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66화 (211/229)

〈 166화 〉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2)

* * *

아티피아에서 가장 강한 일곱 도시에는 그 도시의 대표자들이 있고, 그들은 아티피아의 균형과 미래를 위해 주기적으로 모여서 회의를 갖는다. 그리고 오늘, 대표자들은 예정에 없던 길드 마스터의 갑작스러운 긴급 회의 호출에 응하여 회의장에 모였다.

암석과 같은 거친 잿빛 피부에 수정으로 이루어진 왕관을 쓴 거인 남자, 샴발론의 왕 샨탸르크

B급 감성이 충만한 액션 영화에서 볼 법한 외형의 사이보그 사무라이, 아카위키.

카두케우스의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은 훤칠한 젊은 미청년, 엘레이스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백발의 노인, 네무

이번 사태의 원인이자 최대 피해자인 황금의 왕 빌가메스와 정기적인 회의가 아니면 절대 참여할 일이 없는 천마를 제외한 모든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 각 대표자들은 본래 일정조차 전부 미루고 참석하였음에도 그 얼굴엔 회의를 연 길드 마스터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다. 잠시 후 검은 눈과 머리의 미청년, 이 회의 개최자이자 자유의 도시 데스페라도의 대표자인 정시우가 몇 가지 문서를 한가득 든 채로 회의장 내로 들어왔다.

"자자, 다들 오랜만...이라고 하기도 좀 뭐하네. 저번 회의 이후로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뭐, 다들 내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난 잘 모르겠다만."

"아, 마보로시마 쪽은 외부와의 소통이 잦지 않아서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네무 영감 빼고 나머지는 현재 사정을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본론부터 말하자면... 빌가메스, 그 자식이 사고를 쳤어. 그것도 엄청난 대형 사고를."

정시우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어딘가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랜드필의 선생. 이전 회의의 주제였지. 심의라고 하는, 기존에 있던 특별한 힘... 마법이나 신성력, 무공 등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힘을 다룬다고 보고되었던 사내였지. 그리고 빌가메스와 함께 이번 사건의 주동자지."

일곱 대도시 중에서도 특히 강한 세 도시인 마기스토스와 메타버스 시티, 그리고 데스페라도를 향해 엘드랜드에서 기습적으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그 과정에서 이용하려 했던 랜드필의 선생으로 인해 오히려 엘드랜드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사건. 정작 목표가 되었던 세 도시에선 그저 시민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조금 내는 것 외에 특별한 피해는 없었지만, 엘드랜드는 영토의 반 이상이 불바다가 되어 버리고 경제가 완전히 마비되어, 이전과 같은 위상을 빛낼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래서, 우리가 회의할 주제가 정확히 뭔데?"

"엘드랜드의 자폭으로 인한 후폭풍, 그리고 랜드필의 선생에 대한 처우 문제다."

이번 사건에서 누구의 죄가 가장 큰 것인지, 그건 이제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빌가메스의 왕국은 좋든 싫든 그 막대한 부로 인해 이 아티피아의 경제에 굉장히 깊은 연관이 되어 있었고, 엘드랜드의 붕괴는 당연히 아티피아의 경제 체계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작 일곱 마리 만으로 이 넓은 세계의 경제를 단숨에 박살내 버린 무시무시한 괴물을 손쉽게 양산할 수 있는, 랜드필의 선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까지.

"내 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선생 본인이 가진 전투 능력 자체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더군.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적과 싸운 경험이 적고, 싸움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고, 거기에 전투에 재능도 없어. 그와 일 대 일로 전투를 한다면,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 정도지."

자칫 잘못하면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 중 그의 말에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각자 이 세상에서 손 꼽히는 대도시를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그 자리는 단순이 재물과 명예 그리고 인맥과 인덕 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마법이 있고, 마법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발전된 과학 기술이 있으며, 신이 직접 관여하는 세계. 일개 개인이 수만의 군대를 홀로 박살 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양보다 질이 이상할 정도로 효율적이며 확실한 세상. 그 세상의 꼭대기에 이른 이들에게, 홀로 수많은 적과 싸울 수 있는 강한 힘은 기본 전제였다. 자신의 몸을 지킬 힘 하나 없다면, 이 드넓은 세계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신들이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그 목이 진작에 날아갔을 테니까.

"순수한 면에서 자체적인 전투력, 그리고 싸움의 센스는 가히 최악이다. 민간인과 다를 것이 없어. 그러나... 이 자의 생각, 그리고 품은 힘은 그렇지 않지. 아무런 무력 하나 없는 민간인조차 단숨에 도시 하나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고, 생명의 무게를 잘 알면서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데에 죄책감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다. 까놓고 말해서, 이 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음지에서 사람들을 괴물로 바꾸기만 해도, 우리들 중 반 이상은 끝장날 게 틀림 없지."

행운의 여신에게 사랑 받으며 이 아티피아에서 가장 강한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기지 않을 내용이었고,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혹시라도 이번 일로 자기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체감하게 되서, 직접적인 공세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선생이라는 자는 랜드필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고 했지. 선수필승이라고, 우리가 당하기 전에 먼저 녀석들을 치는 건 어떻지?"

"근데 랜드필을 없애는 건 조금... 괜히 그곳을 없앴다간, 여태 랜드필에 머물고 있거나 아니면 거기로 갈 만한 놈들이 곳곳에 퍼지게 되는 거잖아? 그 쪽이 더 골치 아프지 않나?"

모든 추악하고 쓸모 없는 것들이 전부 랜드필로 모임으로서 다른 도시들은 비교적 깨끗하고 평화로운, 다시 말해 이상적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도 랜드필이라는 골칫거리를 소유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곳이 사라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근처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렇게 버리면서 주변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각 도시들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선 그것들을 위협하는 쓰레기들을 따로 모아둘 쓰레기통이 반드시 필요했다.

"네 말은 쓰레기통을 뒤지기 싫다고, 그 안에서 바퀴벌레들이 번식하게 내버려 두자는 말이랑 뭐가 달라?"

"네네, 아주 잘나셨네요. 그럼 네가 말해보던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문제는 랜드필이 아니라,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선생이란 사내잖아. 랜드필에 대한 모든 공급을 끊고, 선생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면 그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들은 아마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이 살기 위해 그를 팔아 넘기겠지. 우린 지지할 곳을 잃은 그 외로운 이방인 하나 처리하면 끝이고."

"아, 그건 별로 추천 못 하겠네요."

소란스럽게 오고 가는 익숙한 여섯 목소리 속에 난입한 일곱 번째의 낯선 목소리에, 대표자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소리 없이 열린 회의장 문, 그리고 그들의 앞에 당당히 선 한 사내.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전에 자료를 통해 본 적 있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전 당신들이랑 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요."

"랜드필의 선생...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번 일의 원인보다 제 처우를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제가 여기에 어떻게 온 것인지 보다는 어째서 온 것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딸깍, 부우웅...!

선생의 말에 누군가 답변을 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 아카위키는 문답무용으로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검은 막대처럼 생긴 무기는 스위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드러냈다. 형광봉처럼 생긴 그 무기는 아카위키가 최근에 양산에 성공한 광선검, 포톤 소드 mk.2였다.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우리거든? 네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던 간에, 혼자서 여기 있는 다섯을 전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왜 5 대 1이라고 생각하시죠?"

"뭐?"

선생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함께, 길드 마스터가 그의 등 뒤로 걸어갔다. 미지의 힘을 가진 적을 상대하기 위해 배후를 잡고 포위하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게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의 뒤에서 검을 뽑은 길드 마스터가, 이내 그것을 선생의 등이 아닌 아카위키를 향해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4 대 2네요?"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여유로운 선생의 말,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정시우의 태도에 경악한 아카위키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시우...! 이게 무슨 짓이야! 설마 배신한 거냐!"

회의장 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진다. 당장이라도 사납게 달려들 듯이 분노를 분출하는 아카위키를 향해 길드 마스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를 자극해서 일을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마. 그리고 배신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랜드필의 선생이 좀 전에 우리와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거 못 들었어?"

"지금 그 근본 없는 이방인의 편을 드는 거냐? 같은 대표자인 우리들이 아니라?"

"말은 똑바로 하지. 나는 선생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야. 너의 섣부른 행동을 억제하는 거야. 아까부터 우리, 우리, 우리 거리는 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이 곧 모두의 생각이라 여기고 일단 행동하는 거 나쁜 버릇이야. 아직 우리들은 랜드필의 선생을 어떻게 대할 지 결론조차 내리지 않았잖아."

"큭...."

"얼른 칼 다시 집어 넣어, 아카위키. 랜드필의 선생은 내가 초대한 거야."

"초대했다고...?"

"그래. 황금의 왕 빌가메스를 꺾었고, 어쩌면 이후 새로운 도시의 대표자가 될 지 모를 사람이니까."

"누구 마음대로! 내가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행동한다고? 그래,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우,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나랑 다를 게 뭐야! 그 자식을 빌가메스를 대신할 새로운 대표자로 들이겠다고? 우리 네 명이 그 말에 동의할 것 같아?!"

"아, 그거 말인데."

뚜벅, 뚜벅, 뚜벅.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이스타가, 랜드필의 선생과 길드 마스터 시우의 등 뒤로 걸어가 섰다.

"이젠 3 대 3이군."

그 순간 아카위키가 지은 표정은 천연기념물 급이었다.

*

새로운 도시의 대표자가 될 지 모를 사람이라...

'이 새끼, 은근슬쩍 호감작 하는 거 봐라?'

저번에는 내가 어느 정도 힘을 갖고 있는지 떠보려고 정체를 숨긴 채로 정찰을 와서 바인과 아이네랑 몇 번 부딪혀 보고 돌아가더니, 빌가메스가 개털리는 모습을 보고선 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좋다고 확실하게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길드 마스터가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는 것과는 별개로,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가 나에게 칼을 겨누지 않는 것은 분명히 이득이었다.

본래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이니까.

아무리 지혜롭고 현명한 말이라고 해도 가진 것 없는 거지가 하면 헛소리가 되고, 아무리 멍청하고 아둔한 소리라도 힘이 있고 권위 있는 유명한 사람이 하면 그럴 듯한 명언이 되는 것이 현실이니. 내가 아무리 평화롭게 우호적 관계를 맺고 싶다고 호소해도, 저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길드 마스터가 내 편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쳇."

여기서 가장 강한 정시우에, 자신과 전투력이 맞먹을 엘레이스타까지 미지의 힘을 가진 내 편을 들어주니 차마 이 인원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무사할 자신이 없던 것인지 아카위키는 혀를 차며 광선검의 칼날을 납도했다.

"빌가메스의 왕국을 거의 멸망시킨 놈이랑, 대체 뭘 믿고 우호적 관계를 맺겠다는 건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건 빌가메스 쪽이고, 전 어디까지나 맞대응을 했을 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맞대응으로 나라를 반 멸망 시키냐고, 아카위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 그럼 앞으로의 아티피아의 일에 대해 모두 사이 좋게 의논을 시작해 볼까요?"

"...."

"불만 있으면 째려보지 말고 말로 하시죠."

눈깔 확 뽑아버리기 전에.

굳이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추측이 가능할 뒷말을 삼키며,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땅덩어리가 크고 돈이 많은 나라를 반 정도 궤멸 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밝은 미소를 말이다. 나는 테이블에 걸어가, 원래 빌가메스가 쓰던 자리에 앉았다.

"우선 엘드랜드에 대해서 말인데... 잃어버린 전력을 다시 복구하기 전까지는 랜드필에서 엘드랜드를 지켜주기로 협상을 체결했으니 여러분들이 머리를 쥐어 싸맬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만 들으면 자기한테 시비 걸었다가 망하기 직전인 나라를 도와주는 사람 좋은 이야기로 들릴 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엘드랜드는 침식 단계에 이른 능력자들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본래 사십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다 무색하게, 지금 생존한 병력은 불과 일만 여 명에 불과하니까.

이전의 굳건한 병력을 거의 상실하여, 현재 엘드랜드는 털어먹을 것은 많은 데 그걸 지킬 힘이 없어서 사실상 황금고블린인 셈이다. 평소에 빌가메스가 압도적인 자본의 힘으로 폭리에 가까운 강압적인 거래를 일삼았던 만큼,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엘드랜드는 반드시 멸망한다.

엘드랜드가 멸망은 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누비스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지키고자 빌가메스로부터 반 강제적인 수호 조약을 체결 받았다.

녀석도 차마 왕국의 길고 영광스러운 역사가 자신의 대에서 끝나길 바라진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엘드랜드의 강력한 자본의 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역사의 산물이었기에 다시 그 위용을 되찾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이 걸리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속국이 된 셈이니... 녀석은 아마 후대에 역대 급 최악의 암군으로 두고 두고 기억될 거다.

나는 국방력 없는 엘드랜드로부터 보호비라는 이름으로 랜드필 주민들을 위한 지원금을 지속적으로 뜯어낼 수 있게 되고, 빌가메스는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업보의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왕국을 반 멸망시킨 존재들로부터 왕국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 받게 되었으니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아닐?까?

"누구 마음대로 엘드랜드를 그렇게 멋대로 하겠다는 거지?"

아카위키, 또 너냐. 고급스러운 시계의 사이보그 닌자처럼 생겨먹은 저 새끼는 언제 봤다고 자꾸 나한테 시비질이지?

"엘드랜드의 왕인 빌가메스, 당사자랑 저 사이에서 맺은 협약입니다. 그걸 제 3자인 아카위키 씨가 뭐라 하실 자격이 어디 있나요?"

"하, 그래? 그 조약이 정말 빌가메스가 본인의 의지로 수락했다고 할 수 있을까? 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 어떠한 압박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나?"

"결과적으로 그는 당신을 비롯한 자기 왕국을 뜯어 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 운명을 맡기느니, 차라리 배만 부르면 얌전해지는 사자에게 조금씩 제 살점을 던져주기로 결정했죠."

아카위키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덤벼들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정시우의 눈치를 보며 광선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렇게 길드마스터의 중재 하에 회의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우선 엘드랜드를 단숨에 빈사 상태로 밀어 붙임으로서 무력이 증명된 나는 랜드필의 대표로서 기존의 빌가메스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고, 나와 빌가메스 사이에 오고 간 협정에 대해서 다른 대표자들은 일절 관여하지 않기로 언질을 받아 두었다. 거기에 길드 마스터는 나에게 제대로 호의를 사겠다고 작정했는지, 기존에 내게 있던 혐의 및 석방 조건에 대해 재검토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발언을 꺼냈다.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특별 대우에, 기존에 빌가메스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내 편을 들어준 엘레이스타와 적대 관계에 가까웠던 아카위키가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지은 것은 덤이었다.

이상하다. 원래는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능력자를 파견하는 대가로 기술 지원을 받아서 랜드필 주민들의 삶의 질을 올려줄 생각이었는데, 왜 저 미친 사이보그 새끼가 나를 이렇게 적대하게 된 걸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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