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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보스를연기하는법-211화 (184/229)

〈 211화 〉 나아→락! 나→락! (1)

* * *

천공의 도시 스카이론. 비록 일곱 대도시 중 하나에 들어가진 못 해도, 그에 전혀 꿀리지 않는 유명세를 지닌 공중 도시. 비행선마냥 하늘을 떠다니는 그 땅덩어리는 그 자체로 대다수의 적습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언제든 마음 먹으면 지상을 일방적으로 침공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기도 하다. 단지 일곱 도시의 대표자들이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스카이론을 그저 관광 명소 및 랜드필에 방생해도 다시 돌아와서 사고를 칠 흉악한 범죄자들을 수감할 감옥으로 사용하고자 결정했다.

그랬던 공중 도시는 대지를 떠난 이래로 처음, 자신이 떠난 대지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되었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거대한 도시는 추락의 여파로 완전히 무너졌고, 붕괴의 정도가 너무 심각하여 갑작스러운 추락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랜드필에서 가용한 병력들은 추락한 스카이론에 남아 있던 얼마 되지 않은 생존자 구출 및 실종자와 사망자 색출로 바쁜 상황이었고.

그러나 랜드필에서 그토록 열심히 스카이론의 생존자를 구출하였음에도, 돌아온 것은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만을 맹목적으로 섬기는 자들의 적의 어린 선언이었다.

'정의의 여신께서 공중 도시의 추락은 재앙을 가져올 자가 벌인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라고.

어디까지나 하운드 부대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대처가 불가능했다.

우선, 스카이론 같이 거대한 규모의 떠다니는 땅덩어리는 떨어트리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카이론은 이전에도 수 차례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지만, 스카이론을 추락시키긴 커녕 도시에 걸린 방비 시스템에 되려 요격되어 하늘에서 산화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 랜드필에는, 그런 스카이론을 추락시킬 방법이 있었다.

'추락하는 천공의 재앙'.

황금의 왕국, 엘드랜드에서 구한 일곱 친구 중 하나. 거대한 소라고동에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색상의 눈과 열 세 개의 문어 다리가 달린 그 친구는 유령처럼 조용히 공중을 둥둥 떠다니며 지면에 닿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것을 지면으로 끌어내리는 심의를 보유한, '침식' 단계에 이른 일곱 심의 보유자 중 하나이다.

일전의 엘드랜드의 대대적 침공 당시 빌가메스가 병력을 실은 수십 척의 비행선을 허공에서 한 번에 추락시키는 위엄을 보임으로서 다른 도시에 가해지는 피해를 줄였던 그 친구가, 이번에 스카이론이 추락된 원흉으로 지목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나와 랜드필 사람들이 그 친구의 알리바이를 주장해도 저 쪽에서는 같은 편끼리 싸고 든다며 증언의 진실성에 대하여 걸고 넘어질 테고, 실제로 추락하는 천공의 재앙은 마음만 먹으면 스카이론도 지면에 내다 꽂을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그런 짓을 할 동기가 없다는 것도, 악신이 시킨 일이라며 몰고 갈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나와 일곱 친구들은 일전에 엘드랜드를 궤멸 직전으로 몰고 간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스카이론이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되어서 배척했다며 갖다 붙였다. 도대체 스카이론의 존재가 어떻게 나도 모르는 내 목적에 방해가 되는지 설명을 요구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번 일에는 제대로 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무죄추정의 원칙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것인지, 아직 내가 한 일이라고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나에 대한 처벌을 강하게 요구하는 저 눈가리개를 쓴 붉은 머리 여자는 유스티아의 말만 따르는 하운드 부대의 우두머리인 오르트리스다. 그녀의 그 뒤의 눈가리개를 쓴 자들 중 일부는 얼굴이 익숙했다. 저 놈들이 랜드필에 막 도착한 나를 다짜고짜 잡아서 스카이론에 처녛은 일은 아직도 잊지 못 하니까. 그게 아직 1년도 안 된 일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만.

"정의의 여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남자는 이 세계에 혼돈을 불러올 자라고! 어찌하여 이 세계의 균형을 자처하는 자들이, 사악한 악신을 따르는 추종자를 보호한단 말입니까!"

오르트리스의 앞에 있는 우리들, 나를 포함한 일곱은 대도시의 대표자들이다. 즉,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일곱 명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들을 앞에 두고서도 그녀는 전혀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평등하게 판결을 내리며 정의를 실현한다.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든,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들의 심판에,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가린다고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맨손으로 언제든 자신을 가볍게 찢어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일곱이나 앞에 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은 본래 일곱 도시의 대표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이 아티피아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는 토론 장소였으나, 지금은 나를 중간에 두고 좌우로 일곱 대표자들과 하운드 부대를 포함한 정의의 여신 신봉자들이 대립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기스토스와 메타버스 시티, 그리고 샴발론 왕국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작은 광업 도시에 불과했던 랜드필이 세상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게 된 지진과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먹고 마석을 뱉는 기괴한 마수... 엘레이스타에게 듣자 하니, 이전에 마기스토스 내에서 그것과 유사한 실험을 진행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설마 했는데... 제기랄, 그 실험을 진행하던 마법사도 유스티아를 섬기더라. 이 정도면 혹시 누가 일부러 자신의 모든 잘못을 유스티아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관여된 일의 대다수에 유스티아가 떡하니 있었다.

엘레이스타는 유스티아의 영향력이 이 이상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 이번 스카이론의 추락 사건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과 하운드 부대가 너무할 정도로 나를 몰고가는 점에서, 되려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내게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아카위키는 이전에 충분히 교류한 관계가 있으니, 내가 선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샴발론의 왕은 지룡을 토벌한 용살자가 사실 그냥 유스티아의 힘을 빌려서 꽁으로 공을 세웠다는 것을 깨닫고 격분해서, 유스티아가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드는 나를 돕는다는 선택을 내렸다.

하지만 나머지는... 천마는 자신과 관련된 영역이 아니라며 신경 끄고 자기 세력을 가다듬는데 바쁘고, 환상 열도 마보로시마의 장로 네무는 애초에 유스티아의 신봉자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일곱 대표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길드 마스터는... 어째서인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는 대신 중립의 자리를 자처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이번 일을 내가 저질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잖아! 그 어떤 물증도 없는데, 도대체 왜 나를 범인으로 몰고가는 건데? 애초에 나는 스카이론이 추락했을 당시, 내 도시의 가용 가능 병력을 최대한 모아서 구조대를 편성했다고. 내가 진짜로 스카이론을 추락시켰다면,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잖아?"

"그것도 다 자신이 저지른 죄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기만책일 테지."

"아니, 시발! 그러니까 내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어딨냐고!"

"유스티아 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의 말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나?"

싯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대화가 전혀 성립이 되지 않잖아.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저 새끼들은 나랑 대화를 나눌 생각이 단 1도 없으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유스티아 그 시발 년이 나한테 누명 씌워서 선동과 날조의 언론 플레이로 나를 조질려고 자작극을 벌인 것 같은데. 애초에 브레이크윙 교도소장을 비롯한 스카이론의 고위직의 대다수가 유스티아 쪽 사람이니 내부에서 추락시키는 것도 문제는 아니겠지.

하지만 문제는... 세상에 머리에 뇌 대신 우동사리가 들어있지 않는 이상 도대체 누가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는 그 귀중한 공중 요새를, 고작 사람 한 명에게 누명 좀 씌우겠다고 그대로 황야에 쳐박아 버리는 미친 짓을 저지르겠냐고.

솔직히 유스티아 그 년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긴 해. 소질과 재능은 있지만 알맹이가 전혀 따라주지 않는 루크를 꾸역꾸역 제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더 나은 용도가 있을 마법 소녀를 굳이 나한테 버림패로 쓰는 꼴을 보면 자신이 가진 패를 감추려고 하기 보단 되려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무지성으로 낭비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으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유스티아의 자작극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인력 낭비 성향을 통해 내가 내린 심증에 불과할 뿐,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오히려 상황으로 따져보면, 유스티아가 미친 척하고 자기 것이나 다름 없는 스카이론을 지상에 내던져버린 것보단 내가 '추락하는 천공의 재앙'을 보내서 스카이론을 추락시킨 것이 더 그럴듯하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겠어?

정의의 여신이 벌인 짓이 너무나 비상식적이라, 상식적인 사람들은 되려 나를 의심하는 꼴이다.

스카이론의 추락이 내부에서의 소행이라면 유스티아를 손절치고 내 쪽의 라인으로 갈아 타려는 준비를 하던 브레이크윙 교도소장이 뭔가 증언을 해줄 수 있을 텐데, 하필 그는 스카이론 추락 이후 행방이 묘연해서 기대할 수 없으니...

"언제까지 시간 낭비만 할 셈이지? 그리 어려운 논쟁거리도 아니다. 우리 목적은 하나, 여신님께서 말씀해주신 이 세상에 혼란을 불러올 재앙의 씨앗을 처단하는 것."

하운드 부대. 눈을 가리고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하며, 오로지 한 여자의 말만 맹목적으로 들으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검을 겨누는, 저 눈이 멀고 귀가 먼 얼간이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죄다 찢어 죽이고 싶은데, 그래서야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어쩌면 유스티아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일 지도 모르고.

"여신 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겠다면..."

누가 누구더러 비협조적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좋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지. 다들, 시작해라."

갑자기 부하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오르트리스. 그녀가 뭔개 개수작을 부리려는 것임을 직감함과 동시에,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선생님! 습격, 습격입니다!'

시발, 뭐?

'어제 구조대가 구한 생존자들 사이에 유스티아의 신도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미, 미친....?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추락해서, 구조대가 없으면 생존자들은 얼마 안 가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사람을 꾸려 구조대를 보냈던 건데,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생존자들 사이에 자기 신도를 섞어 놓았다? 아니, 아니야... 이건...!

"이, 이 미친 년...!"

유스티아는, 애초에 스카이론에서 자기 신도를 대피시키지 않았어...!

보통이라면 그런 일을 벌일 때, 최소한 자기 아군은 위험한 곳에서 대피를 시켜야 정상이지. 하지만 유스티아, 이 년은 절대 정상이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자기가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모성 말로 생각하는 년이었어! 내가 구조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스카이론에 남아 있던 신도들은 그대로 황야에 방치되어 죽어버릴 텐데도, 그런데도 그들을 남겨두고 스카이론을 추락시켰다고?

유스티아는 미친 년이다. 루크한테서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유스티아라는 년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미친 년이었어.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람을 생명이 아닌 그냥 숫자로만 보는 여자라니. 절대로 신의 힘 같은 전능한 도구를 쥐어줘선 안 되는 부류의 사람이었어.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그 정도 피해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거냐? 어차피 자기가 직접 만든 피조물도 아니니까, 잃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이런, 이런 시발련이...!

'현재 스펙터 부대가 응전하고 있긴 하지만, 만만치가 않습니다! 바인 부대장은 아직 용살자와의 전투로 인한 부상이 채 낫지 않은 상태인데, 습격을 감행한 신도 50명 가량이... 크윽, 녀석들 하나 하나가 품은 권능이 그 용살자와 거의 동급입니다!'

바인의 다리를 잘라낸 가짜 용살자 라스. 녀석의 전투 능력은 형편 없었지만, 권능을 포함하면 그 전투력은 준 용사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생존이 확실하지도 않은 첩자 50명이, 죄다 준용사급이라고? 유스티아, 그 여자의 신격으로 그게 말이 되나? 아니, 절대 불가능할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벌써 소식을 접한 모양이군. 허나, 너는 여기서 떠날 수 없다."

스르릉, 챙.

오르트리스를 포함한 하운드 부대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이쪽을 향해 겨누며 감정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끼는 그 도시는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네가 빌가메스를 굴복시킨 그 날처럼. 그리고 그 도시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넌 그 사악하고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겠지. 네놈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이곳을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하, 하하."

이야, 이거 진짜... 계속 가만히 듣자 듣자 하니까...

"하하하... 하하하하하..."

살다 보니 정말... 별 개 소리를 다 듣겠네?

"사악하고 추악한 본성, 이라... 이거 진짜 미친 년놈들일세."

온 힘을 다해 힘들게 가꾼 도시가 왠 미친 새끼들의 자살 특공이나 다름 없는 테러로 불타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가 시발, 그 시궁창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생전 하지도 않은 서류 속에 처박혀 살면서 내 발로 열심히 뛰며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왠 또라이 년 하나 때문에 그게 다 사라지려는데 누가 진정할 수 있겠냐고?

그래. 뭐. 나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돌아온 업보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착한 새끼는 아니다보니 이따금 저지른 잘못도 있으니까. 그런데, 나랑 전혀 상관도 없는 미친 년이 내 뒤에 있는 누구 잡겠다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 머리채를 붙잡고 늘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참으면 그건 참을성이 깊은 게 아니라 그냥 개병신 호구새끼인 거지. 안 그래?

"라그나 아마게돈, 멈춰라! 여기서 네가 저들을 해치면, 되려 유스티아 여신에게 명분을 주는 셈이야!"

"도시에 가해진 피해는 나랑 엘레이스타가 나중에 복구를 도와줄 테니까, 일단...!"

"아니."

내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정작 내뱉은 내 귀에도 놀라우리만큼 싸늘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상 참을 생각이 없었다.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존중하지."

'심의'를, 랜드필에서 나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내가 해방시킨 그 힘들을 떠올렸다.

"인간이 짐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짐승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높고 튼튼한 성벽과 방아쇠 한 방으로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총을 가진 인간은,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아. 짐승에게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존중은, 존경은, 서로에 대한 선의와 배려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내게 칼을 겨누는, 눈 먼 종자들을 향해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상대의 안에 내포된, 자신을 향한 폭력의 가능성. 오직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며, 다른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는 것들은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몰라."

"멈춰라. 이 이상 접근하면,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니, 그게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지. 그래서 두려움을 품지 않고, 그렇기에 존중하지 않아."

"우린 경고했다. 그리고 넌 어겼고. 모두, 공격 준비. 적을 처치해라!"

눈 먼 종자들의 검에, 일제히 여신의 권능이 피어오른다. 불길처럼 일렁이는 주홍색 신성력. 정의의 여신의 권능. 서른 명의 하운드 부대 모두의 검에, 무시하지 못할 양의 신성력이 맺혔다. 저 정도 양이면, 대략 1.8 루크인가.

"나는 부족한 몸이다만, 일단 랜드필에서 '선생'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너희에게 가르쳐주지."

"공격!!"

오르트리스의 외침과 함께, 눈 먼 자들의 검이 일제히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빠드드드득...!

"커, 허억...?!"

순식간에 자신의 7할을 잃어버린 사내가, 안대가 끊어짐에 따라 다시 드러난 눈으로 나를 마주한다.

"커헉....! 괴, 괴무울...!"

마치 바람 불지 않은 잔잔한 수면처럼 높낮이 없던 어조가 흐트러지며, 공포라는 균열을 자아냈다. 마침내 제대로 앞을 보게 된 사내의 눈에는, 이제서야 겨우 '존중'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바로존중이다. 저승길에서도 잊지 말도록."

그리고 나는 그의 나머지 3할을 바닥에 떨구었다.

"매, 맨손으로... 사람의 척추를, 단숨에 뽑았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참상에, 당장이라도 내게 칼을 휘두르려던 한 눈 먼 자가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나를 향한 공포.

나를 건드려도 될 법한 만만한 적이 아닌, 함부로 덤볐다간 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한 적으로 간주하고 제 몸을 사리는 그 모습.

그게 내가 바라던 거였다. 하지만...

"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너는 너무 늦었어. 내가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낌새를 계속 주었을 때 알아서 잘 사렸어야지.

비명소리, 피냄새, 적의와 공포가 섞인 시선.

나는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그리고 이전에도 산 자의 생명을 끊고 그들을 불사의 군대로 만들 때 그랬듯이, 다음 희생자로 향하는 나의 손길에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패닉에 빠지지 마라! 정의의 여신 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저 거악의 목을 베고, 그로써 우리들의 정의를 증명하라!"

나는 딱히 살인을 즐기지도 않고, 폭력에 취하는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필요한 상황이 찾아 왔을 때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사람도 아니지.

벌써 여섯 놈이 제 몸의 중심이 되는 뼈를 잃고 참혹한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음에도, 아직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두 다스나 남아 있군.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남의 일이다, 이거지. 눈앞에 벌어진 참상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그 근거 없는 확신이 얼마나 오래 갈지 보자고. 너희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여신은, 애초에 너희들 따위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니.

"히익...!"

"...멈춰라, 라그나 아마게돈."

길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치우려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품은 부외자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계의 최강자, 길드 마스터 정 시우가 굉장히 특별해 보이는 검을 한 손에 쥔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미워하지 마라.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개입하지 않기로 맹약을 했던 '승리의 여신'이, 지금 정의의 여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승리의 여신이 저 쪽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이상, 이대로 그녀와 싸워도 무의미하게 패배할 뿐이야. 그러니 지금은 머리를 식히고..."

"아니, 아니지."

나는 그의 말에 부정했다.

"어차피 유스티아, 그 년은 날 내버려 둘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 제대로 보여줘야지. 자신이 누굴 건드렸는지."

빠드득...

"그토록 무시하는 '피조물 따위'에게 안면이 뜯겨 나가면, 그제서야 피조물들을 조금존중할 수 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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