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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75화 (220/229)

〈 175화 〉 이건 이제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4)

* * *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카위키는 자신이 느끼는 당혹감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최대한 뻔뻔하게 되물었다.

*

먼지 쌓인 폐공장에서 치뤄진 간이 시험. 결국 에드릭과 에밀, 에닐 쌍둥이는 랜드필의 선생을 바닥의 썩은 페인트로 그려진 원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실패했다. 에드릭은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에밀과 에밀 쌍둥이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 했다. 처음부터 공정하지 못한 조건이었다고,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건 무효라고, 어린애가 떼를 쓰듯 계속 시끄럽게 찡찡거리는 모습에 랜드필의 선생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애초에 '심의'가 필요할 만한 사람이면, 나를 이 원에서 꺼낼 힘도 없겠지.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너희들은 결국 내가 줄 수 있는 '심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 했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지. 그렇기에 너희들에게 자격이 없다는 거다."

자신이 쥐고 싶은 검이 도축용 식칼인지, 의료용 메스인지, 기사의 장검인지 조금도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뭘 쥐어 줄 수 있겠냐고.

"애초에, 너희들의 파티원인 쿠린에게 묻지 않은 시점에서 너희들의 탈락은 예정되어 있었다."

"뭐?"

"너희들은 설마 정말 아무런 무력도 없는 일반인이 골드 등급 모험가들을 상대로 이 작은 원에서 5분을 버티겠다고 말한 줄 알았나?너희들의 파티원인 쿠린은 심의를 갖고 있지. 그걸 얻게 해준 사람이 나고. 누군가에게 심의를 안겨줄 수 있다면, 동시에 나 또한 심의를 다룰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설마 그 정도의 추론을 할 지능도 없나?"

"지금 말 다 했어...!!"

"아직 다 안 했다. 애초에 정말 나를 원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면, 쿠린에게 심의에 대한 정보를 물어봤어야지. 자신들의 별 것 아닌 부족한 실력만 믿고 무작정 나설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한 짓은, 시험을 치루기 전에 공부를 하기는 커녕 교과서 한 번 보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시험 범위를 공부도 안 했으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험에 응한 건지.

"그럼 너희들은 왜 쿠린에게 그것을 묻지 않았을까? 쿠린은 시험에 참가하지 않았으니까? 동료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합격하고 싶어서? 아니, 아니야. 너희들은 '심의'라는 게, 어차피 마법이나 신성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거야. 신성력은 신의 힘이지만 동시에 본연의 것이 아닌 타인에게 빌리는 힘이기에 한계가 있고, 마법에도 마력이 바닥나면 끝이지. '심의'도 분명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근거 없는 추론 때문에 너희들은 나한테 준비도 하지 않고 덤볐지. 그래서 패배했고. 아직도 변명거리가 남았나?"

사람들은 모두가 이성적일 수는 없다. 설령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그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 자의가 아닌 외부의 압박 요소에 의해 어쩔 수 없다며, 아니면 지금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으니 끝을 봐야 한다고, 혹은 머리로는 납득해도 가슴은 인정할 수 없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는 자들.

심의란 마음의 힘. 심의에 있어서 감정의 조절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자신의 손에 든 무기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더라도 그것에 휩쓸리기만 하는 사람은 제 무기의 무게를 주체 못하고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쌍둥이들은 심의를 가질 자격이 없다. 제 감정 하나 어떻게 못하는 이들은,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 힘에 도달할 가능성이 0.1%도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내가 굳이 도울 필요 없다. 애초에 연이 없고, 얻어도 제대로 쓰지 못할 테니.

"너희들이 아무리 납득을 하지 못 한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잠자코 너네 길드마스터한테 호출할 때까지 마음의 준비나 해두라고."

길드 마스터의 이름이 나오자, 당장이라도 부러진 칼날을 내 목에 꽂아 넣을 기세였던 쌍둥이와 말 없이 불만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던 에드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내가 말했잖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무례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그리고 아랫사람이 벌인 일의 잘못은, 윗사람의 책임이지. 데스페라도의 대표라는 사람은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데, 그 길드 소속의 모험가란 것들이 길드 마스터의 일을 돕기는 커녕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다니. 과연 길드 마스터는 너희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까?"

모험가들의 패기는 결국 거기까지였다. 약자 앞에선 분노 조절 장애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날뛰다 강자 앞에선 분노 조절 잘해가 되버리는 놈들 같으니.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아도 길드 마스터는 굉장히 무서웠던 건지, 파티의 리더인 에드릭은 쌍둥이의 뒷목을 붙잡고서 내게 폐를 끼쳐셔 죄송했다는 사과를 남기며 황급히 파티원들과 함께 달아났다.

"그럼, 볼 일이 다 끝나신 것 같으니 다시 원래 목적지인 근방의 안드로이드 A/S 센터로 안내를 시작하겠..."

"아니, 잠깐 기다려. 일단... 카스파. 난 여기서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번화가로 돌아가서 오늘 묶을 숙소를 잡아줄 수 있을까?"

"흠, 알겠다. 선생."

눈 먼 저격수, 카스파가 떠난 후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반, '설마...? 아니겠지?'하는 표정 반인 얼굴을 하고 있던 안드로이드 7호를 폐공장 내부의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7호가 벽을 등지게 한 후 바짓춤을 내렸다. 갑갑한 하의 속에 억눌려 있던 성기가 덜렁, 하는 효과음이 귓속에 들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요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생식기를 꺼내들자, 7호는 자동으로 '밤시중' 모드에 들어갔다.

워터젤이 분비되어 촉촉해진 오나홀에 자지를 푸욱 쑤셔 박은 후, 몸을 가늘게 경련하는 그녀... 아니, 그의 귓가에 나는 속삭였다.

"그 몸뚱이 안에 네가 들어 있다는 걸, 내가 설마 정말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내게 짓눌린, 남자의 정신을 가졌으나 육체는 여자인 이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다시 인식을 시도해주십시..."

"되지도 않는 흉내는 그만 둬. 소용 없다고 했잖아."

그럴 리가 없다고.

"잘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끝까지 시치미를 뗀 다면... 좋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심의'라는 힘을 각성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내 힘은 정확히 따지자면 능력의 각성 같은 거창한 게 아니야. 사람의 마음... 그리고 감정 중에서 '욕망'이라는 분야에 한해서 관여하는 것이 내 힘이야. 사실 이 '심의'란건, 욕망이라는 감정을 통제하는 과정에 의도치 않게 발견한 뜻 밖의 수확이거든."

말도 안 돼. 들켰을 리가 없어. 이건, 이건 그냥 나를 떠보는 거야.

"그리고 나는 단지 타인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자들의 욕망을 느낄 수 있어. 생각을 읽는 것과는 달라.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 지 이해하고 공감할 뿐이지."

아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처음엔 긴가민가 했어. 그냥 인공지능이란 것이 진짜 사람의 생각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잘 만들어진 건가 싶었지. 하지만 이 도시에 도착하고 나니까, 확신이 서더라. 다른 안드로이드들과는 달라. 그것들은 입력된 신호에 맞는 행동을 할 뿐이라서, 욕망이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너는 다르지."

어떻게든 일반적인 안드로이드 보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연기를 했는데, 저런 이해하지도 못할 수단으로 인해서 들킨다고? 이게... 이게 말이 돼?

"너에게선 분명히 욕망이 느껴져. 그게 바로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안드로이드들에게 탑재 된 인공지능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의식이라는 증거야."

"저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최신형 안드로이드입니다. 그렇기에 기존에 있던 안드로이드들보다 더 좋은 성능의 인공지능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야. 달라. 욕망이란 감정은, 무언가를 원한다는 마음은,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꼈을 때 생겨나는 거야.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엔 자신만의 생각이 없기에, 욕망 또한 존재하지 않아. 뭐, 물론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며 학습하며 인공지능이 진화를 거치다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갖고 사람처럼 욕망을 느끼게 될 수도 있지만... 네 말에 따르면, 넌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지. 그런 네가 마음 속에 욕망을 품고 있다니, 앞뒤가 맞지 않아."

아카위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님을 들켰다고 해도, 그 안에 든 사람이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인 아카위키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

"제 머릿속에 든 것이 인공 지능이 아니라면, 제가 누구라는 뜻입니까?"

"네가 쓰는 안드로이드 몸뚱아리는 아카위키가 보낸 것이지."

"그 정도는 누구나 조작할 수 있습니다. 되려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님을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그 분을 견제하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팔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들이 메타버스 시티에 도착하자 마자, 시큐리티들이 우리를 포위했지.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신고를 받아서 출동했다고 말했지. 하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이 한 신고 한 건 때문에, 시큐리티 열 다섯이 중무장을 한 채로 나를 위협한다? 그렇다면 그 신고를 한 당사자는, 사실상 치안 유지관인 시큐리티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며 그 자는 어떠한 목적으로 나를 잠시 붙잡아 두려고 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안드로이드를 수리하러 메타버스 시티로 향한 것은 오늘 결정한 일이고, 다른 이들에겐 알리지 않았어. 그래. 내부의 누군가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

"누군가 주인님의 얼굴을 알아보고, 거짓 신고를 넣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다른 도시의 대표자들을 깎아내리면서 자신들의 도시의 대표자를 치켜세우고자 하는 섣부른 충성심 때문에 말이죠."

"자랑은 아니지만, 랜드필에서 내 이름과 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내 얼굴을 외우진 않았어. 내가 거의 대부분을 랜드필에서 보내고 있음에도 말이야. 그런데 내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도시의 사람 중 누군가가, 랜드필 사람들도 전부 외우지 못한 내 얼굴을 알아보고 골탕 먹이려고 거짓 신고를 했다? 거짓말은 좀 더 생각하고 내뱉는 게 어때?"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결국 본론은 지금 그 기계 몸 안에 들어 있는 건 안드로이드에 탑재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메타버스 시티의 치안 유지 세력인 시큐리티를 제 의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이고 하니, 후보가 딱 하나 있더라고. 내게 이 안드로이드를 보낸 택배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녹음기, 그 안에 녹음된 목소리의 주인. 이제 슬슬 밝힐 때가 되지 않았어? 목적이 내부를 염탐하기 위해서였건,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목적인지는 몰라도 상관 없이. 넌 이미 들켰다고."

수많은 퇴로들이, 차례로 하나씩 막히기 시작한다. 아카위키는 두뇌에 과부화가 올 정도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핑계를 늘여 놓았다.

"도대체, 메타버스 시티의 관리자가 무슨 이유로 이 안드로이드의 몸 안에 있다는 뜻이죠? 게다가 전 주인님의 밤시중도 들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카위키 님은 남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주인님은 스스로 남자를 범했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애초에 난 처음에 그 안에 누가 있었는 지도 몰랐고, 그리고 어쨌든 내가 맛 본 육체는 여성형 안드로이드의 것이었지. 생각이 남자여도, 몸은 여자였다고. 그러니까 그런 궤변으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은 그만 두시지. 네가 왜 그 몸에서 나오지 않고 나를 이 도시까지 데려온 것인지는, 지금부터 네 입을 통해서 들을 생각이니까."

이미 틀렸다. 무슨 변명을 해도 먹히지 않고, 그는 이미 내가 아카위키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래, 전송! 이 근처에 내 의식을 전송할 수 있는 다른 의체가...

"설마 내가 널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

"회의장에서 만났던 아카위키는 사이보그 사무라이인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 안드로이드도 아카위키네? 어느 쪽이든 그게 진짜 육체가 아닐 확률이 높고, 그럼 너는 그 몸을 버리고 다른 몸으로 갈아탈 모종의 수단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뭐든 간에, 아마 지금은 소용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막고 있거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근방의, 접속할 수 있는 온갖 단말에 접속하여 자의식을 그 안으로 전송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가 자꾸 발생했다. 시스템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에서의 개입으로 인한 문제였다.

이것도, 그 '심의'인가 뭔가 하는 힘인가?

푸욱!

"흐긋...?!"

"말했잖아. 도망칠 수 없다고."

다른 단말에 접속하여 자의식을 전송함으로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이미 실패했다. 거기에...

으윽, 배가... 무거워. 몇 번이고 받아냈던 물건인데, 오늘따라 유독 안에 있는 그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져. 싫어, 싫다고... 난 남자야. 여자가 남자의 자지를 삽입 당했을 때의 감각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어. 섹스할 때 여자가 느낄 쾌감 따위, 직접 경험하고 싶은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고...!

"흐극, 하아악...!! 흐힛...!♥"

벌어진 입 사이로 신음이 절로 튀어나온다. 처음엔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는데, '이미 전부 들켰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참고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몸은 인간을 기본 베이스로 하여 신체의 일부를 의체로 교체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순수하고 금속으로만 구성된 전신 의체다. 그리고 전신 의체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생명 유지 활동의 대부분을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몸에 피가 흘러야 하고, 피가 흐르기 위해선 심장이 뛰어야 하며, 심장이 뛰기 위해선 입으로 호흡을 해야 한다.

하지만 기계의 몸은 그저 에너지를 공급하기만 하면 끝이기에,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거의 대다수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호흡이라는 생명 유지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피가 흐르거나 심장이 뛰지 않는 몸이기에 호흡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입을 꾹 닫고 있으면 이 인간이 좋아할 신음을 낼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일이란 건 그렇게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비록 피가 흐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할 심장이 없으며, 반드시 숨을 들이쉬고 내실 필요가 없는 몸이라고 해도, 그 안에 든 정신은 인간의 것이다. 이미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숨을 쉬며 살아온 그 정신은, 호흡을 할 필요가 없는 몸을 얻었음에도 기존의 습관을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숨을 쉴 필요가 없어도, 저도 모르게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릴 때마다 거센 호흡 대신.

"하아아아앙!!♥"

달콤하게 녹아든 암컷의 교성이 울려 퍼졌다.

"시, 싫어... 이거, 놔..! 놓으라고!! 나, 난 남자야! 남자란 말이야!!"

비록 지금은 성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지만, 유기물로 이루어진 몸을 갖고 있었을 때 아카위키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였다. 호흡을 할 필요가 없는 몸이 되었어도 여전히 숨을 쉬는 것처럼,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된 지금도 아카위키는 자기 자신을 '남자'로 규정하고 인식했다.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육신은 잃은 지 오래였기에,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끝 없이 자신은 남자라고 되뇌였다.

"남자라고? 네가?"

그가 입가에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띄운다. 실제로 몸을 더듬거리는 듯한 끈적한 시선이 몸을 흩자,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혐오감과 함께...

"어딜 봐서?"

"윽...!!"

하복부에 강렬한 쾌감이 내리 꽂혔다.

"하, 으흑...!"

난, 남자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란 말이야. 그러니까 남자의 자지를 보며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하반신이 젖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자궁에 자지가 박히며 헥헥거리지 않으며, 남자와 섹스하면서 쾌감 따위 느끼지도 않아. 난 여자가 아니라 남자니까.

"네가 아무리 주장해도 말이지... 남자한테는 이런 찹살떡처럼 부드러운 젖가슴도."

"흣...!"

"움직일 때 마다 꼬옥 꼬옥 조여오는 쫄깃한 보지도."

"학, 흐윽...!!"

"그리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간드러지는 신음을 내지르는 이 듣기 좋은 미성도 없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 보면, 넌 아무리 봐도 여자잖아?"

"나, 난 남자야..! 남자라고! 여자가 아니란, 흐읏, 말이야아...!!"

"그거 알아?"

상처 입은 먹잇감을 궁지에 몰아 넣은 굶주린 짐승이,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지금 네 모습은 누가 봐도 쾌감에 허덕이는 한 마리의 암컷일 뿐이야. 그렇지 않아?"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어딘가로 향한다. 뭐지? 뭘 보는 거지? 거기에 뭐가 있...

"...아."

검푸른 머리카락. 등에 맨 창. 여자치곤 꽤 큰 키.

'해신의 창'이라 불리는 모험가, 츠나세 쿠린.

왜... 네가 여기에...? 아까 전에 동료들과 함께 떠났던 게...

"놔... 놔줘. 이, 이거 놔...!"

"쉬잇, 가만히 있어야지. 자, 쿠린. 네가 보기엔 어때? 네 눈에는... 이게 남자로 보여, 아니면 여자로 보여?"

이 남자가 나를 여자라고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제 3자가 나를 여자로 보는 것은, 어째선지 부정할 수 없었다. 셋 중에서 둘이 A라고 말한다면, 설령 적혀 있는 것이 B라고 해도 A가 되는 법이니까.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게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그가 질문하지 못 하게 입을 막고 싶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막을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입 뿐이었다.

"여자... 에요."

그래서 다행이었다. 남자라는 사실을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내 안의 무언가가 산산조각나며 깊숙이 침몰하는 느낌, 그리고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에서 뇌를 꺼내 으깨버리는 듯한 강렬한 충격과, 마치 마약을 혈관에 그대로 들이붓은 것만 같은 어질어질한 쾌감이 동시에 머릿속을 깨부수고... 그 빈 공간을, 아득한 충만감이 가득 채운다.

난... 남자...

....였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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