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83화 (228/229)

〈 183화 〉 무적기다, 애송아!!(4)

* * *

모험가 길드 지하 2층. 지하 1층인 카지노의 존재를 아는 골드 등급 이상의 베테랑 모험가들이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아는, 그리고 모험가들이 죽는 것 다음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 이방인들을 모험가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계의 주민들로 바꾸고 그들을 지키려고 하는 길드 마스터가 굳이 그러한 장소를 만든 것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당근과 채찍. 각기 다른 세계에서 넘어 왔기에 그만큼 이방인들은 각자 개성이 넘쳤고, 그런 그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관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단순히 보상(당근)만으로 그들을 통제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공포(채찍)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왕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누군가 벌을 내려야만 했다면, 하다못해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자신의 사람이 타인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끝내주겠다는... 그런 다소 어려운 심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지하 2층의 징벌방에는 길드 소속이 아닌 사내가 한 명 갇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크. 성은 따로 없고 별로 급이 높지도 않은 하급 여신의 작은 세계에서 살던, 아티피아의 기준에서는 크게 특출나다고 하기 어려운 전투력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 버려진 도시 랜드필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난동을 피웠고, 랜드필의 대표자인 아마게돈 선생이 직접 나서서 그를 제압했다. 그런 그가 모험가 길드의 지하에 있는 이유는, 길드 마스터 정시우가 랜드필의 선생에게서 그의 신병을 양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랜드필의 선생은 이 녀석이 그냥 유스티아가 보낸 버림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야. 가호는 몇 개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권능은 갖고 있지 않은 탓인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내 입장에선 정말 다행이군."

신에게 선택 받은 자들, 그들에게서 그 힘을 권능과 가호라는 형태로 빌려 쓰는 이들. 그들은 신의 힘을 빌려 쓰기에, 자신과 같은 힘을 쓰는 자를 느낄 수 있다. 상대가 어떤 성향의 신에게서 힘을 받았는지, 자신보다 더 강한 권능과 가호를 가지고 있을 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신에게 사랑을 받는 만큼 상당히 강한 권능과 가호를 받고 있는 정시우의 눈에, 루크가 가진 권능과 가호는 그저 버림말로 쓰일 만한 자가 가질 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루크가 정말로 버림말이었다면, 그의 몸을 보호하는 가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가호는 소유자의 의사와 상관 없이 발동하지만, 그것은 결국 신에게서 빌려온 힘이며 가호를 유지하는 것은 신의 마음. 신이 그 자를 포기했다면, 당연히 그 가호를 다시 거두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가 완벽하게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그를 보호하는 가호는 남아 있었고, 그것은 유스티아가 그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정시우가 랜드필의 선생에게서 루크의 신병을 양도 받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였다. 루크는, 체스말로 치자면 나이트에 해당했다. 룩이나 비숍처럼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는 없지만, 읽기 어려운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변수를 창출하는 게임말. 나이트의 존재가 체스 판에서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하기에, 유스티아의 나이트인 루크를 조사함으로서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셈이었다. 앞으로 유스티아를 대할 행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대체 왜 혼돈의 신과 그의 사도들에게 그토록 증오심을 품고 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정시우는 '천운'을 비롯한 행운 계열 권능과 가호들의 조합으로 상대의 정보를 강제로 열람했다. 랜드필의 선생에겐 통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그건 굉장히 특별한 예외로 쳐야만 했다. 선천적 초월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긴 세월을 살아온 그 '옛 신'이 직접 나섰다면 그 힘을 파헤치는 것은 같은 옛 신의 사도가 아닌 이상은 불가능하니까. 유스티아는 비교적 경력이 짧은 후천적 초월자임에도 상당히 그 힘과 격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결국 옛 신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기에 행운의 여신 티케의 권능과 가호의 시너지 만으로 충분히 그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시우는 루크의 상태창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어디, 우선은 가호부터... [역경극복], 상대와의 격차가 클 수록 전투 능력에 보정을 받으며 승리하였을 경우 대폭 성장한다... 뭐야, 이거 용사 전용 스킬이잖아? 이걸 갖고 있다는 건... 이 녀석, 용사 출신이었어? 아니 잠깐, 그보다 이건 또 뭐야? [갈라진 그릇]...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초월자들이 주는 권능과 가호를 한 번에 쓸 수 있다고? 거기다가 권능들도... 와, 랜드필의 선생은 이런 엄청난 능력들을 둘둘 두르고 있는 전 용사 출신의 이 이방인을 어떻게 이긴 거야?"

정시우가 루크와 라그나 아마게돈이 싸우던 장소에 도착한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우연히 운 좋게' 조우하게 된 것이었기에, 그는 라그나 아마게돈이 어떻게 전투를 하는 지 확인하지 못 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미 처참하게 패배한 상태였던 루크와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던 라그나 아마게돈 뿐이었으니까.

"...으윽."

"뭐야, 벌써 의식을 되찾았..."

"아, 아아아아악!!"

"...이거 왜 이래?"

정시우는 눈을 뜨자마자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발작하는 루크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여신의 힘을 활용한 정보 열람은 다소 강제적인 수단이다보니 상대에게 어느 정도 두통이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미쳐 날뛸 정도는 아닐 텐데... 그 순간, 정시우는 루크의 상태창에 새로운 글자가 천천히 새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가호에 [눈 먼 정의], 권능에는 [집행의 검]과 [죄의 저울]이라는 문구가 더해졌다. 그와 동시에, 고통을 호소하던 루크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온몸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진 주홍빛 기운이, 우선 그의 머리로 향한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신의 힘이 손의 형상이 되어, 마치 눈가리개라도 되듯이 인간의 두 눈을 감싸 시야를 가렸다.

"아, 눈이... 앞이, 앞이 보이지 않아아아..."

[너의 두 눈을 가려라. 이는 눈앞의 광경에 휩쓸리지 않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기 위함이니.]

그리고 들려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는, 정시우에겐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유스티아...?! 젠장, 설마 진짜 목적은 나였나?"

이윽고 신의 힘은 인간의 왼쪽 손으로 향했고, 무게를 재는 저울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저울과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 저울은 어느 쪽에도 추가 올려져 있지 않았지만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저울을 들어 죄의 무게를 재라. 세상에 죄가 없는 이는 존재하지 않으니, 저울은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 기울 것이리라.]

그건 또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정시우는 오랜 만에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참으며, 행운의 여신 티케의 권능과 가호를 끌어내어 갑작스러운 전투를 준비했다. 이윽고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사로 잡힌 인간의 반대쪽 오른손에, 주홍색 빛 무리가 모여들며 한 자루의 황금빛 검이 되었다.

[검을 들어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라. 너의 검은 오직 죄가 있는 이들만을 벨 것이고 죄 없는 이들에겐 상처를 입히지 않을 지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두려워 말라.]

정시우는 진심으로 유스티아의 궤변에 반박하고 싶어졌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눈을 가려버리면, 그저 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야 진정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릴 턱이 없었다. 그리고 왼손에 든 저 기울어진 저울. 저울이란 무게를 재기 위한 물건인 만큼, 비어 있다면 반드시 수평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 밖에 기울어질 수 밖에 없는 저 저울로, 무언가의 무게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저 칼. 죄가 없는 이들만을 벨 것이라고? 그것도 조금 전에 저울에 대해 말할 때 '세상에 죄가 없는 이는 존재하지 않다'라고 말해 놓고서? 저 칼에 진짜로 죄가 있는 사람만 베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그냥 저 칼의 성능이 엄청나며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 혹시 자신이 실수하지 않을까 주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속이고 있다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네. 사도 급이라면 몰라도, 화신 급은 나도 익숙하지 않은데...."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이들은, 크게 다섯으로 구분한다.

힘을 다룰 수는 없지만, 그것을 느낄 수는 있는 신도.

힘을 미약하게나마 다루며, 신도들에게 신의 뜻을 알리는 사제.

힘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사제들을 가르치는 주교.

신에게 상당한 힘과 축복을 받아, 그것을 오로지 신의 뜻을 위해 사용하는 사도.

그리고 그 위. 자신의 몸을 그릇 삼아, 그 안에 신의 존재를 일부나마 담은 화신.

현재 루크의 몸은 정의의 여신의 화신이었다. 그 육신은 루크의 것이나, 그것을 다루는 자는 정의의 여신인 것이다.

[아둔한 여자의 치마 폭에 파묻힌 아이야, 네가 그 옛 신의 사도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진정 모를 줄 알았더냐? 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시켜 힘들게 가두어 두었거늘, 너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것을 다시 세상 밖에 꺼내었지. 그래서 내 너를 직접 처리하기 위해, 이 녀석을 보내었지. 그리고 너는 악신의 사도를 너의 아군으로 회유하고자, 그리고 나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이 인간을 가장 비좁고 은밀한 공간으로 끌어 들였지. 그것이 내가 안배한 함정인 줄도 모르고 말이지.]

정의의 여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시우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라그나 아마게돈의 힘에 관심을 보인 것.

그를 아군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잠시 감시가 소홀해진 때를 노려 어설픈 변명거리를 만들며 그를 밖으로 꺼낸 것.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여신을 배제하기 위해, 그녀의 사도로 보이는 자를 심문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올 것까지.

[제 아무리 영리하여도, 그래봤자 한낯 필멸자가 감히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지금은 너를 구해줄 그 아둔한 여자도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그 악신을 뿌리부터 완전히 뽑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는 곧 벌어질 성전(?戰)에서, 나의 대군을 이끌 선봉이 되어 주어야겠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되찾기 위해서, 그 아둔한 여자도 나를 도와 악신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겠지.]

한 마디로 말해서, 반 시체로 만든 후에 자신의 권능으로 멋대로 주물러서 꼭두각시로 삼겠다는 소리였다. 지금의 루크처럼. 정시우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 뭔가 한 가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소리지?]

"설마, 내가 여신의 행운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정시우의 주변으로, 강력한 힘이 모여들었다.

"성공에는 반드시 행운이 필요하지. 하지만, 행운만 있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야. 오직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얻는 거야.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은 성공을 거쳐 왔거든?"

그의 등 뒤로 열 개의 원형의 마법진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정시우가 가진 힘의 근원이자 근본. 그리고 그를 이곳에 있게 만들어준 기술.

"인연 소환 ­ 10 연차."

열 개의 마법진이 빛을 내뿜으며, 다섯 가지의 무구와 다섯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유스티아의 화신이 갑작스레 나타난 다섯 사람들의 존재에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정시우는 방금 전의 그 마법으로 소환한 다섯 무구... 오토매틱 테크니컬 쉴드와 성검 X­칼리버, 하늘을 떨구는 활, 명계의 투구와 불사자의 갑옷 등을 하나 하나 차례대로 장비하고 있었다. 그 무구들은 하나, 하나가 유스티아의 화신이 가진 [심판의 검]에 전혀 꿀리지 않는, 신의 권능에 전혀 부족하지 않는 보구. 그 물건 하나를 갖기 위해, 과거 다른 세계에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릴 정도였다.

무구들의 진가를 알아본 유스티아의 화신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들이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 악신의 사도를 감옥에서 빼낸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행운의 여신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끈 후에 그녀가 가장 아끼는 인간을 쓰러트리고 회수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겠다는 계획은... 아쉽게도 문제의 그 인간이 가진 전투력은 화신인 지금의 상태로도 감히 승기를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연 소환. 나의 행동으로 인해 향후 나와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한 이들, 그리고 내가 손을 거쳤던 보구들. 나와 인연이 닿아 있으며, 내게 도움이 되는 것들. 그 수 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를, 내가 있는 이곳에 불러내는 나만의 고유 마술이다. 물론 정확히 어떤 것을 소환할 것인지 명확히 정해두면 시전 속도와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한 탓에 어떤 동료와 무기가 소환될 것인지는 완전 랜덤이긴 한데... 알다시피, 내가 누구에게 사랑 받고 있는 지는 유스티아 당신도 알고 있겠지?"

행운의 여신에게 사랑 받는 남자에게 있어서, 운빨이 강하게 작용되는 기술은 단지 성공률이 낮은 도박이 아닌, 자신이 일일히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불러낼 수 있는 편리한 수단.

심지어 그가 불러낸 이들은,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붉은 말을 탄 장군 려봉,화염의 뱀파이어 프투가, 불굴의사무라이 야마다, 백발백중의 저격수 크레이그, 전투 성녀 다르크까지.

개인으로서의 전투력은 충분히 우수한, 각기 다른 세계의 다섯 인연이 그의 부름에 응하여 이곳에 나타났다.

"랜드필의 선생, 그가 한 말이 맞았군."

[뭐라고...? 설마, 그 악신의 사도가 나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는 건가!]

"아니.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거든."

한 때 자신의 세상을 구할 당시에 썼던 애병, 성검을 양손으로 고쳐쥐며 정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루크. 그 이방인을 포함한 계획은, 뭐가 되었든 간에 실패한다고. 그 말이 맞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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