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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206화 (179/229)

〈 206화 〉 외전 ­ 0부 3화

* * *

"아니요. 거기선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쓸 일도 없을 텐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나의 진심 어린 애원에도 불구하고, 마르스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가문의 가주라는 사람이 일개 기사 지망생보다 예법이 떨어진다니, 그래서야 어떻게 귀족을 자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럼 넌 대체 왜 나보다 예법에 더 능숙한 건데? 너 평민 아니었냐?"

"일단은 기사를 꿈꾸는 몸이기에, 이후 기사가 되었을 때의 삶을 대비하여 간단한 예법 정도만 익혔을 뿐입니다. 오히려 귀족이면서도 이렇게나 예법에 문외한인 당신이 이상한 겁니다."

아니, 귀족의 예법이라고 해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왕이 없는 나라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 중 하나로 살던 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만에 그런 복잡하고 번거로운 온갖 예법을 익힐 수 있겠냐고.

애시당초 귀족이란 것들은 도대체 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에 목을 매는 건데? 그냥 확 다 목을 매어버릴까 보다.

"귀족의 품위는, 그 사람이 품은 예법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시지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꼴이 되었는가 하니, 시작은 마르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건넨 한 마디였다.

'그러고보니 라돈 남작, 당신의 그 말투는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응? 내 말투에 무슨 문제 있어?'

'예?'

'응?'

지난 번에 그.. 이름도 생각 안 나는 주인 없는 영지의 사람들을 죄다 쓸어버린 후 멋대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마르스. 그녀는 몇 번의 응답 끝에 내가 귀족이면서도 귀족의 예법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선 경악하며, 어떻게 귀족이 예법을 익히지 않을 수가 있냐며 내게 강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스는 기사 지망생이었고, 나는 몰락했다지만 일단 한 가문의 가주이다. 하지만 일단 기사된 자로서, 그녀는 자신이 함께 하는 귀족이 귀족 답지 못한 행보를 벌이는 것을 차마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엔 어디 해보라는 듯이 어울려 주었지만... 막상 '기본 예법'이라고 칭한 것이 스무 개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나는 절로 낯빛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무슨 놈의 쓸 데 없는 예법이 그렇게나 많은 건지.

지극히 일반인 수준이었던 내 두뇌로는 기껏해야 열 개 정도의 예법을 익히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되는 마르스의 주입식 교육에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제기랄, 괜히 귀족 출신이란 걸 밝혔나? 애초에 애는 용사 동료가 되야할 애가, 대체 왜 악역인 나한테 그런 걸 가르치고 있는 거냐고?

마르스가 유력한 용사 동료 후보 중 한 명에 속하다 보니, 용사에게 쓰러져야 한다는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그녀의 신변에 해가 되는 일은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불 같은 고집을 꺾기도 쉽지 않았고. 그리고 정말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내가 마르스의 강제적인 귀족 예법 교육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이고, 나으리! 저, 저희는 정말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니까 너희 마을은 해치지 말아 달라, 그런 뜻인가?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 놓고서, 내가 지나가자 마자 내 적들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팔거나 그들에게 협조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어떠한 결말을 안겨주었을까?"

처음엔 마르스가 간절히 부탁한 끝에 마을 하나를 불태우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 마을은 실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이고 금품을 약탈하던 도적단 마을이었고, 나와 마르스가 자비를 베풀어 그냥 넘어가자 오히려 나를 죽이고 내가 가진 재산을 빼앗으려는 듯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 한 밤중에 야습을 해 왔다.

내가 귀족인 걸 알아 챘어도, 빼앗길 만한 충분한 재산을 가지지 못한 몰락 귀족이란 것은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내 병사들은 애초에 살아 있는 것들이 아니다 보니 한밤 중에도 완전 무장 상태였고, 도적 마을은 쉽게 소탕되었다.

마르스는 자신이 자비를 베풀자고 했던 마을 주민들이 실상은 본색을 감춘 도적단에 불과했으며, 배응망덕하게 자신들을 노리려다 불사의 병사들에게 썰려나가는 모습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발생하자 그녀가 내 결정에 무작정 반대를 하는 일은 점차 없어졌다.

내가 이 마을도 불태우려 하고 있는데 마르스가 딱히 저지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내가 왜 굳이, 등 뒤에 나의 적이 될 지 모를 자들을 남겨두어야 할까?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놀린 그 혀를 뽑아주지."

지금으로서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가장 무시무시한 협박에 마을의 촌장은 식은 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 저희 마을은... 농지가 워낙 비옥해서, 많은 양의 곡식을 추수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앞으로 나으리께 주기적으로 곡식을 바치겠나이다!"

곡식이라... 확실히, 전쟁에서 군량의 보급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내가 부리는 군대는 애초에 죽지 않기에 보급을 따로 할 필요가 없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불사의 군대만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두 공작가 파벌의 하위 귀족들로부터 빼앗긴 영지를 어느 정도 되찾고 나서는 그 영지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선, 그곳에 살면서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

"흐음. 또 다른 이유는 없나?"

"아... 이사벨라!"

촌장의 외침에, 한 시골 처녀가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사람 많은 도시도 아니고 이런 한적한 시골에서 사는 사람 치고는 상당히 예쁜 미인이였다. 적절하게 부푼 젖가슴, 마을 사내들의 시선을 절로 끌어 모을 빵빵한 엉덩이와 탄탄한 골반,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함과 무해함이 절로 묻어 나오는 얼굴...

"제 막내 딸, 이사벨라입니다. 저희 마을이 계속 귀족 나으리께 충성을 바친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나으리께, 저희 이사벨라를 바치겠습니다...!"

"아, 아빠...!"

촌장의 말에 막내 딸 이사벨라가 놀란 나머지 내 앞이라는 것도 잊고서 제 아비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의 말에 놀란 것은 그의 딸아이 뿐만이 아니었다.그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나는 악당으로서의 포스를 잃지 않기 위해 당혹스러운 얼굴을 애써 감추었고, 마르스도 투구의 바이저를 내려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굉장히 놀란 것이 절로 보였다.

마을의 안위를 위해, 자기 딸을 바친다니. 게다가 내가 설마 그걸 받는 입장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막상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다.

촌장의 막내 딸 이사벨라는 분명 내 기준에서도 상당한 미인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마르스가 붙어 있어서 불편한 마당에 또 다른 동행인을 데려갈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냥 좀 예쁜 시골 처녀가 사람을 마구 학살하는 언데드 군단을 통솔하는 사악한 귀족 옆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너의 각오는 잘 알겠다만, 나는 지금 이상으로 짐을 늘릴 생각이 없어서 말이지..."

나는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대충 네 마음은 잘 알겠고, 그냥 용서해주겠다는 식으로 말을 끝맺으려 했다.

하지만 마을 촌장은 내 뒤로 섬뜩하리만큼 완벽하게 정렬한 언데드 군단과 영 좋지 않은 내 얼굴, 그리고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전신 갑옷의 기사(마르스)를 한 번씩 흩어보더니 이내 얼굴이 창백해져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 제 딸 아이라면 나으리를 분명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아빠..."

"이, 일단 한 번이라도 안아 보시지요. 제가, 제가 다 준비하겠나이다!"

촌장은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마을을 전부 불살라 버릴 것이라고 오해한 것인지, 결국 제 딸을 시식(?)이라도 한 번 해보라며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나로서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용사를 상대하기 전까지 쌓아야 할 악명을 생각하면, 이런 제안을 거절했다가 그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 지 알 수 없었다. 기왕 잡은 이 악당이라는 인식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무른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하아, 알겠다."

이전 생에서도 여자와 한 번도 관계를 나눠본 적 없는 동정인 나로선, 마을의 안위를 위해 바쳐진 시골 처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묘하게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마르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어딘가로 향하고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마을 촌장은 제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나를 안내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나를 암살하려고 사람을 숨겨둔 것이 아닐까 하여 마법에 문외한인 나도 할 수 있는 기초 마법 중 하나인 탐지 마법으로 내부를 살폈지만, 다행히 방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부디... 나으리께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가 자기 딸 아이로 만족하면 이 마을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듯, 촌장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천천히 물러났다.나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동정 딱지를 떼도 괜찮지만...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 동정을 떼는 건, 해야 할 일은 우선 다 끝낸 후에 천천히 해도 되는 거고. 지금은 뭐... 그냥 적당히 이사벨라라는 여자를 마법으로 기절시킨 후, '관계를 나누었다'라고만 말하고서 이 마을을 지나칠 것이다.

쭉 둘러봤는데 다행히 이 마을은 지난 번처럼 도적단 마을은 아닌 것 같고, 또 수확하는 곡식도 제법 양이 많은 편이니 망가트리지 않고 영지에 편입하면 그만큼 충분한 이득을 가져올 테니까. 애초에 나는 저항할 생각도 없는 사람을 굳이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도 아니고.

"응? 뭐야?"

"....."

그러나 문을 연 내가 마주한 사람은, 촌장의 막내 딸 이사벨라가 아닌 마르스였다. 그것도 평소에 거의 매일 입고 다니던 중무장은 어디 가고, 살갗을 거의 드러낸 아찔한 속옷차림으로.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여전사가, 수줍은 새색시마냥 속옷 차림새로 침대 위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모습은...충격적이고, 엄청나고, 또... 상당히 임팩트가 있고... 젠장할. 너무 뜻 밖의 광경을 봐서, 언어 능력이 마비라도 된 건지 마땅한 다른 감상은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마르스. 왜 네가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나는 양손으로 안면을 쓸어내리며 조금 평정심을 되찾고서, 얼굴을 붉힌 채 침대에 앉아 있던 마르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입을 열어, 평소의 그 당당한 태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생길 무고한 피해자를... 줄이리라 결심했으니까... 그러니까, 그...아무 죄도 없는 처녀의 혼삿길을 망칠 수는 없어서..."

그 이후는 굳이 그녀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금방 파악이 되었다. 이사벨라는 아무리 아비의 명령이라지만 갑자기 마을을 습격한 처음 보는 남자 따위에게 다리를 벌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때 마침 마르스가 찾아와 자신이 그 일을 대신 해주겠다고 말하자 거절해서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기에 그대로 수락했을 테지.

그렇게 이사벨라는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잃지 않았고, 마르스는 무고한 피해자를 줄이고...

진짜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네.

"아니, 그럼 그냥 나를 찾아와서 그 여자와 관계를 맺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 될 거 아닌가? 굳이 네가 그녀 대신 나를 기다릴 필요가 있나?"

"지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당신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죄 없는 여인이 당신에게 몸을 바칠 일이 계속 있을 테죠. 그들에게 손 대지 말아주세요. 대신 제가... 제가 그 몫을 대신 할 테니까...."

나는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과연 정말 이해하고 있기나 한 걸까 싶은 마르스로부터 잠시 고개를 돌려, 옆에 둥둥 떠 있는 대본을 살폈다. 오로지 내게만 보이는 그 반투명한 창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이름 : [마르스]

성별 : 여

칭호 : 용사의 동료 후보, 기사 지망생, 약자들의 수호자

직업 : 가디언

...

...

...

이성 경험 횟수 : 0회

경험 횟수 0회. 즉, 처녀...

스스로 레이디가 아닌 기사를 자청하던 처녀의 입에서, 다른 사람들 대신 자신의 몸으로 만족하라는 말이 나오다니.

"하...."

진정하자. 상대는 마르스야. 용사의 동료 후보 중 하나라고. 물론 후보 중 하나일 뿐이니 반드시 용사의 동료가 되리란 법은 없지만, 그녀의 강함은 용사의 동료가 된다면 아주 도움이 될 수준이니 기왕이면 그녀가 용사의 동료가 되는 편이 이상적이겠지.

그렇다면 나중에 나와 적대 관계가 될 텐데, 여기서 섣불리 관계를 맺었다간 엄청난 대형 사고야. 나를 죽여야 할 상황에, 관계를 나눈 것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싸움 도중에 항복하는 짓거리를 벌일 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참아야 한다. 아무리 눈앞의 여자가 평소의 그 든든한 여전사와는 전혀 다른 갭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내가 손을 대도 괜찮은 상대가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선 참아야...

"그, 그리고... 보시다시피 전 그런 쪽의 경험은 전혀 없으니까... 그, 아프지 않게 살살... 부탁해요?"

강인한 여전사가 얼굴을 수줍게 붉히며 내뱉은 그 한 마디에, 내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시발, 뒷감당은 모르겠고 이걸 보고도 참으면 고자 새끼가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비록 하반신의 물건을 이성을 상대로 써본 적은 없어도, 보아하니 지금 상황에서 멀쩡히 작동하는 것 같고. 아니, 좀 많이 과부하 되긴 했는데... 아무튼 이걸 보면 난 고자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럼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뭐다?

"네 입으로 내뱉은 말이니...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도록."

평소와의 갭이 느껴지는, 지극히 무방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여전사를 상대로 나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바지춤을 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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