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 (2)
뒤늦은 인사에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차하얀.
“……뭐예요, 정말?”
이내,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나를 향해 옅게 얼굴을 찌푸려왔다.
“지금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혼란을 가득 담은 눈망울과 함께 떨려오는 목소리.
“어떨 땐 차설하고, 또 어떨 땐 차하얀이고……. 한세계 당신, 사람 이름 가지고―”
“굳이.”
어쩌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진한 원망을 품고 있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속삭임을 끊고 지그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설희 앞에서 굳이 너를 설하라 부를 필요는 없잖아.”
“…….”
차설하라는 이름은―
차하얀 못지않게 차설희에게도 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리 좋지만은 않은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세글자였다.
지금껏 가족의 금기였고, 앞으로도 금기일 이름.
그래서 오직 나만이 불러줄 수 있는 아주 자극적이고, 유일한 이름.
“…….”
난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파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용히 푸른 도화지에 부유하고 있는 하얀 구름을 보는 내게 들려오는 발소리.
“……그럼, 그냥 계속 차하얀이라 부르면 되잖아요.”
난 차하얀이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글쎄, 그렇게 하긴 싫은데?”
다시 서로의 지근거리에 선 우리.
“……왜요?”
난 내 떨떠름한 거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옅게 미소 지었다.
“나한테는 차하얀보다 차설하가 더 익숙해서?”
“…….”
“그리고 설하는 오직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잖아.”
툭―!
한 걸음― 옆으로 내디딘 발걸음에 잠깐 부딪히는 서로의 신발.
난 큼지막한 그녀의 눈망울에 그대로 비춰오는 내 얼굴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속삭였다.
……왜?
“……싫어?”
“…….”
내 숨결이 그녀의 오똑한 콧날을 간지럽히는데도 미동 하나 없는 차하얀.
난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않은 그녀에게 잔웃음을 흘리며 지나치게 가까워진 얼굴을 다시 거뒀다.
잠깐 몸을 뒤척이는 와중에도 수없이 부딪치는 서로의 어깨.
난 나란히 선 그녀의 어깨에 내 어깨를 붙이며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어색하게 도망치려 하지 마. 아깐 정말 크게 실망할 뻔했으니까.”
삽시간에 뒤바뀐 목소리와 눈초리.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차하얀이 내 차가워진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떨었다.
깜짝 놀라 더 둥글게 뜨여지는 그녀의 눈망울.
난 그 눈망울을 보고 나서야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나도 너처럼 바람이나 쐬면서 땡땡이치는 거 좋아하거든.”
“…….”
“난 이제 막 땡땡이쳤는데 같이 땡땡이쳐야 하는 사람이 갑자기 도망치는 게 어딨어?”
휘이이잉―!
마주 보는 서로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헝키고 지나가는 바람.
난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녀에게 확실히 말했다.
“가지 마.”
“…….”
“네가 있어야 나도 네 핑계로 잠깐이라도 쉬지.”
“…….”
진지하다기엔 밑에 베인 짙은 웃음기가 걸리는 말.
농담이라기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걸리는 말.
차하얀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아리송한 부탁에 꾹 다문 입술을 쉬이 열지 않았다.
허나, 마침내 나를 향해 작게 끄덕여오는 고개에 감사의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
간간히 살랑대는 바람을 빼면 사위가 고요한 옥상.
그저 멍하니 하얀 뭉게구름들이 하늘을 이동하는 모습을 올려다보다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잠은 잘 잤어?”
질문이 끝나자마자 닿고 있던 어깨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떨림.
“자, 잘 못 잘 이유가 있나요?! 치, 침대도 푹신하고, 이불도 따뜻하고, 방도 적당히 어두컴컴하고― 어제는 그, 그냥 눕자마자 바로 기절했는데요?!”
계속해서 몸을 파르르― 떨고 있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 쉴 새 없이 떨리는 그녀의 성대.
난 내 얼굴에 레이저처럼 지잉― 와닿는 불안에 젖은 시선에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 한세계 씨는요?! 한세계 씨는 어제 잘 주무셨어요?”
아주 티가 날 대로 나는 노골적인 말 돌리기.
난 차하얀이 그 얼굴로 왜 연기를 안 했는지 깨달으며 말 돌리기에 응해주었다.
“당연히 잘 잤지. 대한민국에서 오직 하나뿐인 축복받은 침대에서 잤는데.”
“…….”
처음엔 이해를 잘 못했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 내 우쭐거리는 표정을 바라본 뒤 반쯤 감기는 눈가.
“아― 네.”
그녀에게 나왔다곤 상상도 못 할 만큼 낮은 저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말씀 드리기 그런데, 조금 꼴 보기 싫게 꼴값이시네요.”
우웩―
제발 좀 보란 듯이 토하는 시늉을 하는 모습에 화보단 웃음이 먼저 치밀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난 아직 남은 웃음기를 토하며 지그시 차하얀과 눈을 맞췄다.
“어제 잠도 푹 주무신 차설하 씨가 왜 옥상에 혼자 계실까?”
“…….”
“라운지 분위기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던데.”
“…….”
난 내 눈길을 피하려는 차하얀의 시선을 끝까지 따라붙었다.
이번에도 침묵으로 대화를 넘기려던 차하얀이 내 집요한 기다림에 살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어― 시, 시차 적응?”
“…….”
“그런 비슷한 적응 기간……?”
반석대학교에서 반석대학교로 거처를 옮기신 공주님의 어처구니없는 대답.
아직 만족을 못 하고 더 가늘어진 내 눈가에 차하얀의 눈동자가 조용히 바닥을 쓸었다.
“그, 그냥― 아직은 모든 게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서요…….”
“이상하게 조금 갑갑한 느낌도 들고…….”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아주 조용히 읊조리는 뇌까림.
끝까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차하얀이 서둘러 끝말을 덧붙였다.
“내, 내일부터는 이런 일 없게―”
툭―!
붙어있는 걸 넘어 조금 더 깊게 파고드는 발걸음.
난 하던 말도 멈추고 몸을 바짝 움츠린 차하얀의 어깨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는 엄지손가락.
“뭐가 내일부터 그런 일 없게야. 너처럼 어색한 게 오히려 당연한 거지.”
바짝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서서히 이완되는 것이 선명히 느껴져 왔다.
난 점점 원래의 높이로 돌아오는 그녀의 어깨를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그녀를 확인했다.
무엇이 불안한지 쉴 새 없이 입술을 꾸물거리며 얌전히 나를 올려다보는 차하얀.
난 내 손길을 피하지 않는 그녀에게 입가에 호선을 내보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설희가 알면 걱정할 테니까.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
“…….”
“……알겠지?”
조금 더 진하게 그녀의 어깨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묻는 확답에―
“……네.”
차하얀이 아주 가녀린 미성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내가 원하는 가치관을 주입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바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외부의 변수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고립된 상태.
그런 의미에서 지금 차하얀은 꽤 충실히 주변의 변수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동생을 아끼던 차설희마저도 우선순위가 바뀐 달콤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평소였다면 절대 대화 자리를 아무 이유 없이 벗어나지 않았을 차하얀 답지 않은 행동에도 차설희는 라운지에 남았고, 차하얀은 홀로 옥상에 올라왔다.
그렇게 다시 착한 차하얀, 얌전한 차하얀―
언니 말을 아주 잘 듣는 차하얀이 되는 것에 갑갑함을 느끼는 그녀가 여기 있었다.
내가 조성해줬던 편안함을 맛본 이후에야 알게 모르게 불편함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거 본의 아니게 또 나만 이득을 보는 것 같네.”
“……네? 무슨 이득이요?”
“너랑 만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우리만 아는 비밀이 꽤 많이 생겼잖아.”
“……그게 무슨 이득인데요?”
“그냥― 너랑 나만 아는 비밀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이가 뭔가 특별해지는 것 같아서.”
장난기를 가득 담은 능글맞은 미소.
내가 던진 미끼에 차하얀이 피식 웃으며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진하게 찌푸렸다.
“과방에서부터 느낀 건데 한세계 씨는 그냥 예쁜 여자면 다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과방에서부터 뭘 느꼈는데?”
“뭐 그냥 척 보면 척이죠. 제가 아침 먹을 때마다 맞은편에 앉아서 아주 제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계셨잖아요.”
약간은 우쭐대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몸짓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짝 힘을 줘서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내 손짓에 반격하듯 어깨를 여러 번 튕겨 올리는 차하얀.
난 그녀의 어깨에 얹었던 손이 자동으로 들썩이는 모습과 ‘내 말이 틀렸나?’라고 표정으로 묻는 그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지었다.
내 헛웃음에 전염되듯 결국 함께 잔웃음을 터트리는 차하얀.
“……그러니 지금 자기 입으로 자기가 엄청 예쁘다고 말한 거지?”
“뭐― 제가 안 예쁘다고 해서 갑자기 못생겨지는 것도 아니니까―.”
부드럽게 자신의 긴 머리 쓸어 옆으로 흩날리는 손짓.
휘이이잉―
“푸흡― 퉤―!”
난 다가오는 역풍에 휘말려 도로 그녀의 입술을 간지럽히는 머릿결에 더 진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서둘러 얼굴을 세차게 때리는 머릿결에 손을 휘적거리는 그녀를 돌려세워 얼굴을 맞댔다.
옅게 찌푸린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에게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
그녀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도 풀어 양손으로 정성스레 정돈하는 머릿결.
답지 않게 아주 활발하게 장난치던 차하얀이 다시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던 머릿결을 걷어낼수록 선명히 드러나는 이목구비.
난 뒤에 배경처럼 펼쳐진 파란 하늘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그녀와 조심히 눈을 맞췄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기에 너무나도 적격인 얼굴.
마주 보기만 해도 저절로 눈이 시원해지는 청량함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다.
“솔직해서 좋네.”
“…….”
아까의 우쭐한 표정은 어디 가고 다시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는 차하얀.
난 제법 잘 정돈된 그녀의 머릿결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마주 보던 몸을 천천히 돌렸다.
툭―!
철문을 향해 몸을 돌린 내 옷소매를 잡는 다급한 손길.
“얘,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난 깜짝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차하얀에게 옥상 철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하러. 우리 돼지 같은 차설하양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여, 여기 와서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돼지라고 그러세요!”
“앞으로 먹을 걸 생각해서 한 말인데?”
“허―! 허, 진짜―! 어, 어떻게 여자한테 돼지라고…….”
툭―.
옷소매를 잡던 손을 놓고 억울함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는 차하얀.
난 다시 자유로워진 옷소매를 거두며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아무튼―
“내일 보자, 차설하.”
장소와 시간이 생략된 다소 뜬금없는 약속.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아주 분명하게.
***
덜덜― 거리며 엔진음을 토해내는 등 뒤의 운반 차량.
난 육상 트랙으로 보이는 갈색 탄성포장재 위에서 조용히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초록색 인조 잔디로 뒤덮인 드넓은 야구장과 주변에 밀집된 체육 시설들.
그 시설들을 빠르게 왕복하며 무언가를 한아름씩 들고 낑낑거리는 수색조들.
쿵―!
“……헤엑― 헤엑―.”
난 필사적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노획한 물자들을 바닥에 내려놓는 수색조원들을 곁눈질했다.
이를 악물고 사뿐히 물자를 내려놓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제법 큰 소리로 물자를 내려놓고 오히려 자기가 놀라는 수색조원들.
난 마른침을 꼴깍이는 여성 수색조원들의 몸을 흠뻑 적신 땀방울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휘적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내 손짓에 서둘러 꾸벅― 허리를 숙이고 주변에 산재한 체육 시설로 달려가는 여성 수색조원.
태생적으로 남성보다 훨씬 더 부족한 근력을 내가 어찌해 줄 수는 없었다.
수색조에 들어오겠다 자원했으면 스스로 정신력이든 뭐든 끌고 올 수 있는 건 모두 끌고 와 수색 임무에 충실해야겠지.
난 캠프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들과 지금 물자를 나르는 데 열심히인 여성 수색조를 번갈아 생각하며 조용히 이마를 긁적였다.
다소 비효율적이라도 쓸 수 있는 자원은 모두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
“…….”
난 운반 차량 앞에 작은 언덕처럼 쌓이는 노획품들을 바라보았다.
야구 방망이부터 글러브, 테니스 라켓과 배드민턴 라켓 등―
일단 체육 시설에서 긁을 수 있는 건 모두 남김없이 긁어오고 있었다.
이렇듯 모든 수색조원들이 내 지시를 따라 쓸만해 보이는 건 그게 무엇이든 모조리 도서관으로 옮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대학 남측에 자리 잡은 편의점과 식당들부터 단과대에 남겨진 모든 노획품들.
학생회관에 모여드는 생존자들과 아직까지 끈질기게 생을 이어가는 남측의 생존자들까지.
대학 남쪽의 모든 생존자와 물자를 독식하는 모양새.
덕분에 내 힘의 원천인 왕권 또한 아주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띠링―!
[왕권 : 299]
그저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세 자릿수의 왕권.
남측에 잔존해있던 생존자들을 흡수하며 커지는 덩치와 알게 모르게 굴복에 멈춰있던 캠프원들이 내게 순응하기 시작한 효과의 여파였다.
띠링―!
[왕권 : 300]
지금도 실시간으로 상승한 왕권.
덕분에 ‘300’에 도달한 왕권이 내 눈앞에 새로운 상태창 메시지를 갱신했다.
[일정 수치에 도달한 왕권 스탯에 의해 당신의 운명이 해금됩니다.]
[폭군의 세 번째 은혜를 선택하세요.]
[1. 인간 자체의 건강함]
[2. 탄생이 축복받는 땅]
[사막 위의 오아시스]와 [근대화의 첫걸음] 이후에 새롭게 갱신된 은혜들.
난 물과 전기를 배급할 수 있게 해주던 어마어마한 특혜들을 생각하며 진한 미소로 메시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