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식별 (4)
킁―! 킁―!
작게 코를 먹는 귀여운 소리.
휴지로 눈물을 콕콕 찍어 닦던 차설희가 린네아의 시뻘게진 코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감동의 해후를 마치고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녀들.
“정말 갑자기 연락은 왜 끊겼던 거야, 언니?”
난 그것 때문에 언니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휴지를 눈가로 가져가는 차설희.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물음을 듣고 있던 린네아가 함께 울상을 지었다.
“폰을 잃어버렸어.”
“뭐? 도대체 언제부터?”
“그 괴물들이 나타난 첫날에……. 폰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갑자기 이상한 글자가 눈앞에 떠다니고…….”
제정신을 붙잡는 것도 어려웠던 첫날을 뇌까리는 린네아.
차설희는 조용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우리 언니.”
“…….”
차설희의 따뜻한 위로에 린네아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생에게 담담하려 노력하는 언니의 미소에 차설희의 눈망울이 더 애틋하게 빛났다.
“……그래도 한국어는 더 잘해졌네. 안 그래도 유창했는데 이제는 완전 한국인인데?”
“정말?”
“그러엄~! 이제 한국어 트레이닝은 필요 없겠는데?”
“……맞아. 이제 테스트 보면 무조건 만점 받을 수 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떠올리는 게 어색해지는 기억들.
린네아는 그 기억들에 항상 함께였던 동생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에 맞잡은 손을 더 꽉 쥐어오는 차설희.
“그나저나 갑자기 리더는 또 뭐래. 언제는 나이순으로 리더를 정하자 했을 때 엄청 싫어하면서 거부했던 분이?”
“……그러게.”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이 웃긴지 헛웃음을 터트리는 린네아.
그녀가 테이블에 기대어져 있는 검집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냥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어.”
린네아가 고개를 들어 그녀들이 있는 방을 찬찬히 휘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언어교육원의 클래스룸이어야 했을 공간.
하지만 이제는 원래의 용도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작은 회의실.
그리고 자신 또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남도윤 씨랑 성준기 씨가 기숙사에 찾아왔고― 거기서 나한테 갑자기 하얀이가 납치됐다고 하니까…….”
기숙사와 농과대가 힘을 합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이자 시작점.
“어어― 아주 엄밀히 얘기하면 납치가 아니라 내가 부탁했던 일이야.”
“그런 것 같네. 설희 네가 그 사람 쪽에서 왔다니깐.”
그 사람.
차설희는 린네아의 입에서 거론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하얀이, 설희 그리고 나.
차설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며 읊조리는 멤버들의 이름.
린네아가 아직 완성되지 못하는 하이퀸즈를 떠올리며 다시금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거기 래인이는 없어?”
“…….”
차설희는 린네아의 물음에 아주 쓰게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래인 언니도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야. 그 언니 성격이 어디서 나쁜 일 당하고 있을 성격은 아니잖아.”
“…….”
“그러니까 우리 세 명이 더더욱 힘을 합쳐야지, 언니. 래인 언니도 빨리 찾아야 하잖아.”
“당연하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오는 린네아.
차설희는 생각하던 그대로 대답해오는 린네아에게 더 가까이 몸을 숙이며 말을 이었다.
“래인 언니도 찾아야 하고 나랑 하얀이도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언니랑 그 사람이랑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
“언니?”
조금 전과 달리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대답.
차설희는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바라보며 린네아를 다시 불렀다.
“……정말 괜찮은 거지, 설희야?”
한참 동안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녀의 첫 마디.
린네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을 들어 지그시 차설희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 옆에 있던 장덕구라는 사람.”
“…….”
“정말 나쁜 사람이야, 설희야.”
린네아는 차설희와 맞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했던 짓에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남도윤 씨가 보호하고 있어. 나도 농과대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린네아는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던 여성 생존자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걷고, 숨 쉬고, 밥을 먹지만―
이상하게 어색하고 망가져 보이는 인간 자체의 분위기.
그녀들의 텅 빈 눈동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남도윤 씨가 그 사람에게 그랬어. 검은 놈 옆에는 검은 놈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해.
나지막이 흘러대는 린네아의 끝말.
차설희는 계속해서 자신의 눈을 걱정을 담아 응시하는 린네아와 눈을 맞췄다.
“……근묵자흑이란 거네.”
“……어― 근…… 뭐라고?”
“아니야.”
갑작스런 사자성어에 눈가를 좁히는 린네아.
차설희는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
이미 꽉― 잡은 손을 다시금 꼼지락거리는 손길.
“그런 단편적인 조각들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너무해.”
“…….”
“게다가 정확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확신하는 건 더 너무해.”
옅게 가라앉은 차분한 미성.
차설희는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린네아의 손을 다시금 맞잡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거잖아.”
하루가 멀다하고 끊임없이 튀어나오던 가십거리와 루머.
사실 확인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그저 씹고 뜯어먹기 좋은 자극적인 키워드로 범벅이 된 기사들.
그 루머와 기사들만 믿고 어느새 그런 사람이라 단정 지어버리는 사람들.
모두 그녀들이 함께 겪었던 너무나도 아픈 고통들이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도서관에 가보는 건 어때?”
“……도서관?”
“응. 언니가 농과대에 가본 것처럼 이번엔 도서관에 와보면 되잖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다음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차분히 이어지는 차설희의 권유에도 린네아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떠나질 않았다.
“설희 너는 무조건 믿는데…… 그 사람은―”
끝말을 다 잇지 않아도 이미 튀어나온 속내.
“……솔직히 조금 서운해지려 한다, 언니.”
“……미안. 그래도 내가 없어지면 나만 죽는 게 아니니까―”
어느 순간부터 혼자의 목숨이 아니게 된 그녀였다.
함께 이 위험한 세상을 해쳐온 소중한 사람들.
설희와 하얀이와는 다른 의미로 각별해진 사람들을 위험에 내몰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미안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는 린네아를 바라보던 차설희가 풋― 갑작스레 잔웃음을 터트렸다.
뜬금없는 웃음에 조금 놀라는 린네아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 미안, 언니. 그 사람이 말했던 상황이 진짜 오니까― 조금 이상해서.”
“……그 사람?”
“응. 그 사람이 언니가 망설일 때 주라고 한 선물이 있거든.”
“……선물?”
쉽사리 종잡을 수 없을 문답에 흐릿한 물음만 반복하는 린네아.
차설희는 린네아의 물음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선물.”
***
뚜벅― 뚜벅― 뚜벅―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농과대 의무실을 울려대는 발소리.
남도윤은 시선을 조금 위로 치켜들고 의무실을 왕복하는 성준기를 바라보다 자신도 시선을 위로 들었다.
[03 : 22 : 40 : 27]
1초씩 아주 착실히 줄어들고 있는 제한 시간.
“정신 사납다니까, 준기야.”
“아― 쏘리.”
남도윤의 타박에 평소답지 않은 반응으로 발걸음을 멈추는 성준기.
남도윤은 벽에 등을 기대고 계속해서 제한 시간을 바라보는 성준기에게 눈을 좁혔다.
“……갑자기 뭐야?”
“응? 뭐가?”
“이쯤이면 네가 분명히 발작할 타이밍인데 조금 재수 없게 실실 웃고 있잖아.”
자신의 입가를 톡톡 가리키며 묻는 남도윤에 성준기가 자신의 입에 걸려있던 미소를 조용히 거뒀다.
“그냥― 드디어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라서.”
“…….”
“그동안 내가 이것 때문에 하루종일 잠도 못 자고 하얀이한테 진짜 죽을 만큼 미안했는데.”
다소 평온했던 말투에서 글자 하나하나를 짓씹기 시작하는 성준기.
“이제 이 제한 시간만 지나면 하얀이를 다시 찾을 수 있잖아. 그 새끼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돼.”
“……글쎄.”
마지막엔 거의 으르렁거리듯 말을 잇던 성준기가 남도윤의 대답에 사납게 얼굴을 찡그렸다.
“글쎄는 뭔 얼어 뒤질 글쎄야. 남도윤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호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경악과 간절함을 함께 드러내는 성준기의 핏발 선 눈동자.
남도윤은 그 열기 가득한 시선을 살짝 피하며 답했다.
“어찌 됐든 일단 놈을 제압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다음은?”
“놈의 죗값을 책정해야지.”
“아니 여기서 더 책정할 죗값이 어딨어? 그냥 무조건 사형이지―!”
어이없음을 들어내듯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들썩이는 몸짓.
남도윤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발광을 시작하는 성준기에게 단호히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범죄자를 다루면 그건 한세계와 다를 바 없는 짓이야.”
“…….”
답답함을 넘어 온몸의 혈기가 전부 모여드는 성준기의 얼굴.
붉다 못해 터질 듯 시뻘게진 얼굴의 성준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미간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답답해 죽으려는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정당한 절차와 시간을 들여 모두가 동의하는 처벌을 내리겠다는 거니까.”
“……그래도 그 새끼는 뒤져야 하는 새끼인 건 변함없어.”
남도윤의 대답에 성준기가 신경질적으로 벽에 등을 부딪치며 뇌까렸다.
툭―!
“……알아.”
의무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답해오는 목소리.
그제서야 성준기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한세계.”
그런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남도윤의 속삭임.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퍼즐들이 모두 한세계를 넣으면 말이 되게 풀려.”
이유진의 독에 쓰러졌던 애들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한세계가 이유진을 죽였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베일에 싸여있던 차하얀 납치범.
그 미친 듯이 알고 싶었던 놈의 정체도 한세계였다.
“……이유진, 장덕구와는 차원이 다른 쓰레기.”
쿵―!
“씨발―! 뭔 개짓거리를 만들었으면 그냥 시원하게 그 자리에서 끝내면 되지. 피아식별은 뭔 피아식별이야―!”
신발 밑창이 기대고 있던 벽을 후려치는 발길질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울분.
남도윤이 미처 풀지 못한 화를 씩씩대고 있는 성준기를 바라보았다.
“……백군과 흑군. 우릴 군대로 상정하고 전쟁을 유도하고 있잖아. 아마 본격적인 전쟁 전에 전초전이나 정보전을 먼저 하라는 의도겠지.”
“아니― 이미 편 다 가르고 쾅 붙기만 하면 되는데 뭔 전초전이야?”
“그 편이라는 걸 바꿀 기회를 주는 거겠지.”
“……응?”
다소 멍청하게 튀어나오는 성준기의 반문.
허나, 점점 눈을 크게 치켜뜬 성준기가 남도윤을 바라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설마…… 린네아 씨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사람은 하얀이랑 같은 하이퀸즈 멤버야.”
“알아. 게다가 린네아 씨는 장덕구에게 고통받은 캠프원들을 함께 본 좋은 사람이야. 그것보단― 이 피아식별 기간이 우리에게만 불리한 시간이라는 게 문제지.”
“……우리에게만 불리하다고?”
남도윤은 성준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한세계는 자신의 영역을 폭력이나 온갖 쓰레기 같은 짓으로 꽉 틀어막고 있을 거야. 당연히 탈주자나 도망자가 생길 수 없는 구조겠지. 그에 반해 우리는 한세계 쪽에 비해 문이 더 활짝 열려있으니까.”
“놈이 그 열린 문으로 어떤 쓰레기 짓을 할지 아무도 몰라.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캠프원들을 보호해야 해.”
4일.
남도윤은 시야 위편에 띄워져 있는 제한 시간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그렇게 4일 뒤까지 캠프원들을 확실히 보호한 뒤에, 내가 한세계를 제압할게.”
“뭐? 아니, 나는?!”
“그 자식이 어떤 악독한 수를 쓸지 모르는데 너를 어떻게 보내냐. 그 자식은 나 혼자 처리할게.”
“아니 쫄병이 있는데 왜 왕이 가오 떨어지게 먼저 나가. 너는 체스도 안 해봤냐?”
“……체스?”
“그래, 이 새끼야! ……아니 씨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네가 체스도 알아?”
“……이 새끼가 나를 완전 병신으로 보네.”
점점 살기가 쌓여가는 성준기의 말투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남도윤.
큰 목소리로 웃음을 토하던 남도윤이 작게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한세계를 맡을 때 누군가는 하얀이를 구해야 하잖아.”
“…….”
“그 일에 준기 너 말고 누구를 보내냐?”
……아.
뒤늦게 살짝 벌려지는 성준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탄식.
한세계를 벌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이자 자신이 지키지 못한 소중한 캠프원.
성준기가 자신을 담담히 바라보는 남도윤의 시선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쾅―!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의무실 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혔다.
“도윤 형님―! 도윤 형님―!”
농과대 캠프원 한 명이 눈이 튀어나올 듯이 치켜뜬 채로 남도윤에게 창밖을 가리켰다.
“지, 지금 밖에 하얀이랑 사람들이― 헤엑― 찾아왔어요, 형님―!”
“…….”
“하얀이가 왔다니깐요―!”
자신의 보고에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도윤.
답답하다는 듯 다시금 소리친 고함에 남도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문 앞에 선 캠프원과 급하게 부딪치며 그대로 달려 나가는 몸뚱이.
쐐액― 쐐액―!
남도윤은 순식간에 얼굴을 휘감는 바람을 헤치며 복도와 계단을 통과했다.
급작스런 몸짓에 공기를 고파하는 심장을 무시한 채 더 빠르게 내디디는 다음 발.
남도윤은 계속해서 부딪쳐오는 바람에 엉클어지는 앞머리를 느끼며 마지막 계단을 뛰어넘었다.
쿵―!
로비를 크게 울리는 발소리에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부산거리는 인파.
“하아― 하아―”
뒤늦게 숨을 몰아쉬는 남도윤의 눈동자에 그리운 얼굴이 맺혀왔다.
급하게 달려온 탓에 조금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는 차하얀.
“……하얀아.”
남도윤은 그 흐드러지는 미소에 멍하니 속삭였다.
여전히 보는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맑은 미소.
어디 다친 곳이 있나 그녀를 빠르게 훑던 남도윤의 시야에 조금 이상한 것이 담겨왔다.
저도 모르게 조금 가늘어진 눈가에 맺혀오는 작은 유리병.
환하게 웃고 있는 차하얀이 소중히 들고 있는 유리병.
그 안에 담긴 황금빛이 그녀와 함께 반짝였다.
우우웅―
피아식별.