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님들 저 도시 운영 이번이 처음인데 이거 좋은 건가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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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슐렌 왕비. 그녀는 지저도시 샴발론의 왕 의 왕비이며 아름다운 공주 앨리스의 어머니이자 국민들에게 사랑 받는 존경 받는 아주 훌륭한 여인이다. 그런데 그 여인이, 설마 연락도 없이 이 랜드필에 딸과 사위를 동행하여 여행을 온 걸로도 모자라 그 사위가 될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샴발론 왕과 그의 부인은 금슬이 좋기로 소문이 났었는데, 그게 사실 다 이미지 메이킹에 불과했다는 말이 퍼질 것이다. 정말로 부부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배우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왕비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연하의 남성과 눈이 맞을 리가 없지 않냐는 변명하기 힘든 추문이 나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약혼자와 어머니가 그런 사이였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런 남자와 약혼했던 공주의 혼삿길 또한 자연스럽게 막힐 것이다.
내 도시라고 해서 피해가 전혀 없지도 않다. 그런 일의 원인이 이제 막 새로 태어난 내 도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지면, 내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게 될까? 장모가 자기 사위랑 눈맞아서 불륜 여행이나 다니는 도시라는 인식이 박힐 테고, 그 인식을 고치는 데에 엄청난 시간과 예산을 낭비할 수 밖에 없겠지. 그러므로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최대한 적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아주 조용하고 은밀히 처리해야만 한다.
다행히 에슐렌 왕비가 이 여행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던 덕에 샴발론 왕의 왕비가 이 도시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평소에 입지 않는 복장과 머리 색을 바꾸는 약으로 변장을 한 영향도 있기야 하지만.
랜드필 주민들 중에 샴발론 출신이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여왕이 모습을 바꾼 채 나타난 모습을 보고 주저 없이 나와 내 사람들에게 보고를 올렸고, 그 덕에 이렇게 문제를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중에 그 주민에겐 상이라도 내려야겠다. 아무튼, 저 간통범들을 어떻게 해야한담?
"선생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 남자를 살인 멸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 나도 알아.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왕의 사위가 낯선 도시에서 행방이 묘연해진다면, 샴발론 왕의 진노가 우리 쪽을 향할 테니까. 랜드필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상황이고, 다른 도시와 전쟁을 할 정도의 여력은 없어. 지금은 몸을 사리며 힘을 길러야 할 타이밍이니, 문제를 키워선 안 돼."
물론 마음 같아선 저 라스 경인가 뭔가 하는 미친 새끼를 그대로 반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다. 보아하니 공주도 굉장히 예쁜 것 같은데, 뭐가 아쉽다고 그 공주의 어머니랑 바람을 피워? 물론 그 어머니라는 왕비도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한 미모를 자랑하기는 하지만, 공주의 어머니랑 그런 관계가 되면 공주랑은 어떻게 하려...
"선생님, 제 말씀은... 최악의 경우 살인 멸구를 시도한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습니다."
"뭐?"
나는 도성운의 자신 없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도성운이 누구인가? 내가 이 랜드필의 조직들을 통합하기 전, 랜드필이 다섯 개의 큰 조직들에 의해 분할되어 운영되고 있을 때 가장 무력이 강한 조직의 수장을 맡았던 사내다. 이 랜드필에서 아무런 능력 없이 순수한 전투 실력으로 치자면, 따라올 이가 없는 출중한 무인이고. 그런 본인의 실력에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했던 도성운이, 이렇게 자신 없는 말을 내뱉는다고?
"샴발론 왕의 사위, 라스. 그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자 모험가 출신으로, 샴발론에 큰 골칫거리였던 거대한 괴물 '그랜드래곤'을 토벌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랜드래곤... 드래곤? 그러니까, 저 난봉꾼 새끼가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드래곤이 어떤 생물인가. 어떤 작품이던 간에, 항상 최강의 반열에 든 무적에 가까운 괴물들이 아니던가? 마법의 시초라던가, 신을 죽였다던가, 이지를 가진 자연재해라던가, 온갖 묘사가 나돌 정도로 드래곤이 최강의 생물이라는 것은 어느 곳에서든 공식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루미너스의 연극에서 최종 보스의 역할을 했던 것도 불멸의 용, 그러니까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루미너스라는 하급 여신이 창조한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대해 왔던 적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적이었고. 그 불멸의 용을 본격적으로 덤빈다고 하면 지금의 나라고 해도 홀로 상대하는 것은 제법 벅찰 지경인데,그런데 저 제비족 샌님 같은 새끼가 그런 드래곤을 혼자서 죽인 적이 있다고?
"그랜드래곤은 플레티넘 등급 모험가, 그러니까 메타버스 시티의 전투력 측정 기준 S 급에 달하는 강력한 사람이 최소 열 명 이상은 달라 붙어야 간신히 상대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라스라는 사내는 홀로 그 그랜드래곤의 목을 베어 돌아옴으로서, 샴발론의 왕에게서 공주와의 약혼을 약속 받은 실력 있는 전사입니다. 물론 선생님이 저희에게 주신 힘은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자를 이길 수 있을 지는 저도 확답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허...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나보네. 그래, 혼자서 드래곤을 잡아 죽일 정도는 되니까 공주와 약혼한 상태에서 그 공주의 엄마를 탐하는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거지? 근데 그 미친 짓을 벌일 거라면 여기 말고 다른 도시에서 하지 그랬냐? 하필이면 이제 막 대도시 중 하나로 인정 받아서 그 힘이 미약한 내 도시를,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방패로 삼아?
"그럼 무력을 쓰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데... 좋은 생각 있는 사람?"
내 물음에도 불구하고 간부진이 모인 회의실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도시가 기껏 완공되자마자, 타국의 왕비가 자신의 사위랑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초대형 스캔들이었으니까.
"저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새끼 처리할 괜찮은 방법 아는 사람, 진짜 없어?"
왜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묘한 시선으로 흘깃 쳐다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부들 사이에서도 이 상황에 대한 마땅한 대처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은 의견이 있었다면, 진즉에 꺼냈을 테니까.
"정말 아무도 좋은 생각 없어? 어차피 사건이 터질 거면, 도시의 이미지가 그딴 식으로 씹창나는 것보단 차라리 다른 도시랑 아예 맞짱 뜨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으니 당장 저 난봉꾼 새끼 찾아가서 남자 구실을 아예 못 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강렬한데, 진짜로 아무도 괜찮은 다른 의견 없어?"
누가 제대로 된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개판이 나던 말던 그냥 물리적인 방법으로 정리하겠다는 협박성이 다소 짙은 내 발언에, 간부들은 다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특히 비전투 계열 쪽이 더더욱.
"...아! 방법이 하나 있네요!"
"그래? 그 방법이란 게 뭐지, 양마담?"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샴발론 왕의 사위인 이방인 라스가 장모인 에슐렌 왕비를 꼬신 것으로 인해 생겨날 추문 때문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문제의 원인인 이방인 라스는 이미 예쁜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까지 취해 오야코동을 노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선생님 못지 않게 색을 많이 밝히는 사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요."
"거, 아까부터 너네들 하는 짓이 심상치 않다? 묘하게 내게 방탕하다고 비난하는 것 같은데?"
"그,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가리."
부정은 안 한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상사를 팩트로 때리는 것은 용납 못 한다.
"그러니까 양마담이 하고 싶은 말은, 저 미래의 가정 파괴범에게 미인계를 써보자는 거지?"
나쁜 의견은 아니다. 아니, 정말로 저 라스라는 놈이 영웅호색이라는 말에 걸맞게 색을 매우 밝히는 녀석이라면, 미인계에 아주 취약할 것이다. 다만 양마담 쪽 애들이 아무리 예뻐도 엘리시아 공주나 에슐렌 왕비에 비비기에는 좀 부족하다.
물론 양마담에 아가씨들이 저 둘을 상대로 외모에서 밀린다는 뜻은 아니고,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분위기의 차이라고 해야 하려나? 공주와 왕비가 풍기는 고풍스러움과 서큐버스의 몸에서 진동하는 문란함은 그 방향성이 정 반대이고, 저 라스라는 놈이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를 함락함으로서 만족감을 느끼는 부류라면 정조의 허들이 매우 낮아서 조금만 유혹해도 쉽게 넘어올 여자에게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젠장, 진짜 누구 마땅한 아이디어 없어? 이게 최선이야? 미친 소리라도 좋으니까, 일단은 뭐라도 의견을 내 보...."
"아. 선생님."
"오, 그래. 뭔데?"
"저, 아이디어는 아니고... 지금 주요 관심 대상이..."
에스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흐렸고,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려 화면을 본 나는... 직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저것들 지금 뭐하는 거야?
"애들아, 나 잠깐 갔다온다."
"선생님..."
"시발, 말리지 마."
최고 충신 에스크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그 자가 죽지만 않게 해주십쇼."
나는 그의 부탁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으니까.
*
용살자 라스. 지저 도시의 골칫거리이자 위협적인 재앙인 지룡 그랜드래곤을 홀로 토벌하며 그 공으로 엘리시아 공주의 사위가 된 남자. 또한 엘리시아 공주가 샴발론 왕의 외동딸이며, 그녀에게 왕권을 둔 싸움을 벌일 다른 경쟁자가 없다는 것은 곧 그녀와 결혼할 남자가 이후 샴발론의 왕이 된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용을 토벌하여, 공주와 결혼하고 왕위를 잇는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클리셰 덩어리. 그러나 클리셰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잘 먹힌다는 뜻이다.
그래, 그것에서 그쳤다면 클리셰에 따라 '두 사람은 결혼하여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해피 엔딩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라스의 욕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론 엘리시아 공주는 매우 매력적인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이자 현 국왕의 유일한 아내인 에슐렌 왕비 또한 라스가 보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라스는 용을 죽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공주와 차기 왕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내였고, 그녀의 어머니까지 갖고 싶어 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젊음과 매력을 그녀에게 어필했고, 에슐렌 왕비 또한 그의 '개연성'으로 인해 점차 그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흔들림에 정점을 찍기 위한 것이, 바로 이번 랜드필 여행이었다.
본래 일곱 대도시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컸던 엘드랜드를 속국으로 삼아, 새롭게 대도시로 부상한 랜드필. 불과 몇 주 전에 도시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끝나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기 시작한 도시. 랜드필은 지리상 굉장히 외각에 위치해 있으며 지저도시 샴발론과의 거리가 아주 멀었다. 즉, 이 도시에서 어떤 추문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이 샴발론에 도달하기 전까진 꽤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라스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 새롭게 단장된 도시에서 에슐렌 왕비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 잡을 계획을 세웠다.
혹시 샴발론 쪽의 눈이 따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에 방문하겠다는 전언을 미리 보내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에슐렌 왕비와 엘리시아 공주에겐 '평민의 입장으로서 도시를 지켜보기 위함'이라고 변명하였다. 여행 스케줄은 표면적으로 공주와 혼인 전 짧은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 중간에 왕비를 공략하기 위한 빈 시간을 빠짐 없이 넣었다. 딸이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 젊고 매력적인 사위에게 추파를 받는, 평생을 올바르게 살아온 왕비에게 무척 배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연출한다.
왕비도 라스에게 아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라스는 그 미세한 틈을 집요하게 노리며 점차 그 틈새를 벌려 나갔다. 그 덕에 현재 그의 장모님은 사위에게 젖가슴을 주물러 지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었다. 앞으로 조금이면, 그녀를 침대에서 안을 수도 있을 상황. 그러나 그녀는 사위의 일탈은 눈 감아 주어도, 사위와 관계를 맺는 것은 아직 거부하고 있었다. 라스는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선, 그 흔들리는 마음을 확고하게 넘어트리기 위한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흠?"
"어머?"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마침 적당한 목표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못 보시던 분들인데, 관광객분들이신가요? 정말 잘 어울리는 선남 선녀들이군요. 부디 이 랜드필에서 즐거운 추억을 잔뜩 쌓고 가시길 바래요."
거리를 걷다 마주친 상대가 건넨 말들은 다른 어떠한 불순한 의도 하나 숨겨져 있지 않는, 순수하게 그들의 여행을 축복하는 마음 넓은 현지인의 상냥한 인사였다. 그러나 라스는 용을 죽인 검의 검집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왜냐하면 상대는 아무리 보아도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의류 용품 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본 딴 인형과 같았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성인 체형의 여성형 마네킹이었다. 다만 유리 너머로 옷을 입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마네킹과 달리, 눈앞의 존재는 마치 진짜 사람처럼 움직이며 말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말을 할 입이 없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없는 것은 입 뿐만이 아니었다. 눈과 코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얼굴 부분이 무언가로 파내진 듯 음푹 파여 있었다.
"이런, 곤란하네요. 보시다시피 오늘의 저는 싸울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만약 제가 불쾌하게 느껴지셨다면 이대로 물러날 테니, 부디 분노를 거둬주시지 않으시겠나요?"
장미 넝쿨을 엮어 만든, 날카로운 가시와 붉은 장미 꽃으로 장식된 100% 자연산 드레스를 입은 그 여성형 마네킹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는 듯 빈 손을 보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라스는 여전히 검집에서 손을 내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조금 불쾌하고 기이하긴 해도 특별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외형과 달리 긴 역사를 가진 황금의 왕국을 반나절만에 궤멸시킨, 이 랜드필의 주인이 된 '선생'이라 불리는 사내가 부리던 일곱 괴물 중 하나였으니까.
마치 부잣집 아가씨를 흉내내는 듯한 어설프게 고풍스러운 말투, 표정이라는 것을 볼 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기에 실제로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섬뜩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기이한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예쁘다'라는 인식하게 되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목구가 있어야 할 부위가 음푹 패여 있기에 정확히 어떤 부분이 어떻기에 예쁘다고 인식하는 것인지 명확히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그저 '예쁘다'고 인식할 수 밖에 없는 기이한 현상. 용의 환각 마법에도 제 정신을 유지했던 라스는 자신이 저런 제대로 된 무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존재의 정신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래. 겉으론 특별히 강해 보이지 않더라도, 애시당초 상대는 가장 거대한 대도시를 멸망으로 몰아간 괴물 중 하나이며 어떤 무시무시한 힘과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얼굴이 없는 데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쁘다'는 인식을 심게 만드는 이 정체 불명의 힘 또한, 저 괴물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의 편린 중 하나일 지도 모르지.
비록 타국의 도시에서 멋대로 검을 뽑으며 칼부림을 저지르는 것은 지탄 받아 마땅할 일이지만, 지룡을 쓰러트린 드래곤 슬레이어가 엘드랜드를 멸망시킨 괴물 중 하나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그것을 베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언제 자신들에게 향해질 지 모를 무시무시한 존재 중 하나를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제거하였다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라스의 뒤에 서 있던 에실리아 공주와 에슐린 왕비도 저 괴물에게 그리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란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인식해야 하며, 가장 먼저 접하는 정보가 시각이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인간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괴물의 모습은, 호의보다는 적의와 혐오감을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저 괴물이 사소한 말 실수를 하나라도 내뱉는 순간, 그것을 명분 삼아 저것을 베어 죽이고 '자신은 왕비와 공주를 미지의 위협에서 지켜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라는 말로 행동에 명분을 더하며 동시에 두 여인으로부터 점수를 얻는다.
용을 죽인 용사를 세뇌하려던 괴물을 베어 죽이고, 왕비와 공주를 위험으로부터 구했다. 그것이 라스의 계획한 시나리오였다.
"이봐요,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 괴물의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괴물의 등장은, 라스가 지금 막 세운 시나리오에는 물론 없었던 일이었다.
이 쪽은, 앞의 저 기괴한 여성형 마네킹에 비하면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인간을 흉내 내며 저도 모르게 '예쁘다'고 인식시킴으로서 되려 모종의 괴리감과 불쾌함 만을 느끼게 하는 이상한 괴물과 달리, 이쪽은 정말로 인간에 아주 가까운 생김새였다. 양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감추고,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양털 코트를 입어 자신의 속살을 완벽하게 감춘 귀부인. 그녀는 장미꽃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 괴물에 비하면 훨씬 더 고상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라스를 향한 적의를 숨김 없이 드러내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타인에게 호의를 삼기 힘든 모습이라고 한들,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위. 그러니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어서 그 무기를 내려 놓으시죠. 저희는 당신과 싸울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이, 그 위험한 물건을 저희에게 휘두르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라스는 탄식했다. 상대가 풍기는 특유의 고고한 분위기는, 높으신 분들이 가질 법한 고풍스러움이었다. 만일 상대가 괴물이 아닌 인간이었다면, 그리고 매우 예쁜 여성이었다면 아마 자신의 공략 대상에 반드시 들어갔을 텐데. 상대가 괴물인 것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라스는 이내 그녀를 향해 가시 돋친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럴 듯한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내뱉는 구나, 사람을 흉내 내는 괴물들아. 하지만 일국의 공주와 여왕을 지킬 의무를 지닌 자로서, 이미 자신의 위험성을 증명한 전적이 있던 자들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를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느냐?"
라스는 눈앞의 두 괴물이 한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가는 일에 일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서, 그들을 자극하였다. 물론 황금의 왕국을 궤멸시킨 괴물들의 위험성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일곱 전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 둘 뿐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고 계산을 마쳤다. 실제로 자신은 이미 샴발론이라는, 엘드랜드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큰 도시 하나를 위협하던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홀로 쓰러트린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사람을 흉내 내는 괴물이라, 차마 그냥 넘겨 듣기 힘든 모욕적인 말이군요. 예의도, 품위도 없군요."
"끝까지 사람 행세를 하는 구나. 괴물 주제에 예의와 품위를 찾다니.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군, 도대체 언제 그 추악한 속내를 드러낼 셈이냐?"
"그건 오히려 이쪽이 하고 싶은 말이군요."
양털 코트와 양 가면 차림의 귀부인이, 가면 너머의 어딘가 고요하고도 섬뜩한 시선으로 라스의 두 눈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결국 저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지 않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도대체 언제 그 같잖은 영웅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추악한 욕망 덩어리인 본 모습을 드러낼 셈이죠?"
그녀는 자신들을 괴물이라 말하며 처치할 명분만 찾는 그의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뱉은 말이었지만, 공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도 노리고 있던 라스는 그 싸늘한 눈빛과 묘하게 자신의 상황을 찌르는 듯한 말에 괜히 뜨끔 했다. 물론, 자신이 괴물의 말 따위에 움찔했다는 사실에 이내 굴욕과 분노를 느꼈지만.
"하,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역시 괴물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언젠가 사람을 해칠 죄악을, 여기서 미리 정리하마!"
철컥! 라스는 위협적인 소리를 울리며, 마침내 검을 뽑았다. 그 간단명료한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했기에, 마네킹 여인을 감싸듯이 선 양 귀부인이 그에 대응하듯 살벌한 기운을 온몸에서 내뿜기 시작했다. 마치 사나운 포식자를 눈앞에 둔 위압감에 라스는 잠시 몸이 위축되었지만, 용을 죽였다는 명성은 괜히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듯 이내 떨쳐내며 검을 휘둘렀다.
용의 목을 벤 명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에도, 라스는 자신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용과 홀로 싸웠던 그에게 있어서,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괴물 정도야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적이었으니까.
까아아아앙!!
"....어?"
양털 코트와 칼의 충돌에서 들릴 거라 생각치도 못한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림과 동시에, 라스는 자신이 휘두른 검이 귀부인이 펼친 코트 사이에서 튀어나온 길고 날카로운 무언가와 충돌하며 튕겨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물건이 거대한 육식 짐승의 발톱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어느새 귀부인의 모습이 거대한 늑대로 변한 후였다. 그리고 용살자가 다시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내려쳐진 거대한 앞발이 그를 바닥에 찍어 눌렀고, 거대한 주둥아리가 쩍 벌어지며 어지간한 도검 못지 않은 길이와 예리함을 지닌 수십 개의 살벌한 이빨들이 드러남과 동시에...
"자, 거기까지."
어느샌가부터 도중에 끼어 든 한 사내의 말과 동시에, 용살자를 그대로 물어 죽이려던 괴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약한 썩은 내가 풀풀 풍기는 끈적한 타액이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통해 자신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이해할 새도 없이 들이 닥친 상황들 탓에 뒤늦게 공포심이 밀려 온 라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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