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35화 (35/120)

왕의 기원 (5)

툭―!

조용히 박태하를 재촉하는 한세계의 손짓.

너무나도 가벼운 손짓에 크게 휘청이는 박태하의 걸음이 뒤로 이동한다.

“가. 구예리는 이제부터 네 거야. 그 좆같았던 씨발년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봐.”

하아― 하아― 하아―

한세계의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정신이 멍해진다.

그저 제어도 못할 만큼 거친 숨이 새어 나오며 머릿속에 이명이 가득 찬다.

삐이이이이―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시야와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이명.

그리고 그 중앙에서 옅게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한세계.

그의 얼굴이 점점 확대되며 선명해진다.

그럴수록 주체할 수도 없이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들끓었다.

마치 끝까지 억누르고 있던 봇물이 터지듯 제어할 수 없는 물결이 하반신으로 가득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박태하는 이 물결을 잠재울 방법을 알고 있다.

‘가.’

박태하의 머릿속에 선명해지는 그의 음성.

차츰차츰 망설이듯 느리게 뻗던 뒷걸음질이 점차 빨라진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돌린 박태하가 완전히 임시 거처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태하 선배?”

그런 박태하를 발견하고 의문을 내뱉는 구예리.

하아― 하아― 하아―

한세계는 그의 귓가에 너무나도 선명히 들리는 거친 호흡을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띠링―!

[‘박태하’가 당신에게 ‘아주 강하게’ 복종합니다.]

[복종 요인 : 책임을 대신해 줄 ‘아주 강한’ 도피처, 폭력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배고픔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지나치게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 만들어낸 박태하의 짙고 짙은 그림자.

억지로 꾹 누르고 눌렀던 무언가가 한세계가 비틀어 연 틈으로 범람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배? 왜 그러세요?”

점차 다가오는 박태하를 보며 걱정스레 묻는 구예리.

짜아아악―!

“아악―!”

허나, 그에 대한 답은 거친 손바닥이었다.

구예리가 책장에 부딪히며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온다.

손전등과 책장 사이의 틈으로밖에 유추할 수 없는 상황.

바닥에 쓰러진 것이 분명한 구예리에게 커다란 덩치가 몸을 숙였다.

찌이익―! 찍―! 찌이이익―!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친 손짓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옷 찢어지는 소리.

“아아악―! 서, 선배! 선배 갑자기 왜 그러세요! 태하 선배!”

“닥쳐. 닥쳐, 씨발년아.”

“우읍―! 우으으읍―!”

박태하에게 입이 막힌 듯 구예리가 웅웅거리며 생선처럼 팔딱이는 게 책장 틈 사이로 여실히 보였다.

구예리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의 반대쪽 손이 급하게 박태하의 바지춤을 두리번거린다.

스르륵― 바지가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더 가까이 구예리의 몸에 바짝 붙는 곰 같은 덩치.

“우으으읍―! 우으으으읍―!”

더 격하게 반항하기 시작하는 구예리였지만, 애초에 체격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로 벌려진 만큼 반항은 무의미했다.

“크허― 하아아아―”

“우으으으읍―! 우으으으으으읍―!”

더 가까이 허리를 붙인 뒤 만족스럽게 으르렁거리는 박태하의 거친 숨.

이내―

“푸하―! 이거 놔―! 이거 놔아아아아, 켁! 케엑―!”

퍽―! 퍽―! 퍽―!

구예리의 목이 졸라지는 소리와 허벅지와 엉덩이가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켁―! 케에에엑―!

“하아― 크허― 허어어―”

박태하의 짐승 같은 신음과 그에게 깔린 채로 파닥거리기만하는 구예리의 얇은 다리.

퍽―! 퍽―! 퍽―!

세차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짐승 같은 신음 외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박태하의 캠프에 속해있던 모두가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리고 빛에 반사되는 강간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현실이 아니라는 듯 세차게 흔들리는 그들의 동공.

팅―!

그들의 동공이 이질적인 소음에 잠시간 떨림을 멈춘다.

“스스로 뒤질 용기도 없는 버러지 새끼들.”

한세계가 천천히 쇠 파이프로 책장을 두들기며 그들에게 오고 있었다.

“내가 주는 선처를 받아먹고 살던 기생충 새끼들.”

한세계는 마치 뱀처럼 스멀스멀 캠프원들 사이를 거닐었다.

아무렇게나 툭― 툭― 건드는 쇠 파이프가 내는 뾰족한 소음과 나지막한 욕설.

“크허― 하아― 하아아아―”

간간히 새어 나오는 박태하의 신음 외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처형자를 기다리는 수감자 마냥 애처롭게 턱을 바르르― 떨 뿐이다.

“가장 무가치한 것에 매달려있는 병신 새끼들.”

툭―!

장난처럼 얼어붙은 캠프원들의 팔뚝을 치대는 쇠 파이프.

한세계는 그들을 천천히 누비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중 제일 소름 끼치는 건, 네놈들이 우리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3층과 4층을 정리하고, 좀비를 죽이고, 식량을 구하고, 앞으로 살아갈 공간을 정리할 동안.”

한세계는 쇠 파이프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캠프원들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그런 우리를 욕하면서 반 시체처럼 천장이나 보며 나뒹굴었지. 우리가 주는 음식만 돼지 새끼처럼 축내면서 말이야.”

그러니, 너희들 입으로 직접 말해 봐.

“너희들이 우리보다 나은 점이 뭔데?”

“…….”

그 누구도 지금, 이 순간에 입을 열 담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한세계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좋아. 그럼 더 쉬운 걸 물어보지.”

그는 다시금 박태하 캠프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다음 계획이 뭐였어?”

“…….”

“그러니까 만약 운 좋게 나를 죽였다면, 그래서 캠프를 장악했다면 그다음 계획이 뭐냐고.”

“…….”

“내가 얻은 식량을 돼지 새끼처럼 다 낭비한 후의 너희들의 계획이 뭐였냐고―!”

점점 고조되는 고함에 몸을 파르르 떨어대는 캠프원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질문에 한세계가 선고했다.

“그게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유야.”

한세계는 검지를 까딱― 까닥― 흔들며 말을 이었다.

“유일한 이유이자 차이지. 너희들과 우리의 차이.”

그는 까딱― 까닥― 흔들던 손가락으로 캠프원들을 찌르듯 가리켰다.

“우리 애들은 주제를 아는데, 네놈들은 자기 주제를 몰라.”

대학생.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것 마냥, 진짜 자유를 얻은 것마냥 망아지처럼 날뛰던 너희를 생각해 봐.”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술을 처마시고 토를 해대며 뭔가 이제 진짜 어른이 됐다고 느꼈겠지. 부모님과 선생님의 간섭이 없는 진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병신 새끼들.

“부모의 지원과 대학이라는 또 다른 학교에 다니면서 자유는 지랄. 너희들이 여태껏 맛본 자유가 달콤했던 건 너희가 통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부모, 사회, 시스템.

크든 작든 모두에게 작용하던 동일한 통제.

“이제 다 큰 것마냥 날뛰던 네놈들도 사실 누군가의 통제안에서 살았다는 거다, 이 버러지 새끼들아.”

그런 이들에게 정말 갑작스럽게 진짜 자유가 찾아왔다.

법과 사회 시스템이 모두 무너지고, 경찰과 군인, 선생과 부모가 모두 사라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또 책임져야 하는 진짜 자유.”

어때?

한세계는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이제야 맛본 진정한 자유는 달콤했나?”

“…….”

“아니, 상상한 만큼 그리 달콤하진 않았겠지.”

그리고 깨달았는지도 모르지.

“자신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던 주인공들처럼 특별하지 않다는걸.”

그들처럼 강하지도, 똑똑하지도, 의지가 굳세지도 않다.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에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엔 너희는 너무 나약하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았겠지.”

“통제안에서 살아가던 너희에게 자유는 버거울 만큼 무거웠겠지.”

그래도 너무 자책하지 마.

“이건 너희가 유독 나약해서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니까.”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너희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어.”

아주 많았지.

쏘아붙이듯 날카로운 말이 어느새 부드러운 분위기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 버거움에서 벗어났는지 알아?”

갑작스레 누군가가 해주는 동화처럼 부드러운 속삭임.

“너희들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난 거야.”

그리고 그 누군가가 말해.

“내가 너희들의 그 버겁고 무거운 자유를 거둬 가주마.”

내가.

“너희들에게 가장 자비로운 자비를 선물해주마.”

너희들을.

“통제해줄게.”

한세계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이들에게 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부터 너희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던 책임과 고뇌에서 해방된다.”

“오늘부터 너희는 혼자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던 적과 위협에서 벗어난다.”

오늘부터 너희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고 내가 바라는 일만 하고 나만 올려다본다.”

그것만으로―

“너희는 좀비에게 망가진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거다.”

“그저 내 지시를 따를 뿐인데 안심하고 잘 수 있는 집이 생기고, 걱정 없이 배를 불릴 음식이 생기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땅이 생길 거다.”

“최선을 다하는 자에겐 합당한 상을 주고 마땅히 벌해야 할 자는 직접 벌해주마. 그저 내 지시를 따르는 것만으로 너희는 더 나은 세상에 이바지하는 거다.”

그러니―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한세계는 모두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

눈을 깔고.

“복종을 표해.”

빌어.

질질 울면서 내게 선처를 애원해.

“그럼 내가―”

띠링―!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람하듯 시야를 가득 메우는 상태 메시지.

한세계가 쏟아지는 상태 메시지를 한켠으로 치우며 찢어질 듯한 미소를 내지었다.

그것은―

폭력이 점차 낯설어지는 현대에 점점 흐릿해지는 이름이다.

평등과 권리라는 미명 하에 해체되고 대체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어느덧 메시지를 모두 치운 그의 시선에 맞닿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광경에 더 없이 가슴이 두근거린다.

언제나 망상하듯 바라고 갈구하던 그대로의 광경.

한세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아니― 그보다 더 먼 곳에 있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이들보다 하늘에 가까웠던.

천명의 대리자이자 지존(至尊).

내가―

그럼 내가 너희들의―

“왕이 돼줄게.”

왕의 기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