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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198화 (171/229)

〈 198화 〉 님들 저 도시 운영 이번이 처음인데 이거 좋은 건가요?(8)

* * *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죠."

또 한 차례의 격렬한 관계가 끝나고, 머리를 데우던 열기가 식은 후 그녀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없었던 일로 하자니...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진 않았습니다만."

광란의 밤이 끝난 후 그는 여색에 굶주린 짐승에서 다시 어두운 신사로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강렬한 열망에 에슐렌은 가까스로 이성을 다시 붙잡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저 눈과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밝아 벗겨진 채로 그를 마주하는 것 같아서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었다.

"저는 샴발론 왕국의 왕비이고 당신은 이 도시, 랜드필의 주인이에요. 우리들의 이 관계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고,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순간 큰 문제를 초래할 일이죠. 그러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끝을 내죠. 저는... 지금 제가 가진 것을 한 순간의 실수로 잃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힘겹게 가꾼 이 도시를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사위의 추파를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 어쨌든 제 딸이 당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잠시 밤산책을 나갔던 것일 테지요. 제가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 전 이만 돌아 갈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에요. 알겠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슐렌 왕비님. 그럼, 숙소까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런 이른 시간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요."

이대로 계속 붙어 있으면 언제 다시 서로 붙어 먹게 될 지 알 수 없었기에, 에슐렌 왕비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문을 나섰다. 녹색 스카프를 목에 둘러 지난 밤의 진득한 흔적을 감추며, 한 아이의 어머니라 하기엔 너무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은 그렇게 짐승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럼,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엘리시아 공주."

왕비를 배웅한 후 다시 어제 밤을 보낸 방으로 돌아와 옷장의 문을 연 라그나 아마게돈은, 그 안에서 몽마에 신들린 손길로 인해 몸이 잔뜩 달아오른 채 정욕과 질투과 복잡하게 뒤섞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공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궁금하신 점이 매우 많으신 것 같은데, 하나씩 답변해드리죠."

"....어째서, 어머니가 당신과 관계를 나누신 건가요?"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이미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는 공주 님께서 저와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을 막고자, 왕비 님은 제게 자신의 몸을 바치겠노라 결심하셨습니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 하. 부모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약혼에, 심지어 저를 제대로 봐주지도 않는 사내와 저를 맺어지게 하고 싶어서... 제가 처음으로 마음에 든 사내를 가로채신 거군요. 그것도 일국의 왕비라는 사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 제 어미를 향한 존경심과 존중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에슐렌 왕비는 이제 어머니이자 본받아야 할 여인이 아닌, 딸이 마음에 든 남자와 외도를 저지르는 지조 없는 탕녀에 불과했으니까.

"그럼, 어머니의 목에 남겨진 그 붉은 자국들은..."

"물론 제가 남긴 것이죠. 공주님의 어머님께서는 참으로 매력적인 여인이신지라, 저도 모르게 그만."

아드득. 이를 가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공주의 눈동자에 맺힌 질척한 질투가 뜨거운 분노가 덧씌워졌다. 마음에 든 사내가, 자신보다 제 어미의 용모를 칭찬하는 모습은 자신의 외모에 나름 자신이 있었던 공주로서 자존심이 상함과 동시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만 두세요."

문 하나를 두고 왕비가 그를 향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잊어 달라고 말한 것을 듣지 못 했던 공주는, 처음으로 마음에 든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육체 관계를 나눌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어미를 향한 질투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말씀은..."

"대신, 저를 안아주세요."

잃어버린 것은 되찾으면 그만이고,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다시 구하면 그만이다.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에게 있어서 첫 여인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마 그녀는 제 분노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의 첫 여자가 아니라면, 그 자리를 자신이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어머니가 가진 연상의 여인으로서의 매력은 없을 지라도, 자신에게는 젊은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있을 것이라고 공주는 생각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어린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애정을 쟁취하기 위해 어머니를 경쟁 상대로 보는 단계를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에게서 발생하며 아이의 발달 단계에서 지나가는 단계들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지만 본래 만 3~6세 사이의 아이가 겪어야 할 그것이 성인식을 치룬 숙녀에게서,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애정을 쟁취하기 위해서 발생한다면 조금 더 깊이 생각 해 봐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맺어지고 이성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할 상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다른 동성이지, 자신을 낳아준 부모는 아닐 테니까.

"흐음... 하지만 공주님의 어머님께선, 제가 그 분을 취하는 대가로 공주님께 손대지 말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비록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하긴 했지만, 이미 대가를 받았는데 입을 싹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이이익...!"

"정말 저와 남자와 여자로서의 관계를 맺고 싶으시다면, 우선 왕비님부터 설득하셔야 겠군요."

라그나 아마게돈으로선,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의 주변엔 매력적인 여인들이 많았고, 공주가 아무리 매력적인 여인이라고 한들 그녀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다른 관계를 포기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토끼 한 마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에서 동시에 두 마리를 노리려는 얼간이와 달리, 그는 한 번 손에 넣은 토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공주님, 밤을 새셨으니 많이 피로하실 텐데 슬슬 숙소로 돌아가시죠. 모노, 공주님을 숙소까지 에스코트해주겠어?"

"흐음, 알겠어~♪ 그럼 갔다 올 게, 자기~♬"

"자, 잠깐만요.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게 해주세요."

"네. 무엇이 궁금하시죠?"

"어째서... 제가 아니라 제 어머니죠?"

많은 내용이 함축된 한 마디에, 랜드필의 선생은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글쎄요. 이유라... 그야 먼저 저를 원하셨으니까요?"

저는 가는 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고 늘어지지만, 오는 여자는 말리지 않거든요. 랜드필의 선생은 그렇게 덧붙였지만, 엘리시아 공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랜드필의 선생이 말한 '먼저'라는 한 단어만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마음에 들어 했는데.

내가 먼저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나보다 먼저...

...망할, 도둑 고양이.

*

엘리시아 공주는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혼자서 무어라 계속 중얼거리는 불안한 모습과 함께 오늘 내 집을 나섰다. 어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하고 반짝이는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그녀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제 어머니의 편을 들어줄 텐데, 되려 어머니를 경쟁 상대로 여기면서까지 나를 바랄 줄이야. 내가 먼저 뭘 하지도 않았는데, 상대 쪽에서 호감을 표출한 일은 거의 없다 보니 그리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집착이 심한 음침녀라는 요소는 가상에서는 매우 매력적이게 다가올 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스토커'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정말로 엘리시아 공주와 몸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면 그 집착의 정도를 낮추며 특정 인물에 한해서만 질투와 시기를 드러내도록 제한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뭐, 어쨌든 나는 결과적으로 밀어 붙이는 것에 매우 취약한 유부녀 왕비 님을 두 차례나 따먹은 덕에 최고로 high한 기분이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나면, 지금이라면 루크 그 망할 자식이 내 눈앞에 나타나도 죽이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루크 녀석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요즘 랜드필의 재시공 및 인사 배치 등으로 바쁜 탓에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길드 마스터 정시우가 수거해 간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째 뭔가 캐냈다는 소식은 통 돌아오지 않으니, 나로선 의아할 노릇이었다. 설마 루크 그 자식의 뻐킹 징크스가 행운의 여신에게 사랑 받는 남자의 행운마저 뚫을 정도는 아닐 텐데, 도대체 뭐지?

아, 어쩌면 그 쓸 데 없이 아집이 강한 녀석이 자신의 부당 고용주를 변호하는 개 병신 짓을 하느라 정보 탐색이 늦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 자식이라면, 악법도 법이라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불리한 법률이 있다면 그것에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세상이 그것을 바란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냥 받아들일 답답한 얼간이니까.

보통 고집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루크 녀석은 다르다. 녀석의 아집은, 되려 자기 자신의 불신에서 나온다.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이 맞을 것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냥 참고만 해야 할 원칙을 어떤 상황에서든 따르려고 드는 그 답답한 성격은,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함과 불신에서 나오는 모습일 수 밖에 없으니까.

"쓰읍. 아무리 그래도 연락이 너무 늦는 것 같은데. 설마 그 길드 마스터가 고작 루크 따위에게 고전하고 있을 리는 없고, 그럼 루크를 이용하고 있는 그 유스티아인가 뭔가 하는 년 쪽에서 이상한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흐음... 루미너스 여신의 세상과 달리, 여기선 고용주와 직접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루미너스의 세상에서 내가 어디서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신이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전능함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티피아는 한 명의 신이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창조한 곳이 아닌, 여러 신들이 여러 세상의 파편을 맞춰서 재창조한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각 신들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의 영향이 굉장히 미약하다. 신들이 손길이 가장 많이 닿은 이 세상은, 되려 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과 연결된 신과 소통하는 방법은 그 신을 섬기는 제단이나 신전을 통하는 것 뿐이다. 문제는, 내 현 고용주인 니아 씨... 혼돈을 담당하는 그 고대의 외신은 현재 이 아티피아에 출입 금지 상태라서 나와 접촉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 나 이전의 두 명의 선임자들이 워낙 큰 사고를 친 탓에,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나? 그래서 니아 씨의 경우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는 있어도, 제단을 통해서 나에게 접촉할 수는 없다는 모양이다.

물론 고대신을 숭배하는 제단의 경우, 그 제작자가 대부분 인신공양을 당연시 여기는 광신도들이기 때문에 진즉에 길드 마스터 선에서 전부 토벌 당해서 현재로선 그 흔적조차 거의 없지만.

"후, 고민해 봤자 조금도 소용 없는 일인데, 그만 두자. 그래, 고대신과 접촉하는 방법보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이 내 도시에 이주를 신청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니까."

*

그리고 그 날 오후.

"...엘리시아 공주님, 혹시 왜 여기에 계신 지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왜 여기에 있냐니, 너무 뻔한 걸 물어보시네요."

문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불안한 모습으로 내 집을 나섰던 타국의 공주가 지금 내 부하들이 입는 의복을 입고 내 사무실로 들어올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일까?

"제가 여기 RGA 직원이 되었기 때문이죠."

정답 = 그걸 싯팔 내가 어떻게 알아?

...이 공주님, 집착이 대단하다! 도대체 내 부하들을 어떻게 구워 삶았길래, 고작 하루만에 내가 이끄는 조직에 입사할 수 있었던 거지?

"언제부터요?"

"대략 10분 전부터?"

"그... 혹시 제 부하들이 공주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 했나요?"

"혹시 피로에 쩔어서 좀비처럼 문서에 도장을 찍으시는 분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공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그래, 새로 뽑은 직원들이 업무를 숙달하기 전까지 부하들을 갈아 넣다시피 한 내 업보구나.

나한테 반한 이웃 왕국의 공주가, 내가 이끄는 조직의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주 시발 라이트 노벨 제목으로 딱이구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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