?!"
"그리고 뭐, 빌가메스의 눈을 속였지만 네 눈은 속일 수 없다고? 너네 나라 왕의 안목이 이런 칙칙한 감옥을 지키는 보잘 것 없는 간수 이하라고 그렇게 당당히 자랑하고 싶냐?"
"...!!"
같잖은 시비들에 그에 맞은 말로 응수해주자, 곧 간수 중 하나가 허리 춤의 열쇠고리에 손을 뻗었다. 감옥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흠씬 두들겨 패겠다, 이런 속셈이겠지. 내일이 빌가메스가 급하게 세운 대규모 침공 작전의 결행일이니, 그 일에 문제가 가지 않을 선에서 자신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나한테 화풀이를 하려던 모양인데.
"미리 말해두는 데,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한테 두들겨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뭐?"
"한 번 말해주면 이해 못 해? 그러니까, 감옥 문 따고 들어오면 반 죽음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고."
자신븓롭다 키도 작고 근육도 없는 남자가 단순히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간수는 코웃음을 치며 결국 열쇠 고리로 감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좁은 감옥 안으로 간수 두 명이 들어왔고...
"하, 그래. 네가 말한대로 들어왔다. 그래서, 이제 뭘 어쩌시게? 응?"
짜악!
얼굴이 얼얼하다. 새끼, 손 한 번 더럽게 맵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들이 사고를 친다고 해도 빌가메스가 백성인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한 두 번 해본 일도 아닌 것 같고.
"뭘 어쩔거냐고!"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이며, 충동적이다. 자신의 눈을 세상에 맞추는 대신, 세상을 자신의 수준에 맞게 끌어 내리는 자들. 아둔하다면, 하다 못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이는 멍청한 놈들.
"먼저 폭력을 휘두른 건 너희들이니까."
이런 부하 하나조차 제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놈이.
"이건 정당방위다?"
마음이 무너지고, 오로지 본능과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그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나를 때리기 위해 간수는 멱살을 잡지 않은 반대편 손을 뒤로 당겼고, 나는 놈의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퍼억.
"....꺼, 허억...?"
나를 때리려던 간수는, 이내 내 옷을 붙들던 손을 놓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방금 전에 주먹 하나가 가볍게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뚫린 자신의 옆구리를. 시원하리만큼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반대편이 훤히 보였다.
"컥, 허, 허억...!"
고통을 호소할 새도 없이, 간수는 부들거리며 점차 허물어졌다. 그 모습에, 감옥 안에 있던 다른 한 놈과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놈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이게 무슨..."
감옥 안에 있던 다른 한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나는 놈의 복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이 닿기 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간수가 급히 몸을 뒤로 빼려고 들었고.
파삭.
"아, 이런."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이윽고 감옥 안에 있던 나머지 한 명의 간수는 가랑이 사이 새빨갛게 물든 곳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아... 그러게 왜 피했어? 가만히 있었으면 적당히 죽지는 않을 정도로만 상처를 내려고 했는데, 멋대로 움직이니까 영 좋지 않은 곳에 맞았잖아. 앞으로 하반신 쓸 일은 없겠네. 뭐, 애초에 쓸 일이 없는 물건이었을 테지만."
순식간에 간수 둘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후 밖에 있는 놈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얼굴에 공포를 띄운 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야, 너."
움찔. 내가 녀석을 부르자, 녀석은 몸을 떨었다.
"이 새끼들 데려가서 죽기 전에 치료해. 그리고 앞으로 되도 않는 곳에 돈 걸었다가 괜히 잃고서 남탓하지 말고."
"아, 어, 으..."
"얼른 안 데려가?"
"예, 예에! 무, 물론이죠! 여,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힘에 의한 공포는 일시적이고 단순하지만, 빠르고 효과적이다.
아마 어디서 이름을 들어본 적 없던 사내가 갑자기 자국의 자랑인 대장군을 가볍게 요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단순히 눈속임과 기이한 사술로 그들의 대장군을 쓰러트렸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게 자신들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이제 빌가메스가 작전 실행을 위해 나를 다시 감옥에서 꺼내기 전까지, 나한테 괜히 시비를 걸러 오는 놈들은 없겠지.
그리고 빌가메스의 계획도 어떻게 망쳐버릴 지, 이미 머릿속에서 생각해 두었다.
내가 말했잖아, 빌가메스. 침식 단계에 이른 자들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통제할 수 없다고. 지금으로선 내가 나서지 않으면 다시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다고.
네가 세운 작전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오직 자신들의 배만 무사하고 적들의 배가 전부 파도에 휘말려 침몰하기를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만일 네가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했다면, 이런 무모한 작전을 급하게 결행하지는 않았겠지. 아무리 마음이 급했어도, 너무 이른 선택이었어.
"빌가메스가 이번에 사고 한 번 제대로 치면, 아마 각국은 한동안 몸을 사리느라 랜드필 쪽에는 신경도 못 쓰겠지. 유독 가스도 사라진 지금, 랜드필에 필요한 건 질서지. 능력자들을 온전하게 통솔하여, 외부의 세력과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하지만 법은 안 돼. 랜드필은 무법지대이기 때문에 내가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고, 랜드필에 온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법을 제대로 따를 리도 없으니."
그러니 나는 랜드필을 법이 없는 도시가 아니라, 법이 필요하지 않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 나 개인의 전투력도 이제 결코 부족한 수준은 아니고."
에스크의 [꿰뚫기], 장 센의 [왜곡 곡예] 등... 능력자들이 각성할 수록, 내가 쓸 수 있는 패도 늘어난다. [왜곡 곡예]는 만개 단계만으로 엘드랜드의 대장군이나 신의 가호와 권능 보유자인 누비스를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가볍게 쓰러트릴 수 있음을 증명했고, [꿰뚫기]도 방금 간수 두 놈의 몸에 제대로 구멍을 내줌으로서 쓸만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정도라면... 빌가메스가 갑자기 숨겨둔 수단을 꺼내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일 대 일 승부라면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다.
뚜벅, 뚜벅.
그 때 들려온 이쪽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내 상념을 깼다. 뭐지? 그 간수 두 놈에게 본보기를 보여줬으니 어지간한 놈들은 감히 나한테 접근할 생각도 못할 텐데, 누가 오는 거지?
"....응? 세미라?"
나를 찾아온 손님은 세미라.
빌가메스에게 나를 엘드랜드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고 랜드필에 침투했...다가 동료들 전부 뒤지고 나한테 따먹힌 여자였다. 그녀의 뒤에는 후드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가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아니 근데 이 동네에서 정체를 숨기고 싶으면 저렇게 후드를 뒤집어 쓰고 나타나는게 상식인가? 여기 엘드랜드는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 쬐는 사막 왕국인데, 저렇게 두꺼운 데다가 새카만 색이라서 열을 잘 흡수하는 재질의 후드를 쓴다고? 나라면 진즉에 쪄 죽었을 텐데.
"무슨 일이지?"
"...이 분께서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길을 안내해드렸습니다."
"면회인가? 근데 너희 왕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을 텐데."
빌가메스는 지금 나의 힘을 이용한 대대적인 대규모 기습 침공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내일이 바로 작전 결행일인데, 그 작전의 핵심인 내가 다른 누군가와 접촉하게 둔다고? 접촉한 인물이 나를 해치거나, 혹은 나를 빼돌리면 어쩌려고? 그래도 나름 왕이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래, 허가는 받지 않았지. 본래라면 여기까지 직접 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누가 이곳을 지키는 간수들을 전부 내쫓아준 덕분에, 이렇게 늦기 전에 서둘러 내일 있을 당사자인 선생 당신을 만날 수 있었지."
"흐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으며, 거기에 중요한 참고인인 나에 대한 면회를 왕이 허가해 주지 않을 테니 몰래 만나러 왔다고? 거기에 빌가메스 그 녀석의 신하라던 세미라가 협조하고 있는 걸 보면, 결코 낮은 사람은 아닐 텐데... 빌가메스의 작전이 긍정할 수 없지만, 그의 앞에서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며 동시에 이 왕국에서 나름 높은 사람이란 거네? 거기에 묘하게 나를 아는 듯한 말투... 내가 이곳에 와서 얼굴을 마주한 사람 중에 높은 사람은 둘 밖에 없거든?"
"..."
"나 입 무거우니까 그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이시지."
"벗을 수 없다.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그건 댁 사정이고. 용건이 있어 왔으면서, 자기 정체도 밝히지 않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
세미라는 후드를 쓴 사람을 대신하여 뭔가 항변을 하려 했지만, 후드를 쓴 사람은 그녀를 막아서며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그래,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리고 그 자는 후드를 벗었다.
"...이제 좀 믿어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누비스 대장군."
그렇다. 나를 찾아온 인물. 그것은 빌가메스 왕이 굉장히 신뢰하는 붉은 모래 군단의 대장군이자 사막의 신 사헤라에게 선택 받은 자, 그리고 투기장에서 내가 쓰러트린 누비스였다.
물론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그보다, 누비스 대장군... 당신 여자였어?"
그녀의 모습은, 피부를 갈색으로 태운 건강미 넘치는 연상의 운동녀 그 자체였다.
악어를 형상화 한 그 흉악한 갑옷 아래에, 이렇게 예쁜 여장부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진짜 놀랍네. 그 유명한 누비스 대장군이 설마 여자였을 줄이야. 그런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지?"
"본론부터 말하지."
누비스 대장군은 나를 가둔 감옥의 창살을 붙잡고서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 내일 벌이실 일은, 너무나 무모하다.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각국의 강자들이 그 일을 그냥 넘기진 않을 것이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폐하께서 내리신 결단이 이 왕국의 기나 긴 역사에 마침표를 찍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일 있을 침공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다."
"침공을 막고 싶다고? 근대 댁은 대장군이잖아. 내일 있을 침공에서 빌가메스의 군대를 통솔하고 이끌어야 하는 대장군이잖아?"
"나는 신하 된 자로서 폐하께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시려 하신다면 그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허나 폐하는 그대가 가진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나의 말에도 전혀 귀를 기울여 주지 않으시니... 애초에이 세상을 지켜보는 신들께서 폐하의 그러한 무모한 계획을 가만히 지켜보실 리가 없다. 이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면, 분명 많은 신들에게 분노를 살 것이며 이는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는 서막을 열 것이다. 나는... 비록 대장군이지만, 두 번 다시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다."
"왜?"
"전쟁은, 결국 어느 쪽이든 무언가를 잃게 되니까."
흠...
신의 개입이라, 확실히 그건 그렇네.
니아 씨에게 듣기론, 아티피아의 신들은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하지만... 루미너스의 세게에서 번개의 신과 죽음의 신이 신들 사이의 규율을 깨고 무대에 몰래 숨어들어 그녀가 치를 신격 등급 시험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규칙을 정해도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거기다가 누비스 대장군의 말대로, 빌가메스가 이렇게 대대적인 침공으로 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트리면, 이 세상을 원하던 신들은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노려 더 많이 개입해 올 가능성도 있지.
"빌가메스 폐하의 결정은, 신들 사이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게 만들 총성이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이 신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이렇게 부탁하겠다."
쿵!
"누, 누비스 님!!"
"부탁이다.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부디... 부디 이 세상이 다시 신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그리고 엘드랜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을 막도록 도와다오...!"
"..."
빌가메스가 워낙 나한테 지랄에 지랄을 해서, 그 복수로서 녀석과 함께 녀석이 아끼던 이 왕국도 한 번에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한 왕국의 대장군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머리를 바닥에 박아가며 부탁해오는 데 그걸 거절하기도 참 뭐하네. 가장 부유한 왕국인 엘드랜드가 하루 아침에 멸망하면, 그건 그것대로 이 아티피아의 경제에 큰 혼란을 초래할 테니 대장군의 진심을 봐서라도 특별히 엘드랜드가 멸망은 하지 않도록 도와줄까?
...절대로, 나한테 도게자 박고 있는 누비스 대장군의 등 라인이랑 엉덩이 뒷태가 예술적으로 꼴려서 그런 건 아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