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떼 속, 한 마리의 (5)
“아― 다행이네요. 혹시 주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옅은 달빛을 받아 더 뽀얗게 빛난다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새하얀 피부.
책장 틈으로 몸을 반쯤 내민 차설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시선에 옅게 웃었다.
고장훈과 안세준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내게 머무는 동그란 눈.
그 화려한 이목구비에 맺혀있는 아주 형식적인 미소에도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감탄으로 살짝 벌려진 입.
꿀꺽―
바로 옆에서 천둥소리처럼 목젖이 꼴깍이는 소리와 함께 고장훈이 내게 몸을 바짝 붙였다.
게다가 덜덜 떨며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만 있던 안세준조차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염없이 차설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에게 미녀란 어떤 존재일까.
누군가 내게 그걸 묻는다면 나는 이 어이없는 풍경을 답으로 제출했을 것이다.
철저히 내 통제 아래 놓여있던 두 놈조차도 차설희라는 존재 하나에 하지도 않던 이상행동을 시작했다.
특히나 고장훈.
이 새끼가 진짜 안 처맞아서 이러나?
내게 바짝 붙어있는 놈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자 바보같이 차설희를 헤― 거리며 보고 있던 고장훈이 움찔거렸다.
곧바로 헤헤― 거리며 짜증 나게 붙어있던 몸을 떼는 고장훈.
이 새끼가 지금이 좀비 수색 시간인 줄 아나?
왜 나한테 가까이 붙는 거야 기분 뭐 같게.
차설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고장훈을 계속해서 노려보자 그제서야 고장훈이 다급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차설희를 필사적으로 곁눈질하는 고장훈의 눈알.
……허.
어이없음에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난 잔웃음이 잔뜩 맺힌 얼굴로 다시 차설희와 눈을 맞췄다.
그래도 고장훈의 병신 짓 덕분에 나름 빠르게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늦은 밤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그래도 다른 분들 걱정 안 시킬 시간이 지금뿐이라.”
걱정을 안 시킨다라…….
나름 빙빙 돌려 말한 것 같은데, 쉽게 풀이하자면.
도서관 캠프 사람들 몰래 나올 수 있는 게 지금 뿐이었다는 말이었다.
“하긴― 어련하시겠어.”
차설희의 형식적인 미소에 날아드는 비아냥.
“어디서 온지도 모를 개족보 판사 한 명이 사람 하나를 대낮에 끌고 갔는데 거긴 지금 난리가 났겠지.”
“…….”
“사람 하나 사라진 줄도 모르고 개노답 회의에 열중이지 않을까.”
“…….”
툭― 찔러보는 물음에도 자연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차설희.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은 차설희가 구석에 박혀있는 안세준을 잠시 바라보곤 다시 나를 응시한다.
“저는 그쪽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할 마음도 없고, 굳이 엮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차설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한세계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거래?”
“네. 당신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생각할만한 정당한 거래.”
강조하듯 ‘정당한 거래’을 또박또박 발음한 차설희가 팔짱을 끼며 책장에 등을 기댔다.
“……와.”
그 모습에 리액션처럼 곧바로 튀어나오는 감탄.
바로 옆에서 멍청하게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곧바로 얼굴이 찌그러졌다.
허나, 차설희는 아무렇지 않은지 고장훈에게 작은 미소로 화답하곤 우리에게 손가락 5개를 활짝 폈다.
“5억을 드릴게요.”
그것도 개인당 5억.
게다가 일을 빨리 끝내주시면 보너스도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차설희가 스스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연분홍빛 입술에 손가락을 톡― 톡― 두드렸다.
“어쩌면 보너스가 여러분들한테는 메인일지도 모르겠네요. 일주일 안에 해결해주시면 2배. 3일 안에 해결해주신다면―”
마치 무대에 선 아이돌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뜸을 들이는 차설희.
진한 미소로 잠시간 말끝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가 손가락 4개를 다시 폈다.
“4배.”
그러니― 개인당 20억.
“만약 두 분이서 해주신다면 40억. 만약 안세준 씨도 같이해주신다면 정확히 60억이겠죠?”
다소 현실감이 매우 떨어지는 제안이었다.
그녀같이 돈방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에 걸쳐도 모으기 힘든 금액.
“……그 해결해야 할 일이 정확히 뭐, 뭔데요?”
지금껏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안세준의 입을 떡― 벌리게 하는 제안이었다.
안세준의 물음에 더 부드러운 미소로 머금은 차설희가 다시 팔짱을 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제 동생을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와주세요.”
“……여기서 차설희가 말하는 동생은 같은 하이퀸즈의 멤버인 차하얀을 말하는 겁니다.”
차설희의 제안이 끝나자마자 귓속말로 흘러들어오는 속삭임.
고장훈이 중요한 정보를 전하는 것마냥 자기 입을 가리고 내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친자매가 같은 그룹에 속해있는 것도 매우 희귀한데, 그 자매가 그룹의 개인 팬 순위 1, 2위를 다툰다? 이건 걸그룹 덕후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셀링 포인트죠. 안 그래도 차설희와 차하얀의 가족관계가 하이퀸즈의 초반 화제성 몰이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 덕후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여겨집니다. 그 둘은 팬들 사이에서 ‘찐자매즈’라고 불리며―”
뭔, 나무위키마냥 갑자기 술술 새어 나오는 연관 정보.
이상한 열정을 가지고 설명충에 빙의한 고장훈의 말을 끊을 요량으로 차설희에게 반문했다.
“차하얀을 ‘다시’ 이곳에 데리고 오라고?”
“네. 지금 제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고 있으시죠?”
그건 당연히 알고 있다.
나 같은 아싸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대학 전체가 요동쳤으니까.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저랑 하얀이가 여러분들이랑 똑같은 반석대 재학생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학교 관계자분들이 그동안 너무 많은 편의를 봐주셔서 그분들 부탁도 들어드릴 겸, 자컨 겸 학교 홍보 영상을 찍으러 온 건데―”
“……여기서 자컨이란 ‘자체 컨텐츠’의 줄임말로―”
고장훈의 속삭임 덕분에 양쪽 귀가 동시에 포화 상태였다.
난 통역사 겸 설명충이었던 고장훈의 말을 끊으며 그에게 읊조렸다.
“나도 알아.”
“……녜?”
“나도 안다고.”
나지막한 속삭임에 멍청하게 되물었던 고장훈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작게 벌렸던 입에 은근한 미소를 품은 채 알겠다는 눈빛으로 눈썹을 기분 나쁘게 움직이는 고장훈.
“……아하―.”
뒤늦게 튀어나오는 이상한 음색의 대답과 놈의 얼굴을 보니 스멀스멀 튀어나오는 불쾌감에 자연스레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
언제나 내 기분을 찰떡같이 알아차리는 고장훈이 서둘러 얼굴 표정을 지우고 먼 산을 보듯 정면을 주시했다.
“여, 역시 하이퀸즈. 국민걸그룹 하이퀸즈.”
할아버지, 할머니도 안다는 하이퀸즈.
그리곤 기계처럼 반복하는 중얼거림에 화를 꾹 누르곤 다시 차설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석대를 홍보하는 영상이기도 했으니 대학 전체를 담아야 했죠. 게다가 자컨이긴 해도 당연히 유튜브에 올릴 영상이니까 그냥 홍보하기보다는 보물찾기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당연히 방송이니까 동시에 출발하는 것도 그림이 안 살잖아요?”
어느새 방송적으로 알맞은 그림으로까지 진행된 이야기.
“출발하는 것도 복불복으로 정했어요. 하얀이는 1등으로 학생회장 가이드까지 붙어서 나갔고 다른 멤버들도 순서에 맞춰서 나름의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나갔어요. 그리고 꼴등이 바로.”
저.
손가락으로 자신을 콕 찌르며 답하는 차설희.
“드디어 제 순서가 돼서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주변이 엄청 시끄러워지는 거예요. 뭐랄까― 평소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그날을 회상하듯 잠시 먼 곳을 바라보던 차설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 저 혼자 여기에 있네요.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진 채로, 하나뿐인 여동생도 없이 이곳에 혼자.”
팀장님도, 로드 매니저들도 없이 정말 저 혼자.
그러니까 지금껏 들은 차설희의 말을 요약하자면, 그냥 갑자기 일어난 좀비 아포칼립스에 다 뿔뿔이 흩어졌다는 걸 상당히 길게 말한 거랑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차하얀은 어디를 홍보하러 갔는데?”
제일 중요한 걸 묻는 물음에 잠시간 말을 멈추는 차설희.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곤 작게 말했다.
“……농과대요.”
“농과대. 농과대학.”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옆에서 기함을 하는 고장훈.
“……농과대는 반석대―”
또다시 설명충에 빙의하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서둘러 말을 멈추는 고장훈.
혹시나 불똥이 튈까 서둘러 자기 입술을 짝― 짝― 때리는 손짓을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계속해.”
“……녜?”
“이건 계속하라고.”
……아.
잠깐 덜컥이던 고장훈이 이번엔 표정 변화 없이 서둘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농과대는 반석대 제일 끝에 위치한 단과대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정문 쪽에 가까운 저희 인문대나 도서관이랑은 거리 차이가 좀 상당하죠.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농과대에서 매일 자기들이 농과대라서 산 옆에 붙여놨냐고 대학 순환 버스 확대 운행하라고 난리란 난리는 다 피우고 현수막 달고, 시위하고―”
아―
고장훈의 말을 들으니 정문 앞에 달려있는 현수막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대학 안에 있는 단과대라 해봐야 인문대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내게는 굳이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없던 단과대이기도 했다.
그러니 연예인 많이 다니고, 학교가 으리으리하게 넓다는 게 주요 자랑 포인트였던 반석대 최끝단에 있는 여동생을 데리고 와라.
그럼 개인당 최소 5억을 주겠다?
“……어이가 없네.”
“……지금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내 중얼거림에 곧바로 튀어나오는 날선 반응.
난 실실 웃는 얼굴로 차설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먼저 차하얀이 뒈졌는지 안 뒈졌는지 어떻게 알고?”
“초면에 계속 반말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말은 좀 가려서 하세요. 하얀이는 살아있습니다.”
최소한 어제까지는, 무조건.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주듯 자신의 스마트폰을 까닥― 까닥― 흔드는 차설희.
“사장님, 본부장님, 팀장님, 실장님, 매니저들 전부 다 연락이 안 되도 하얀이는 어제까지 연락이 됐어요.”
그러니, 전기가 끊기기 전까지는 연락이 됐다는 말인데.
“분명히 농과대에서 아직까지는 안전히 있다고 오히려 저를 걱정했다구요. 거기도 이쪽이랑 비슷하게 생존자들끼리 뭉쳐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거 때문에 더 불안하니 하얀이를 최대한 빨리 데리고 와야겠어요.”
하긴, 이런 세상에선 혼자 있는 것보다 오히려 여럿이서 있는 게 더 불안한 요소일 수도 있었다.
그게 차하얀처럼 아주 특출나게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차설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던지는 물음에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변한다.
“아이돌한테 가장 넘치는 게 뭔지 아세요?”
“……돈?”
“아니요. 시간이에요.”
특히나 스케줄과 스케줄 사이의 대기 시간.
밴에서든 대기실에서든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의 지옥.
“그렇게 쪽잠으로 시간을 떼우는 것도 지겨워지면 다들 그 대기 시간 동안 할만한 취미를 구하죠.”
저는 그게 영화를 보는 거였어요.
“하얀이랑 같이요. 그렇게 넘치는 대기 시간동안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이랑 똑같은 영화도 자주 보게 돼요.”
어두운 밤에 울리는 듣기 좋은 미성 때문인지,
아니면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발달한 부분 덕분인지.
차설희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이상하게 같잖고 짜증 났던 구예리와의 대화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내 얼굴을 찌르듯 가리키는 길고 가녀린 손가락.
‘지금’을 가리키기엔 상당히 부적절한 대상이었다.
“좀비 영화. 하얀이는 공포 영화라면 질색을 하면서 도망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끝까지 보는 아이였거든요. 그러면서 밤에는 자꾸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며 칭얼거리는 아이였구요.”
그렇게 좀비 영화를 보고 칭얼거리는 하얀이한테 제가 어떻게 말했는지 아세요?
마치 선생님처럼 차분한 눈동자로 내게 묻는 그녀.
차설희는 앞에 차하얀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좀비가 수천, 수백만 명이 나타나도 영화 같은 일은 없다고. 결국 현대화기로 무장한 군대에게 제압당해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고. 그러니 허튼 짓하지말고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고.”
마치 나에게 경고하듯 이어지는 차분한 속삭임.
“이 단순한 해프닝에 저는 돈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에요. 돈은 또다시 벌면 되니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제 동생을 안전히 데리고 와주신다면 왜 연예인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는지 제대로 보여드릴게요. 동생이랑 저를 이 해프닝이 끝날 때까지 안전히 보호해드리면 하루마다 천만 원씩 보호비를 내겠습니다.”
만약 보호받는 기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보호비도 사리에 맞게 올려드리겠습니다.
쐐기를 박듯이 이어지는 차설희의 차분한 미성.
난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차설희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놀랍고 말이 되는 제안이었다.
또한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경고이기도 했다.
“깊게 생각하시고 움직이시는 한세계 씨라면 지금 이 제안이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일지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깊게? 생각?”
난 차설희의 말에 어이없게 웃으며 안세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나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처맞은 안세준.
하지만 차설희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원래 안무 대형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틀린 걸 잘 몰라요. 밖에 있는 사람이 가르쳐줘야 알지.”
……허.
그녀의 말에 캠프 외곽에서 차분히 나를 바라보던 차설희의 눈빛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금과 같이 별빛같이 반짝이는, 하지만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보는 저 눈동자.
저 눈동자가 부회장과는 그리고 구예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감정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하긴, 어디서나 탑을 찍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 특별하고 더 구미가 당긴다.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차설희는 알까?
지금 저런 모습이 오히려 내 정복욕과 소유욕을 미치게 들끓게 하고 있다는걸.
“영화를 많이 봤다니까, 나도 영화로 말할까?”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차설희에게 선선히 던지는 물음.
“예전에 어떤 영화를 보고 관람객들이 말도 안 된다고 눈살을 찌푸렸다고 하더라고.”
고작 감기에 온 세상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 그 고작이 현실이 된 세상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가끔 현실은 영화적 상상을 아주 가뿐히 뛰어넘어. 이번에도 혹시 모르지.”
영화적 상상을 아주 가뿐히 뛰어넘는 현실이 찾아올지.
웃음기 가득한 내 대답에 무표정이던 차설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쩌면 지금 우리를 덮친 이 현실은 네가 바라던 해프닝이 아니라―”
사실―
어쩌면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쓰임새가 존재한다.
원인도 모른 채로 내게 속해있던 상태창이 결국 쓰임을 다하는 것처럼.
[부분무능(部分無能) Lv.1]
이 어색한 이름의 스킬 또한 어딘가에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좀비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무효화 스킬.
이 스킬의 쓰임새가 어디인지 추론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능.
그 이능을 무효화하는 스킬.
당연히 이 스킬을 가진 내가 있다면―
내 스킬이 쓰임새를 다할 상대가 있어야 했다.
어쩌면 지금 반석대 안에서도 나와 같은 존재가 좀비들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나와 비슷한 존재들과 벌어야 하는 필연적인 치킨 레이스.
그리고 그 레이스의 무대가 될 좀비로 가득 찬 이 세상.
이미 이 세상은 해프닝이 아니라―
“……‘종말’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종말에서는―
“콜라 병뚜껑은 아니더라도 그 넘치는 돈은 별로 쓸모가 없을 것 같은데?”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마주했다.
아래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누가 그린 것처럼 오밀조밀한 그녀의 이목구비.
“깊게 생각하시고 움직이시는 차설희씨라면 이럴 때 무엇이 매력적인 제안일지 잘 아실거라 생각하는데?”
“…….”
난 아무 대답도 없는 차설희를 노골적으로 눈동자에 담았다.
컨셉이 여대생인 것을 아주 잘 알려주듯 길게 쭉 뻗은 청바지와 그 위의 하얀색 블라우스.
특별할 것 없는 패션을 더없이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유려한 곡선들에 자연스레 하반신에 힘이 몰린다.
이미 한계까지 빳빳해진 자지가 트레이닝복 아래에서 격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당신 이거 성희롱인 거 알아?”
그리고 남자들의 이런 눈빛에 어쩌면 제일 익숙할 그녀가 경멸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쏘아대고 있었다.
정말―
할 수 없을 때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있는대도 하지 않는 건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바로 저 경멸하는 얼굴을 그대로 강제로 눕혀버릴 수도 있었다.
이미 한계까지 발기한 자지를 저 연분홍빛 입술에 처박을 수도 있었고―
저 묘하게 성욕을 자극하는 청바지를 찢어 곡선이 이쁜 엉덩이 사이에 가려진 보지에 그대로 도장 찍듯 박아버릴 수도 있었다.
갑작스런 강간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입을 막고 그대로 정액을 보지에 싸버릴 수도 있겠지.
아주 확실히― 또래 남자들에게 가장 정복욕을 돋구는 여성의 보지 안에 영역표시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
하지만―
난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눈짓했다.
“고자야, 내가 한 말의 어떤 부분이 성희롱이었지?”
“어― 아무래도 설희 씨가 조금 예민해지셨나 본대요? 제가 보기엔 아주 건전한 토론 중이셨습니다.”
“그렇지?”
난 차설희에게 보란 듯이 웃으며 한쪽을 발길질했다.
툭―!
내 발길질에 서둘러 나를 올려다보는 큼지막한 눈망울.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를 놈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세준아. 네가 보기엔 어느 부분이 성희롱이었냐?”
“……요.”
“세준아. 좀 크게 말해야지. 앞에 계신 우리 탑 아이돌님께서 안 들리시잖아.”
“……자,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지? 네가 봐도 잘 모르겠지?”
“……네.”
난 안세준의 확답까지 받아내곤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벌어지는 광경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차분히 바라보던 그녀가 짓씹듯이 내게 읊조렸다.
“……개새끼.”
역시 외모가 되니까 저런 욕지거리도 어디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 같네.
난 끝까지 나를 노려보다가 등을 돌리는 차설희를 조용히 응시했다.
저런 여자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삼수생 고아 새끼가 얻으려면 말이야.
당연히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되겠지.
아주, 아주 많이 특별한 방법이 필요할 거다.
‘굴복’과 ‘복종’.
이런 세상이 찾아오고 나서야 내가 찾아낸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인간관계.
하지만 지금까지의 굴복과 복종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됐다.
폭력만큼 공포심을 돋구고 반항을 꺾기 쉬운 방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차설희에게 필요 이상의 폭력을 쓰는 건 조금 마음이 걸리적거렸다.
그 누구도 온전한 예술품을 가지고 싶지, 훼손된 예술품을 가지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차설희는 이미 도서관 캠프에 얽매인 몸이다.
굳이 부드럽게 잘 이행되고 있는 계획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도서관 캠프를 완전히 장악하면 차설희는 자연스럽게 내게 떨어질 퀘스트 보상 같은 존재였으니까.
“명심해, 차설희.”
그러니,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뒤에.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기어간 나의 속삭임이 차설희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내 부름에 몸을 멈칫거리는 차설희.
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개새끼.
“종말엔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는 거야.”
그러니―
넌 결국 다시 내게 돌아오게 될거다.
지금과는 다른 조건을 들고서.
양 떼 속, 한 마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