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근데 이제 뭐함? (4)
* * *
헤르몬 왕국의 아마게돈 영지. 몰락 귀족인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다스리는 영지로, 현재는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아가 펼친 대규모 결계인 마법의 안개에 보호 받는 땅이다. 이 땅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라그나 아마게돈을 적으로서 대하지 않는 사람 뿐.
라그나 아마게돈의, 정복 전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공격적인 영지전으로 인해 아마게돈 영지는 대략 면적이 오천 평에 이르었다. 아마게돈 가문이 공작가일 시절보다 배 이상 커진, 현재 헤르몬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그 영지는... 현재 약 일만 명에 이르는 병력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
헤르몬 왕국에 남은 유일한 공작가의 사병 천 여명에, 헤르몬 왕가에서 직접 파병한 왕국 병사 구천 여명까지. 넓은 영지에 비해 자체적인 병력 자체는 불과 이천 명에 불과한 데다가 그 병력의 질조차 압도적으로 좋다고 하기도 힘든 아마게돈 영지의 현재 사정으론 제대로 맞붙는 것도 어렵다. 아마게돈 영지가 아직까지 불타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미스트리아의 마법 안개가 적들의 침입을 불허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마녀 미스트리아의 마법 안개는 강력한 결계지만, 그녀의 원수인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는 결국 그녀의 결계를 뚫고 안으로 침입할 수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가레테 타바코나가 그 수단을 운반하는 동안, 헤르몬 왕국의 병력은 아마게돈 영지를 포위하고선 대치 상태 중이었다.
"저 망할 자식들..."
안개를 코앞에 두고 진지를 세워, 이쪽을 경계하는 병사들 증오스러운 눈으로 쏘아보다, 이내 마르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물러났다. 아마게돈 영지가 포위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전쟁이라도 벌일 수 있는 병력이, 자국의 영지 하나를 탈환하겠다고 아까운 군량을 낭비하고 있다. 일주일 째 외부와의 교류가 끊긴 탓에 아마게돈 영지에는 슬슬 물자가 바닥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저들은 지속적인 보급을 통해 더욱 전력을 견고히 다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시가레테가 운반하는 그 수단이 도착하는 순간 아마게돈 영지는 끝장이다.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되찾은 땅은, 다시 하이에나 같은 귀족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고 그 와중에 이 영지에서 평화로운 삶을 얻은 영지민들의 대다수가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할 터이다. 공작가의 사병 천 명 정도는 그렇다고 쳐도, 설마 헤르몬 왕가에서 귀족들 사이의 영지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불문율을 깨트리면서까지...!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아마게돈 영지를 빼앗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아마게돈 영지의 주인, 라그나 아마게돈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주 목적일 것이다.
귀족으로서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 이웃 왕국의 유적에서 만난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얻은 힘으로 불사의 군단을 통솔하며 헤르몬 왕가 내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세운 것이나 다름 없던 남자, 검은 군대의 라그나 아마게돈. 용사와의 전투에서 생존 유무가 불확실해 졌으며 아마게돈 영지에 마법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게속 유지되는 탓에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사실상 그가 이미 죽었거나 혹은 죽기 직전의 상태라고 추측되는 상황.
라그나 아마게돈에게 조력한 끝에 결국 왕위에 오른 왕자는, 라그나 아마게돈이 가진 개인이 품어선 안 될 힘을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가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라 추측되는 지금, 확실하게 그 불안 요소를 제거함으로서 왕국에 안정을 찾아옴과 동시에 왕으로서의 권위와 귀족들의 지지를 모두 얻어낼 셈으로 공작가의 사병에 왕국의 병사들을 지원 보낸 것이다.
"마르스, 적들의 상태는?"
"어제보다 더 군기가 바짝 들었으면 들었지, 전혀 풀어지지 않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경계만 계속 하면 지루해서 긴장이 풀어질 법도 한데, 지휘관들이 주기적으로 군기를 바싹 넣고 있는 모양이야.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절대 놓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역시 외부에서 물자를 구하는 것은 무리겠네."
미아는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 영지에 이제 한계에 봉착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아마게돈 영지가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영지가 좁았을 적에는 직접 발로 뛰며 다른 영지를 빼앗던 그가 직접 나선다면 더 많은 영지를 빠르고 확실하게 빼앗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부터 영지전을 직접 실행에 옮길 대리인으로 마르스를 임명하고 계속 자신은 영지에 쳐박혀 있던 것은, 되찾은 영지를 다시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기 위함이었다.
불사의 군대를 통솔하는 흑마법사 영주가 자기 영지에 있는데, 어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정신 나간 머저리가 그 영지에 쳐들어가겠는가?
하지만 라그나 아마게돈의 생존 유무가 불확실해지고, 오랫동안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됨으로서 세상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자신들이 잃은 이득을 되찾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다. 존중은 공포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공포를 잊은 자들은 존중 또한 잊었다. 영지를 포위한 채 대기하는 저 일만 여명의 병력이, 그 증거였다.
"후우우..."
미아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남자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언제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어떠한 수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명계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줘서라도 망각의 강을 다시 건너,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가 다시 돌아올 때를 위해, 그가 돌아올 곳을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여태까지 간신히 영지를 지킬 수 있었으나, 그것도 이젠 한계다.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미아는 지쳤고, 뻔뻔한 도적들은 주인 없는 집을 털어먹기 위해 찾아왔다. 이젠, 더 이상 방법이...
쿵...! 쿵...! 쿵...!
"아....."
점차 가까워지는 육중한 소리. 미아는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법 안개 너머로도 그 무시무시한 것의 윤곽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연기의 마녀, 시가레테 타바코나가 안개의 마녀 미스트리나의 마법 안개를 없애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병기, 용아포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포구를 통해 마공학으로 만들어낸 강력한 열기를 뿜어내는 저 병기는, 그야말로 용사가 무찔렀던 마룡이 뿜어내던 지옥의 숨결을 재현한 병기. 특히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조차 전부 불살라버리는 그 흉악한 기능은, 일시적이지만 아마게돈 영지를 지키는 마법 안개를 완전히 소실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연기의 마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길에 들어선 친구였던 이를 향한 증오를 담아 만든 그 대량 학살 병기가, 결국은 도착하고야 말았다.
"....."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마르스는 적들과의 메꿀 수 없는 전력 차에 분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마수 조련사 레이와 신 사하는 체감한 듯 눈을 감았고, 호크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스트리나는 아연한 얼굴로 용아포의 흉악한 외견을 올려다 보았고, 미아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용의 머리를 본 딴 그 거대한 병기의 포구에 산조차도 순식간에 녹여버릴 막대한 열기가 모여들었다. 용아포의 포구에 맺힌 열은 눈부신 밝기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그것이 아직 발포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아마게돈 영지를 둘러싼 마법 안개가 불안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병기가 불을 뿜는 순간, 아마게돈 영지를 지키는 안개는 완전히 걷히며 밖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영지는 완전히 불길에 삼켜질 것이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차라리 죽느니만도 못한 꼴이 되겠지. 헤르몬 왕가에서 공적으로 지정한 라그나 아마게돈의 편을 들었다면서 전부 처벌할 것이다. 그 비극적인 미래를 막을 방법은 이제 없다. 그가 없는 영지를 계속 지켜왔던 미아가 모든 것을 포기한 그 순간.
"미안. 그리고, 고마워."
".....!!"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그러나 그녀가 분명히 아는 그 목소리가,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이제부턴 내게 맡겨."
"아...!"
기다리던 사람이 마침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음을 깨달은 미아는, 이내 그동안 억눌렀던 울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거대한 어둠이, 모든 것을 불태우려는 용의 머리를 물어 뜯는 것을 자신의 두 눈에 담으며.
죽은 이를 기다리던 여인은,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정말로 유스티아의 입에서 정보를 꺼내는 것에 성공했군. 그럼 약속한 대로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내가 가능한 선에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네.]
"제 소원은 전부터 하나였습니다. 루미너스의 세계에 사는 제 사람들과, 다른 세상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내가 니아 씨에게 소원을 비는 와중에, 염소 머리의 검은 악마는 자꾸 나를 돌아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자꾸 자기랑 계약해서 악마가 되지 않겠냐고 꼬드기는데, 그럴 때마다 니아 씨한테 촉수로 두들겨 맞아 놓고서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정말로 소원은 그것으로 충분한가?]
"예, 물론이죠."
[좋아, 그럼...]
드드드드드득.
흙으로 이루어진 검은 촉수들이 바닥에서 일어나며, 서로 섞이고 엮여 이내 둥근 아치형의 문이 되었다. 짙은 보라색 빛이 문의 안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가 되었다.
[나는 자네가 즐거운 노후를 보낼 세계를 찾아보고 있을 테니, 자네는 그녀의 세계에 직접 가서, 자네와 함께 갈 이들을 데려오게.]
자주색 포탈 너머의 풍경은, 마법의 안개로 둘러 싸인 아마게돈 영지와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병사들.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용의 형태를 어설프게 흉내 낸 거대한 병기.
정확한 사정을 따로 들을 필요도 없었다. 보나마나 내가 없는 사이, 나에 대한 공포를 잊은 얼간이 귀족들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며 개짓거리를 벌인 거겠지.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포탈로 몸을 내던졌고,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운 두통과 함께 곧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내가 루미너스의 세계에서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의 배역을 수행할 당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던 방. 그곳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여인이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아.
어쩌다가 인연을 맺게 된 다른 여간부들과 달리, 내가 처음으로 내 자신의 의지 만으로 기반을 철저히 파멸시키고 거둔 여인. 나의 메이드이자, 나를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하는 여인.
자신의 가족과 가문이 불에 타 사라질 때조차 눈물 한 방을 흘린 적 없던 그녀가 구슬피 우는 모습에, 나는 가슴이 절로 아렸다. 내가 없는 동안, 이 영지를 지키겠다고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던 것인지, 지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는 '돌아왔다'라고 먼저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가 눈앞에 있으니까.
"미안."
내가 없는 동안, 나 같은 놈을 위해 고생하게 만들어서.
"그리고, 고마워."
내가 없는 동안, 내가 돌아올 곳을 지키기 위해 힘써줘서.
"이제부터 내게 전부 맡겨."
문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갈 여유 따위 없기에, 나는 거침 없이 창문으로 뛰어 내렸다. 상남자 특, 문 있는데 창문으로 다님.
"이야, 참 많이도 준비했다?"
머릿수가 어림 잡아도 네 자릿수는 가볍게 넘기는데... 아무래도 진짜 작정하고 온 모양이네. 뭐, 그래도 상관 없지.
"흐음..."
파스슥, 하고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힘이 내게 모여든다. 이 세상에 남아 있던 내 전 육체가 가루가 되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불사의 용의 힘이 사용자에게로 돌아온다. 이 힘을 다루는 건 꽤 오랜만인데, 생각보다 잘 될 지는 모르겠다? 내가 힘을 거둠에 따라 마법 안개가 걷혔지만, 대기하던 병사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저 거대한 병기가 뜨거운 화염을 토해내기 직전이었으니, 제 몸을 바삭하게 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기다릴 수 밖에 없겠지.
"이렇게, 하는 거였지?"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나는 이전에 다루던 힘을 끌어 올렸다.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을 퍼내듯, 끝이 없는 마력이 용솟음치며 거대한 어둠이 일어난다. 내가 검은 군대라고 불린 이유는, 죽지 않는 병사들을 앞세워 일방적인 학살과 승리를 통해 영지를 키워 나갔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거대한 어둠은, 그 불사의 군대를 하나로 모아서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저 거대한 병기를 박살내기 위해 필요한 건 죽지 않는 병사들이 아닌, 거대한 괴물이었으니까.
"!!!"
나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지휘자처럼 손을 내저었다. 사실 내가 불러낸 이 거대한 어둠을 부리는 것에 굳이 그런 제스쳐를 취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일종의 퍼포먼스니까.
"괴, 괴, 괴물...!"
"그럴 리가...!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은, 죽었던 게...?!"
내가 이 거대한 어둠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저들의 눈에 확실히 각인 시키기 위한 퍼포먼스. 설령 내가 나타나지 않아도, 다시는 이 땅을 넘볼 마음을 품지 않게 만들기 위한 작업. 내가 손을 휘젓자, 그에 맞추어 어둠의 거인이 주먹을 휘둘러 불을 내뿜기 직전이었던 병기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거대한 병기가 뒤로 밀려나면서, 강렬한 불길이 아마게돈 영지가 아닌 텅 빈 하늘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눈부신 불기둥이 하늘을 밝히고, 이내 용머리의 병기가 뒤로 완전히 넘어가며 거대한 충격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준비한 비장의 병기가 단 일격에 박살난 것에 경악한 얼굴로 침묵하던 이들의 시선이 곧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인에게로,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그 거인을 지휘하던 내게로 향했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공포와 혐오와 증오로 점철된 시선. 나는 그에 호응하듯, 이제는 매우 익숙해진 아주 사악하게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살갑게 대꾸했다.
"오랜만이다?"
거대한 어둠을 다시 수천 마리의 불사자로 이루어진 불멸의 군대로 변환하며, 나는 그들의 기대에 응했다.
"내가 없는 동안, 제법 살만 했나 봐? 감히 내 영지를 공격하려고 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나는 라그나 아마게돈. 영웅에게 죽고,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야 하는 악역.
악역을 죽여야 하는 영웅이 죽은 이 세상에서, 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
"라그나 아마게돈 남작이..."
"살아 있어...?"
눈앞에 나타난 나로 인해 잊고 있던 공포가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두려움이라곤 모를 것만 같던 백전불패의 병사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히거나 무기를 쥔 손을 파들파들 떨며 한 명씩 천천히 뒷걸음친다. 탈영병들을 막는 것은 지휘관들의 소임이지만, 문제의 지휘관들은 이미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 영지를 침입한 이들의 대다수는 이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거나 혹은 나로 인해 벌어진 참상을 본 적 있는 자들이고, 그들의 기억 속에 새겨진 두려움이 그들의 투지를 좀먹었다.
"아마게돈 남작이 살아있다!!"
"제, 젠장...! 이건,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겠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왕이 어느 날 갑자기 부활하면, 대략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지휘관이고 병사고, 너나 구분할 것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기고 갑옷이고 죄다 내던지며 달아나는 모습이 참 장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디, 나에 대한 공포를 다시 각인 시키기 위해선... 3할 정도만 살려 보내도 충분하겠지?"
나의 지시에 따라, 오랜만에 깨어난 불사의 군단이 다시금 진격한다. 투지를 상실하고 전장을 이탈한, 주인이 없는 집을 털려 했던 겁쟁이 도적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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