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38화 (38/120)

도서관의 왕 (3)

“아이고오오오―! 오셨습니까, 오셨어요, 헤헤―!”

“정말 정말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헤헤헤―!”

2층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겨오는 호들갑.

익숙한 호들갑에 조금 낯선 세트가 끼여 있었다.

간신처럼 헤벌쭉― 웃으며 서둘러 내게 달려오는 고장훈과 강청신.

내겐 고자와 춘식이로 부르는 게 더 편한 간신 듀오가 서둘러 내 옆에서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저희만 염치없이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일하느라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헤헤―”

“모릅니다, 헤헤헤―”

난 그중 낯설지만,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는 강청신을 제법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냥 저 모습만 봐도 왜 고장훈이 그렇게나 강청신을 믿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소름 끼칠 만큼 똑 닮은 후배를 데리고 있었네.

“헤헤헤―.”

난 내 헛웃음을 보고 더 바보 같이 헤헤거리는 강청신을 보며 잠시 뒤를 곁눈질했다.

지금 이 춘식이의 모습을 나와 함께 보고 있을 수색조의 눈길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젠 병신이 아니라면 누구나 밤의 기습이 왜 실패했는지 알 수 있겠지.

허나, 일의 전말을 파악한 수색조원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병신 같은 놈들이라도 모를 수가 없다.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우리 춘식이.”

“헤헤헤―”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더 공손히 허리를 굽신거리는 강청신.

“뭐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고?”

“아이고― 하나도―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요, 헤헤헤―.”

오로지 진심만으로 가득한 얼굴로 헤엄치듯 팔딱거리는 손짓.

난 공손함과 비굴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환한 미소에 마주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너라면 오르지도 못할 나무에 한창 자지를 박고 있을 텐데 불만이 있을 리가.

아마 지금도 놈의 머릿속엔 내게 배정받은 여자를 가지고 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놈이 내게 공짜로 포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세상 급한 표정으로 숨을 더럽게 헐떡대며 우리에게 달려왔던 놈의 얼굴이 지금 헤헤―거리며 추하게 웃는 얼굴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편을 잘 고르는 것도 결국 놈이 가진 능력이다.

건강한 집단은 반드시 집단원의 노력과 열의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보상을 받은 집단원의 충성심과 효율이 우상향을 이루니까.

“……그래, 고자야.”

난 강청신 옆에 붙어있던 고장훈을 조용히 호명했다.

언제나 그랬듯 다소 애매모호한 내 눈빛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고장훈.

툭―!

고장훈이 서둘러 강청신을 팔꿈치로 찌르며 눈치를 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는지, 강청신이 사극에서 신하가 퇴장할 때처럼 궁둥이를 쭉 빼고 끊임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열성적으로 나불거리는 입이 어딘가 너무 익숙해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난 강청신이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 얌전히 뒤에서 대기 중이던 박태하에게 눈짓했다.

내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색조원들을 인솔하려던 박태하.

“……편하게 쉬고 계십셔. 보고 끝나면 제가 바로 가서 안내하겠습니다.”

수색조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그가 고장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최종 확인을 바라는 눈빛에 나 또한 고장훈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수색조에 여자들 배분해야 하는 걸 잊고 있었네.

뭐, 이 부분은 내가 신경 안 써도 고장훈이 알아서 잘 관리할 듯싶었다.

역시 고자.

역시 유능한 간신배 새끼.

능글맞게 웃고 있는 고장훈에게 작게 웃어주며 박태하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예.”

짧게 대답한 박태하가 수색조를 인솔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를 굽신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하는 고장훈.

“일이 계획대로 술술 풀린 것 같아 다행입니다, 즈으으은하아아아―.”

둘만이 남게 되자 기쁨이 넘실거리는 목소리로 또다시 호들갑을 떠는 고장훈.

누가 그 후배의 그 선배 아니랄까 봐, 어디 사극에서 나오는 발성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저절로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뭔가― 뭔가 이상하게 듣기 거북하고 속된 말로 오글거렸다.

왕처럼 살아가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내가 확보한 구역이 도서관밖에 없다는 것에 나 스스로도 절로 코웃음이 나올 정도인데.

전하라…….

이건 어디 산골의 동네 대장이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어― 듣기 불편하시면 다시 조장님이라고 부를까요?”

“이제 수색조장은 박태하고.”

“어어― 그럼 혹시― 생각해두신 호칭이라도오―?”

내 불편함을 알아차린 고장훈의 조심스런 물음.

난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뭐 조선시대 왕이 된 것도 아니고 부르고 싶은 대로 편하게 불러.”

“……어어― 그게 제일 어려운데요?”

내 선처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쌍한 표정을 짓는 고장훈.

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괜히 복잡해진 문제를 빠르게 차단했다.

“아― 몰라. 그럼 너희가 알아서 잘 생각해 봐.”

“……예. 그 문제는 저희가 하루종일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를 해서 반드시―”

“그것보다.”

난 또 쓸데없이 나불거리려 시동을 거는 고장훈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통제에 제일 안 따른 새끼가 누구야?”

“헤헤― 그런 놈이 감히 있겠습니까? 좀 말 안 들을 기미가 보이는 새끼들은 조장님― 아…… 일단 조장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말을 안 듣게 생긴 새끼들은 모두 조장님이 데리고 가셔서 무척이나 편했습니다.”

하긴― 그럴 기미가 보이는 새끼들은 강제로 수색조에 박아넣고 내가 데리고 다녔으니까, 아래쪽은 확실히 통제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뭐부터 하고 있는데?”

“일단 그나마 밝은 낮에는 3층부터 차근차근 쓸만한 물건부터 모으게 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두워지면 책장 같은 큼지막한 걸 옮기는 작업으로 전환했구요. 웬만하면 손전등 같은 건 아예 금지했습니다. 수색조만 쓰기에도 배터리가 곧 부족할 수 있으니까요, 헤헤―”

캠프를 통합하고 난 첫날의 작업이라 생각하면 나름 알찬 작업으로 보였다.

난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고장훈에게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 쩌리 새끼들하고 춘식이한테 제대로 전달했어?”

“아이고― 당연하죠, 조장님. 안 그래도 뭔 사탕 뺏긴 애새끼들처럼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장님도 그때 제 얼굴을 보셨으니 알 테지만, 저는 정말 오히려 더 멀리 보시는 조장님의 선견지명에―”

“아 됐고. 나중에 수색조원들한테도 단단히 경고해두는 게 좋을 거야.”

“아이고― 그것도 당연합니다, 조장님. 제가 진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아주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난 고장훈의 호기 어린 확답에 고개를 주억이며 책장에 몸을 기댔다.

원래라면 박태하의 학생회 캠프가 위치할 2층의 구석.

이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보이지 않는 우리 쪽 캠프의 반대편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남자 새끼들의 복종심을 높이고 목줄을 쥐기 위해 여자들을 배분해준 것까지는 좋았다.

또한 그렇게 얻게 된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너무나도 정해진 비디오였기에 난 그것에 대비해야 했다.

난 남자 캠프원들에게 질내 사정을 금지했다.

조금 노골적인 말로 여성을 임신시키는 것을 금지했다는 말이었다.

의료 서비스는 물론 의사 면상 보기도 힘들어진 지금 이 상황에서 임산부라는 건 아주 악조건이란 악조건은 다 빼다박은 최고의 짐 덩어리였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여성의 노동력도 줄어들고, 먹여야 할 입은 늘어난다.

게다가 적절한 의료적 케어가 없다면 기껏 얻은 여자가 죽어버릴 수도 있는 아주 짜증 나는 이벤트.

물론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면 임신만큼 안전하게 세를 불릴 방법도 없지만, 그건 내가 예상하기론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내가 의료적 케어를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무조건적으로 여성의 질 내에 사정하는 것은 캠프원들에게 금지다.

이런 순간에 애새끼를 배는 년이나 배게 하는 놈이나 둘 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게 만들어준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이제 조심은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콘돔이 있으면 어디 보지에 싸든, 항문에 싸든 상관 안 한다는 말도 전했나?”

“그것 또한 당연히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새끼들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작스레 헛웃음을 참는 고장훈.

“애새끼들이 오늘 하루종일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지 뭡니까. 우진이랑 민준이 새끼들이 도서관에서 콘돔을 찾고 있습니다.”

“……하아―.”

절로 이마가 짚어지는 아주 뭐 같은 소식이었다.

새끼들이 성욕에만 관련이 되면 아주 병신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관리하기 편한 것도 있지만, 이렇게 반작용 또한 존재하는 법이다.

“정말 만에 하나 콘돔을 찾아도 어떻게 하는지 잘 감시해. 캠프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야지.”

“예, 조장님.”

앞으로 콘돔이나 담배 같은 사치품은― 콘돔이 사치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치품은 전적으로 내가 관리할 것이다.

성욕에다가 사치품까지 목줄로 잡아채고 있으면 정말 웬만하면 딴생각을 품지 않겠지.

“그래서― 몇 명이야.”

가장 마지막 물음이자 본론이었다.

내 물음에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내게 속삭이는 고장훈.

“세 명입니다. 세 명째부터 다들 필사적으로 열심히 해서 꼬투리 잡을 거리가 잘 없었습니다.”

3명.

“난 한 명.”

그래도 꼴에 나름 전투를 해야하는 수색조에게 배급 금지를 난사하는 건 그리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총 네 명이군요.”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주머니에 든 수첩을 꺼내 셈을 시작하는 고장훈.

이리저리 눈알을 바쁘게 굴리던 고장훈이 조용히 고개를 들며 내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식량 배급을 조절하면 조금 과장해서 5일?”

“과장하지 말고 말해.”

“……4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와 고장훈, 그리고 두 쩌리에겐 산처럼 많았던 식량이지만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할 머릿수는 30명을 넘겼다.

30명이 오랫동안 먹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매점의 재고.

“……4일.”

난 우리에게 남은 시일과 도서관 전체를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했다.

하루마다 1층씩.

이제 2, 3, 4, 5층을 확보했으니 남은 층은 6층과 옥상, 그리고 1층.

내일 6층과 옥상을 동시에 정리한다고 생각하고 제일 좀비가 많이 깔려있을 1층에 하루를 꼬박 소비한다고 쳐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으― 조장님.”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말투.

항상 이렇게 조심스러울 때마다 제법 중요한 말을 했기에 난 고장훈을 재촉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하고 또 듣기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정말 만약에 사범대에 식량이 없다면 계획하신 상황이 조금 많이 난감해질 것 같습니다―.”

식량 재고에 관한 생각보다 예리한 지적.

도서관을 완벽히 정리하고 당연히 식량 탐색의 제1루트가 될 사범대.

그 사범대에 원하던 식량이 없다면 고장훈의 말대로 상황이 아주 많이 난감해진다.

“……걱정하지 마. 언제나 최후의 방편은 남겨뒀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여으으으윽시― 조장님이십니다―! 그냥 저는 조장님을 딱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팍― 왔다니깐요. 그 딱 과방 문을 열었는데 무슨 몸에서 광채가―”

난 또 지랄을 시작하는 고장훈을 외면하며 시야 구석에 시선을 두었다.

띠링―!

[잔여 포인트 : 0]

그야말로 박박 긁어모은 포인트를 모조리 스킬 레벨업에 투자한 덕에 단 한 개의 여유 포인트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 상황.

난 분명 상점창에서 기겁을 했던 창렬 그 자체의 포인트 갈취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식량이 부족해지면 울며 겨자 먹기로 포인트로 식량을 구매해야 한다.

당연히 30명을 최대한 쥐어짜며 관리한다고 해도 한 두 푼으로 해결되는 식량은 아닐 테고, 식량을 포인트로 구매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내 성장은 나락에 처박힐 것이다.

“……슬슬 속도를 높여야 겠네.”

지금 대학 내 생존자들이 대가리에 총을 맞고 뒤지기 전에 사과나무를 심는 게 아니라면, 반석대의 식량은 한정되어 있다.

이미 시작된 치킨 레이스.

반석대 확보라는 제로섬 게임의 승자는 아주 높은 확률로―

식량을 가장 많이 비축한 캠프가 될 확률이 높았다.

***

사람을 관리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적은 인원을 관리하는, 예를 들어 조별 과제의 조장만 되어도 누구나 실감하는 사실.

인간을 통제해보고 나서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뼈아픈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하다못해 조별 과제 내에서도 요란한 무언의 신경전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의사소통들이 난무하는데―

30명이 넘는 인원을 통제하는 일에는 아주 많이 자잘한 수고와 노력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통제는 고장훈과 두 쩌리, 그리고 박태하가 전담한다고 하더라도 넘치는 일거리들.

만약 이들이 내게 작든 크든 어느 정도의 복종심을 가진 게 아니었다면, 아마 골머리를 깨도 네다섯 번은 더 깨부쉈을 상황이 속출했을 것이다.

그렇게 캠프원들이 모두 내일을 위해 잠에 들 시간.

어쩌면 제일 여유로운 시간에 난 붕대를 풀고 있었다.

조심스런 손짓에 새하얀 속살을 내보이는 차설희의 오른팔.

그곳에 아직도 선명한 상처 자국을 보며 조용히 얼굴을 굳혔다.

정확히 이빨 자국으로 그녀의 팔에 돋아난 딱지.

“생각보다 빨리 안 아무네.”

마치 완벽한 조각품에 빗금이 생긴 것마냥 끝없는 불만과 불안을 야기하고 있었다.

“……구예리가 위험해요.”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의 상처 자국을 보고 있던 와중에 들려오는 미성.

조용히 고개를 드니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차설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걸 게워내는 걸 봤어요. 눈빛도 많이 안 좋고, 표정도 너무 창백했어요.”

“……그런 건 또 언제 알았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요. 저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나으니 그걸 막지는 않구요.”

난 차분히 말을 이어가는 차설희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젠 완벽히 내가 알던 차설희의 얼굴이 돌아온 듯했다.

“오― 기특하네.”

“……어쩌면 안 좋은 선택을 할지도 몰라요.”

“오― 안타깝네.”

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차설희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팔목에 새겨진 빨리 지워버리고 싶은 흔적.

“고자가 흉터에 바르는 약 안 줬어?”

“…….”

응급 구조함에 쓸만한 약이 없었던 건가?

반석대 안에 약국이 있었나, 없었나?

뭔 농과대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약국이 있었는지 알 리가 있나.

편의점에서 파는 약 중에 흉터에 좋은 약이― 그래, 흉터에 좋은 약은 분명히 있겠지.

빨리 도서관을 정리하고 사범대로 영역을 넓혀야겠다.

정 급하면 나 혼자라도 움직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리스크가 큰 방법이었다.

자기 본거지의 안전도 확보하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미련한 짓거리는 없으니까.

“……만약에.”

계속해서 그녀의 흉터를 이리저리 관찰하던 와중에 또다시 그녀의 미성이 스며들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한참이나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그녀가 옅게 입술을 열었다.

“만약에― 이 상처가.”

잠시 자신의 흉터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다시 내 눈에 눈을 맞춘다.

“이 상처가 얼굴에 났으면 저도 구예리와 비슷한 꼴을 당했나요?”

“…….”

꽤 태연하려 노력하지만 내게는 숨길 수 없는 목소리의 떨림.

난 그녀답지 않게 꽤 흔들리는 얼굴을 한 차설희를 조용히 응시했다.

여전히 별빛같이 빛나지만, 왠지 모르게 탁해진 동공.

그 검은자를 꿰뚫을 듯이 오랫동안 마주했다.

이제 내겐 그 뒤를 들춰낼 수 있는 무기가 생겼으니까.

그녀의 가장 단단한 빗장을 열 수 있는 열쇠.

나만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

어쩌면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을 차설희의 기저심리.

[폭군 전용 스킬 ‘연역적 지배’가 ‘차설희’의 기저심리를 파악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마음 (애정결핍)]

‘……뭐?’

난 내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문구를 읽으며 꿈틀거리려던 눈썹을 가까스로 참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기저심리에 옅은 콧김이 헛웃음처럼 새어 나왔다.

애정결핍?

만인의 사랑을 받는 아이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애정 결핍을 숨기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기에, 오히려 부족한 애정을 갈구하게 된 것인가.

……아니다.

그런 팬이 주는 애정이 아닌 뭔가 다른 결핍일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차설희의 답안지, ‘애정결핍’을 알고 나니 이제야 모든 의문이 그럴듯하게 해소된다.

석연찮은 가정사와 여동생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애정결핍이라는 네 글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퍼즐 한 조각을 떼어내면 바로 어느 부분의 조각인지 아는 것처럼.

속 안에 애정결핍을 감추고 있는 탑 아이돌.

정말 보면 볼수록 사람을 꼴리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난 아주 편하게 표정을 정리하며 작게 웃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기에, 나는 부드럽게 답안지를 제출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모르고 있을, 그녀가 가장 바라는 답을.

“아니.”

난 그녀에게 확답하며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를 소중히 대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넌 이제 영원히 그럴 일이 없어.”

그녀의 눈에 새기듯 또박또박 한 글자씩 내뱉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이젠 질리도록 맞부딪혀 서로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입술 말고 그저 몸을 맞대는 포옹.

허나, 그렇기에 그녀의 귓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세로 조용히 읊조렸다.

“너한테 내가 필요하듯이 나한테도 네가 필요해.”

“…….”

“나한테도 차설희 네가 필요해. 정말 간절하게.”

점점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젠 꽤 불편한 자세가 됐는데도 여전히 미동도 없이 내 포옹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우린 서로에게 서로가 간절히 필요한 사이인 거야. 그것만 알면 돼.”

“…….”

“그렇지?”

“…….”

대답도 없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차설희.

난 조금 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더 붙이며 나지막이 다시 물었다.

“그렇지?”

“……네.”

아주 미약한 소리로 속삭임에 긍정하는 미성.

난 그 옅은 목소리를 되새기며 칭찬하듯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또다시 짧은 대답 이후에 미동도 없이 내 포옹을 받고 있는 그녀.

난 부드러운 그녀의 머릿결과 호흡 때마다 몽글거리며 내 가슴을 두드리는 봉긋한 감촉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완벽한 백지이기에 도리어 느려지는 작업도 있다.

제일 처음 도화지에 붓을 대고는 한참을 고민하는 화가처럼.

어쩌면 차설희도 이와 비슷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내 손에 들어온 보물이자, 실험체이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확실한 갈피를 못 잡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너무나도 명확한 답안지와 가이드라인이 있으니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었다.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마음 (애정결핍)]

차설희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을 알아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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